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빛나는 순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윤예지 그림, 박태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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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 보니라고 시작하는 문장들을 실제로 사용하게 될 날이 올까 싶었는데 꽤 이미 자주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자랑스럽고 우쭐하고 기분 좋은 일들이 아니라 못 되게 굴고 남을 아프게 한 순간들이 한 치의 에누리*없이 내게로 돌아 와서 보는 이 아는 이가 없어도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에누리 에다 누리고유어. 이제야 배웠습니다어째 날이 갈수록 한국어사전을 더 자주 찾아봐야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 중 20대에 오만하고 못된 말 툭툭 내뱉은 일들이 많았나보다어려운 사안에 대해 이견들이 분분하고 해법은 모자란 지친 상황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둘만 남은 공간에서 참 좋은 친구가 다정한 위로를 건넸다유일한 방법은 바라는 것을 계속 바라는 것일 지도 몰라.”

 

그러자고 마주 웃으며 한 마디하고 손잡고 벌떡 일어나 맛있는 저녁 식사하러 같이 가자남은 오늘은 웃으며 보내자라고 하면 될 것을그럼 행복하게 기억할 시간으로 남았을 것을그만 못되고 못나게 그런 말 구역질 나.” 말이 끝나는 순간 내 심장도 덜커덩거렸고 친구의 얼굴도 덜거덕거렸다그나마 관계가 박살나지 않은 것은 기특하게도 그 못된 말이 나온 속도와 같은 속도로 사과의 말도 바로 나왔다는 것이다그렇게 나를 견뎌준 이들이 여태 친구들로 남았다.

 

그런 성격 탓이었는지 그 순간이 트라우마로 남겨져서인지 그런’ 류의 하이레벨 깨달음위로말과 글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살았다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있지만 코엘료는 그 중 단연 베스트셀러 작가가 어딜 가든 그의 작품들에 대한 대화와 인용이 이어졌다<순례자>가 출간되었을 땐뭔가 깨닫기 위해선 모두 극한 여행을 떠나야만 하는 거야?’ 라고 심통을 부렸고<연금술사>는 금은 그 자체가 원소인데 다른 원소들로 만들어 보겠다는 게 말이 돼?’라며 거부했다그러다 지인들이 읽고 대화하는 코엘료의 책들 중에 에세이가 아닌 <표르토벨로의 마녀>와 <베로니카죽기로 결심하다>를 슬쩍 들춰 보았다.

 

2020년 안부를 묻는 것처럼 <내가 빛나는 순간>이 선물이 되어 도착했다드디어 경험해 볼 에세이라 금지된 일을 시도하듯 두근거리기도 했고 예측 가능한 알러지 반응을 기다리는 것처럼 불안해 지기도 했다.

 

영원한 잠시

 

우리는 우주를 누비는 여행객입니다.

별들이 무한의 소용돌이와 회오리 속에서 맴돌며 춤추는 그곳을 여행합니다.

삶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잠시 이곳에 들를 뿐입니다.

서로 마주치고 만나고 사랑하고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영원이 잠깐 내어주는 매우 소중한 순간입니다.


영혼의 만남

 

책을 산다는 것은 단지 내용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시간에 걸친 착오와 고된 작업을 사는 것이고

수많은 좌절과 기쁨의 순간을 사는 것이죠

책을 산다는 것은 저자의 마음과 나의 영혼…… 

그리고 내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것입니다.


용기

 

용기란스스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용기 있게 글을 쓰자고 용기 있게 사랑하자고 용기 있게 비판을 대하자고 용기 있게 내 뜻대로 살자고 용기 있게 내 꿈대로 살자고

 

선을 넘지 말기

 

이따금 우리는 화를 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화를 낼 권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잔인해질 권리까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내 존재가 사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정

 

아주 오래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우정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우정은 끝까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친구와 적

 

설명 따위 하지 마세요.

친구라면 설명할 필요 없겠지만 적이라면 뭐라 한들 믿을까요.

 

마이 웨이

 

설명하느라고 애쓰지 마세요.

사람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남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바보들의 행진

 

남 욕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유언비어를 실어 나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이를 믿고

한심한 사람은 이를 널리널리 퍼뜨립니다.

 

용서의 기술

 

용서하되 잊지는 마세요.

그러지 않으면 또 다치게 됩니다.

용서는 세상을 달리 보게 만듭니다.

그러나 잊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비참하게 사는 최고의 방법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지에만 귀 기울여 보세요.


저 아세요?

 

늘 그렇듯이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말이 많습니다.

 

언어의 힘

 

말 한마디한마디는

당신의 기억에 마음으로 저장됩니다.

기억은 모여 모여 문장을 이루고

단락을 구성하고 책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예스 또는 노

 

'Yes'라고 말할 때는 기꺼이

‘No’라고 말할 때는 거침없이.

 

진실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불안에 놀아나지 마세요.

불확실할수록 진실에 집중하세요.

누구도 무엇도 두려워하지 마세요.

나는 나의 편입니다.

 

나는 나의 수호신

 

누군가 당신을 공격하면 당신도 공격하세요.

언젠가 용서하더라도 말이죠.

용서는 용서대응은 대응입니다.

행여 무대응을 관용이라 생각하지 마시기를.

침해당해놓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저 겁쟁이일 뿐입니다.

 

빛의 속도

 

미루지 마세요.

인생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릅니다.

 

시간이 없어요

 

어느 날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젠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더 이상 시간이 없구나,라는 것을요.

그러니 지금하고 싶었던 것을 하세요.

 

지금을 즐기세요

 

누구든 죽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지는 않아요.

부디 즐기세요.

지금도 이른 건 아닙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슷한)순간들 원제가 어떤 이유로 단수, moment로 표현되었는지는 모르겠다 ― 에 나도 웃으며 빛났을 수도 화가 타올라 빛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호흡이라는 것은 생각할 때마다 불편한 양가적 기분을 느끼게 한다. 산소를 호흡하기 때문에 내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지만바로 그렇게 때문에 나는 매 순간 죽어가는 것이다인간은 36.5도로 천천히 타다가 꺼지게 되는 존재이다체온을 유지하는 제1기능을 위해 열로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그 기능을 넘어 반짝하고 빛나는 순간들은 필요하고 그 빛으로 어두워가는 다른 순간들에 천천히 다다를 희망도 생길지 모른다.

 

모든 이들이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작품처럼 이 책에서는 이미 높고 밝게 빛나는 저자만이 아니라 참여한 다른 이들의 소개 글들도 반짝거린다.

 

역자 박태옥

타고난 재주가 글쓰기라 평생 글과 함께 살았고파울로 코엘료의 말처럼 돈 좀 못 벌더라도 꿋꿋이 꿈을 따랐다하루하루는 다 다르고 날마다 새롭고 멋진 일이 일어난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에 백 퍼 공감한다.

 

그림 윤예지

기억할 수 있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습니다그림 이외의 직업은 상상해본 적이 없기에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으로 돈을 벌고그것으로 또 시간과 공간을 확장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흐르는 것들에 대해 예민한 편입니다그래서 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시간에는 흐르는 것을 기록으로 잡아두는 연습을 합니다시시각각 변하는 시간과 감정의 흐름을 잊어버리기 전에 이미지로 기록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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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만드는 소녀 - 제4회 NO. 1 마시멜로 픽션 수상작 마시멜로 픽션
이윤주 지음, 이지은 그림 / 고릴라박스(비룡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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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주 전인가 비룡소 아동 도서를 우연히 추천받아 읽고 아이들은 멀쩡한데 혼자 통곡을 한 일이 있었다비룡소에서 출간되는 책들을 훨씬 더 오래 많이 읽어 오신 이웃분이 그 밖에도 좋은 책들이 정말 많다고 해주셔서 가끔 눈길을 주다가 우리 집 10대 두 명이 원하는 책을 읽게 되었다마시멜로 픽션 대상 수상작이라는데 무지해서 상의 성격은 잘 모르지만 일단 작품의 수준을 보장받은 느낌이다.

 

생각보다 내용은 파격적으로 시작한다몸속에 낯선 행성의 친구가 들어오면서 놀라운 사건들이 벌어진다외계인과 합체한 로나는 헤로인이 되어 지구를 차지하려는 악당에 맞선다배경은 아주 친숙한 동네와 학교이다.



지루한 어른인 나의 시선으로 포착한 교훈적인 내용은 외계인이 모두 적대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과 함께 모은 힘으로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목차에서도 보이는 바와 같이 10대들에게 더욱 친숙할 듯한 유튜브스마트폰 앱단톡방이 등장한다우정을 쌓아가는 내용경쟁하고 사랑하는 내용꽤나 가슴 아픈 사연까지 골고루 어우러져 있다.



나 자신도 10였다면 두근거렸을 만한 지구수호프로젝트이에 더해 아이들의 맘을 조종해서 지구를 노린다는 설정의 와우톡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유혹하고세뇌도 시킨다충격적이게도 나쁜 소원을 빌었던 아이들은 죄책감으로 스스로 소멸하려고도 한다. SNS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책에 대한 집중력도 높아질 듯한 구성이다.



순전한 아동 판타지물은 처음이지 않나 싶다그 점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내게도 상당히 신선했고 아이들 또한 진심으로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친근하기까지한 내용을 몰입해서 따라가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외계인이 반영하는 모습이 현실의 어른들이 보여주는 행태를 반영하나 싶게 이기심과 질투수치심을 모르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 혼자 조용히 부끄럽기도 했다.

 

버거운 문제를 앞에 두고 어른이라면 모른 체했을 수도 있지만아이들은 순수함과 집중력을 가진 존재답게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상상을 해보건대 나로서는 무시무시하고 적극적으로 말리고 싶은 결정이다아이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결국엔 다른 의지처를 찾지 않고 노력에 노력을 더한 결정이 기적이라는 결과를 낳게 된다.



로나네가 이 기적을 만든 거야.

 

동네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없고 제도권 교육 기관에 참여해야만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이 개학도 입학도 못하고 각자의 집에서 준자가격리를 당했다들뜬 마음으로 날짜를 꼽아 특별히 설레면 준비한 것들을 가방에 담고 나간 학교는 일주일에 하루혹은 홀짝수로 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올 해 들어 처음 학교를 다녀 온 아이들의 얼굴이 빛나고 다음 날까지 목소리에 힘이 충전된 모습을 아프게 본다간단하고도 분명하게참 좋았다"고 한다. 그 말이 기뻐서 어른들은 서둘러 작은 파티를 마련했다. 그 모든 과정에 눈물이 솟구치다 마르다 했다. 이런 세상을 살게 하려던 것이 아닌데.

 

사람을 만나는 일낯선 이를 알아가는 일운이 좋게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는 일이 모든 것이 실은 아이들을 성장시키고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현실에서는 모일수록 코로나라는 관리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줄어들지만물리적 거리를 유지하는 일과 사람들 간의 거리를 줄이는 일은 전혀 다른 방식의 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 시기야말로 함께’ 좌충우돌 동분서주하며 해결책을 찾고 기적을 찾아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애써야 하는 바로 그 시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참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들을 이어가고 하루하루 더 늘리고 마침내 함께 성장해야만 하는 시기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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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만든 공간 -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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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몇 해 전에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었는데이후에 방송에도 출연하시고 유튜브 강의 영상들도 찾아볼 수 있어서 매번 반갑고 재미있었다이 후 <어디서 살 것인가>는 순전히 제목에 마음이 울려서 한동안 이 문제로 마음을 졸이고 고민만 하다 결국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와 합치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사장된 기억으로 인해 내용이 사뭇 다를 것이라 짐작했지만 역시 읽어 보았다이전에 건축과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떠오르지 않은 것을 보니적어도 내게는 유현준 작가의 글이 건축 관련 독서 경험을 가능하게 한 유일한 계기인 듯하다

 

아는 바 없이 그저 건축이면 디자인이나 시공과 관련된 분야로 한정해서 생각했는데덕분에 인문 건축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고단순히 나의 집과 건축물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볼 수 있었다개별 연구도 쉽지 않은데 통합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고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럽고 그러한 생각들을 말로도 글로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풀어서 전해주시는 점이 늘 감사하다일상의 모든 것이 인문학적 사고의 대상이 되는 것이란 뒤늦은 배움도 얻었다.

 

모더니즘이란,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과

문화 전반에 걸친 새로운 변혁을 말한다.

 

새로 출간되는 책 <공간이 만든 공간>이란 제목도 철학적이면서도 전혀 생각해볼 수 없었던 많은 주제들에 대해 새롭고도 인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거란 기대에 반가웠다우선 문화의 탄생과 기술혁명을 연결 지어 설명해주시는 부분을 읽으며 단어나 명칭에 대해 얼마나 한정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해하고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박람회엑스포 전시장을 구경 갔을 때에는 정말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사회의 모든 구조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문화 교류가 일어나고 새로운 문화가 변종 유전자처럼 탄생하고 진화한다는 설명이 이미지처럼 생생하게 느껴져서 이해를 돕는다공간이란 그렇게 마치 생물처럼 탄생하고 성장하고 이동하기도 하는 것이구나 싶어 건축적 요소에 집중해서 더 자세한 인문학적 문화적 교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도 생긴다.

 

회화나 음악과는 다르게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도구는

비어 있는 공간인 보이드 공간이다.

 

시대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건축양식들과 건축물들의 이름을 한 때는 외우기도 했는데건축은 실은 그 빈 공간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발상이 재미있다건물은 건축 목적과 사용 용도에 따라 내부 공간이 다른 분위기를 갖도록 설계된다는 것을 유럽의 대성당들을 방문하면서 느끼는 수준이었는데심리적으로도 어떤 영향을 미치기는 하는구나,라고만 생각했지 대화를 해볼 생각은 못 했다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몇 해 전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혹은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는 사람들혹은 아이들을 모두를 위한 건축 디자인인 유니버셜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자료들을 잠시 공부했다그러다보니 잘 알던 건물도 어떤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 만든 것인지 누구를 배제하는지가 절절하게 느껴져서 다르게 보였다그래서 적용된 디자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회의 법과 정책과 의식의 내용과 수준을 알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물론 현대 건물만이 아니라 통시적인 관점에서 역사 속에 건재 하는 건물과 건축을 이해하는 폭은 확연히 더 넓을 것이라 생각한다.

 

건축물은

그 시대의 지혜와 집단의 의지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정체로,

그 시대와 그 사회를 대변한다

 

우리나라의 궁궐을 방문하면서 이전에 해 주신 이야기에서 배운 바가 있어서 건축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 경치를 보게 하는 공간으로서 건물을 이해하고 그렇게 완성된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었다그런데 산사를 방문할 때 가끔은 너무나 알록달록하게 새로 칠한 느낌이 강한 단청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껴서인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단지 낡아 보이는 건물을 시주를 받아 새로 칠하고자 한 의도가 아니라 단청 자체가 자연이라는 풍경을 담은 액자의 프레임이다채도가 생경한 녹색과 자주빛 또한 풍경의 연속을 위한 장치였다니그러면서도 건축과 자연이 서로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하는 배치였다니 놀랍다설명해주시는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명도가 높은 색상의 단청이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동시에 일부로 여겨지게 하는 중의적 기능에 어리둥절하고 감탄이 나온다. 또한 인간이 만든 공간 내부에 있지만 거기에 갇히지 않고 바깥을 보도록 하는그 사람의 1인칭 시점을 상상하고 판단한 디자인이라니제대로 배울 기회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당대의 인간과과 세계관건축철학을 더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집트 문자 → 시나이 문자 → 페니키아 문자 → 그리스 식 알파벳 → 라틴 알파벳순으로

변천되어 내려왔다알파벳은 26개의 문자로 구성되어 있으며각각의 알파벳은 변화되지 않는다.

 

한자의 또 다른 특징은 알파벳의 경우 모든 글자가 한 방향으로 나열 되는 반면한자는 글자가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도 덧붙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이다위의 예에 나오듯이 자는 자 위 에 붙기도 하고 때로는 아래에 붙기도 한다그 외의 다른 한자들 역시 왼쪽오른쪽아래 복합적으로 붙어서 새로운 의미의 글자를 만들어 낸다.

 

다시 말해서 한자는 자유로운 성장 패턴을 띠게 되는데이와 같은 성격은 동양의 건축 평면에서도 나타난다.

 

한글도 알파벳도 한 번도 문자 자체의 디자인과 형성 원리를 건축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지 못했기에관련 내용 또한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하다한자가 자연의 모습을 본 떠 만든 그림과도 같은 글자들이 있으니거기에 의미와 철학과 세계관이 합쳐져서 그런 디자인과 활용이 가능한 것이었나 보다도산서원도 여러 번 방문했는데걸어가며 보이는 시선과 공간만 볼 줄 알았지이렇게 고공 관찰하듯 디자인 전체를 살펴볼 생각은 전혀 못했다.

 

그에 대비되는 서양 건축물의 좌우대칭과 일방향성을 지니는 디자인이 일직선으로 달리는 것처럼 역동적이면서 단정하고 깔끔하다는 생각을 했는데이 글을 읽고 나니 건축 주체인 인간의 의도가 주변 환경과 어울림 없이 돋보이게 구별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집트는 같은 스타일의 건축과 미술이

수천 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어 만들어지고 그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황금 분할의 역할이 큰 반면,

동양 건축과 미술에서는

만들어진 구조물보다 빈 공간 혹은 여백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 왔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지라 황금분할이나 수학적 표현들이 아름답고 익숙하다고 느꼈는데이것을 회화의 여백과 건축물의 공간이라는 주제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니 그 차이가 분명하고 완연히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된다.

 

건축물 내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외부를 향한 시선을 상상하여 디자인했듯이동양의 여백과 풍경을 향한 시선의 확장은 확실히 우리의 시선이 머물 수 있는 거리와 공간을 무한히 넓혀주는 역할을 하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흥미로운 내용들을 풀어 놓는 방식들이 마치 신선한 공기가 계속해서 유입되는 공간처럼 시원한 기분이 든다건축(관련 철학)은 재미난 것이었다.

 

픽처레스크 정원 디자인은 서양 문화에 있어서 경직된 기하학에서 탈피하여 상대성에 가치를 두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점이 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외부의 색다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문화권이

새로운 변종을 만들어 내게 되고,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시대를 이끄는 매력적인 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시각과 관점의 변화그리고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 맺음과 인식의 변화철학 이론에서의 의식의 변화이 모든 것이 모두 건축으로서의 공간의 탄생과 성장과 변이로 나아간다는 점그리고 마침내 새로운 문화로 구성된다는 내용을 감탄과 경이로 읽었다.

 

또한 대학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순수이성비판을 애써서 읽었는데지나고 나니 배울 기회가 있었던 점도 이렇게 다시 전혀 새로운 분야와 융합되는 내용으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모두 기쁘다순수이성비판이 세상과 자아를 하나로 보는 일원론적 시각으로의 관점 전환을 보여준다는 점을 기회가 되면 동기들과 교수님과 함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건축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전반을 도저하게 흐르며 살피는 귀중한 출판물이 <공간이 만든 공간>이다.

 

안팎의 경계가 모호한 동양에서는

철학자의 생각도 구분보다는 융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북유럽과 북부독일 지방을 방문했을 때 지붕의 각도가 상당히 큰 것을 보고 건축의 의도를 물어 보았더니 강설량이 많아서 눈 무게로 집이 무너지지 않게 각도를 그렇게 잡는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그저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는데단순히 강설량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다른 건축 디자인들도 강수량일조량바람기후변화 등에 대해 인간이 생각하고 적응하고 대응하는 방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기후농사법공간의 성격 그리고 이를 통해서 만들어진 생각이 네 가지가 필요로 따라 방향성을 달리하며 오랜 세월 영향을 주고받아 아름답고 고유한 문화의 특징으로 구현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다덕분에 앞으로는 사진이든 실사이든 단일 건축물만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로 이어지는 시각과 사고로 더 깊이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이종교배라고 표현하신 다른 분야들 간의 합종의 한계가 정말 없구나,라고 느껴질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완전히 문외한인 분야의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어서 무척 놀랍고 흥미로웠다. 3D 프린터로 건축 자재들 정도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30년 가까운 과거에 이미 디자인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다.

 

다만 상상과 생각을 디자인으로 고안하는 데까지는 나아갔지만 시공 기술의 속도와 맞지 않아 현실화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예전에 바르셀로나의 가우디 건축을 보고 직선이 없는 공간이 주는 생경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이 낯설지만 좋다고 느꼈는데언젠가 앞으로는 곡선과 직선의 한계 없이도 디자인과 시공 기술이 발맞추어 탄생하는 공간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단 기대가 생긴다주체자의 생각과 건축과 다른 분야의 기술들도 끊임없이 만나고 상호 변화하여 그 시대와 사회를 표현하는 문화로 변모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상상을 높여주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공간이 만든 공간>을 읽기 전에는 인칭에 따른 관점이란 단순히 건물에 들어가서 사용하는 사용자들이 용도에 맞는 방식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활용하는 내부 공간을 보는 시선만을 생각했다언제나 한정된 공간 속에 미치는 거리만이 유의미할 것이라 생각하고 내부 공간의 높이와 넓이 색감과 질감이 사용 시간에 따라 사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런 생각을 가끔 했다덕분에 이제는 1인칭 관찰자의 시선이 건물 밖으로 확장되는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주변 환경과 풍경에 어떠한 영향을 받게 되는지 혹은 주게 되는지 둘 사이의 어울림이란 어떻게 구분되면서도 연장되는지 그런 부분들도 조금 보일 것 같다.

 

애초에 다르다고 해서 이종교배나 혼용이 불가능한 분야들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그야말로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건축이 될 수 있고 그러한 건축이 새로운 문화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니 이전과는 또 다른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있게 읽느라 즐거웠지만 정리하다보니 쉽지 않은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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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1 (특별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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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무조건 일주일 휴식!이라고 결심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신간들을 대여하여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처음으로 읽었다파브르의 곤충기 책이 분리되도록 재밌게 읽고 자랐으니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직접 관찰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아프리카로 가서 개미를 연구한 후 120번에 가까운 개작을 해서 1991년 탈고한 작품이라는 책 소개에 얼마나 설렜던지그 시간 이후로 운 좋게도 한국 독자들의 애정을 듬뿍 얻은 베르나르는 섭섭하지 않을 간격으로 계속 자기복제 없는 흥미진진한 책을 출간했고나는 매번 반갑고 기쁘게 열심히 읽었다.

 

그리도 2020년 신작 <기억>이 번역되었다.

 

초판 한정 [렌티큘러표지를 몹시 갖고 싶어 마치 굿즈가 탐나 책을 구매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더 궁금한 것은 역시 내용이라고 위로한다. - 늦을세라 구한 기억 1,2편이 드디어 도착했다책을 열어 보기 전 표지를 들고 이리저리 각도를 바꿔본다보호필름도 떨어질세라 꼭꼭 눌러둔다하드커버도 오랜만이다새까만 표지에 번뜩이며 사라졌단 나타났다 변형 이미지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는 표지를 보고 있자니마치 표지의 피험자 뇌 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기억을 헤집어 보는 섬뜩하고 서늘한 기분이 든다나비가 날개를 팔락이고 별이 반짝인다마치 최면단계에 들어가는 것만 같다.

 

당신이라고 믿는 게 당신의 전부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 기억할 수 있나요?

 

누군가의 기억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기억을 보게 될 것이고 타인의 기억들에 장난과 조작을 가하는 이들을 보게 될 것이고 화가 나거나 어리둥절해지거나 인간이란 기억에 다름 아닌가하는 답 없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기억이 사라진 누군가는 이전의 그와 동일인물인가 아닌가 하는 서글픈 생각도 들 것이고 기억을 잃어갈 지도 모르는 노년의 삶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할 것이다궁금한 만큼 아까워서 막 빨리 읽어 버리면 어쩌나 싶다.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외부의 힘에 휘둘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우리 뇌를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주물러 변형시키고 그 안에 거짓말을 주입하면 결국 그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 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으니까.

 

베르나르의 세계관과 문학관과 작품들이 여전히 흥미로운 이유들 중 하나는 언제나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개인의 기억 오류야 사안에 따라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일 경우도 많다내 나이 대 친구들은 벌써 가끔 함께 한 경험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하거나 해서 기어코 증거가 될 그 시점의 사진들을 가장 성격 급한 누군가가 꺼내들게 만드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진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얘기해 줄 수는 없단다거짓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눈에는 진실이 의심스럽게 보이기 마련이거든모든 것은 기억이다집중력을 잃으면 안 돼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자이건 생존의 문제야기억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현재에도앞으로도.

 

문제는 '기록'이 될 집단적 '기억'에 관한 것들이다잊지 않겠습니다기억하겠습니다는 의례적 발언이여서는 안 된다잊어버리라고기억하지 말라고 간절히 원하고 가능한 교묘히 조작하고 흙칠똥칠을 해서 얻어 낸 망각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집단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잊지 않으면, 끈질기에 기억하면 결국엔 진실을 밝혀 낼 수 있다기억하기만 하면그런 문제들이 파일더미를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에 사는 지라 베르나르가 역사적 기록에까지 기억을 확장시키는 내용이 반갑고 고마웠다.

 

용서가 망각으로 이어져선 안 돼요바로 이 지점이 역사에 요구되는 역할입니다죄를 묻는 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의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키는 게 역사가 해야 할 역할이라는 뜻이예요.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순간 지성의 영역을 벗어나 감각의 영역으로 들어가요과거는 후회의 원천이고 미래는 두려움의 원천이에요동물처럼 오로지 지금의 순간만을 사는 인간을 만드는 게 내 꿈이죠.

 

끊임없이 생산되는 가짜뉴스들이 지겨운 수준을 넘어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가짜 기억을 주입하고 있다개개인이 매번 팩트 확인을 하는 선택은 거의 불가능한 대응방식이다재생산 속도는 파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며 눈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다그에 휘둘리는 않는 나 자신의 유일한 방법은 의심이 가는 정보를 바로 받아들이거나 전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일이다가장 괴로운 점은 주변 지인들 중에 그런 정보의 폭탄 공격을 한동안 받고 확증편향이 생기는 경우이다그런 경우 이후의 판단에서 나타나는 오류는 의도한 것도 아니고 거짓을 재생산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은 진실이라고 의심하지 않는 정보를 유통하게 된다이와 관련해서 베르나르가 작품 속에서 소개한 거짓기억증후군(False memory syndrome)의 내용을 심각한 기분으로 읽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 진실일 뿐 다른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죠.

멍청이들만 생각을 바꾸지 않을 뿐이야세상은 진화하고나 역시 진화해모르는 사람에 대한 성급한 판단은 우위를 점하고 싶은 조바심에서 나오는 거야.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시사점을 준단다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아니라 역사가들이 무엇을 기술했는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이지중략그런 과정에서 약자들은 제도에서 지워지고 강자들만이 살아남았어하지만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아자연은 더할 뿐제거하지 않으니까인간만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을 내놓을 뿐이야.

 

연구하고 탐구하고 현장학습도 마다않는 작가의 작품답게 베르나르는 이 책에서 수없이 많은 왜곡된 역사들에 대해 빼곡하게 느껴질 정도로 언급하고 있다물론 자료 수집 또한 충분한 듯 보인다충분히 동조할 팬의 심정으로 보아도 정말?!이라는 의문이 드는 사례들도 있다인류의 역사에서 왜곡한 역사적 사실들이 아무리 베르나르의 작품이라지만 이 책 한권보다는 넘쳐 나리라는 우울한 자각이 든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에게 영감을 준 것은 그의 얼굴에 떨어진 사과가 아니라 고양이 한 마리였다사과 이야기는 낙하 운동의 원리를 기억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볼테르가 지어낸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기 드로브(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영화제작자)가 말한 <스펙터클의 사회>에 살고 있어역사는 식료품 같은 소비재가 됐어맛을 내기 위해 달거나 매운 소스를 뿌려야 하는 패스트푸드와 똑같이 돼 버렸다고.

 

역사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기억의 조각들을 찾아서 베르나르는 [최면]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이 책의 목차가 히프노스와 아틀란티스 2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히프노스란 그리스 신화의 잠의 여신이다이에서 파생한 영어 단어가 Hypnosis, 최면이다이때 전생은 하나가 아니며 백 개가 넘는 기억의 방에 차곡차곡 분류되고 보관된 각각의 전생들을 찾아가며 기원전으로, 1만 2천 년 전 아틀란티스로 소환된다. 전공 탓에 플라톤이 바로 떠오르는 점이 잠시 괴롭다. 



다양한 전생을 접하는 르네라는 인물은 역사 교사이며 모든 역사에 흥미를 지닌 탓에 어느 시대에나 놀라울 정도로 잘 적응한다이런 인물이 이끄는 내용 전개가 부드럽고 가독성을 높인다그 와중에 현생에서도 연달아 발생하는 사건들로 여러 장소를 전전하니 지루할 틈이라곤 없어 아껴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몰입해서 술술 읽히는 점이 유일한 단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대가를 치르는 수밖에 없지.

모든 역사에는 세 가지 관점이 있다나의 관점타인의 관점그리고 진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의 기원은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간다기록 말살형즉 망각의 형벌은 대역 죄인에 대한 기억을 사후에 모조리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죄인의 사후에까지 계속 적용되는 이 벌은 한 인간에게 내려질 수 있는 최악의 형벌로 여겨진다.

 

현생에서 고착된 기억들기억에 작용하는 작동 원리와 허점들을 지적하며 베르나르가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과거와 집단의 역사에 대한 부조리들이다그 과정에는 소위 소수민족들멸절된 인종들로 대표되는 인물들의 소망 아르메니아폴란드쿠르드족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캄보디아인 등 이 발화되며이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바를 대신 부탁하고 소망하는 바를 대변한다.

 

진실을 회복해 줘요과거의 일들이 진실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반박 불가능한 방법을 찾아내야 해요.

 

당신한테는 우리 모두의 역사적 진실을 회복시킬 의무가 있어요우리 모두는 당신이 가진 지식을 채워 주면서 당신을 도울 거예요.

 

자네가 우리한테 와서 물으면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다 얘기해 줄 걸세누구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라공식 프로판간다가 아니라우리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말이야인류는 기억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되네.

 

실제로 현재에 전해지는 주류 역사는 구전을 제외한 문자를 가졌던 승리한 문명들의 흔적이라는 사실은 꽤 예전에 배울 기회가 있었다(Language older than words, Derrick Jensen번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원작이 많이 읽히길 간절히 바라는 명저이다.) 당연히 승자 버전의 역사이고 그 역사의 장면들 또한 역사가들에 의해 다시 한 번 편집되기 마련이다그 중 가장 오래 속은 이데올로기며 현재도 그 명분이 유지되는 역겨운 것이 전쟁의 명분이다전쟁의 실체는 영토와 자원과 노동력 확보를 위해 타인들만 사지로 내모는 대규모 학살일 뿐이다그런데 전시 중에도 이후에도 승리한 자들과 그들에게 고용된 역사가들은 그런 사실을 철저히 감추고 진실을 뒤바꾸는 노력을 이어왔다희생자를 가해자로가해자는 희생자로기억은 정치의 사활을 좌우하기 때문이다정치인들이 가장 공들이는 것은 유권자들의 기억을 쥐어잡는 것이다.

 

앞으로 교양 없고 무식한 다음 세대가 도래할 일만 남았어교과서 내용을 앵무새처럼 읊어댈 줄만 알고뉴스와 부모의 말을 여과 없이 자기 생각으로 삼고광고와 인터넷에 휘둘리는 세대 말이야그들은 자기 생각도 없고그걸 만들고 싶다는 욕심도 없어이미 만들어진 생각에 그저 동조할 뿐이지패스트푸드를 먹는 격이야패스트푸드식 사고는 미리 씹어져 나온 음식처럼 맛은 없어도 삼키기는 아주 쉽잖아.

 

대부분이 우울한 기분에 둘러 싸여 살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늘 집단지성의 힘을 믿는다발현되기까지는 파악할 수 없는 힘. 그래서 나는 과거의 어느 시절을 그리워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하나의 법령이라도 더 힘겹게 만들어진 현 시대가 분명 자유와 평화가 증가한 시절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이 구절보다는 꼰대가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프랑스 패스트푸드는 저항도 강하고 맛도 없어 섭취량이 적겠구나 싶어괜시리 꽤 먹을 만한 한국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에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다원체 게으른대다 코로나를 핑계로 동선을 줄이다 보니 한동안 섭취한 식품들이 특정 브랜드몰들로 대부분 한정되었다문득 존재 자체가 브랜드화되는 기분이 들었다You are what you eat.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가 다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그렇게 기억되도록 각인된 것이라면 현실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최면을 통해 심층 기억을 뒤지는 일이 소설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가정한다면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역사 교사인 제 눈에 지금 세계는 기억 상실을 앓고 있어요과거의 실수들이 초래한 결과를 망각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거죠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전보다 빠르죠망각의 속도 역시 예외가 아니에요.

 

매순간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와 양심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믿지만 실은중략우리 위에 있는 작가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행동을 결정하고 있다는 말이죠.

 

필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읽었다천재적인 10대 작가가 쓴 것만 같은 작품을 쓴 61년 생 작가, SF도 어드벤처물도 아니지만 그 모든 장르이기도 하고다른 작가가 선택한 소재라면 별 관심이 안 갔을 아이템들도 거부감 없이 따라 가게 된다


현실과 환상을 버무려 종교와 역사와 정치를 원하는 대로 넘나들며 시공간을 자유롭게 펼쳐 놓은 화려한 구성독자로서 그가 제공하는 것들을 놀이기구 경험하듯 즐기기만 해도 좋다아무리 장편이라지만 역사와종교사회인문지리 백과사전을 맛보게 될 줄이야 즐겁게 황당하다


령 탓에 덕을 본 것인지 손해를 본 것인지가장 나중까지 맛을 잃지 않고 머무는 것은 여전히 사회와 정치에 대한 신랄한 지적들과 풍자이며더 나아가 그 시절을 살아가는 인간과 삶에 대한 성찰이다해답도 지혜도 모자란 존재라 이번에도 어깨가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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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호 인플루언서 인문 잡지 한편 2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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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잡지 한편에 대한 소식과 글들에 대한 호평을 듣고 읽기는 했지만 통합인문학에 대한 지식도 독해 능력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인문학 잡지 한 권 읽기가 무척 오래 걸립니다 한 권을 다 읽어볼까구독할까하는 생각은 접어 두었다그러다 반갑고 감사하게 민음사에서 혹 읽어볼 생각이 있지 않냐,고 문의해 주셔서 감사히 기회를 받아 읽게 되었다.

 

통합 인문학이라는 기획 의도에 걸맞게 다양한 분야의 저자들 인플루언서들 -이 참여하였다잡지 팀장영화평론가연구원전문의료인학자사회활동가들과문하여 낯선 분도 있고 성함과 활동이 익숙한 분들도 있다인간과 인간 세상을 다루는 각 분야 인문학자들은 어쩌면 이렇게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소통을 하는 방식이 가장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이 글들도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완결되지만읽다 보면 영향을 미치는 요인사회에 끼친 그 영향들의 분석제공자들의 의도활용되는 사회구조 분석 등이 큰 화면처럼 보인다.

 

개인에 따라 반응이 다 다르기 마련이지만나는 내가 부탁하지 않은 조언도 불편하다고 느끼는 편이다잔소리는 물론이고간혹 친절함에서 비롯된 설명조차 늘 반갑지는 않다꼭 듣고 싶어 정중히 부탁한 경우에 상대방이 적절한 조언과 설명을 제공해 준다면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한국 사회는 목소리가 크고 일종의 사명감이 넘치는 기운 찬 분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남의 시간과 공간에 끼어들어 심지어 지식체계와 정신구조를 바꾸려는 행동을 하는 사건들이 꽤 발생한다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 나면 조심성이 증가해서 잘 피하거나 거절하는 방법도 늘기 마련인데어쨌든 의도와 계기가 무엇이든 이보다 더 강력하게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 모음이라 어떻게 읽을까 긴장이 되기도 했다.

 

인플루언서라는 말이 언제부터 통용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인류사에서 늘 다른 이들에게혹은 다수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은 존재했으며이는 대부분 설득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그런 점에서 나는 대개 처음에는 저항을 강하게 느끼는 편이지만일관적으로 들을 만한 의견을 지속해서 전하는 이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지는 않는다단 거북할 정도로 감정에 호소하거나 사생활을 구매해달라고 하는 노골적인 구애는 사절이다또한 명백히 선동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 자체에는 위협을 느끼고 즉각적인 거부감이 든다히틀러 이후로 독일사회의 지식인들은 대중연설에 대한 깊고 뚜렷한 거부감이 있으며그런 행사는 열리지도 않는다.

 

예전에 꼭 강연을 듣고 싶어 학회에서 열심히 부탁드린 독일 철학자 한 분도 수천명이 입장 가능한 대강당 홀에서 하는 강연에 대한 놀라움과 거부감으로 끝내 거절했으며이유들 중 하나는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가서 하는 강연의 가치가 대기오염에 가담하는 행위보다 가치가 없다,란 이유였다가히 실천철학을 실천하는 이론과 일상의 괴리가 크지 않은 학자였다고 오래 섭섭하기도 존경스럽기도 하였다.

 

인플루언서의 등장과 세력화는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문맹률이 아주 높던 시절 유럽인들은 글도 말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보았다.’ 아주 가끔 현대인들 중에도 미사를 본다란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어 그럴 때마다 아직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건가 쓸데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어쨌든 활자와 교육의 보급이 보편화되기 전 인플루언서들은 분명 극소수의 엘리트집단이었다그 세월은 아주 길어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아날로그적 방식의 출판과 미디어에서 인플루언서들은 여전히 소수였으며생산자와 소비자는 아주 확실하게 나뉘어 있었다.


그에 비해 SNS는 누구나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고 바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긍정/부정적 측면들은 어느 것에나 있지만나로서는 적어도 사실 확인이 가능하다는 점에서잘못된 정보가 끈질기게 확인되지 않고 유통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 부분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바란다예전에 전혀 사실 무근인 정보가 유행을 타고 돌아다니는데사실이 아니라고 열심히 알리려다 지쳐 그만둔 씁쓸한 기억이 있다이런 환경에서는 인플루언서의 탄생과 소멸 수명이 예측 불가능하게 다양해지고간혹 안타까운 점은 더욱 영향을 널리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싶은 콘텐츠들도 빛을 못보고 묻히는 일이다피드백이나 댓글공유 등 또한 이미 인플루언서인 독자들이 관심을 두는지의 여부가 또 다른 유행과 영향을 만들어내느냐 아니냐로 연결되는 숨 가쁘고 경쟁이 심한 환경임에는 틀림없다.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적극적으로 도전하고픈 분들주제와 무관하게 이미 인플루언서인 분들혹은 인플루언서들이 제공하는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에 상호소통을 위한 구독 결정에 대한 고민이 있는 분들이 읽게 되면 더 생생하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나올 듯하다.

 

산만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본 것이라 잡지에 누가 되는 건 아닌지 심란하다외모처럼 가독성과 실물감이 좋고 지치지 않을 짧은 분량의 글들이논문처럼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쓰여 있다. 1호는 미처 못 읽었지만앞으로 이어진 흥미롭고 시의적절한 주제의 글들이 어떤 멋진 그림을 그려줄까 기대되는 사랑스러운 잡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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