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트] 사라지지 않는 여름 1~2 - 전2권
에밀리 M. 댄포스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1월
평점 :
10대, 20대까지도 <호밀밭의 파수꾼>의 10대 주인공 캐릭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헤매다 대부분을 잊어버린 독자로서, 또 다른 10대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시작도 전에 망설여졌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춘기가 영원할 것만 같은 10대와 함께 오늘도 무사히 살고 있다. 그렇게 관계 속의 ‘나’를 새삼스레 알아차리고 다시 책을 들여다보니, 예전과는 다른 감정으로 읽히는 내용들이 많다.
선한 내 한 친구는 아이를 낳아 들여다보다 부모 없는 아이들은 어찌 살아갈까 너무 걱정이 되고 마음이 아파 한밤중에 통곡을 하고 얼마 후 후원을 시작했다 한다. 그런 품격에는 못 미치지만, 열두 살에 부모를 잃고 성소수자인 자신을 혼란스러워 하지만 열심히 성장하여 ‘살아남은’ 10대가 애틋하고 가련하여 네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겠다, 는 각오가 퐁퐁 솟는다. 신작 소설인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출간된 지가 10년 가까이 되었고, 2018년에 클로이 모레츠 주연, <캐머런 포스트의 잘못된 교육(원제: The miseducation of Cameron Post)>이라는 타이틀로 영화화되어 수상을 했다고 한다.
작년에 좋은 책 - <선량한 차별주의자>- 을 만나 내가 차별주의적 발언을 꽤나 한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고, 요즘도 종종 머리가 달아오르면 (공개적으로 발언하지는 아니지만) 혐오에 가까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니 기회가 있으면 항상 혐오, 차별, 소외의 문제를 다루는 책을 찬찬히 읽고 차분해지는 시간을 귀중하게 여겨야 한다. 사랑하는 우리 집 10대 소녀도 무조건 반항해본다 - 그래봐야 내 경우와 비교해보면 착하고 귀여운 수준, 아직은! - 시기를 지나, 진지하게 자신과 자신만의 삶에 대한 이러저러한 발표를 할 것이고, 나는 사실 아무런 준비도 노력도 비축하지 않고 있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와서…… 역시나 부모의 죽음을 너무 일찍 맞은 것과 그 충격적이고 불행한 사건에서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장면이 너무 슬프다. 원해서 그러는 분들이 있을까 싶지만, 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지만, 부모의 역할 중에는 있는 힘을 다해 자녀가 충분히 자랄 때까지 살아서 버텨주는 일도 있다고, 그런 의무사항을 나는 스스로에게 지워 두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한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내 머릿속에는 이런 자잘한 원칙이며 성경 구절, 인생 조언이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어디서 온 것인지, 왜 내 머릿속에 각인된 것인지 의문을 품기를 그만두었음에도 짓눌리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 책으로…… 고등학교에 가서 사랑에 빠지고 모든 면에서 커다란 혼란을 겪고, 그리고 ‘치료’를 위해서라며 강압적으로 입소된 시설. 이후의 캐머런이 자신을 알아가고 정립하는 과정이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버금가게 면밀하고 이성적이라 그 노력이 힘겹겠다싶어 안쓰러우면서도 간혹 웃음이 났다. 확신할 수 없는 요소들을 제외하고 또 제외하고, 마지막 의심할 수 없는 진실 하나를 남기는 방법. 그런 숙고의 대상이 외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라 한편으로는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야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이렇게 까진 못하겠다 싶은 과업(?)을 성취해낸다. 실은 절박함의 차이일 것이다.
집에 전화조차 걸 수 없는 이곳에서 나와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낯선 사람에 둘러싸인 채로, 진짜 나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목장 지대에 있다 보면, 마치 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삶이었다. 호박 속에 갇힌 선사시대 벌레의 삶이었다. 죽었지만 확실히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얼어붙어 유예된 상태.
자신을 부정하고 지우려는 세상, 자신의 병명이 ‘동성매력장애라는 죄악’이라고 명명하는 세상, 가까울수록 사랑할수록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부정한다는 서글픈 모순. ‘동성애’라면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주제이고 극소수의 일일 것도 같지만, 실은 누구나 살면서 논리적으로는 유사한 처지에 놓인 경우들이 생각보다 흔히 있을 수 있다. 사소한 취향부터 중요한 진로결정 그리고 등등등 등등등. 도와줄게, 라던가 걱정해서 그래, 라던가 사랑해서 그래, 라는 이유로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세례를 주듯 쏟아 붓는 조언들. 혹은 부정들, 혹은 강압적 방해들.
“저기요, 여기서 우리를 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우리에게 고함을 지르지도 않아요. 그런 게 아니라고요.” 나는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게 그들을 신뢰하느냐고 물으셨죠? 네, 저는 그들이 고속도로에서 승합차를 안전하게 운전할 거라고 믿어요. 또, 매주 우리를 위해 식료품을 살 거라고 믿어요. 하지만 저는 그 사람들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즉 우리를 천국에 보장된 자리에 걸맞은 최선의 인간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로 알고 있다고는 믿지 않아요.”
“이곳의 설립 목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변하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해야 한단 말이에요.”
“알겠다.” 그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나는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그 밖에 다른 문제는 없니?”
“없어요.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다는 말 속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짓눌리지도 않고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이렇게 똘똘하게 살아남는 10대 주인공을 만난 일은 기특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양가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살면 살수록 느끼는 것이 나는 평생을 순전히 운이 좋아 험한 꼴을 덜 보고 사는 특혜를 누린 것이 맞다. 교조주의적, 근본주의적인 이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적도 없고, 그래서 이런저런 사람들이 대충 어울렁더울렁 사는 일이 세상살이라고 속편하게 생각한다.
유럽에서든 한국에서든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들을 여러 공공 영역에서 만나 함께 일을 하기도 하였다. 다른 이들의 ‘성애’에 전혀 관심이 없을뿐더러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 그 문제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소란을 피우는지도 이해를 못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 혹은 자신들의 경우에는 - 온갖 고귀한 치장을 칠하는 ‘사랑’을 ‘그들’의 경우에만 그토록 편협하게 ‘성애’로만 몰아가는지, 그 이중적이고 부당하고 노골적이고 천박하고 얄팍한 인식에 소름이 돋는다.
이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자꾸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에 흠칫 놀랐다. 예상한대로 10대의 캐머런이 훌륭히 해 낸 객관적 거리두기는 나에겐 벅찬 일인가보다. 가끔은 엉망진창인 듯한 세상을 탄탄히 떠받치고 계신 기적과도 같은 많은 분들의 존재를 떠올려보며 정신을 가다듬어본다.
어떤 사람에게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에, 또 다른 사람에게는 타인을 제약없이 이해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우애와 사랑을 선사할만한 감수성을 얻는 일에 도움이 되는 책이기를 바란다. 역자. 송섬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