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거 총을 든 할머니
브누아 필리퐁 지음, 장소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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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긴다. 유괴/납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웠던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내가 가질 줄이야. [루거 총을 든 할머니]는 연쇄살인범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주인공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공감과 애정을 느낀다. 102세가 될 때까지 ‘자력구제’에 의해서 목숨을 지키고 살아남아야 했던 여성의 이야기가 기막히고 슬프고 무서운데 ‘재미있고 통쾌하다’. 폭력적인 내용들이 묘사되는 부분에서는 심장이 막 떨렸지만, 적지 않은 분량인데 어느새 끝이다. 102년을 살아낸 한 인간의 삶이 펼쳐지는데, 지루하기는커녕 전력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호흡이 멈추고 끝에 이르는 극강의 흡인력을 가진 작품이다.


첫인상은 한 세기를 시난고난하며 살아 온 눈물콧물 다 빠지는 분위기일 거라 짐작했는데, 일단 이렇게 웃길 수가 없다! 격변하는 현실 속 파란만장 인생을 이렇게 묘사하는 필력이 압권이다. 나는 곧 이 ‘할머니’에게 반했다. 살아오며 직/간접적으로 겪은 모든 체증을 빵!빵 날려 주는 처음 만나는 주인공 유형의 여성이었다. “Dam, that woman's fine!(Luther)” 이런 분위기가 여태 재밌는 줄 모르고 살았던 프랑스 소설의 유쾌함인가, 뭔가 막 엄청난 손해를 본 것처럼 억울한 기분이 살짝 들었다.

 

배경은 무려 제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한다.

인생은 짧아, 이것아......

세상의 규칙 따위...... 아무 상관없다고......

살아야 해...... 할미 말 들어!"

"아내를 때리고, 고문하고, 파괴하는 남편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내보일 수 있니?

정의와 법은 정략결혼처럼 서로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야."

하지만 뤼시앵은 설득력 있는 반대 논리를 펼치는 대신, 보다 충격적인 논리를 선택했다. 요컨대 베르트의 따귀를 갈겼다. 부족한 지성을 크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선조들의 방식. 남자들은 늘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바꾸겠는가?

"자, 이제 알겠어? 아내에게 응당 자상하게 대하는 대신 구타를 일삼으면, 아내가 당신 무덤을 파면서 신바람이 난다는 걸? 이래도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남편인지 깨닫지 못한다면야."

"그날 이후로 그 더러운 나치 놈이 매일 밤 내 머릿속에서 맴돌거든. (...) 레지스탕스들은 나와 똑같은 일을 하고서 훈장도 받고, 용감하다고 떠받들리지만 말이다."

"난 그걸 전쟁범죄라고 보는데. 아니면 전쟁에 의한 정당한 범죄거나. 내 행동이나, 전장을 피로 물들인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의 행동이나 다를 바 없다고."

1952년엔 여자를 노예화하는 것은 하등 범죄가 아니었다. 그들을 일명 가정주부라고 불렀으니까. ​

"어, 그래. 우리 여자들은 말이야. 선택의 호사를 누리지 못해. 우린 무엇보다 애 낳는 기계라고. 물론 그것도 모든 기능이 정상일 때 얘기지만! 출산과 살림, 우린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못해! 하지만 난 달라. 이젠 시대가 바뀌었고 난 평등을 원해. 그러니 당신도 집세를 부담해." ​

"여자가 권리만 주장했다하면 그 즉시 생리대를 들고 나오니, 이거 원. 저질에, 비루하고, 생산적이지 못하기 짝이 없네."

전쟁 속에 태어나 전쟁을 치르고 살아남은 베르트는 불평등과 불법으로 덕지덕지한 사회를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과격하고 과감하고 충격적으로 파괴해 버린다. 마치 ‘좋은 게 좋은 건 니들이나 좋은 거지’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는 남자의 머리통을 루거 총으로 날려버리는 행위로 대표되는데, 이때 머리통이 날아간 남자들이란, 1. 강간범인 나치군인, 2. 가정폭력범이자 위선자인 첫째 남편, 3. 성적으로 모욕을 일삼고 불임을 폭력의 정당화 수단이자 공격의 수단으로 삼던 두 번째 남편, 4. 부부강간과 미성년자 강간범 세 번째 남편, 5. 제 쥐꼬리만한 재능을 이유로 여성을 마구 착취해도 된다고 비하를 일삼던 네 번째 남편, 6. 스스로를 구원자라 여기던 망상증 다섯 번째는 스스로 죽음, 7. 베르트의 유일한 사랑인 루터를 인종차별의 희생자로 살해한 인간쓰레기들이다.

 

 

나는 법치주의에 반하는 삶을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가능한 그럴 것이지만, 소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처벌을 받지도 않는 ‘백 번 죽어 마땅하고도 남을 인간들’이 한 개인의 인생에도 이렇게 끝없이 등장하는 일이 과연 픽션뿐인가 하는 생각에 씁쓸하고 두렵다. 미제의 역사적 범죄들에 대한 연상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일본군성노예로 고통 받은 한국의 할머니들의 삶이 피할 수 없이 교차된다.

그래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덕분에 나는 울기보단 자주 크게 웃으며 책을 끝까지 읽었고, 마지막 베르트의 선택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긁히는 듯 아팠다. 그 모든 위태로운 시절을 견뎠으나 끝내 유일한 사랑을 멍청한 인간들의 생각 없는 폭력으로 잃고 만 베르트의 힘겨운 인생이 절망적이게 숨 막혀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에 베르트 못지않은 한 세기를 살아낸 수많은 할머니들이 한 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지도 못하고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현실이 몸서리쳐지게 죄스러워서 그러했다. 그분들도 이처럼 단 한번이라도 속 시원한 순간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페미니즘 스릴러’라는 소개는 작품에 훨씬 못 미치는 명칭이다. 설마 한 인간의 전 생애를 설명하는데 페미니즘과 스릴러로 충분하겠는가. 치장도 포장도 불필요한 날 것 그대로의 화법과 사건 전개, 마치 내 삶에 부끄러움이란 한줌도 없다는 할머니 심정을 녹취한 듯한 문장들이다. 프랑스어 원서는 모르겠으나 역자의 필력 또한 대단하다는 존경심이 든다. 이 책이 승승장구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길 바라는 마음 한편에는, 한국 사회의 온갖 위선들이 교양과 전문지식의 탈을 쓰고 또 힘을 받아 떠들어 댈 일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나는 확신한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들이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통쾌함을 경험할 것이라고.


독자에 따라 이 소설의 결말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열린 결말인지 해석이 다를 것이란 생각이 든다. 통상 희극보단 비극이 깊이 공감할 힘이 있고, 독자를 변화시킬 여지가 있다고 믿지만 역시 맘 깊숙하게 슬픔이 차오르고 한동안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102세를 생존한 베르트를 알게 되고 그를 보내고 이제 나와 우리의 현실 속에서 ‘제대로 생존하기 위해’ 갈 길은 까마득하지만, 법을 고치고 제도를 정비한 후에도 차별적 요소들이 더 이상 사회에 만연하지 않도록 끝장을 내려면,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작을 업데이트하는 일은 매번 살짝 힘겹다.


표지의 색감이 불행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듯 생명력이 가득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보았다.

 

 

"내 사랑...... 허브티와 위스키를 준비해둬, 곧 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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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이향규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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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습니다.
For your 'tomorrow', we gave our 'today' 45

 

나는 이 문장이 감동적이지 않다. 누군가의 미래를 위해 다른 누군가의 오늘이 끝나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개별 전쟁보다 이 이데올로기가 더 폭력적으로 들린다. 누군가의 삶을 희생해야 성취되는 ‘대의’가 추구되어선 안 된다. ‘그 누군가’는 공평무사하게 제비뽑기로 선택되지 않는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분단’ 국가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오고 있다. ‘분단’의 다른 말은 ‘전쟁 중’이라는 뜻이며, 이는 우리의 일상과 교육과 조직과 사회 전반에 전시 체제와 민간/군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포스터 그리기 대회는 몇 년간 ‘반공포스터’였다. 1학년 어린 나는 왜 북한에는 사람들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탐욕스런 돼지와 늑대들이 사는 걸까, 너무 이상하고 궁금했으며, 이후 내가 그린 붉은 눈의 늑대들로 묘사된 북한 생명체들이 ‘그냥’ 사람들이라서, 남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나만 멍청하게 몰랐던 건가 당황해서 속으로만 크게 놀랐다.

 

지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일까. 적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대한민국법상으로도 아직 끝나지 않은 ‘한국전쟁’에 대해 우리는 ‘공비’와 ‘빨갱이’의 호명을 넘어서는 학습과 논의가 필요하고 아주 가끔이라도 전시 국가의 국민으로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얘기해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다양한 접근 방식들이 있을 것이고, 때로는 미시적이고 내부에서 시작하는 것이 유용할 때도 있지만, 독립된 ‘국사’라는 역사가 존재하지 않듯이, 사고의 확장과 정확한 이해를 위해 거시적이거나 외부의 시각으로부터, 세계사를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당사자 개인의 화술도, 한국전쟁 ‘참전인’으로서의 외부인의 화술도 함께 들려주는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은 새롭고 흥미로운 기록 정보이다. 나는 꽤 여러 해 영국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를 만나거나 한국전쟁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우선, 2000년 초중반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국제적 위상이 높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란 적어도 내 주변의 영국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존재였다. 런던에 ‘타이우(TAIWOO)’ 간판이 있어서 대우기업에 관한 정보를 조금 알거나, 이후 미국의 ‘부시’와 ‘부시의 푸들’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영국 총리가 사이좋게 ‘이라크전’ 참전 결정을 내리면서, 천만 영국인이 런던 시위를 주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부시가 “북한은 악의 축이다”라고 한 발언을 두고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북한이 미국에 무슨 짓을 했나?”하는 어리둥절한 반응 정도를 이끌어냈으니, ‘대’한민국인으로서는 인정하기 쉽지 않을 만큼 낮은 인지도였다고 기억한다.

 

그 와중에 ‘북한’이 이런저런 기사보도 수가 많아서 ‘남한’보다 좀 더 알려졌고, 그래서 많은 영국인들은 ‘한국 KOREA'라면 북한을 먼저 떠올리기도 했다. 그 영향인지 어느 날 길 가던 중에 “그래! 니들이 가진 핵무기로 뭘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라는 고령의 백발 노부부의 근심과 분노에 찬 질문을 받기도 했다. 불지불식간에 받은 생애 최고의 기습 질문이라 너무 당황해서 ’나 핵무기 있어?‘하고 말도 안 되는 의문을 잠시 품었다. 어쨌든, 중국의 식민지인지, 일본 옆의 작은 섬인지, 하여간 비가시적이었던 대한민국은 결국 내가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극동(Far-far East)‘로 불렸다. 영국인들은 그리니치 천문대가 영국에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표준시라고 본다. 그러니 직항 비행으로도 12시간이 걸리는 대한민국은 멀리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인식한다. 물론 친구들과 지인들은 내가 농담 삼아 작은 뼈를 담아 던진 말을 잘 알아 들어주어서, 타자를 주변부로 취급하는 표현이 상당히 ’무례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한류의 열풍으로 달라진 점이 많겠지만 21세기에도 그랬으니, 1950년대의 상황을 어떠했을까.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보낸 나라였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영국이 장병을 보냈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정작 누가 왜 갔는지,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대해서 저는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알고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이 겪은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는, 고향에서는 이 전쟁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장병에 대한 환영은 없었다.(...)어쨌든 그렇게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동전 한닢, 치즈샌드위치 하나, 기차표 한장을 받고.” 브라이언 호프

 

“아무도 내게 한국에 대해 묻지 않았다. 돌아와서 얼마 후 댄스파티에 간 적이 있다. 군복을 입었다. 그것밖에 다른 옷이 없었다. 사람들은 이 리본이 무엇이냐고 했다. 전투를 상징한다고 했다. ‘전투? 무슨 전투?’ ‘나는 코리아에 있었어.’ ‘뭐? 코리아? 그게 어딘데?’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국전쟁은 신문에도 티비에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빌 허스트

 

한국전쟁에 81,084명의 영국군이 투입되었고, 그 중 1,106명이 전사, 수천명이 부상, 1,060명이 포로가 되는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삶이 끝나야했던 이들이 너무 안쓰럽다. 흔히, 대한민국에서는 전쟁을 기준으로 전후세대간의 이념과 생각차이로 인한 갈등과 반목이 지난하고도 치열하게 계속된다고 본다. 거기에 더해, 그런 안타까운 희생에 기생하여 자기 이익을 편취하려는 개인이나 집단이 공고하도고 당당하게 사회 진출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필요하고 괴로운 사적 관계 개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부당하게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로 가능한 많은 정보를 알고 공유하고 판단을 재정립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럴수록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국가가 파병한 전쟁이므로 그렇게 전쟁터에 나갔던 젊은이들이 결국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우리가 토론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가르치지 않으면 결국 역사에서 사라지니까요. 113

 

제가 이날 본 전시는 '적군의 만행'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에 맞서 우리가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가 아니라 이 전쟁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줬는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한국전쟁을 이렇게 볼 때가 오겠죠. 전투가 아니라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날이, 적의 잔혹함이 아니라 전쟁의 잔혹함을 이야기할 날이,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던 전쟁이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를 이야기할 날이, '평범하지 않은 시대를 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날이요. 206

 

“갈등의 해결은 언제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다만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나로부터 시작해보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서로 반목하는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이야기의 다른 부분입니다. 그들은 함께 상처 입었기 때문에 결국 치유도 함께 해야만 합니다.” 225

 

“화해와 평화로 가는 길은 잘못을 ‘용서받고 잊어버리는 (forgiven and forget)’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참회하는 (remembering and repenting)’ 긴 과정입니다. 기억하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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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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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분량의 책을 이토록 오래 도전하며 읽은 경우가 처음인 듯하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폭력들을 노골적으로 소재로 삼거나 미화하는 영화나 소설을 그렇게 느끼는 경우에 전혀 접하지 않고 산 지 여러 해이다. 단지 불쾌해서가 아니라 볼 수가 없어서이다. 만약 최진영 작가의 "위로가 될 지도 모를 장면을 쓸 때도 고통을 묘사할 때만큼 주저했다" 말이 없었다면, 그래서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가해자의 언어와 행동양식을 낱낱이 생생하게 드러내는 한편, 피해생존자의 언어를 날 것으로 중심으로 세우는 작업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나를 견디지 않고 나와 잘 살아보고 싶다"는 한 문장을 위해 작가 또한 끈질기게 버티며 그 고통들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했다는 공감이 없었다면 나는 아예 책을 펼쳐볼 생각을 못했거나, 결국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2008년 7월 14일 월요일

끔찍한

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8


함께 커온 오랜 친구가 어느 날 문득 초등학생 시절 담임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너무 어려서 자신이 당한 일이 뭔지도 모르다가 중학생이 되어 겨우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얼굴이 경련이 날 만큼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았는데,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그땐 그런 성격이었는지 다정한 위로를 할 줄은 모르고 대뜸, "그 인간 지금 어디서 뭐하는지 알아내서 찾아가서 꼭 사과를 받고 파면시키든 구속시키든지 하자!"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추적(?!)' 행동에 들어갔다. 당시 그 친구가 내게 기대한 것이 그저 털어 놓는 것이었는지, 위로였는지, 격려였는지 살펴 볼 생각은 못하고, 머리가 활활 타오르는 기분에 지금 생각하면 친구의 의견과 판단을 물어 보지도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는 일만이 옳은 일이라 믿었다. 그 결과는 허무하게도 '그 인간'이 이미 암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사과도 처벌도 복수도 못하게 된 상황이 진심으로 분하고 억울했다. 그 뒤로도 지금까지 우리는 애틋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그래도 친구인 사이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변호사가 되어 가능한 사회에 환원을 많이 하는 방식으로 멋지게 살고 있지만, 나는 그가 20대부터 현재까지 우울증 약을 때때로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이해하는 성폭력이란 정말 기막히지만 가해자는 '정말!' 기억이 안 날수도 있는 과거의 '행위'로 완료될 수 있으나(상습범일수록 행위를 범죄로 인식하는 도덕적 기제가 약회되므로 더 기억을 못하는 경향이 있다.), '피해생존자'는 아무리 원해도 결코 잊을 수 있는 되풀이되고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어 삶 전반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악몽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성폭력 범죄'는 '살인'에 준하는 중범죄로 법감정에 인지되고 처벌되어야 마땅하다. 집행유예가 대부분인 한국의 형법 현실에 치를 떨다, 남의 나라 이야기지만, 간혹 상습 성추행으로도 180년을 선고 받는 경우를 보면 속이 좀 풀린다.


제야는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여름에는,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안정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다 남자와 단둘이 있거나 무리에 있으면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입술을 물어뜯는 사람이 되었다. 164


지난 9월 25일자 기사를 보니, 느리지만 현실이 언제나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할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패대기치고 싶었다. 10세인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35세 남성에게 법원은 고작 3년형을 선고했다. 10살 아이가 성관계에 합의했다고 하더니, 10살 인줄 몰랐다고 지껄이고, 피해자 진술이 '정황상 인정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의 무죄를 받을 뻔하다, 그나마 피해자가 '미성년자의제강간'의 '미성년자'에 해당하는 만 13세 이하라는 이유로 3년씩이나 형을 준 것이다. '성폭행'에 관한 한 '만 13세'까지만 미성년자로 명시되는 참 이상한 대한민국이다. (출처: <연합뉴스>, '10살 초등생 성폭행' 전 보습학원장 징역 3년 확정, 2019-09-25)


나는 이 책이 소설임을 알고 있지만 끝까지 소설로 읽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현실과 한 치도 떨어져 있지 않은 최상의 해상도로 찍어낸 리얼한 실재가 모든 문장에 담겨 있다. 십 여 년 전 성폭력상담소 소장을 하던 친구 덕에 배운 바에 의하면,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반복되는 성폭력을 반성 없는 혹은 원하는 의도를 숨긴 사회와 언론에서 열심히 재생산한 덕분에 우리 모두에게 내재화된 대한민국의 강간문화는 다 헛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에는 '양쪽 입장을 다 들어봐야지.'라는 공평객관의 태도를 견지하려는 심리가 있었다면, 이후에는 확실한 통계를 모르겠지만(찾아보고 싶지도 않다!) (신고된 건수만으로도) 한 때 너끈히 세계1위를 달리던 성폭력 1위 국가 대한민국의 실체를 목격하고 끊임없이 내 눈을 의심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한 예로 두 돌 된 여자아이를 성폭행한 사건을 보자. 그 사건에서 정말 양쪽 입장을 들어보고, 혹시 두 돌 된 아이가 부주의하게 야한 옷을 입고, 해지기 전에 귀가하지 않고 어두운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녔거나, 성폭행범을 만났을 때 좀 더 열심히 저항하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데도 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여지를 준 건 아닌지, 첫 돌 때부터 음탕한 끼가 있었는지 그렇게 물을 수 있는가(실제 성폭력범죄 조사과정에서 빈번하게 활용되는 질문 내용들이다). 극단적 예가 아니다. 유아성폭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더 자주 발생하고, 피해생존자의 연령은 심지어 80대 후반에 이른다. 또한 이는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 영유아청소년이라고 성폭력에서 완전히 안전한 것 또한 전혀 아니다.


때로 티 없이 웃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했다. 유모차를 찬 아기들을 보면 두려웠다. 중략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마주치면 따라가고 싶었다. 집에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집 또한 확실하게 안전한 장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그저 다 포기하고 싶었다. 168


좋아한다고,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당숙은 말했지만 제야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당숙이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던 그 순간 눈앞에 제야가 있었다. 좋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했다. 당숙은 제야를 강간한 게 아니라 여자를 강간한 것이다. 여자 중에서도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자. 자기를 의심하지 않을 여자.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여자.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자. 일을 벌인 후에도 가까이서 통제할 수 있는 여자. 남들한테 얘기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여자. 그래서 또다시 강간할 수 있는 여자...... 미성년자인 친척 여자. 제야는 그 조건을 충족시켰다. 제니도 마찬가지였다. 날이 밝아올수록 제야는 또렷해졌다. 있었던 일과 들었던 말과 그 의미까지. 곱씹을수록, 제자리를 찾아갔다. 제야는 자기를 지키고 싶었다. 제니를 지키고 싶었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108-109


마치 같은 드라마를 무한반복시청하는 것처럼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해진 대사들과 장면들이 유독 성폭력 사건에서는 끝도 없이 반복된다. 가해자의 부모친지주변인들은 가해자가 '평소에' 얼마나 착하고 성실했던가 열변을 토하고, 알든 모르든 '피해생존자', 성폭행을 당한 것만이 아니라 종종 목숨까지 잃은 사람을 두고 '평소에' 얼마나 행실이 나쁘고 당한 일을 '당할만한' 인간이었는지를 성토한다. 가능하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비열하고 구역질나고 야만스러운 언변들이다. 그리고 절망스럽게도 이런 논리가 여전히 동의를 얻는다.


이상하게 꼭 사과해야 할 사람은 사과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사과를 하고 그런다. 32


자고 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나보다 힘이 세고 주변에 흉기 될 만한 것이 널려 있다 치자. 일어나서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 도둑이 나를 죽일 것 같아서, 도둑이 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치자. 그래서 내가 아주 귀중한 것을 도둑맞았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49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건 내 감정이 아니다. 내겐 아무 잘못이 없다. 아무 잘못이 없다. 51


제야는 눈물을 닦았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제야는 강해지고 싶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세요. 제야가 말했다. 잘못은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했어요. 117


어째서 내가 의심받는가. 어째서 내가 증거를 대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설명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사라져야 하나. 133


남자가 큰일을 하려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 말들 속에서 그는 강해졌고 더 강해질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 사람이 될 것이다. 202


나는 내 인생 최대 불행이 강간당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내 인생 최대 불행은 이런 세상에, 이런 사람들 틈에 태어난 거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른이라고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이니까 들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싹수가 노란 거고 애당초 글러먹은 애가 되는 거고. 당숙이 악마여서 나를 강간한 게 아니다. 여기서는 그게 강간이 아니니까 강간한 거다. 당숙이 당당한건, 가해자면서 희생자인 척 구는 건, 이 세계에서 아주 당연한 문법인 거다. 여기 사람들은 ‘강간’이나 ‘성폭행’의 의미를 모른다. ‘남자가 꼴리면 그럴 수도 있는 짓’만 안다. 중략. 지구 어딘가에는 아직도 여성 할례가 있다고 들었다. 더럽고 불경하다며 생리하는 여자를 격리한다고 들었다. 여자를 재산 취급한다고 들었다. 결혼 지참금이 적다고 여자를 학대한다고 들었다. 여기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 해주면 뭐라고 할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기겁할까? 우리는 뭐 다르나? 대한민국은 달라? 내 아들이 한 달에 거둬들이는 돈이 얼만데 젊어서 여자애 하나 건드린 게 무슨 대수냐고 말하는 이 땅은……. 야만인들. 파렴치한들. 206


‘젊은’ ‘여자’ ‘혼자’ 중에 사람들을 가장 세게 건드리는 단어는 뭘까. 219


나는 어린 여자애여서 무시당했다가 젊은 여자여서 의심받고 늙은 여자여서 무시당하게 될 거야. 226


강간문화 :: 성폭력을 미화 혹은 합리화하여 폭력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문화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2019 함께 쓰는 성폭력 사전>


https://www.youtube.com/watch?v=0rufPMisw4o



나는 좀더 멀리까지 가고 싶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나를 견디지 않고, 나와 잘 살아보고 싶다.


2014년 11월 7일. 언니가. 227


p.s.이런 말 정말 쓰기 싫지만 그래도 쓴다. ?너도 잘 알겠지만 확인하는 마음으로 쓴다. 만약에 네가 성범죄를 당한다면 증거를 꼭 남겨야 해. ?녹음이든 사진이든 남겨야 해. ?몸을 씻지 말고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해. 당시 입었던 옷과 속옷도 다 챙겨야 해. 안전한 장소는 없어. 중략. 사람이 많은 곳도 사람이 없는 곳도 위험해. 도시도 시골도 버스도 택시도 공개된 장소도 밀폐된 장소도 위험해.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밤도 새벽도 다 위험해. ‘괜찮겠지’란 생각은 위험해. 상대가 그러기로 마음먹었다면, 성범죄를 피할 방법 따윈 없어. 조심하라는 말이 아니야.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는 말이야. 살아남으라는 말이야. 229


지독하게 살아 숨쉬는

강간문화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모든 제야에게


<이제야 언니에게>, 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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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승님의 책들을 편애하는 지라 차분하게 다른 책들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역시 <과학 콘서트>에서 시작하여 정재승님 다른 책들의 가족 독서/수다 모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짜정보들이 인터넷을 활용해 너무나 쉽게 퍼지는 현실에서 더 많은 분들이 읽어 보심 차분한 생각과 태도로 판단과 논리를 키워 사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응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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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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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의 저자가 초고를 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저자도 나도 40대인 채로 이 책을 처음 읽었다. 처음엔 20대의 발랄명랑쾌할풋풋재미즐거움 등등을 기대했으나, 명불허전 김애란 작가는 어찌된 영문인지, 내가 평생 도달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이미 20대에 다 들여다 보고 있었는가, 하는 느낌이었다. 혼자인 '나,' '우리'라고 불리지만 여전히 '나'인 '나,' 스스로에겐 세상 가장 중요하고 특별하지만 크건 작건 어느 사회에서나 손을 흔들지 않으면 비가시적일 만큼 평범한 '나.' 그런 '나들'의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고, 그렇지만 혹은 그래서 그런 '나들'이 아주 작지만 필요한 그 순간에 조금 다른 선택들을 함으로써 어떻게 (독자이자 시민인 내게는) 대단하고 중요하고 특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상의 평범함을 비범함으로 해석해내는 비범한 이야기들이다.

 


이것은 당신과 아무 상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아무 상관 없는 수만가지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당신이 절대 가볼 리 없는 지방 관광도시의 고장난 공중전화와 당신, 스타크래프트 챔피언과 당신, 고생대부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빛도 산소도 없는 곳에 사는 지옥의 오징어와 당신, 당신과 당신 사이의 당신.

 


나는 진심으로 너무 자주 감동을 받아, 책 귀퉁이를 접는 것을 지나, 오랫만에 포스트잇 필사를 감행했는데, 다 읽고 나니 책상 위 벽이 빽빽한 지경에 이르렀다. 뭘 잘못 읽었나 싶어, 2019년 리마스터 판 말고 이전 판을 애장하고 있는 친구에게 빌려 그것도 읽어 보았다. 초판이 출간되었을 때 읽었다면 어떤 느낌을 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놓쳐버린 그 시기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김애란 작가를 알아보고 책을 읽기로 선택했기에 오랫동안 경애와 감동의 느낌을 갖고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부러움을 넘어선 질투가 난다.

 

마침 그런 내 상황에 딱 맞는 구절도 있다. 반갑고 기쁘다.

 

바람이 들고 날 때마다 모든 벽면은 바깥을 향해 천천히 부풀어 오르다 다시 원상태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럴 때면 다섯 개의 벽면에 붙은 포스트잇들은 일제히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그것은 더욱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 방 전체가 하나의 종이 비늘이 달린 물고기가 되어 부드럽게 세상을 헤엄쳐다니는 상상을 했다. 반대로 자신이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느꼈다.

 

괜히 내 포스트잇들을 부러 물고기 모양으로 다시 붙여 보았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포스트잇 사랏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음에 파고드는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목이 조금 칼칼했다. 나는 기대보다 생각보다 정말 많이 웃었다. 그랬다는 점이 정말 놀랍기도 했다. 순전히 재밌어서 웃은 웃음은 아니지만 콕콕 꼬집어내는 작고 큰 위선들과 게으른 생각들과 익숙해진 것들이 유쾌했고, 작가의 비틀기가 취향에 맞았다.

 


나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쁘면서 불쌍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왜 C라고 말한 뒤 상대방이 A라고 들어주길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 조금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내 앞사람이나 옆사람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에 불쾌해지는 사람이다.

 


나는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누군가 내 방에 와 ‘책이 많으시네요’라고 한마디 해주면 기뻐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편견을 아끼는 사람, 나는 그 편견을 얻기까지 달려갔다 다치고 온 길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식으로도 나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당신보다 당신의 절망을 경청하고 있는 나의 예의바름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례한 사람이다.

 

 

 

세상엔 이유를 알고 나면 너무 시시해져버려 오히려 영원히 알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할말이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나의 이력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역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대단하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대단한 사람에게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왠지 더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늦게 만난 이 책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잔뜩 남겨 두고 끝이 났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미래의 나는 이 책을 마음에 드는 시집 들춰보듯 여러 번 이 단편에서 저 단편으로 옮겨 다니며 머물 것이다. 그때도 포스트잇 필사를 하게 될 지, 아니면 편지를 쓰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내 벽면에 비늘을 사라락거리며 날아다니는 물고기들이 많아지거나 커지는 것은 반가운 일일 것이다. 어쩌면 아주 아주 오래 전에 잃어버린, 해양생물들과 먼먼 바다 여행을 떠나는 프리다이빙과 수영이 가능했던 꿈속의 내가 다시 꿈속으로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김애란 작가가 [영원한 화자]에서 남긴 "나는 아직 잔뜩 남겨진 자"의 구절을 마지막으로 적어 본다.

그래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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