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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살만 루슈디와의 두 번째 만남이다.
저번에 읽은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주인공 무어가 시작부터 넉살 좋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잘 풀어내 주며 이끌어줘서 그의 세계로 입장하는 것이 수월해 참 재미있게 읽었다.
<광대 샬리마르>는 광대를 상징하는 듯, 발가락이 밧줄을 단단히 움켜쥔 표지가 인상적이다. 핏줄 선 발등이 주는 강렬함에 압도된 건지 멈칫하게 하여 내심 매콤한 후추향 풍기는 익살스러운 무어를 찾고 싶게 만들었다.
그런데 ‘올가’라는 인물이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자칭 감자 마술을 이용하는 마녀의 후예라고 하는 어딘가 청승맞아 보이기도 한 이 러시아인 여성이,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감자를 손에서 빙빙 돌리며 이런저런 그간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P. 25) “우리는 그런 혼란 속에서 살아남으려니 당연히 생쥐처럼 약삭빨라야 했지요. 그렇잖아요? 물론 남자들은 다른 곳으로 떠날 꿈만 꾸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겨도 한곳에 머무르지를 않아요. 자기 삶은 자기 것이라는 식이야. 그냥 왔다 가는 거예요. 전쟁은 또 어떻고. 남편을 잃었지요. 슬픈 얘기니까 더 묻지 말아 주세요.”
아무도 물어본 사람은 없지만, 암튼 그녀는 더 묻지 말아달라더니 책 한 페이지 분량을 다 채울 만큼 한숨을 쏟아냈다.
잃어버린 행복과 평화의 나라를 떠올리며 이제는 지는 해가 돼 버린 자신의 속 얘기를 꺼낸 올가의 이기죽거리는 모습 뒤로, 앞으로 펼쳐질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듯하다.
어머니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 지역인 카슈미르 출신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는 ‘인디아’는 미국대사 ‘막스 오퓔스’가 쉰일곱에 얻은 늦둥이 딸이다. 호색한인 아버지의 영향인지 인디아도 앙큼스러운 구석이 있는데, 운전사로 들어온 카슈미르 출신인 ‘샬리마르’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거다. 물론, 그 눈빛 안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출신이라는 것이 그녀를 자극한 요인 중 하나일 테지만 인디아의 가슴 속 들끓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아까 감자를 손에서 빙빙 돌리던 올가는 인디아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인이다. 얇지 않은 책을 읽을 때, 잠시 부담을 덜어내고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큰 것 같다. 읽는 재미를 더 해주는 올가가 시작을 잘 열어줬다. 심지어 모성의 향기가 그리울 인디아에게 심적으로 의지가 되어주는 고마운 인물이다. 그런 의미로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녀를 가장 먼저 소개했다.
책장을 더 넘겨보니,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은 인디아의 아버지 막스 오퓔스.
(P. 62) 억누르려고 최대한 애썼음에도 막스의 손에 들린 일정표가 떨리기 시작했다.
핏빛으로 번진 바닥에 나뒹굴어질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을까.
하나뿐인 딸이 보는 앞에서 정체를 숨기고 들어온 운전사 샬리마르에게 칼에 찔려 숨진다.
어떤 원한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거슬러 카슈미르의 계곡마을 파치감으로 가 본다.
각자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쫓겨 나온 사람들이 자연이 아낌없이 베푸는 은혜를 실컷 누릴 수 있는 이곳에서 쇼, 연극, 희극, 줄타기 등의 공연을 하는 배우로서 요리사로서 터를 잡고 지냈다.
이 마을에 사는 힌두교 집안의 딸 ‘부니’와 무슬림 집안의 아들 ‘노만’은 사랑을 키워나갔다. 파치감에는 모든 게 다 뒤섞여 있는 곳이라 그 어떤 차이도 뛰어넘는 공통의 끈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 두 사람의 사랑에 종교가 방해되어 양측 간 우호 협정이 붕괴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모를 뿐이다.
달을 못 채우고 태어났지만 뭐든지 남보다 앞섰고 운명에 맞서려는 의지가 강했던 부니는, 노만에게 나무 꼭대기까지 데려다 줄 날개와 같은 존재였다. 노만과 부니의 사랑 못지않은 사랑이 또 있다.
보석과도 같은 자식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도 얼마나 절절한지, 이따금 코끝 찡하게 했다.
(P. 101) 아버지의 손바닥은 부자의 손처럼 부드럽거나 푹신하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고 노련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아는 손이었고, 앞길에 놓인 고난을 모르고 살도록 무조건 감싸주지는 않는 손이었다. 그러나 억셀 뿐 아니라 그 고난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손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귀한 사랑을 받으며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고 부드러운 성품을 타고난 ‘광대 샬리마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노만이, 도대체 어떤 연유로 몇 해가 지나 암살자가 되어버린 걸까. 착잡해져 온다.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은 분리되어,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을 두고 충돌을 벌였다. 이 지역에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계선이 국경선이 아니라 통제선이었다는 것이 재앙의 시작이었던 것.
역사와 종교 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그어버린 선 때문에 충돌은 끊임이 없고, 마을 사람들은 경멸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소문을 주고받으며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도시의 생활은 꿈에서조차 꿔본 적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소문 속 강간, 방화, 살인이라는 단어만으로도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한편, 늘 충동적이었던 부니는 채워지지 않는 부정한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굶주린 갈망이 채워지길 바랐고 벗어나길 꿈꿨다.
파치감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노만으로부터.
곧 그녀의 허기를 채워줄 한 남자가 등장한다.
특별공연을 하라는 명령과 함께 정부가 파견한 사절이 카슈미르에 왔고, 미국 대사인 막스 오퓔스가 수행단과 잔칫상을 즐기고, 축제를 즐기러 오게 된 것이다.
유부남이었던 막스 오퓔스는 눈앞에 펼쳐지는 공연 속 파치감 최고의 무희 부니의 예술적 재능에 감탄하며 그녀의 영혼을 꿰뚫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고, 노만의 아내였던 유부녀 부니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막스 오퓔스의 과거가 참 다채롭다.
그는 나치 치하에서 인쇄업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독일이름을 가진 프랑스인으로서 동네에서도 유명한 유대인 집안이었다. 부교수로 일하면서 시간을 쪼개 아버지의 일까지 도왔던 그가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과거까지 들여다보니, 어쩌다가 또 이 사람은 미래의 난봉꾼이 되어 잔혹한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 걸까 싶다.
(P. 255) “만사가 다 지랄맞아. 나치 놈들은 보나마나 작업장을 총 만드는 데 써먹으려 할 거야. 개새끼들.”
어둠이 팽팽해지고 위험하지 않은 곳이 없었던 시기에 부모님을 지켜내지 못했던 막스 오퓔스는 애국주의를 드러내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되살려내고자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되어 전쟁 영웅이 되고, 반들거리는 광택을 내뿜는 신세계 미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복수심에 불타 폭파기술을 배우고, 아우슈비츠로 가는 죽음의 기차에서 유대인 아이들을 탈출시키고 데려오는 역할까지, 레지스탕스로서의 활동 업적이 많았던 그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쓰러져간 동료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터지는 폭탄과 탄내 풍기는 삶을 거쳐 연합국 스파이였던 영국인 ‘그레이 랫’과 결혼해 미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이어나간다.
시간은 흘러 막스 오퓔스는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끝난 직후 인도의 대사직을 제안받는다.
그는 욕망의 명령에 따르듯 뱀처럼 꿈틀대는 경계선이 그어진 불안정한 중간지대 카슈미르로 향했고, 이 선택이 인도와 미국 간 외교 분쟁 못지않은 해골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부니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것이다.
만약, 막스 오퓔스가 수많은 일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내와 균형 잡힌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더라면, 샬리마르 칼의 칼집이 되는 불행을 피하고 막스 오퓔스가 안겨주는 선물 속에 담긴 편의주의에 뱃속 지방만 늘려가며 킬킬대는 부니의 파멸을 막을 수 있었을까.
카슈미르에 그어진 경계선이 마을 사람들의 삶의 줄을 당기며 유혹하고 배신하는 동안 단순한 행복의 열망은 그을음만 냈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악몽이었을 비극적인 삶과 끝나지 않은 현실의 불행을 담은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대단치 않은 것에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나의 소박한 삶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계속 아른거리는 문장이 있다.
(P. 143) 삶은 계속된다. 눈은 녹고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 책 속에서는 부인을 잃은 남편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며 용기 잃지 말고 살아나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말이었는데, 나에게는 겸허한 마음을 들게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지만, 자연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채워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생기는 변화가 당연하여 눈도 녹고 꽃들이 꽃눈을 틔우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씨에 눈이 떠져 하루가 시작될 테지만 실은 당연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삶이 준 시련에 마음마저 염세적으로 변하여 모든 것이 근사한 포장지를 두르고 있는 말처럼 와 닿지 않고 눈을 씻고 다시 들여다보고, 귀를 씻고 다시 들어봐도 여전히 그 말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 할지라도, 위협과 위험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이가 우리에게 삶은 계속되고 눈은 녹고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이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 말을 어떻게 허투루 들을 수 있을까.
아직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한 나로서는 울림을 주는 메시지를 스치듯 지나가는 말처럼 흘려보낼 수가 없다.
평화로운 공존이 환상처럼 여겨질 만큼 비극을 머금은 의구심 드는 현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에서도 나는 ‘희망’을 끄집어내고 싶다.
살만 루슈디는 흔적도 남지 않은, 이제는 카슈미르 지도 상에만 존재하는 파치감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며, 폭력이 흘러넘치는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아챌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간 것 같다.
그리고,
끊임없이 종교, 정치, 역사, 예술 등을 다루며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P. 372) “그러지 말고 똑바로 앞을 보려고 노력해보세요. 여기 없는 것을 보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을 봐요.”
과거에 매달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파국으로 이끄는 광대 샬리마르를 향한 외침 그 안에는 살만 루슈디의 간절함이 담겼다.
이 외침은 뚜렷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