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해도 별반 없었긴 하지만, 올 해는 반 이상 정신을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르몽드>의 통찰력과 디테일에 기대어 한 해의 마무리를 조금이라도 더 공부하며 다져보고 싶다.
미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구성된 세상의 경계를 넓히고 싶다면 르 몽드 한국어판을 만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12월호의 다양한 주제와 장소에 관한 명징한 기사들을 읽으며 국내 상황으로부터 정신적 휴식도 누렸다.
한 달 동안 제대로 알아보고 배우기엔 늘 풍족함을 넘어서는 내용들이다. 글을 완성하기위한 노고에 못 미치는 독서라 매번 미안하지만, 소심한 내 기준으로는 펼칠 때마다 더 넓은 공간으로 확실히 걸어 나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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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다움에 아무 관심이 없는 행정부 수반이 구시대의 악몽 같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탄핵 소추 가결되는 내내, 쪼개진 정신으로 더 허둥대며 겨우 살았다. 어떤 난동을 더 부릴지 모른단 불안에 오랜 집중이 불가능했다.
폭력을 사용하는데 주저가 없는 그도, 그가 속한 정치 집단도, 인간답지 못한 수단으로 이익을 챙기는데 노골적이었고, 사람들을 가능한 잘게 쪼개는 비열한 기술을 휘둘렀다. 원래도 약자였던 이들은 날개를 달고 날뛰는 폭력에 더 위축되고, 상해를 입고, 죽임을 당했다. “여혐 살해”는 무용담이 되었다.
다양한 신체적, 사회적 폭행과 범죄들 중 일부는 폭로되고 잊히고, 다른 일부는 합당치 않게 처벌되고 또 잊혔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공공장소에서도 여성들은 살해되었다. 그 살해가 멈춘 것인지, 보도가 멈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양한 내용 중에서 “페미사이드femicide”와 “페미니사이드feminicide”*에 대해 배운 것을 정리해둔다. “유엔은 2012년 빈 심포지엄에서 이 개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두 단어를 구분 없이 자주 함께 사용한다고 한다. * 사회적 통제나 정치적 폭력의 형태로 여성을 살해하는 행위
관련 역사와 내용을 알 수 있어 반가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상황들이 섬뜩하고 아프다. 언론의 행태도 유사하다. “페미니스트”란 단어가 프랑스에서는 “한 때” 여성혐오적 모욕으로 쓰였고, 한국에서는 “지금” 혐오 폭력의 “표적”으로 쓰이는 것을 제외하면. 단, 폭력의 종류는 한 가지가 아니다.
“여성 살해는 강간, 고문, 성적 노예, 강제적 이성애, 강제 불임, 강제 임신(피임과 낙태를 범죄화), 정신외과 수술, 특정 문화에서 여성에 대한 영양 불균형 등을 포함하는, 여성 혐오적 공포의 연속성의 극단에 위치해 있다.” 1980년대 영국의 사회학자 리즈 켈리
“다양한 사회적 이유로 인해 여성들이 조기에 사망에 이르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1,000건이 넘는 멕시코 국경 도시의, 미제로 남은 여성 살해 사례에서 보듯이, “2,526건의 여성 시신에 고문과 성적 절단의 흔적”이 남았다는 점에서 이 살해들은 젠더 특징적**이다. ** 체계적 성적 여성 살해, 살해된 신체와 신체를 문화적으로 짓밟는 범죄.
“여성들이 살해당할 때 그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페미니사이드>의 저자, 다이애나 러셀(1938)
한국 사회에서 여성 혐오와 폭력을 수단으로 지지층을 만든 자들은 무엇을 경험해도 권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일수록 표가 아쉬울 때는 임신한 아내와 나이든 어머니를 앞장세운다.
박근혜 탄핵 때 나라를 구했다면 잠시 추켜세워진 (여)학생들에게 이후 쏟아진 조롱과 폭력을 생각해보면, 이번 탄핵 집회의 경험이 다양한 틈을 한 번에 메우고 갈등을 봉합하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일례로 시국선언하는 여고생들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남고생들도 ‘우연’이 아니다.
정치적 탄핵 이후에 만들어갈 세계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는 많은 시간 솔직한 논의가 필요하다. 대통령 하나 바뀌어서 망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다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고단하고 먼 길이지만 그 미래를 몰라도 지더라도 가야할 길이다..
“이데올로기가 전파하는 가치와 규범은 (...)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더라도 (...) 최상의 환상이다.”
12월호를 읽고 기록하는 동안 내내 춥고 무겁던 몸에 체온이 조금 상승했다. 며칠 만에 잠을 잘 자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승리’를 과신하지도 말고 낙관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산뜻한 생각이 든다. 감사하며, 조금은 달라진 2025년에 다시 만날 새로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