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이면을 보다 - 신용권의 역사기행
신용권 지음 / 지식과감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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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한 분야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늘 부러워 하다가, 그저 나는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지 않는 통사 위주로 독서를 하자, 란 나름의 자포자기를 한 지가 오래다. 그런데, 문제는 이 통사 파악을 통한 전반적 이해라는 목표가 좀처럼 다가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젊은 날, 얼굴이 붉어지는 행태들 중 아직 희미해지지 않는 것들이 꽤 남아 있는데, 그 중 아직도 지켜보리라, 하며 가능할 때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 읽기이다. 물론, 2,000권이 넘는 기록이니, 아마 이번 생에서는 못 이룰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도 포기를 못하고 그 언저리를 맴돌고는 있는 중인데, 그래서인지 비슷한 주제나 소재를 다루는 여타의 역사서들이 보이면 자연히 관심이 가게 된다. [역사의 이면을 보다]란 이 책 또한 제목부터 몹시 흥미로웠다. 더구나 역사의 이면을 대신 보아 주셨다니 통찰력이 없는 독자로서 고마울 뿐이다.

 

우선, 참 담백한 화법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담담하고 깔끔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잘 느껴지는 부담 없는 서술이다. 조선과 일본의 비교 연구, 예시, 해석, 비판 분야는 흥미롭고 쉬우면서도 신뢰감 가는 팩트와 간단한 주장이 잘 어우러진 내용들이다. 예를 들면, 일본은 왜 호전적인지를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주고,

 

조선이 선비의 도를 실천하고 있을 때, 일본은 무사도에 따라 사회를 경영했다. (...) 선비의 도가 성리의 철학적 삶을 중시한다면, 무사도는 힘과 물질의 원리에 따르는 현실을 중시한다. (...) 흔히 일본인의 정신을 표현하는 잇쇼겐메이니라는 어휘는(...) 자구 그대로 풀면 한 곳에 목숨을 걸고이다. 무슨 일을 하건 끝장을 볼 때까지 달려드는 모노즈쿠리와 헤소마가리(외골수) 정신은 최고의 품질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국력이 신장되는 시점에는 곧잘 이웃나라침략이라는 폭력으로 표출되곤 한다. 22-23

<em> </em>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씨를 말리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그 나라 사람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연후에 서도의 사람을 이주시킬 것이니, 10년을 이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정유재란은 조선인의 몰살 자체가 목표였던 만큼, 임진왜란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였다. 왜군 한 명당 한 되씩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바치라고 명한 것도 바로 이 전쟁이다. 104-105

 

조선은 왜 위기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는지를 사회를 얽어맨 신분제도를 받아들이던 백성들의 입장에서 풀이해 준다.

 

평안도 안주성에서 감사 윤훤이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자고 말하자, 병사들은 거꾸로 서얼, 상민, 노비라고 써놓은 호패를 성 위에 쌓아 놓고, ‘너희들이나 나가서 싸우라고 거부했다는 것이다. 안주성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비 등 각종 신분제로 백성을 옭아맸던 나라가, 위기에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77


도자기 수출로 번 돈은 이후 일본 근대화의 종잣돈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기술자 대부분이, 일본에서 삶과 대우가 훨씬 좋았기 때문에 조선 귀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도 조선 조정은 이들을 괘씸하다고 생각했을 뿐, 기술이나 기술자를 우대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116

 

그리고 양란보다 더 아픈 식민지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다른 비판도 가능하겠으나, 내가 느끼기에는 식민지 논리에 따르는 자기 비하가 아니라, 스스로를 파악하고 비판하는 반성의 형태로 전개한다.

 

12세기 남송의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을 독점적 지배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양란 이후 오히려 포용력이 더 약화되었다. 양반 사대부의 지배층은 국가기강을 회복한다며,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주자학의 근본주의에 더욱 매몰된다. (...) 논쟁에서 이긴 학파는 도덕적 권위와 함게 권력과 부를 독점했다. 패한 쪽은 권력에서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목숨마저 잃었다. (...) 구한말의 세계사적 격변기에도 조선은 위정척사의 깃발 아래, 사상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고,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상공업을 천시하며, 성리학적 질서를 더욱 강화했다. 148-150

 

흔히 우리나라의 위인들로 지정되고 숭배 받는 이들에 대한 일침도 빠지지 않고 지적되고 있다. 가끔 너무 뭔 과거의 인물들을 우상화하는 일은 너무 게으르고 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입장에서 반가웠던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충무공으로 상징되는 호국정신을, 북한의 주체사상을 압도하는 지렛대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에게 덧씌워진 우상의 더께를 벗겨낼 때가 됐다. 2017년 이순신 종가는 현충사 본전에 걸려있는 박정희 친필 현판을 철거하고, 숙종의 사액 현판으로 원상 복구해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했다고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160


우리는 1965년부터 세종대왕 탄신일인 5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그는 겨레의 진정한 스승인가? 성군으로 존경받는 세종은 리더로서의 처신이나, 인간에 대한 연민에서도 과연 흠결이 없었던가?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오는 그 어린 백성은 누구인가? 178

 

조선 사회의 가치 기준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실제 사대부들의 인식이 어떻게 괴리가 있는 지도 지적하는데, 자신들이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시대 속에서 시대적 한계가 어쩔 수 없었으리라 납득하면서도, 시대를 꿰뚫는 통찰도 불가능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에서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남보다 잘할 수 있는 것 하나가 있으면 그것으로 존경한다. 교토의 히예산 비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조우일우 차즉국보’. ‘오직 한 자리만 비추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나라의 보배로 삼는다는 말이다. 181


조선의 가치 기준인 유학은 기본적으로 소인과 군자로 그 인격의 차이를 규정했다. 소인은 물질적 이해를 기준 삼아 공동선에 관심을 두지 않으나, 군자는 이러한 소인을 극복한 인물로 끊임없이 인격을 개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유학은 성인이 되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성학이라고 불렀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사대부들은, 이재를 쌓는 것을 죄악시했다. 182


10만 평의 논밭과 150여 명의 노비를 가지고서도, ‘10년을 경영해 초려삼간을 지어 낸다고 자신을 가진 것 없는 사람이라 표현했다. (...) 중산층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던 그들이 가진 결핍의식(?)’에서 도학정치를 주창했던 그들 조선 사대부들의 부의식과 민낯을 엿보게 한다. 187

 

2019년에도 믿어지지 않게 노론, 소론 타령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식과 일상 속에서 다른 시대에 사는 것이 사실이다. 동시대에 산다고 모두 동시대인인 것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유독 반상 구분과 뿌리 깊은 차별의식의 뿌리가 어딜까 안타깝지 그지없던 중에 조선사회가 국제적으로 공인된 가장 발달된 노예제 사회였다는 대목은 또 한 번의 충격과 놀라움이었다.

 

미국의 문화 사회 학자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은 전 세계적으로 발견된 노예제를 비교 분석하면서, 노예가 출생에 의해 그 신분이 세습되는 방식을 7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그중 부모의 어느 한 쪽이 노예면 그 자식이 모두 노예가 되는 방식이 적용된 코리아에서, 전근대 세계 어디에서보다 가장 가혹하고 발달된 노예제의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다. 189-190


이렇게 양반 숫자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반상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이것이 현재 모든 한국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마치 양반의 후예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만든 큰 요인이 되었다. 그 많던 평민과 노비,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191

 

객관적 서술과 비판만이 역사서술가의 목표는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도 역시 저자는 담백한 목소리로 자신의 바람을 곳곳에 담아 두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 선고(1910214)를 받고도 뤼순감옥 안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정녕 반일은 쉽다. 남 탓에 그치기 때문이다. 친일 또한 나를 버리고 남에 굴종하는 노예의 길이다. 이제는 거시적 안목으로 동북아 평화를 생각해야 한다. 오늘의 눈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사에서 깨달은 교훈으로 현실의 벽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찾아야만 한다. 232-233

 

마침, 25세 젊고 아름다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다룬 드라마 [이몽]을 부모님과 본 다음 날이라 여러 생각이 떠돌았다. 전쟁과 폭력의 수많은 희생자들과 피해자들과 생존자들의 잃어버린 세월들에 마음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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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는 벌써 전 세계인들에게 익숙해져버린 이름이 되었지만, 예전 영국 유학 시절엔 제 지도교수와 입장을 달리하는 학자라 학문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워지기가 어려웠습니다. 학자로서 저술가로서 그 분의 전문성에 반박할 생각은 없으나, 독자들은 늘 유명세 보다는 질문을 놓지 말고 독서하기를 응원합니다. 여전히 흥미롭고 멋진 주제와 제목입니다. 오래 곁에 있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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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아직 선택권이 있습니다˝란 문장이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희망‘을 좀 더 바라도 되는 거겠지요. 제 주변만이 아니라 전체 미래세대의 삶이 어떻게 될까 기성세대로서 미안하고 불안합니다. 만난 순간 감동과 반성과 배움과 충격, 그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해 준 [총, 균, 쇠]는 영어 ebook으로 아직 제 곁에 있습니다. 과거를 배우고 미래를 꿈꾸는 그 길에, ‘비교연구‘라는 흥미로운 방법을 활용한 이 책이 좋은 동반자가 되리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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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그 책이 주는 즐거움에 비례해서 이제 얼마 안 남았네...라는 서글픔이 차오르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이 제게는 그랬습니다. 더 많은 독자들이 ‘관광‘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여행‘을 경험해볼 수 있는 그런 귀중한 계기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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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열전 - 인생 고수들이 들려주는 지혜의 말들
김영철 엮음, 서울시평생교육진흥원 기획 / 창비교육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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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 세상은 살 만한 것이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느낌 점은 한 마디로 이것이었다. 처음 느낀 것은 아니지만, 내 속엔 매번 참 염치없단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끔은 망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한국사회가 엉망진창 분탕질로 휘몰아칠 때가 있는데, 그 끈질기고도 깊디깊은 범죄행위들과 행위자들, 개선의 여지없이 꿈쩍 않는 범죄 양산 시스템에 절망에 절망을 더하는 때가 끝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아직 이렇듯 소위 '굴러가는' 것은 그에 못지않게 애틋할 정도로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더 나아가 주변을 살피는 분들이 아주아주 많기 때문일 것이다 


[공부 열전],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는 제목을 보고 헉! 많은 인구가 절대적으로 듣고 싶지 않은 단어일 텐데... 하는 신간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시험 날짜'에 맞춰 해치워야 하는 것 말고도, '살아가기' 위해서 늘 공부는 필요하다. 특히 정보가 범람하여 선택을 좌우하는 이런 시대에는, 일상 정보 판별을 위해서도 제대로 된 공부가 필수적인 법이다. 하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거라면, '바르게 잘 살고 싶다'란 소망을 현실화하고 싶다면, 그 공부란 얼마나 공을 들여 얼마나 오래 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은 먼저 부모님께 일독을 권해 드렸다. 이제는 약화된 시력 탓에 큰 글자 책이 아니면 한 번에 잠시 동안만 독서가 가능하시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늘 활자 책과 출판물과 더불어 살아오신, 가족들 아무도 텔레비전을 아쉬워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 주신, 적지 않게 어린이날 선물로도 책을 받았던, 이런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부모님이 반가워하실만한 분들의 이야기들이 이 책에 여럿 있었기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정말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정말 특별히 좋은 시간이었다. 훌륭하게 살지 못하는 자괴감과 낯 뜨거움은 있지만, 귀중한 이야기들을 베베 꼬거나 비틀지 않고 알아들을 수 있고, 귀중한 삶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안목이 있다는 점만으로도 조금은 안심이 된다.

 

눈물이 차오르기도 하고, 속이 시원해지기도 하고, 없던 용기가 잠시 생기기도 하고, 따스한 위로를 받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이 뭉클하게 떠오르기도 한 행복한 책 읽기였다.

 

[공부 열전] 제목이 주는 떨떠름함은 더 이상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먼저 이렇듯 공부하며 바르게 살아 주시고 애기를 남겨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동시대인이면서도 먼저 시작한 바른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신 분들에게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위인은 되지 못했지만, 얼굴 붉어질 일들도 자잘자잘 기억 속에 남았지만, 오늘도 바르게 열심히 사람답게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동시대인들이 함께 읽고 배우고 얘기 나누고 위로 받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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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러면 못써."(......) 여기 이 서재에 있는 책들을 다 읽고 한 줄로 줄여라 하면 "사람이 그러면 안 돼." 이거 아닙니까? 공부란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싸워야 큰다."(......) 싸우면 모순이 드러나니까, 그것을 고치고 바꾸고 맞추고 정리해서 새로운 세계로 가자는 거지요.

"남의 일 같지 않다." (......) 마을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이 다 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지요. 관계의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 겁니다.


(......) 나무는 바라보는 쪽이 정면이거든요.(......) 답이 하나인 세상은 없습니다.(......) 경계가 없고, 정면이 없고, 다 받아들이는데도 느티나무는 평생 느티나무로 살거든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도 안 변해요.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며 자기를 귀하게 가꾸어 갑니다. 24-25


저는 살아오면서 뭘 하고 싶은 게 별로 없었습니다.(......) 그냥 산겁니다.(......) 지금도 뭐가 되고 싶은 게 없어요. 희망이 없어 편해요.(......)

바라는 게 없으니까 편하지. 살다 보면 별일들이 있지만 그런 별일들도 다 지나가지요. 늘 지금이 좋다, 생각하며 삽니다. 29


'여행이 학습'이라는 말은 그게 주입식 교육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사람은 그냥 놔두면, 풀만 보고 바다만 봐도 깨달을 수 있지요. 오픈해 놓고 가만 놔두면 깨닫게 된다는 걸 그때 알게 된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가 '성찰'인데, 깊이 있는 성찰은 반성으로 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조선이 마련되어 있어야 가능해요. 자유로운 공간, 다른 걸 볼 수 있는 시간이 제공되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여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9


남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건 하질의 인간이 하는 짓이에요. 지금 매우 어렵겠지만 당장의 어려움이 인생을 결정하는 건 아니잖아요?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세요. 절망이 절망을 낳지 않도록. 인생은 희망이니까요. 87


우리가 그냥 '시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제가 '시장 전체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같지 않아요. 시장은 경제 체제이고, 이 체제의 논리, 가치관, 사고방식이 사회 모든 영역을 장악해서 지배하는 것이 시장 전체주의요.(......) 시장 근본주의적 사고가 한국에 들어와서 경제만이 아니고 문화, 교육, 언론 등 광범한 사회 영역들을 접수하고 지배하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됐습니다. 인문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하겠지만, 시장 제일주의, 시장 근본주의로는 교육도 안 되고, 사회도 지탱할 수 없어요. 95


중요한 것은 인간이 결코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는 안 되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사회가 망각하지 않는 일입니다. 이를테면 '진실', '인간성'(humanity)이 그런 가치입니다. 이런 가치들이 함몰되면 사회는 신뢰의 파탄이라는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변화에 휘둘리는 시대일수록 사회는 인간이 지키고 유지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98


지금 우리 시대의 교육에서 크게 빠져 있는 것이 타자에 대한 나의 책임 부분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가? 왜 우리는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공존의 삶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타자와의 공존을 도모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100


인간의 욕망은 자연 현상인데 이 욕망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자극되고, 무한히 확대될 때에는 탐욕이 되어 버립니다. 무한 탐욕이 가져올 것은 인간의 종말이고 문명의 끝이죠. (......) 지금 인간 문명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구 환경 전체에, 그리고 우주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인간의 지구적 운명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들(......)을 인간의 미래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데 소홀했습니다. 사정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운명은 지구 문명의 운명과 분리되지 않지요. 103-104


우리 사회는 지금 지독한 편협성, 불용, 협소성, 혐오와 증오의 문화 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정치가 이 경향을 더 심화시키고 있어요. 협소하고 편협하고 옹졸한 인간을 부추기는 데 정치가 기여하고 있습니다. 입만 벌렸다 하면 막말 내뱉고 욕설로 쌈박질하는 거, 그게 지금 정치권의 모습 아닌가요? 정치권의 막말 문화가 젊은 세대의 언어 습관을 크게 타락시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소통 수단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에 되레 지독한 불소통의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역설 같아요. 105


그런 주장에 동의 못합니다. 그렇다면 피해자 인권은 누가 지켜줍니까? 그런 얘기를 하는 분들은 피해자 인권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더라고요. 형사 사법 제도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범죄자다 보니 범죄자의 인권 침해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것이지요. 그들이 희생양으로 삼은 피해자는 증인에 불과합니다. (......) 저는 인권을 절대 가치로 취급하는 의견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그전에 공동체의 안전과 피해자의 인권이 있는 겁니다. 132


소년원 교육 프로그램 중에서 재범률을 가장 떨어뜨리는 과목이 제과 제빵이에요.(......) 아직까지 재범이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어요.(......) 아이들의 '욕구(need)'를 충족시켜 줬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교실에 모아 놓고 뭐가 선이고 뭐가 악인지 교육해 봐야 말짱 헛일입니다. 그래 가지고는 갱생이 불가능하지요. 현실적인 장애를 넘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소도 나오면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하고 가정은 다 해체돼 비행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어요. 그 경로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 그런데 이런 정책이나 대책을 집행하려면 예산과 인력이 있어야 되잖아요? 근데 그게 확보가 잘 안 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 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같이 현장을 잘 하는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소년원에 예산을 더 배정해 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청소년들은 투표권이 없잖아요? 그러니 예산 배정이 안 되는 거예요. 어쨌든 투입한 만큼 갱생은 가능합니다. 133-134


역사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과를 따져 보면, 산업화는 가난을 벗고 밥을 먹어 보자는 것이었고, 민주화는 사람이 밥만 먹고 사냐, 말을 제대로 하고 살자는 것이었지요. 이 둘은 대립되는 게 아니라 크게 보면 서로 승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느 단면에서는 대결했는지 몰라도, 크고 길게 보면 밥과 말이 같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지요. (......) 밥도 먹고 말도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 안전하고 행복한가요? 그렇지 않거든요. 먼지 걱정, 물 걱정, 더위 걱정 따위를 한단 말이에요. 이런 큰 문제를 정직하게 다루는 게 중요하지, 과거에 연연해 박정희와 김대중을 말하는 건, 작은 이야기입니다. 175-176


교육은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입니다. 엄밀히 말해 종교도 교육이지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45년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설법했고, 예수도 3년간 여기저기 다니며 설교했습니다. 저는 이들이 유목형 교육자라고 봐요. 그러니까 교육이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지만, 가장 유력한 수단인 건 맞다는 생각입니다. 186


지혜가 많은 사람이 지식이 많으면 좋고, 지식이 많은 사람이 정보가 많으면 좋은데, 요즘 사람들은 거꾸로 돼서 지식은 없고 정보만 넘치게 알지요. 187


과거에 TV가 일반화될 때, '바보 상자'라고 하면서 문명 비판적인 용어로 조롱을 했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휴대폰을 '스마트폰'이라고 칭송한단 말이예요. 결코 스마트하지 않은데. 현재 지성 사회가 문명 비판적인 시각이 너무 약화되고 디지털에 압도되어 있다는 방증이지요. 188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됐다고 칩시다. 그런데 25년 후에 지구 온난화로 이 땅에 사람이 살기 극히 어려워지면 평화가 오고 통일된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한반도 생명 공동체의 바탕 위에서 평화를 이뤄야지, 정치적인 통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189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이씨 왕조가 너무 오래갔다. 임진왜란이 끝났을 때 사실은 왕조가 바뀌었어야 했다." 그랬으면 실학자들이 새 왕조의 이데올로그가 됐을 겁니다. 새 왕조가 만들어지고 그때부터 근대를 향한 움직임이 시작되었을 거예요. 그렇게 됐으면 일제 강점기 전의 애국 계몽 운동이 공화정 운동이 됐을 거고, 자력적인 근대화가 시작됐을 겁니다. 그럼 식민지 통치를 안 받았을 거고요. 조선 왕조가 너무 오래갔습니다. 229


학문이라는 게 근본적으로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게 있을 수 없어요. 특히 역사학은 진실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 왜냐하면 역사라는 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얼마만큼 진실된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것인가, 그걸 모아 놓은 게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된단 말이에요.(......) 현실에 따라붙어야 되지만, 너무 시류에 따라 가면 현실에 아부하는 학문이 될 가능성이 높단 말이에요. 그러면 진실되지 못한 학문이 됩니다. (......) 학문은 무조건 진실을 추구해야 합니다. 23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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