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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평점 :
나는 불과 한 시간 만에 마술에 걸린 듯 그때까지 나와 정신적 세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꿰뚫고서는, 열정, 새로운 열정을 찾아냈습니다.(P. 53)
‘새로운 기쁨‘ 이었던 것이다.
내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에 맛보았던 그 기쁨과 같았을 이 책의 주인공 롤란트가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빠져들며 느꼈을 그 새로운 기쁨.
롤란트의 젊은 시절 이야기들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봤다. 아니 자연스럽게 떠올려져서 책을 읽다가도 혼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듯 시선을 위로 올리고선 내 머릿속에 떠올려진 과거들을 천천히, 그리고 때론 부끄러워 뜨거워진 얼굴을 만져보며 후다닥 다른 생각으로 이동시키는 경험도 하고 꽤 나쁘지 않은 (그 당시에는 좋을 수만은 없는 온갖 것들)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를 읽고 바로 그의 책을 2권 더 구매하였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는 그 공감능력과 다정하고도 섬세한 그가 좋았다.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면은 나라는 사람의 대해 사유할 수 있는 큰 배움도 있고 자유스러움을 갈망했던 마음에서 얻는 공감은 꽤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한다. 어쩜 이렇게 부정적 마음의 표현조차도 고급스러우면서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하되 그 뜻은 부족함 없이 충만하도록 글로 잘 담아낼 수 있는 건지 참 놀랍다.
<감정의 혼란> 속 롤란트는 교수님의 구술을 받아적으며 느낀 감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선생님이 야성적이고 원시적인 서술을 열광적으로 묘사할 때는 창작자의 단어가 웅대한 울림으로 날아올랐습니다. (P. 101)
롤란트를 한순간에 압도시키고 그에게 열정을 불러일으켜 준 교수님의 존재가 심지어 한 인간으로서 부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으로 교수님에게 식어버린 열정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롤란트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랬다.)
‘나’라는 존재를 ‘지금의 나’로 결정지어 버릴 만큼이라니...
이거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완전히 교수님에게 압도당해 사로잡힌 롤란트의 감정이 내겐 조금씩 벅차고 두려움을 만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인물’ 혹은 한 ‘사건’에 치우친 삶을 살기로 선택하게 될 때에 거기에서 오는 내가 감당해야 할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그 순간에는 완벽히 가늠할 수가 없고, 시간이 흘러 그로 인해 내가 오롯이 겪는 실패와 후회를 끌어안은 채 산다는 것이 꽤 녹록지 않다는 것을 느껴본 자로서 앞으로 롤란트가 겪게 될 고난이 조금은 예상되어 불안함 섞인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혹시 나의 예상대로 그도 나처럼 생채기를 겪게 된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궁금해졌다. (물론, 나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뭔가 세련되고 우아한 방법을 택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허나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이더라.)
자신의 감정을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던 롤란트가 원하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향한 교수님의 ‘공감’뿐이었는데, 그는 조금은 무모하게 ‘멈춤’없이 교수님을 향해 달리기만 했던 것 같다.
롤란트의 고백처럼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은 한순간이면 충분한 것이었다. 누구나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을 수도 있는, 혹은 단 한 번도 겪어볼 수 없는 심미적 정신세계로의 여행을 통한 그 ‘감정’을 느껴본 자만이 가늠할 수 있는 그 무언가(혼란스러움)를 향유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그것은 슈테판 츠바이크만의 빠져들게 하는 서술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 솔직함과 섬세함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혼란스러울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