(30)

누가 쓴 책이든, 무엇에 관한 책이든 비판적으로 읽는 게 기본입니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인, 교수, 평론가도 거짓말을 하거나 틀린 주장을 하니까요. 책은 모두 사람이 쓴 겁니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동물, 오리는 모두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50)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59)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와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60)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96)

늘 잘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먼저 이견을 가진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공감을 표현한 다음 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실이 중요하고, 이런 해석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누구든 상대방이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의 말을 더 진지하게 경청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153)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162)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입하는 독서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재미없고 난해한 책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책이라도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으면 덮어 둡니다. 제가 아직 그 산에 오를 만한 내공이 더 생기고 나면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을 기약하면서 또 덮어 둡니다.

 

 

(167)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가온 책이 소설가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이별이란 제목이 눈을 찌르듯 다가왔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길었던 여름을 견뎠습니다.

 

 

(237)

원페이퍼든 상세보고서든, 슬 때는 독자의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퍼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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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113)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QUSWHEHLJTEK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6개월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더는 군법회의로 보내지 않고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사법부로부터 멀어졌다.


(259)

1986년 4월 23일.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었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나 시국사건에서는 여전히 정권이 깊이 개입했지만 사법부는 인산구속에 신중해지고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1,290명이 구속되면서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김용철 대법원장은 적극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법관들에게 보복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이 안기부의 눈에는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무능력한 업무 자세로 일관”하는 ‘주사급’ 대법원장으로까지 비쳤다. 결국 김용철은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353)

이 기막힌 결정에 대해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탄식했다. 조금 길지만 꼭 되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 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법관 개개인들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로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잇는 모든 법관들이 깊이 통찰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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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회영 평전 - 항일무장투쟁의 전위, 자유정신의 아나키스트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참고] 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다시 이회영]

예전에 이회영이란 분을 처음 알게 되고, 그 분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싶어서 찾아보다가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란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좋아하는 김삼웅이 이회영 평전을 내셔서 꼭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랬다가 책을 낸 지 한참이 지난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이회영이란 분에 대한 이야기는 텔레비전을 통해 제법 많이 소개되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여섯 명의 형제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우애 좋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여섯 형제

그들을 행동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못 했을 텐데 말이다. 비록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이회영 집안처럼 삼한갑족이라고 부를 만큼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었다면 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런 자신의 안위는 삶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의 넷째이지만,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주도적이었다. 그래서 1910년 나라가 일본에 넘어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간도 땅으로 가자고,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단 한 명도 반대가 없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하인들 사오십 명이 한겨울에 그 추운 간도 땅으로 갔다고 한다. 하인들도 억지로 끌려간 것이 아니다. 이미 스무 살 때 이회영은 자신의 노비들에게 존댓말을 쓰면서,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가도 된다고 했다. 그런 선각자였다. 이회영 가족과 같이 간 하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 여섯 형제 중에 이석영은 친척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그 양아버지가 영의정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부자였다고 한다. 이석영도 동생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고, 자신의 전재산을 팔아서 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급하게 재산을 처분해야 했기에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도 오늘날로 치면 60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그렇게 한겨울 모진 밤바람을 맞고 사오십 명이 북으로 걸어가는 장면을 생각해보니, 찡하다. 그 일행 중에는 갓난아이도 있었다고 하는데 말이다.

 

 

[민족주의자]

기억에 가장 남는 부분부터 급히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우리나라를 떠나 간도로 가는 장면을 이야기해주었는데, 그 전에도 이회영은 국내에서 잘못된 나라 꼴을 제대로 돌리려고 노력을 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회영은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인 고종을 몰래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일을 하나 기획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나라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독립을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참석하게 되는데, 이 일은 유명한 일로 학교에서도 배웠다. 그런데, 이 일을 기획한 사람이 이회영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준이 할복자살했다는 것만 기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준은 그곳에서 분함에 병을 얻어 병사를 하신 것이다. 암튼, 이회영이 기획한 이 일에 고종도 동의하고, 옥새까지 그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헤이그에 온 것을 알고, 못 들어오게 조치를 취했지만,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서 우리나라 상황을 전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약소국의 현실만 확인하고 큰 효과는 얻을 수 없었다. 이 사건에 고종도 연루된 것을 알게 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순종을 왕위에 세웠다.

그 이후 이회영은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교육기관을 만들기도 하고, 여러 거사를 꾸미기도 했지만, 실패를 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직접 중국으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고, 그래서 찾은 곳이 간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1910 12 30, 한겨울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간도에 도착했다. 그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전부터 생각해온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운동의 메카가 되었고, 3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게 된다. 지청천, 이범석 등 많은 사람들이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회영은 군자금을 모으려고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가 그는 또 다른 큰 일을 계획했다. 그것은 바로 고종을 망명시키는 일이다. 고종을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만들면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 친일파가 독살한 죽음으로 이루지 못했다.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다시 중국으로 갔다.

 

 

[아나키스트]

아나키스트 이회영.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나키스트는 “무정부주의자”로 해석하는데, 아나키스트를 말을 일본에 어떤 사람이 맨 처음에 무정부주의자로 해석을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를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무강권주의자”라고 하는 게 더 맞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유럽에서 처음 생긴 이후 아나키즘의 흐름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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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고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an archor’에서 유래한다. 모든 정치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주,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다. ‘아나키(anarchy)’는 미하일 바쿠닌이 처음 쓴 말로 알려졌다. “그는 ‘재산은 절도’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의 제자로, ‘아나키’는 그가 조합한 단어다. ‘계급구조’를 의미하는 하이어아키(hierarchy)의 반대개념으로 ‘무정부’를 뜻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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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그가 아나키스트가 된 이유는 그것이 우리나라 독립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거다. 그가 그 시대 또 하나의 조류였던 공산주의를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공산주의도 소련에서 이미 변질되고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시대를 읽는 통찰력 또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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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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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과 만나게 되는 이회영. 그들을 후원하게 된다. 의열단에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원봉이 이끌고 있었다. 예전에 이원규의 <약산 김원봉 평전>을 정말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김삼웅도 <김원봉 평전>을 쓰셨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김원봉은 작년에 크게 인기를 끈 영화 <암살>에서 나와서 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의 활약은 일본 경찰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김구보다 더 활약이 많았고, 일본이 김구보다 훨씬 무서워했던 이가 바로 김원봉. 그가 해방 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북한으로 넘어간 이후 우리 나라의 역사책에서 사라진 것이 끝내 아쉽다.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친일파들은 버젓이 실려 있는데 말이다. 김원봉이 우리나라 역사책에 더 크게 부각되었다면, 이회영 선생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약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약산 김원봉 평전>을 추천한다.

 

[독립운동가의 가족]

그 이후에도 이회영은 베이징, 텐진, 상하이를 오가면서 ‘다물단’, ‘무련’ 등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면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어. 간도로 오면서 가지고 온 돈은 이미 독립자금으로 다 쓴 이후다.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 가족들은 빈곤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회영은 아내 이은숙에게 독립자금을 마련해 보라고 국내로 다시 보냈다. 당시 임신한 몸이었던 아내 이은숙은 국내로 들어왔다.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 자금 마련이 쉽지 않았다. 나중에는 바느질까지 해서 돈을 마련하여 중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이 분 또한 투철한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중국의 먼 땅에서 남편을 찾아오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뒷바라지까지 다 해주었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내로 자금 마련을 오는데도 한치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그 길이 이회영과 마지막 길이었다고 하니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이은숙은 자서전을 통해 이회영의 독립 운동에 대해 자세히 적어 놓아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혹시 책을 살 수 있나 싶어 검색해봤더니 이미 수십 년 전에 절판이 되었다. 이런 소중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도 출판사들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튼, 아내를 국내를 보내고 나서 이회영은 텐진을 기점으로 운동을 하다가 상해로 거사를 위해 이동하게 되는데,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갈 수 없어서 구제원에 맡기고, 아들만 데리고 상하이로 갔다. 구제원은 오늘날 고아원이다. 하지만, 가는 길에 계속 두 딸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성공적인 거사 소식을 듣고, 경비도 삼엄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텐진으로 돌아왔다. 두 딸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첫딸 규숙이 나이가 들어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 이회영을 존경하는 젊은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였다. 이회영은 규숙 부부에게 아직 어린 둘째딸을 보살피게 했다. 그래서 자유로운 몸이 된 그는 다시 무력 투쟁에 온 힘을 쏟게 된다. 국제 아나키스트의 연맹인 동방연맹을 조직하기도 했고남화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백범 김구와 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 유력 인사가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흔 가까이의 나이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위험한 일은 오히려 자신이 해야 한다면서 북만주행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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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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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은 끊겼다. 그리고 얼마 뒤 뤼순 감옥에서 그가 죽었다는 사망통지서가 국내에 있는 아내 이은숙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거꾸로 상해에 있는 이회영의 아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알렸다고 한다. 뤼순 감옥은 예전에 안중근 의사가 죽은 곳이고, 신채호 선생도 투옥 중 사망하신 그 곳이다. 뤼순 감옥은 우리나라 아픈 현대사를 가득 담고 있는 곳이다. 일본은 이회영이 자살했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그는 모진 고문으로 삶을 잃었다고 밝혀졌다. 그리고 이회영이 일본경찰에 잡히게 된 것은 바로 이회영의 조카가 발설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해방을 하고 나서 여섯 형제 중에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 또한 정말 가슴 아프다.

 

[이회영]

누군가 이회영이 어떤 분이 물어본다면,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이회영이란 어떻게 짧고도 강렬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데, 지은이가 이 책의 ‘닫는 글’에서 그 답을 주셨다. 짧고도 강렬하게 이회영을 정리해 주었다. 그 글을 인용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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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유학 찾는 열린 사상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현실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온갖 고문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한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한 겨레의 사표.

====================================

그가 바로 이회영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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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동서고금의 역사를 상고컨대,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되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도다.

진시황은 육군은 병탄하고 판도를 확장하여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를 호령하였으나, 진시황이 간 후에 그 후에 그 사업이 시황을 따라 여산에 장사하였고,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은 용도호략으로 일시에 혼천동지하여 구라파 전경과 아시아의 반폭을 거의 점령하여 만고에 혁혁한 대국을 세웠더니 대왕이 잠이 들매 위대한 사업도 춘몽같이 스러지고 광활한 대국은 거품같이 흩어졌나니, 그 이류를 말한진대, 진시황이 가매 그 사업을 이을 국민이 없었고, 알렉산더가 죽으매 그 목적을 계통할 사람이 없어 사업은 영웅과 같이 왔다가 영웅과 같이 갔나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리오

불란서는 이와 같이 아니하며 건국한 이래로 위험한 역사가 허다하니 열강 연합군에게 유린을 당하며 괴걸의 농락에 빠져 혁명의 재양을 입었으나, 천신만고를 다 지내고 만사 일생을 얻어, 오늘날 부강국 반열에 참여하나니, 이는 그 건국한 원동력이 오직 국민에게만 있던 연고니라.

 

 

(109)

이회영은 젊은 시절에 익힌 왕수인의 양명학을 행동의 준거로 삼았다.

"일을 통해 갈고 다듬되, 절대로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조그마한 일로 자신을 과시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160)

모든 개인이 어떠한 강권의 지배도 받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는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해야만 했다. 이들은 테러적 직접행동론, 경제적 직접행동론, 혁명근거지건설론, 민중봉기론, 민족전선론 등을 민족해방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거기에 입각해서 테러 활동, 혁명기지 건설, 비밀결사 결성, 항일전쟁 등을 전개하였다.

 

 

(164)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사상을 전환하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다만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생각하고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나의 사고와 방책이 현대적인 사상적 견지에서 볼 때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상통될 뿐 각금시이작비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었던 내가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다.

 

 

(204)

리투아니아 출신의 무정부주의 혁명가 예마 골드만(1869~1940)은 아나키즘이 도전한 '권위 있는' 역사적 실체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신과 교회 즉 유럽을 지배했던 가톨릭교회다. 아나키즘은 가톨릭교회의 신적 권위를 부인하고 거기에 도전했다. 한때는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신교도 아나키즘과 일정한 동맹을 맺기도 했다.

둘째는 국가다. 국가 중에서도 '짐이 곧 국가'라고 오만을 떤 절대왕정이 아나키즘이 주된 적이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절대왕정에 대한 투쟁에서 아나키즘과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이 연합하였다.

셋째는 자본자를 중심으로 한 부르주아 세력이다. 부르주아 의회가 국가와 언론이 아나키즘의 타도 대상이 되었다. 이때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힘을 합쳤다.

넷째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다. 사회주의자들이 당을 만들고 권력을 잡고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을 세우려고 시도하자 아나키즘은 사회주의를 경멸했다. 새로운 권위를 세운 사회주의는 아나키즘의 입장에선 또 하나의 타도 대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인민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권력을 잡은 사회주의 정권은 강력한 권력과 권위체제를 구축했다.


 

(205)

모든 지배와 권위를 거부하고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아나키즘(anarchism)은 그리스어 ‘an archor’에서 유래한다. 모든 정치조직, 규율, 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의 강제수단을 철폐하여 자주, 자유,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려는 이데올로기다. ‘아나키(anarchy)’는 미하일 바쿠닌이 처음 쓴 말로 알려졌다. “그는 ‘재산은 절도’라는 말로 유명한 프루동의 제자로, ‘아나키’는 그가 조합한 단어다. ‘계급구조’를 의미하는 하이어아키(hierarchy)의 반대개념으로 ‘무정부’를 뜻하지만, ‘혼돈’이나 ‘무질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268)

우리 독립운동의 현실로 보아 (아나키즘이) 가장 실제적인 이론이며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사실상 모든 운동가들이 자기 사상이야 어떠하든지 이미 무정부주의 자유연합의 이론을 다 같이 이대로 실행하고 있다. 기미년 이전과 이후를 막론하고, 지금까지 수많은 단체와 조직이 생겼지만 그에 소속된 운동가가 자신의 자유의사의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강제 명령에 무조건 맹종하여 행동한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단체가 어디 있는가?

이른바 철의 조직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며, 강제와 복종의 기율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는 공산당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의 소련과 같이 자기들의 정치권력을 확립한 뒤의 얘기다. 그들도 혁명 과정에서는 모든 당원이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니라 자유합의에 토론과 타협을 하고 나서 행동하였던 것이 아닌가?

 

 

(270)

이러한 세계연합이 이루어지면 각 민족적 단위의 독립된 사회나 지역적인 공동생활권의 독립된 단위 사회가 완전 독립된 주권을 지니면서, 자체 내부의 사건과 문제는 자주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다른 사회와의 관계나 또는 공통적인 관계는 개별적으로 또는 연합적인 세계 기구에서 토의 결정하여 처리하는 것이다.

 

 

(340)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이것을 남의 눈에는 불행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을 예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구만 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은 죽는 것을 제 집에 돌아가는 듯이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다.

 

 

(379)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 해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더욱이 혁명공작을 어떻게 하겠는가."

 



(382)

전통유학에 탐닉하지 않는 개신유학 찾는 열린 사상, 

왕조체제와 공화주의 교체기의 개명사상, 

벼슬이나 감투보다 분방하게 살고자 한 자유혼, 

형식논리의 주자학보다 실천논리의 양명사상, 

현실안주와 저항인의 갈림길에서 보여준 기득권 포기, 

‘상놈’들이 모이는 상동교회에서 결혼식 올린 파격, 

청상이 된 누이 장례 치르고 재혼시킨 여성주의, 

머슴들 해방시키고 존댓말 쓴 평등사상, 

황실과 가까우면서도 신민회 창설한 탈근대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파견을 주도한 국제주의, 

고종황제 앞세워 망명정부 세우려던 통 큰 고구려인, 

일가 재산 모두 팔아 망명한 ‘인민의 전위’, 

윗자리 사양하고 위험한 곳 먼저 찾은 비범한 범인, 

굴욕과 억압보다 자존과 저항을 택한 자유주의,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세운 무장투쟁의 원조, 

목적과 수단을 일체화하는 리얼리스트, 

일의 성패를 문제 삼지 않고 동기의 순수성을 중히 여긴 양명학자, 

시작과 끝을 양심에 호소할 뿐 성패를 묻지 않는 강화학파, 

대원군 난초 쳐서 독립자금 만든 예술혼,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높이 산 아나키스트, 

광복운동 과정에서 ‘자유협동체론’을 제시한 경륜, 

“독립한국은 4민 평등한 만인의 자유평등과 

공평하게 다 같이 행복을 누리며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되는 사회”를 꿈꾼 민주공화주의, 

“나의 소망은 언젠가 당신이 우리가 되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네.” 

존 레논을 닮은 ‘목마른 영혼의 외침’의 소프라노, 

다물단, 흑색공포단 지휘한 조선의 체 게바라, 

온갖 고문 악형에도 입을 다문 사육신의 화신, 

처자보다 동지, 동지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 순혈 조선인, 

무서운 깊이와 아름다운 표면을 함께한 선비, 

‘노블레스 오블리제’ 실천한 겨레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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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2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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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스포일러 포함/기억력에 의한 내용상 오류 있을 수 있음.

 

[더 파란만장한…]

2권에서는 1권보다 더 파란만장한 그의 이야기를 펼쳐진다. 책을 덮고 나서야, 지은이가 이야기하려고 뭐였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결국 이 이야기는 삼촌의 변함없는 꿈을 결국 이룬다는 이야기다. 그 꿈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러면서, 읽는 이들에게 지금 꿈을 꾸고 있느냐고 묻는 듯했다.

이번에도 나의 빠른 망각을 위해 줄거리만 자세히 썼다. 혹시 이 책을 읽을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이 리뷰를 건너뛰길 바란다. 스포일러 잔뜩 포함된 글이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상구의 삼촌... 계속 삼촌이라고만 했는데, 그의 이름은 권도운이다. 그래도 계속 삼촌으로 이야기하겠다. 삼촌은 정으로 잠시 발을 들여 놓았던 조직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충무로에 와서 단역 배우 생활을 시작했고 영화촬영장에서 그의 짝사랑 원정을 다시 보게 되었다. 원정은 유사장한테 차이고 한물간 3류 배우가 되어 있었다. 그날 삼촌의 역할이 하필이면 원정을 강간하는 악역이었다. 삼촌은 긴장을 해서 몇 번의 NG를 하고 나서야 겨우 촬영을 마쳤는데, 원정이 삼촌을 알아봤다. 예전에 북경반점의 배달원으로 자신의 집에 왔다가 몹쓸 짓을 했던 것까지… 삼촌은 창피했지만, 원정은 그 일을 웃으며 넘겨버렸다. 그만큼 시간도 흘렀던 것이다. 우연히 원정과 술자리까지 하게 된 삼촌... 술에 취한 원정이 자신을 버린 유사장에게 전화를 하고이내 곧 유사장의 부하들이 찾아와서 원정을 때리고협박하고이른 본 삼촌이 무도인답게 그들을 단번에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이 일로 삼촌과 원정은 친해졌다.

이소룡의 대역을 하겠다고 홍콩으로 떠났던 것이 벌써 십 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한번도 북경반점에 오지 않았는데, 우연히 근처에 갔다가 간판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갔는데, 가게 운영은 이미 안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는 마 사장만 혼자 있는 걸 보았다. 마 사장은 자신이 삼촌의 홍콩행을 도와준 이유를 이야기했다. 자신은 꿈은 없는데, 삼촌은 자신만의 확실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든, 없든 상관은 없다면서그리고 자신은 현재 난소암에 걸려서 오래 살 지 못할 거라면서칼판장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지만, 마 사장은 오래 살 지 못했다. 그런데 장례식에 칼판장이 나타났다. 사실 칼판장은 근처 중국집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안함 때문에 나타나지 못하다가 이제서야자신의 돈을 떼어 먹은 칼판장이었지만, 그것을 용서할 만큼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삼촌도 좋은 기억들을 들추어 내서 다시 칼판장과 좋은 사이가 되었다.

...

 

[도와주려고 했을 뿐인데...]

상구의 친구, 종태. 토끼파의 우두머리 토끼가 포섭하여 자신의 보스를 배신하고 토끼파에 합류했던 종태. 그리고 옛보스를 칼로 중상을 입히고 감옥까지 가고... 그런데 출소하고 보니, 토끼는 종태를 개무시하고 있었다. 종태의 가족에게 가게를 하나 준다는 약속도 지치지 않았다. 종태는 복수의 칼을 갈았다. 당시 토끼는 그 지역 국회의원의 행동대장으로 상대 진영 국회의원 후보를 위협하고 폭행하는 등 선거 운동 방해를 했다. 이에 종태는 그 상대 진영 국회의원 후보의 행동대장이 되기로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상구는 종태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고 했다. 상구는 토끼의 약점을 하나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삼촌이 술을 먹고 나서, 삼촌과 토끼가 묘지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을 이야기했다. 바로 사람을 죽인 것. 그것도 사람을 잘못 알아보고 딴 사람을 죽인 것.. (1권에서 있었던 일) 그것을 다른 사람을 시켜 종태에게 알려주었다. 그것도 직접 알려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죽인 장소를 알려주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종태는 토끼를 위협했고, 그로 인해 토끼는 혼자 종태가 이야기한 장소로 왔다. 종태는 토끼를 감금했다. 토끼가 사라지자 토끼 측 국회의원 후보는 난리가 났다. 선거 운동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거기에 종태 쪽에서 휘두르는 폭력에 대처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거가 끝나고 개표를 하는 동안, 토끼가 방심한 틈을 타서 도망을 갔다. 도망은 쳤지만, 더 불운한 사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산을 싣고 오는 트럭이 치이고, 황산에 녹아서 죽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토끼의 아내가 누구? 어렸을 때 삼촌하고 결혼하자고 했다가 안 한다고 하니 같이 청산가리 먹고 죽으려고 했던 그 여자오순이그녀의 또 다른 이름…  독극물 제조 전문가. 오순이는 토끼의 죽음 뒤에 종태가 있음을 알게 되고, 몰래 종태가 먹는 커피에 독약을 넣었다. 그래서 종태는 그걸 먹고 그만 죽고 말았다오순이는 범인으로 밝혀져 감옥에 가게 되고... 상구는 다시 한번 자신의 행동을 자책했다. 자신은 종태에게 도움을 준다고 한 행동이었는데, 친구를 죽게 만들고, 오순이를 감옥에 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 엔딩]

북경반점의 마 사장이 죽었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마 사장이 죽기 전에 유언장을 썼는데, 북경반점을 삼촌에게 물려준다고 한 거다. 마 사장이 죽기 전에 삼촌이 몇 번 찾아가긴 했는데, 마 사장이 그렇게 할 줄을 아무도 몰랐다. 삼촌은 엉겁결에 북경반점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그 음식점을 운영하지는 않았다. 이층의 살림집에서만 그저 생활하고, 여전히 단역 배우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원정과 만나게 되고그들은 더욱 가까워져서 사랑 비슷한 것도 하게 되었다. 원정은 순수하고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마음을 가진 삼촌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원정은 어느날 북경반점에 찾아왔고원정도 이제 영화배우라는 딱지를 때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기로 결정했다. 삼촌과 함께 북경반점에 살기로 한 거다. 삼촌은 감격했다. 원정은 자신의 짐을 정리하러 갔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원정이 오지 않아서, 삼촌은 원정의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그곳에서는 온몸에 온통 상처 투성이에 피를 뒤집어 쓴 원정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자세한 이유는 묻지 않고, 삼촌은 원정을 쓰다듬어 주고 토닥여 주었다. 그런데, 다음날 원정은 사라졌고, 삼촌은 미친 듯이 밖에 나갔지만, 한강변에 원정의 신발만 가지런히 남겨진 걸 볼 수 있었다. 삼촌은 좌절하고 원정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경찰에게 신고해서 원정을 찾아달라고 했지만오히려 원정의 집에서 발견한 수많이 피흔적들로 인해 삼촌은 원정의 살해용의자로 몰렸다. 그때 삼청교육대 시절 삼촌이 목숨을 구해준 정 기자가 도움을 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삼촌은 도대체 원정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데만 모든 것을 집중했다. 그러다가 충무로에서 이상한 필름이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필름을 보니 원정이 두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복면을 쓰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두 사람이 사이먼 앤 가펑클 닮았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영화를 촬영하다가 누가 봐도 사이먼 앤 가펑클인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그 중에 한 명은 바로… 원정의 남자였던 유사장, 아니 지금은 유회장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어 유의원이 된 남자의 아들이었다. 그 유의원의 아들은 아버지의 영화사를 물려받아 이제는 그가 유사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새끼 유사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유사장은 해외유학 시절부터 완전 쓰레기라고 소문이 난 놈이었다. 온갖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는 놈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새끼유사장의 절친이자, PD를 맡고 있는 김PD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들이 원정을 폭행한 내막은 이랬다. 새끼 유사장의 엄마, , 유 의원의 아내가 죽기 전에 유 의원의 많은 여자들 중에 원정만 콕 찍어서 이야기했다. 그 여자 때문에 자신이 평생을 고생했다고그 말을 들은 새끼 유사장이 원정을 공격하고 폭행했던 것이다.

삼촌이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고, 유사장과 김PD가 벌이고 있는 타락의 현장에 찾아간 삼촌삼촌은 그들을 거의 반쯤 죽어놨다. 그들의 한 짓을 알려주려고, 삼촌은 유 의원을 부르게 했다. 그 자리에 온 유 의원은 이미 그들이 한 짓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유 사장은 아버지인 유의원을 총으로 쏴 죽였다. 사실 유 사장은 자신의 엄마가 죽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자신의 아버지였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전부터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유사장은 아버지를 죽였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서 삼촌은 그곳을 도망쳤다. 그리고 유 의원의 살인용의자로 삼촌이 지목되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유사장과 김PD, 그리고 유사장이 데리고 온 여자가 한 명이 있었을 뿐이니까그들이 모두 범인은 삼촌이라고 이야기했다. 삼촌은 완전히 잠적을 했다. 상구도 삼촌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그러다가 상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장례식장에 몰래 찾아왔다가 상구와 동구만 만나고 갔다. 그런데, 상구도 정황이 정황인지라, 삼촌이 결백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삼촌은 다시 숨어 지내는데, 유 의원이 죽기 전에 한 말이 머리를 맴 돌았다. 그가 죽기 전에 말하길, 원정이 살아 있다고 했다. 원정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유 의원이 죽어버려서 원정이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어디를 가면 원정을 찾을 수 있을까. 삼촌은 자신이 숨어 다녀서는 원정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범죄를 자수하기로 했다. 그러면, 자신이 언론에 노출되고 원정이 감옥으로 찾아올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자수를 할 때도 삼촌은 불우한 할머니와 손녀에게 자신을 신고하라고 했다. 현상금으로 그들을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삼촌은 경찰에 잡혀서 15년 형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감옥에 있는데, 원정은 찾아오질 않았다. 그러다가 7년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원정이 면회를 왔다. 사실 자살하려다가 마지막 순간에 마음에 바뀐 원정은 유 의원에 전화를 했고, 유 의원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았다고 한다. 한국 소식에 전혀 담을 쌓고 지내다가, 최근에서야 우연히 삼촌의 소식을 알게 되고, 알게 되자마자 삼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원정은 거의 매주 삼촌을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유사장에게 배신당한 여자에 의해 베일 속에 숨겨져 있던 그날의 일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유 의원을 죽인 것은 바로 그의 아들인 유 사장이라고 이야기했다. 증거도 나왔다. 삼촌은 죄가 없는데,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유 사장의 만행이 세상에 밝혀지면서, 삼촌은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이후 드디어 원정과 다시 만나서 남은 삶을 같이 하기로 했다. 너무 사랑스러운 결말이다. 아참, 삼촌의 착한 짓 하나 더토끼의 아내이자,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오순… 종태를 독극물로 죽이고 감옥에 갔었는데, 오순이 출소하였을 때 자신의 북경반점을 그녀에게 주었다. 주방장은 칼판장. 그리고 오순의 아들,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그 아들도 같이 일하게 되었다. 정말 훈훈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삼촌의 꿈은 원정이었던 것 같다. 힘들고 긴 여정 끝에 삼촌은 자신의 꿈을 찾은 것이다. 원정에 대한 꿈을 일찍 포기했다면, 삼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꿈을 일찍 포기하거나, 아예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것 같았다. 나도 자문해 보았다. 난 꿈이 뭘까? 나도 아직 꿈이 있다. 심지어 한 개가 아니다…^^ 나도 그 꿈을 위해 오늘도 앞으로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고수만이 알 수 있는, 이소룡이 했다고 하는 멋진 말 하나로 글을 마친다.

 “내 스타일에는 아무런 수수께끼가 없다. 내 움직임은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비고전적이다.

 

 

 

 

※ 이 리뷰는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를 수정하여 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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