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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ㅣ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4월
평점 :
얼마 전에 인도 수학자 ‘라마누잔’의 일대기를 담은 <무한대를 본 남자>를 봤다. 카스트 제도의 계급 중 최상위인 브라만 계급임에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가 독학으로 수학을 공부하고, 생계를 위해 회계사로 근무하다가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수학자의 초청으로 영국을 가게 된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인으로 인종차별을 받는 모습부터 영국 수학협회 정회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오는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기억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영국을 가기 위해 배를 타러 가는 깔끔한 정장을 입은 라마누잔 뒤로 그의 짐들을 머리에 이고 걸어오는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한 한 인도인 남성이 내 머릿속에 떠나질 않았고, 머릿속에 맴도는 그의 잔상이 <적절한 균형>를 펼치게 하였다.
이 책의 저자 ‘로힌턴 미스트리’는 파르시 집안 출신이다.
인도 상인 집단이자 최대 부자 가문 중 하나인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파르시는 페르시아(현재의 이란)지역에서 살다가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들을 피해 인도로 넘어오게 된다. 서양의 유대인과 유사한 모습이다. 등장인물 중에도 파르시 집안 출신들이 나온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하층민, 불가촉천민 출신의 재봉사인 삼촌 이시바와 조카 옴, 파르시 출신 의사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현재는 과부가 되어 홀로 자립을 위해 낡은 아파트에서 하숙을 치는 여성 디나, 그리고 디나와 마찬가지로 파르시 가문 출신이자 가게 일을 하는 부모 밑에서 곱게 자란 대학생 마넥, 이 네 사람의 각기 다른 삶을 담은 책이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갈 꿈을 품고 도시를 찾은 이시바와 옴. 그리고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 점점 발전해가는 세상에 발맞춰 배움을 위해, 더 좋은 학교에 가려고 도시를 찾은 마넥.
이시바와 옴은 재봉일을 하러, 마넥은 하숙을 하러 디나의 집을 향한다.
이 책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기 전 시절부터 국가비상사태 체제로 지내던 시절과 그 이후의 삶까지 인도의 현실을 아주 세밀하게 담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된 이후에는 국경선이 생기면서 참혹한 학살 속에서 막대한 재산이 한순간에 사라졌던 사람들이 다시 해결책을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균형 잃은 무질서 속에 계급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가 나는 삶의 질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모습은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결혼 후 3년 만에 약제사였던 남편을 잃고 그 이후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익혀가며 재봉 일을 배웠던 디나.
마흔두 살이 되자 시력에도 문제가 생겨 재봉 일이 어려워졌다. 그녀는 미국과 유럽의 양품점들에 의류를 수출하는 여성을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어 재봉사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감독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즉, 외국 바이어들의 요구 사항에 맞추어 현지에서 재봉해서 수출하는 의류 산업자에게 용역을 받아 일하게 된 것이다. 그 재봉 일을 맡게 된 사람이 이시바와 옴이다.
고향에서 무두질과 가죽세공을 하는, 태어나자마자 부여받은 가장 낮은 지위의 공동체인 차마르 카스트에 속하는 이시바와 옴.
평생 빈곤한 삶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들은 카스트 장벽을 허물고 다른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살아왔다.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이 하층 카스트의 사람들에게 저지를 수 있는 범죄들은 이들의 삶에서 영원히 인내해야 할 동반자였다.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에게 더욱 비굴하게 엎드려야만 했다.
비상 계획 실행을 위해 날품팔이 노동자들, 여자들과 아이들, 육체노동자들에게 돈을 주고 집회 현장으로 향하는 트럭에 실어나르는 총리의 부름을 받은 자들을 보고 있자니, 내 머릿속에는 열성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날리는 빨간 모자를 쓴 사람들의 모습이 둥둥 떠다녔다.
선거 때마다 약속한 대로 물, 화장실, 전기 같은게 좋아질 거라 기대하며 판자촌에서 기다렸던 이들에게 나타난 건 집들을 부수기 시작한 큰 중장비들, 그리고 강제노역과 인구증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강요된 불임 수술이었다.
희망을 꿈꾸며 온 도시는 이시바와 옴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옥 같은 광란의 도시였을 뿐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배려심을 가진 디나는 고용주가 된 후, 재봉사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고용주 답게(?) 그들을 경계하고 채근하는 면모를 드러냈다. 가볍게 보이면 일하는 사람이 머리 위로 올라오려고 할 거라는 주변의 충고를 따르는 것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뿐만 아니라 이시바와 옴이 뿜어내는 악취도 포함이다.
자신들보다 높은 계급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갈망하고, 받았던 수모들은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사람들. 아들이 태어나면 사람들에게 돌리던 사탕 과자를 딸이 태어나자 돌리지 않는 모습. 말대꾸한다고 부인을 때리는 남편의 모습.
이렇듯 조화로운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속에서 인간의 다양한 이면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가비상사태 시기의 학생들이 민주화, 민족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프롤레타리아 주의의 대해 논의할 때, 마넥은 대부분 가난한 학생들이었던 그들과 자라온 환경이 달랐기에 위협과 공격이 너무나 흔해진 캠퍼스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기숙사를 떠나 디나의 하숙집을 찾아온 것이다.
어려움을 겪으며 자라온 적 없던 마넥은 삶에서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선택을 도덕적, 윤리적 문제로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나 조차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향해 관심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이는 사람이 못 돼서 일 거다.
거리에는 끊임없이 반정부 시위와 행렬로 교통이 막히고 떠들썩한 군중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디나와 마넥이 사는 세계 너머로 빈민굴에서 살아가는 오물 가득 한 하수구에서 풍기는 악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도 존재했다.
저자는 한 인물에게도 다층적 심경을 알 수 있게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감정의 층위가 복합적이어서 많은 관점이 교차하여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두꺼운 책임에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았다.
계급을 향한 이들의 시선도 다양하다.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자신의 계급에 따라 사는 것이 당연했던 삼촌 이시바와 달리 조카 옴은 그 계급의 벽을 허물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두질과 가죽세공을 해야 했던 이시바와 그의 동생 나라얀이 재봉사가 되기 위해 도제에게 보내졌던 어린 시절, 사람들은 감히 카스트의 영원한 사슬을 끊으려고 한다며 천벌을 받을 거라 말했었다.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던 카스트 제도의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아버지 둑희의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자식들이 더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의 결정이었지만, 그 용기도 딱 거기까지만이다.
나방이 등불 유리로 뚫고 들어가려고 연약한 날개를 퍼덕거리는 모습처럼, 높은 계급의 사람들 뒤로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고 이만해도 많이 좋아졌다며 아버지 둑희는 현재의 삶을 만족할 수 없는 아들을 향해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
(P. 216) “그런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 그래 봐야 넌 몇백 년 된 깊은 우물에 빠진 두레박 꼴이야. 첨벙 소리는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을 거라고.”
“존엄이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입니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선거 날 유권자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투표용지를 달라는 계급이 낮은 남자를 동네 악당들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균형을 망가트렸다고 카스트의 선을 넘는 것은 가장 엄한 벌로 다스려야 한다며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혹함으로 응징했다.
조용하게 좌절감을 느끼며 살았어야만 했나.
그러면 목숨은 부지했을까.
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시간이 아무리 흘렀어도 자유를 위해, 정의를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편견과 악의 제도에 비폭력으로 맞서 싸우자는 마하트마 간디의 메시지를 듣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계급을 받은 자신들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는 빛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을까. 용기를 내며 맞서는 사람들을 우려하며, 자신이 속한 곳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며 지낸 사람들의 선택은 당연히 이해 못 할 이상할 일도 아니다.
서로 거리를 둬야 한다는 디나 아주머니의 말씀에도 마넥은 비슷한 또래인 옴과 친해지고, 서로 연관성 없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아갔다.
모든 사람과 잘 어울리라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온 덕분인지 편견과 차별 없이 옴을 대하는 마넥과 진흙탕 속 거친 어른들 틈바구니에서만 지내다가 마넥과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옴의 모습은 보는 동안 참 흐뭇했다.
그리고 디나는 이시바와 옴에게 철저히 그어 놓았던 경계 끝자락부터 서서히 그 흔적을 지워가며 다가갔다.
식탁을 다 같이 채운 이 네 사람은 멀리서 보면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찌그러진 반죽이 완벽한 원을 이루듯이.
이들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디나는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에게 안겨 꼭 나중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될 거라고 말했던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죽은 남편 리스텀과 달콤한 연애를 즐기며 함께라서 행복했던 그때였을까.
이시바는 동생과 처음으로 배운 재봉 기술로 아빠 둑희의 조끼와 엄마 루파의 촐리를 만들어 그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선물로 안겼던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텅 빈 학교에 몰래 들어가 처음으로 만져보는 분필을 석판에 대고 선을 하나, 또 하나 그려보며 킥킥대던 이시바와 동생 나라얀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이마에 브라만 카스트 계급 표시처럼 굵은 선을 만들어보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랍고 재밌었을 아이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 이렇게도 쉬운지 몰랐었던, 하지만 금지된 세계에서 금방 발각되어 수모를 당했던, 스스로 결정하고 미래를 선택할 기회를 꿈꿔볼 수 없었던, 이 아이들의 맺힌 상처는 누가 치유해 줄 수 있단 말인가.
희망과 절망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란 영혼의 창을 닫을 수밖에 없는 지울 수 없는 운명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저 아득하기만 한 것일 뿐,
포효와 환호로 울부짖으며 승리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연한 마음으로 좌절감을 견디고, 메울 수 없는 구멍을 견뎌야 했을 뿐이다.
어미 새가 물어다 준 먹이를 입 벌려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세상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참혹한 먹이를 이시바와 옴에게 물어다 주지만 이들은 잘근거리며 씹을 새도 없이 너무나 쉽게 삼켜버리며 살아왔다.
이 책을 더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