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도가 높은 무협 순정 작품입니다. 김혜린 작가의 박식하고 깊이 있는 사전조사와 지식도 존경스럽고, 자칫 한편으로 흐를 수 있는 내용의 균형도 절묘해서, 무협도, 시대서사도, 사랑도, 우정도, 인간애도, 도덕도, 그러면서도 인생을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도 직조직물처럼 잘 짜여져 있는, 불멸의 명작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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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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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리즈와 다르지 않게 이번 중국편도 섭할 정도로 잘 읽힌다.


그래서 잠시 빈둥거릴 시간이 날 때마다 눈에 띄게 둔 덮은 책을 다시 여기 저기 들춰 보곤한다.


문장도 내용도 가볍지 않으면서도 읽을 때마다 이렇듯 흡인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부럽고도 대단하다.


그것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어느 편을 읽어도 대동소이하다.


어느 정도 내용을 알고 다시 보면, 사진을 오래 들여다 보는 여유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처음 읽을 때와는 다르게 아쉬운 점도 커져간다.


너무나 인상적인 막고굴 하나만 해도 몇권 분량의 내용이 나올텐데 한정된 시공간에 몇개의 석굴을 답사하고 한권에 다 담으려니 더 알고 싶은 그 지점에서 억지로 종결이 되어 버린다.


유홍준 선생님 아시는 것 다 이야기하시려면 백과사전이 백권쯤 되어야 할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함께 답사여행에 참가할 기회를 가진 분들이 모두 입을 모아 하는 답사후기가 선생님의 입담과 즐거운 이야기에 대한 칭찬이 대부분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때 나의 답사는 이보다 더 생생할까...


느리지만 시야가 조금은 더 넓게 넓게 확대되는 공간감도 기쁘다.


다음 출간되는 3권은 어떤 내용일지 매일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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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보내는 노래 창비 노랫말 그림책
유희열 지음, 천유주 그림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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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야흐로 5월 가정의 달, '어린이날'은 이미 이번 주말부터 시작되었다. 그 주말 약속과 일정과 기대를 조율하느라 실은 이번 주 내내 전화도 마음도 기분도 분주했다. 그러고 나면 숨 쉴 틈 없이 '어버이날', '스승의 날', '생일' 등이 잇달아 온다. 이런 캘린더주의에 맞추는 삶이 끔찍하기 하지만, 아이들과 노인들이 있는 가정에서 섭섭한 분위기 없이 공감하고 이벤트 없는 평안한 날을 보내는 것은 신급 스킬이다.


그렇다면, 이왕 치러야 하는 것, 선물이라도 '좀 덜 쓸모없고,' '좀 덜 상업적이고,' '좀 더 마음이 담기고,' '좀 덜 시간과 비용이 아까운' 품목이 없나 하는 마음의 타협을 치러야 한다. 그래서 '매년' 인기는 없지만, 아름다운 책, 공감할 수 있는 공연, 관광지가 아닌 느긋한 여행 등을 제안하곤 하는데, 이번엔 9년 전 눈부신 봄,5월에 태어난 막내 꼬맹이의 지원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골랐다. 막상, 이젠 시력이 약해질 대로 약해지셔서 큰글자 책만 잠깐씩 볼 수 있는 부모님이 더 좋아하실 지도.

 

꽃보다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하고 따뜻한 마음도 한 가득 담겼고, [딸에게 보내는 노래]라는 노래도 있는, 이 책은 화환보다는 적어도 좋은 선물일 것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처음 살고 있는 그대들에게 바칩니다(유희열)

아이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초대받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천유주)

 

예전, 꽤 오랫동안,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란 노래가 불릴 때면, 좋아하며 박수치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매번, "뻥치시네, 꽃이 더 아름답지!"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보석들, 세상에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 천지였다.


그런데...

꼬맹이들이 태어나고, 처음 눈을 마주치고, 그 조그맣지만 완벽한 모습을 보고, 나는 "진심으로 진심으로"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워~" 신봉자가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구나~ 개안을 한 것은 물론, 늘 부러워하였지만 불가능했던 "사랑에 빠지는 일"도 겪었다. 출근길, 횡단보도 앞, 승강기 안, 침대 속, 어디서든 꼬맹이 모습이 떠오르고, 뭐라도 나쁜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심장이 터질 듯 뛰기로 했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지 못한 자책이 무겁게 밀려들고, 그 모습이 떠오르면 언제든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되었다그야말로, 고단함도 괴로움도 물리치는 실패 없는 막강 엔돌핀이 매일 새롭게 업데이트 되는 일상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생각하면 누군들 세상에 새로 찾아온 '이 작은 생명'에게 진심을 담아 사랑과 축복을 전해 주고 싶지 않을까. 한 장면 한 장면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추억이 된다.

 

천유주님은 이 책에 빛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간들을 차곡차곡 그려 담아 주었다.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너란 꿈을 피게 됐단다"

 

세상 힘든 일이 육아지만, 세상 제일인 '모든 순간들'도 그 시간에 있다고 믿는다. 울었던 기억만 말고 행복한 기억들이 더 오래 남길, 새로 태어난 생명, 나이 드신 부모님, 엄마, 아빠, 이모, 고모, 오빠, 언니, 모든 이들에게 축하와 감사와, 따뜻한 기억과, 사랑과 힘이 되는 노래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서로서로 좀 더 알아주고 위로해주고 위안이 되어 주는 그런 시간들이 늘어나길 바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음의 장면이 생각났다.

그가 있어 '눈이 부시게' 행복한 날들이 늘어난 것은 확실하다.

감사합니다. 당신.

 

 

삶은 때로는 불행했고 때로는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래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오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한 가지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백상예술대상. 김혜자 

...............................................​

 

* 창비 노랫말 그림책 시리즈: 한국 대중가요를 그림책을 펴내는 시리즈. 

* [딸에게 보내는 노래](2007년 발표, 토이 6[Thank you]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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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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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비해 너무나 빨리, 기대에 비해 너무나 빨리 읽어버린 책.


여름의 무더위가 지나도록 그 상큼함이 그치지 않는 추리전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쉽고 아쉽다.


평온하게 이어지는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주적인 힘들이 신비롭게 균형을 맞춘 기적인지는, 그 일상이 깨어져봐야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은 극적인 사건일 필요도 없다. 가장 흔한 예로 가족 중 누가 아프다면 단박에 일상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다.


평범하길 원했지만 평범할 수 없어서 평범한 척이라고 하며 살아야했던 이들의, 누군가의, 우리고 우리의 살아가는 순간들.


레몬, 레몬, 레몬.


여름에 레몬사탕을 입에 물고 무더위 짜증을 부리는 대신 만약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다면, 제대로 그 순간을 감사하며 다시 읽을 것이다.


레몬, 레몬, 레몬.


입 안이 아니라 머릿속에 레몬의 맛과 향이 퍼지는 듯하다.

가제본에 이은 단행본 뒷 부분 마지막 인용을 올린다.


어떤 삶은 이유 없이 가혹한데, 그 속에서 우리는 가련한 벌레처럼 가혹한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식당 주방에서 일한다는 그들 남매의 엄마는 난쟁이였다. 선우를 좀 더 가혹하게 눌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 엄마를 보자 이상하게도 내가 앞으로 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졌다. 내가 살아갈 방향도 정해졌다. 일단 엄마에게서 독립할 것이다. 엄마는 어떤 일에도 연루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언젠가 다시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 145


결국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들 사이에 명료한 선을 긋는 사건이에요, 라고 다언은 진지하게 말했다. 죽은 자는 저쪽, 나머지는 이쪽, 이런 식으로. 위대하든 초라하든,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그 사람과 나머지 전 인류 사이에 무섭도록 선을 긋는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라고, 탄생이 나 좀 끼워달라는 식의 본의 아닌 비굴한 합류라면 죽음은 너희들이 나가라는 위력적인 배제라고, 그래서 모든 걸 돌이킬 수 없도록 단절시키는 죽음이야말로 모든 지속을 출발시키는 탄생보다 공평무사하고 숭고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다언은 책을 읽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179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179


그해에 일어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끔찍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190


소리는 이렇게 귀로 듣는 것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194


나는 궁금하다. 우리 삶에는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걸까. 그저 한만 남기는 세상인가.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8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 199

내용이 결말이 레몬의 의미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으셔야 한다.

어찌나 앙증맞고 재미난 지 누구에게라도 추천할 수 있는 책이다.

무더위가 몰려 오는 여름에 [레몬] 한 권 맛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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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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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의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진정한 발견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여전히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르몽드

 

제발트를 이야기할 때 '위대한', '경이로운', '전 세계적인' 같은 수식어사 붙는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소위 '제발디언(Sebaldian)'은 아니다. [이민자들]을 열 번은 열다 덮다 했지만 내용이 마음에 닿지 않는다거나 번역품질로 난독이 온 것이 아니라 집중력의 문제였으므로 완독을 했는데, 감동보다 묵직한 무게감이 너무 커서 다시 읽어볼 엄두가 안 났다.

 

[토성의 고리]는 배경, 소재, 제목 모두가 와 닿았지만, 첫 독서의 영향이 가시지 않아 미뤄두고 있다가, 본문 전체를 다시 다듬고 표현도 오류도 바로잡아 새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동했다. 설마 더 난해하게 다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도 감동의 대열에 합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기대와 함께.

 

제발트는 현재 세계환경수도라는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가르쳤다. 다시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하고 영국에서 교수로 임용되어 영국문학번역센터를 창립했다. 성취도는 다르지만, 독일과 영국을 번갈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한 때 그리 살았던 나도) 많은 공감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토성의 고리] 독일어판 부제는 '영국 순례'이며, 그 중에서도 영국 동남부 지방이야기이다. 우리는 그냥 '영국', '영국인'이라고 하지만, 영국과 영국인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U(nited)K(ingdom),England, (Great)Britain, English 등으로 나뉘는 것을 이해하려면, 이 지역 영국 역사와 지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학자의 문학고고학적 여행기라니, 여타의 여행기와는 다른 신기하고 독창적인 문학임에는 틀림없다. 책을 읽어본 이들은 경이와 함께 깨달을 수밖에 없겠지만, 마치 정밀묘사처럼 풀어나가는 작가의 섬세하고 순도 높은 표현은 독보적이다. 장면은 가장 정확히 표현한 사진에 초일류급 해석이 달린 느낌이다.

 

어쨌든 그 여행 뒤로 한동안 나는 멋진 자유로움의 기억뿐만 아니라, 그 고적한 지방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던, 오랜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파괴의 흔적들을 보며 느낀 먹먹한 전율의 기억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0

 

, [토성의 고리]는 여행기가 아니라 '소설', 그것도 '인류의 역사소설'이라 극찬을 받는 작품이며, 먼 거리를 이동하는 '정신적 여행'을 기록한 최고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며, 쓸쓸하고 묵직한 비가로서 문화, 문명, 자연, 인간사를 넘나드는 깊디깊은 이성적 성찰을 다룬 작품이다.

 

(...) 현실 자본주의에 모든 것을 걸었던 대처 남작의 집권기간 동안 점점 부풀어 올랐던 이 희망은 결국 투기광풍으로 변질되더니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손실은 처음에는 지하의 화재처럼, 이어서는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고, 보트 조선소와 공장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으며, 결국 로스토프트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영국 지도의 가장 동쪽을 표시하는 지점이라는 사실만 남게 되었다. 55

 

매년 수천 톤의 수은, 카드뮴, 납과 산더미처럼 많은 비료와 농약이 강을 거쳐 독일의 바다로 흘러든다. 대부분의 중금속과 여타의 독성 물질이 도거뱅크(영국 동부의 해역의 얕은 수역에 침전되는데, 여기서 사는 물고기의 3분의 1은 이미 이상발육과 기형을 안고 태어난다. 면적이 수십 제곱킬로미터에 이르고 깊이가 9미터에 달하는 해안 가까이에 독성 해초 무리가 자주 형성되는데, 바다 동물들은 여기서 떼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는다.(...) 번식과 관련된 의식은 이제 기껏해야 죽음의 무도에 지나지 않는다. 68-69

 

살랑 팔랑 유쾌 상쾌 술술 읽히는 작품은 분명 아니다. 내 경우에는 익숙하다고 예단한 부분에서 난데없이 내가 아는 바의 얕은 깊이, 바닥을 들춰내는 다소 버거운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재현은 시선의 위조에 기초한다. 살아남은 자들인 우리는 모든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모든 것을 동시에 보면서도 실제로 현장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150-151

 

폐허에 가까이 갈수록 망자들의 신비로운 섬에 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사라졌고, 그 대신 미래의 어떤 대재앙으로 파멸한 우리 자신의 문명의 잔해를 보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본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가 남겨놓은 금속과 기계의 쓰레기더미 사이를 돌아다니는 미래의 이방인처럼 나 또한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여기서 살고 일했는지 () 이해할 수 없었다. 278

 

재앙과 거대한 폭력으로 파괴되고 남은 잔해와 유적과 폐허에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독자라면, 꼿꼿이 서서 마주하고 성찰할 수 있는 독자라면, 함께 하기에 이만한 여행기는 없을 것이다. 또한 어느 물질문명은 이렇게 사라져갔지만, 어떤 독자의 정신문명은 창조되고 확장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우리의 모든 작업은 결국 생각에 기초할 뿐이고, 생각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바뀌는 법이니, 이렇게 바뀐 생각 때문에 우리가 이미 완성했다고 간주한 것들을 다시 부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290

 

물론 이는 독자가 역사를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가능하면 학살과 파괴의 고통을 겪고 희생된 희생자들의 입장과 관점에서 바라봐주면 좋겠다. 반복적인 역사적 잔혹함은 실제로는 보상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허무하게 잊히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목숨이 붙어 있던 아이들 중 많은 아이는 배가 고픈 나머지 목에 걸고 있던, 개인정보가 적힌 마분지 판을 씹어 먹었으니, 결국 극도의 절망 속에서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 그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기억의 그림자들이 여전히 계속 배회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20-121

 

때때로 우리는 이 지구에서 사는 데 결코 적응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들이고, 삶이란 끝없이 진행되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실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259

 

체력과 지력과 기력이 충분하여 이 책을 완독하게 된다면, [토성의 고리]라는 제목에 대한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럴 때 이 책의 서두를 다시 펼치고 제발트가 인용한 부분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서양에서 '토성'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부록이 될 것이다.

 

멈출 줄 모르고 머릿속을 맴도는 끝없는 생각, 잘못된 실을 붙잡았다는, 꿈속까지 파고 드는 느낌이 사람을 어떤 막다른 골목과 낭떠러지로 몰아가는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331

 

이토록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섬세한 묘사에 공을 들인 작품은 흔하지 않다. 연상능력이 뛰어난 독자는 뇌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지도. 손바닥보다 좀 더 큰 이 책이 담고 있는 순도와 밀도가 높은 문장들이 얼마나 충실한 지, 절대 대충 읽을 수가 없다. 집중력이 흩어지면 바로 난독 증상이 따라온다. 함께 책을 읽어 내는 모든 동료 독자들에게 문득 문득 친근함을 느낄 정도다.

 

쉽게 권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함께 읽은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단언하건대 이토록 정성스럽고 충실하게 써 내려간 독창적인

인류역사자연사정신문학여행서는 다시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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