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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단호한 행복 - 삶의 주도권을 지키는 간결한 철학 연습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방진이 옮김 / 다른 / 2020년 11월
평점 :
절판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 그리스 철학 강의를 무척 힘들게 들으면서 그래도 나는 일반적으로 알려 지길 스토아학파의 대척점에 있다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철학에 힘을 덜 들이고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니 스토아학파*의 철학서들을 열심히 읽지도 않았고, 귀동냥으로 들은 인물들 중 세네카와 아우렐리우스는 아주 조금 기억이 남았지만, 에픽테토스*는 과문해서 완전히 낯선 인물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못 다한 공부를 좀 채워보자, 반가운 기회로 삼아 이 책을 읽어 나갔다. 내 시절 교과서 수준이라야 거짓에 근접할 정도로 단순화되거나 일반화된 내용들이 가득했으니, 에피쿠로스학파가 쾌락주의라는 평이 뜬금없는 엉터리인 것처럼, 스토아학파가 금욕주의라는 것도 지나친 단순화에 다름 아니다.
일례로 스토아 학파의 4대 기본 덕목 - 실천적 지혜, 용기, 정의, 절제 - 에 대한 멋진 설명을 이 책에서 읽어 보고나니 비로소 정확하고 아름다운 철학적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구나 싶다. 구절 마다 이후의 다른 철학자들이 떠오르는것을 보니 스토아철학은 내 짐작보다 훨씬 더 후대에 영향을 미치며 사상적으로 살아 남았다고 생각된다.
‘단호’한 태도로 ‘행복’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원칙주의자가, 인간을 중심에 두고 깊이 사유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당연한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가장 힘겨운 순간에 처한 이들이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수도사가 영혼 수련을 위한 지침서로, 조지 워싱턴이 전쟁 중에, 미 해군 영웅이 고문당할 때…….
저자의 인생을 순식간에 변하게 한 에픽테토스의 글을 읽으니, 대학시절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가 시험문제로 나왔던 것과 교수를 감동시킨 멋진 답변이 생각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다른 이들의 답변은 무엇일까, 가끔 궁금했다. 댓글에 달아 주시는 분들 계시면 참 반갑고 감사하겠습니다.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쌓아야 한다.
또한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용기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심을 키워야 한다. 33
온전히 개인에게 달린 것은 판단, 의견, 목표, 가치관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47
말로만 철학을 떠들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실천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롱을 당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86
다리가 부러질 때도 스토아철학의 원칙대로 말했고, 추방당했을 때도 굴하지 않고 철학 학교를 세워 운영한 의지의 인물. 소크라테스를 롤모델로 삼아 아무 것도 글로 남기지 않은 철학자. 현재 전해지는 <담화론>은 짜 중 한 명이 기록한 것이고, 유실본을 제외한 것을 요약한 것이 <엥케이리디온>이라는 짧은 지침서이다.* 정말 많은 지식인, 지성인 작가들 그리고 영화감독들까지 읽고 소장하고 변형해서 언급하였다. 심지어 현대의 증거기반 심리치료요법 중에 가장 성공적이라고 인정받은 인지행동 치료요법이 앨버트 앨리스의 합리적 행동정서 치료법이고 이 역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을 참고한 것이다. 왜 전혀 몰랐을까…….
원래 세상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우리의 생각이 좋고 나쁨을 결정할 뿐이다.
햄릿 2막 2장, 셰익스피어. <엥케이리디온 5절 변형>
에픽테토스와 <엥케이리디온>의 가르침은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인류의 삶에 외형을 조금씩 바꿔가면서 늘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1,900년 전의 철학자와 그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는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2,000년 전 이들도 오늘날 우리가 그러하듯 사랑하고, 희망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다 죽었다고.
저자가 붙인 별칭처럼 이 책은 ‘바데메쿰vade + mecum, 가다 + 나와 함께’, 즉 휴대용 책이라는 뜻이며, 저자는 이 책을 실전 지침서라 부르고 싶어 한다. 그런 의도와 기획에 충실하게 너처럼 스토아주의와 에픽테토스의 기초부터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고, 철학적 훈련이나 지식이 없어도 현대 언어로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글이라 아무 문제없이 읽을 수 있다. 단, 2부 중반부터 3부는 저자가 독자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고 수정한 내용이라, 논점을 바꿔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실전과 실천을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에픽테토스가 거급 권장한 ‘철학 일기 쓰기’이다. 철학이 앞에 나서긴 했지만, 그냥 일기 쓰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매일 그날 한 일을 전부 돌아보기 전까지는 당신의 유약한 눈꺼풀 안으로 잠을 들이지 마세요.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어떤 일을 완수했는지, 어떤 일은 왜 마무리하지 못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니 시작하세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세요. 그런 다음 자신의 악행을 꾸짖고 선행에는 기뻐하세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런 목료를 정하고 일기쓰기를 권장해주는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아쉽고 아깝다. 어른들에게도 이런 글쓰기를 권해주는 사회라면 또 어떨까…….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철없는 아니나 그런 기대를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빚진 것이 없습니다.
개인의 사정을 고려해가며 우주의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8
미신에 현혹되지 마세요.
별, 카드, 찻잎, 심령술사를 통해 미래의 징조를 읽을 수는 없습니다. 18
누군가 여러분의 몸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며 남에게 넘겼다고 해봅시다.
분명히 화가 나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조종하고 마음대로 다루는 현실에는 화를 내지 않는 겁니까? 28
낯설지도 난해하지도 않은 철학과 철학자, 뒤늦었지만 만나게 되어 다행이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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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스토아 철학에 이르러서는, 이론적-논리적 관심보다는 실천 철학에 대한 관심이 더 부각되어 전면으로 나타나고 있다. 헬레니즘 시기의 다른 철학 유파들과 마찬가지로 스토아 사상도 개인적 실존을 철학적으로 확고히 하려는 소크라테스적인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급격하게 붕괴되어 가는 사회와 정치적으로 불완전한 사회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철학적 화두였다
* 에픽테토스 - 그리스어로 ‘구매된 것’을 뜻한다 - 는 늘 ‘자유와 노예’를 자신의 논의 주제로 삼는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원칙적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를 의미한다. ‘노예’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서 만들어진 ‘정신적 부자유’이다. ‘정신적 자유와 스스로 자초한 노예’의 대조야말로 그의 일생을 통한 철학적 화두이다. 자유와 노예는 자신이 속하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사람에게 속하는 정신의 지위이고 태도에 대한 비유이다. 에픽테토스 [Epictetos, Epictetus]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에픽테토스의 『담화록』에서 아리아노스가 직접 뽑아 놓은 도덕적 규칙들과 철학적 원리들을 모은 요약본의 성격을 지니는 ‘선집(選集)’ 내지는 ‘편람(便覽)’인 『엥케이리디온』(Encheiridion; 문자적 의미는 ‘손 안의 작은 것’이다)이 전해진다. 에픽테토스 『담화록』 (해제), 2006.,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김재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