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을 바라보며 왼쪽을 바라보며.
오른쪽과 왼쪽. 그 사이의 공백을. 그 속의 심연을 바라보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그 이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릴 때. 다시 그 이전. 오른쪽을 바라보다가 왼쪽을 바라보려는 그 사이에. 그 이전. 왼쪽을 바라보다가 오른쪽으로 바라보려는 그 사이에 그 사이와 사이에. 그 사이와 사이의 사이 사이에.
물빛은 아름답겠지. 물빛은 아름답고 쓸쓸하겠지. - P25

패터슨이 무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듯이 직관적으로 바로 써 내려가는 것은, 그가 버스를 운전하면서, 산책을 하면서, 늘 오가는 거리를 걸으면서, 그렇게 일상을 살면서,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내면으로부터 작동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저 깊은 마음의 눈으로, 늘 삶의 구석구석을 면밀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발견하고 연결하고 다시 낯설게 보면서 세계를 확장시켜나가기 때문이다. - P52

노랫말과는 무관하게 어떤 인물을, 이야기를 건져 올릴 수 있는데, 이것들은 아주 모순적이게도 바닥의 어둠과 천상의 환희를 동시에 품고 있다. 나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환한 빛에 이를 수 있는지, 어떻게 그 희미한 불빛으로 어둡고 지친 누군가를 건져 올릴 수 있는지 묻는다.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죽음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내게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느냐고, 나는 묻는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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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창밖으로 흰 눈은 끝없이 내려앉았고. 마치 꿈결처럼. - P14

잊지 않기 위해서. 잃지 않기 위해서. 무언가 기억하기 위해서. 무언가 간직하기 위해서. - P17

결국 쓴다는 것은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단어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슬픔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가진 지극히 단순한 낱말 속에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또 다른 소리와 의미를 다시 새롭게 겹쳐 새겨 넣는 것이라는 사실을. - P19

자기 개시의 순간이 활짝 펼쳐지기를 기다리면서. 시의 몸을 입은 언어가. 시의 혼이 흐르는 언어가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오래된 의미의 그늘을 지워내고. 한없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추론의 언어로 다시 움직여가기를.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시 새로운 봄이고 새로운 꽃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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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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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기록‘을 담고 있다.

짊어져야 할 무거운 삶의 짐을 지탱해 줄 바닥짐 하나 없는 소녀티를 막 벗은 스무살 처녀. 가족들과 얼기설기 엮인 실타래처럼 불안한 마음을 식량 삼아 감내해야 했던 비현실적인 진짜 이야기.

(P.56) 오로지 배고픈 것만 진실이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모조리 엄살이요. 가짜라고 여겨질 정도로 나는 악에 받쳐 있었다.

(P. 61) 지난 여름의 전쟁이 박살내고 지나간 자리가 별 없는 밤 하늘을 배경으로 태고의 폐허같은 괴기하고 비현실적인 선을 시커멓게 드러내고 있었다.


식구들 먹여 살리기 위해 올케와 함께 남의 집 담벼락을 넘어 세간살이를 들쑤시며 먹을 것을 찾는 ‘나’는 밀가루 건더기 듬성듬성한 멀건 수제비국 부족하게 나눠 먹으면서 머릿속으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당장에 식구들 배곯지 않는 ‘내일’이 간절하다. 지긋지긋한 사상이며 이념이며 다 무슨 소용인가.

한 고비, 또 한 고비.
단 하루도 맘 편히 지낼 수가 없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 하는 세상 속에서 앞날의 대한 불안감은 줄어들지를 않고 서로 색깔이 다르고 뜻이 다르다는 이유로 총구를 겨누고, 줄을 그어 버렸으니 우린 맥없이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P. 91) 북으로 난 국도 위로 퍼부어대는 폭격과 기총소사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움직이는 거라면 쥐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을 기세였다.

(P. 98) 가장 바람직한건 우리가 자는 사이에 소리없이 전선이 우리 위를 지나가서 밤 사이에 바뀐 세상을 맞을 수 있는 거였다. 우리는 어디서 밤잠을 자든 낮잠을 자든 이런 소망이 자는 사이에 이루어지길 빌면서 잠들곤 했다.


각자의 근심과 한숨을 삼키면서 내남없이 서로 내뿜는 형체없는 그림자같은 불행의 냄새로 가득 한 곳에서도, 인생은 덧없음이 아니라는 희망을 준 사람들의 온정이 전쟁과 분단이 훑고 간 상처를 잠시 잊게도 하고, 또 더욱 경멸하게도 만들었다.

(P. 184) 세상만 자반뒤집기를 안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적응하고 먹고 살게 돼 있었다.


뭐랄까, 희망 끝자락에 ‘딱‘ 붙어서, 이제는 조금씩 그녀와 가족들에게도 살아가는 힘 얻을 일이라도 생기려나 하는 ‘꽃망울‘을 본 느낌이랄까.
향토방위대에서 만나 함께 했던 언니에게 취업자리를 부탁해서 얻게 된 미군 피엑스 파자마부를 다니며 밥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첫 월급 봉투 당당히 내 놓았을 때 그 벅찬 감정이란...

(P. 226)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내 안에서 삶의 의욕이 쾌적하게 기지개를 켜는 걸 확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아도 난 이제 스물한살이었다. 미치게 젊은 나이였다.


가늠도 할 수 없는 삶의 모서리 만큼 일지언정 6.25 전쟁이 쏟아붓고 간 그 이후의 삶이 궁금했다.
살아 남는 것이 중요했고, 먹고 사는 것이 급급했으므로 , 오빠의 ‘죽음‘에서조차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없었던 그 한 서린 날들 속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냈을까?’하는 참혹함과 동시에 경외심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가 본 ‘스낵바’ 이야기에는 나도 같이 콜라와 팝콘을 어석어석 씹고 싶은 신기함 가득 한 즐거움을 함께 느꼈다.
거친 말도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며 이야기 보따리 잔뜩 이고 온 어느 입담 좋은 어르신 같았던 박완서 작가님의 1951년 1.4 후퇴부터 1953년 결혼까지의 시기를 담은 이 책에서, 나로썬 상상할 수 없는 거친 그때의 삶도 ’살아낸‘ 힘은 결국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 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세상은 그녀에게 아프라고 던지는 돌덩이와 함께 ‘냉소’와 ‘환멸’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당찬 모습으로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P. 7) 내가 살아 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 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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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구는 향토방위대가 떠나기로 한 날보다 하루 먼저 떠났다. 그들의 목적지가 ‘거기‘라는 걸 빼고도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남루하다 못해 기괴해 보였다. 여태껏 엄마의 자존심의 방패가 돼 주었던 싱거 미싱 대가리도 그 울퉁불퉁한 모양을 옷 보따리 사이에서 비죽대고 있었다. 미싱 대가리가 재산 목록 일호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해서 창피할 건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버젓이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앉음으로써 우리 식구의 피난 행렬은 아무래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의 짓 같지가 않았다. - P167

그렇게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던 먹는 문제에서 놓여났는데도 여전히 목숨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니까 살아 있다는 감각도 없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였다. 우리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동안인지 생각도 안 나게 오랫동안 빈곤, 악운, 질병 등 인간의 그늘만 독차지하다보니 드디어 표정을 포기한 그림자가 돼 버린 것이다. 마침내 편안해진 것이다. - P202

"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가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팥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다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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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는 내 뜻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문제였지만 무사히만은 개인적인 운명에 속할 터였다. - P78

사람의 생각 속에는 좌우의 이념보다는 거기 속할 수 없는 생각들이 훨씬 더 많은데, 누굴 만나면 우선 저 사람 속이 흴까 붉을까부터 분간해야 하는 관습화된 심보가 부드럽게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 P82

그날을 앞두고 식구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벌떡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가슴을 쥐어뜯곤 하는 엄마를 올케가 천사 같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곧 만나게 될 거예요. 임진강만 안 건넌다면요."
"오냐, 오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떻게든지 임진강만은 건너지 말거라" - P90

목련나무였다. 아직은 단단한 겉껍질이 부드러워 보일 정도의 변화였지만 이 나무가 봄기운만 느꼈다 하면 얼마나 걷잡을수 없이 부풀어 오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미친 듯한 개화를 보지 않아도 본 듯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머, 얘가 미쳤나 봐, 하는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실은 나무를 의인화한 게 아니라 내가 나무가 된 거였다. 내가 나무가 되어 긴긴 겨울잠에서 눈뜨면서 바라본, 너무나 참혹한 인간이 저지른 미친 짓에 대한 경악의 소리였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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