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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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3천년의 역사, 한반도 약 40배의 면적, 남북한 인구의 약 20배의 인구, 중국(문화유산) 답사기이다. 과문한 탓도 있지만 유홍준 선생인 아니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 아닐까 한다. 과연 몇 권으로 나올 것인지가 기대되고, 개인적 소망은 앞으로 한 십년 쭉 써주셨음 좋겠다. 대중교양서로 이런 수준의 출판물이 나온다는 것은 대단한 선물이자 축복이다.

첫 번째 대상은 역시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역대 왕조의 수도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는 무려 8대 고도에 이른다.

전공이 미술사인 작가는 당연히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있는 미술사적 명소를 즐겨 찾아다녔다고 하는데, 실제 감동은 사상사, 문학사의 고향에서 받은 것이 더 컸다고 한다. 그 감동을 제대로 나누려면 아무래도 "아는 만큼 보인다"의 명제에 걸맞은 '아는 만큼'이 필요할 것이어서, 조금 위축이 되기도 한다.

일송정을 비롯한 독립운동유적지가 많은 연변조선족자치주와 길림성은 부모님과 직접 관련이 있어서 개인적인 기대가 더 높다. 이에 더해,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인 올 해는 임시정부가 있던 상해, 가흥, 항주, 중경과 서안 종남산의 광복군 제 2지대 등 독립운동현장에 대한 내용도 포함된다.

알려진 것만 해도, 19세기에 이르기까지 2천여 년 간 끊임없이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더욱 풍요롭게 이룩한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질 것이란 기대도 높다. 근거 없이 주눅이 들거나 비난하는 방식을 놓고 규모의 차이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중국 문화유산을 깊이 이해할수록 당연히 우리 문화의 가치에 대한 감상 또한 새롭게 깊어질 것이다.

'국사' 뚝 떼어내는 방식 말고, 우리도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이라는 당연한 지위를 재매김하며 폭넓게 역사적 연관을 이해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저자 역시 중국 답사기를 쓴 소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의 중국행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의 놀이터이자 중국 역사와 문화의 학습장이면서 동시에 우리 문화의 특질을 동아시아의 지평에서 재인식하는 현장이었으며, 나아가서 오늘날 국제사회 속에서 우리의 좌표를 생각게 하는 세계사의 무대였다.

이를 위해 저자는 최소한의 중국 역사의 흐름을 아는 것이 좋고, 그 최소한의 최소한은 시대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중국 역대 왕조의 순서라고 한다. 조선족 중학생들이 노래로 만들어 외우는 것이라는데 가능하다면 함께 외워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중국편 1은 돈황과 하서회랑, 명사산 명불허전이다. 저자에게는 꿈에 그리던 돈황/실크로드 답사였고, 그냥 명불허전이 아니라 감동의 울림이 진하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그런 장대한 답사를 꿈꿔본 적도, 꿈꿀 만큼 지식이 있거나 호기심이 있지도 않았다. 다만, 작가가 받은 감동과 체함 내용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견문과 정보들이 이 책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을 것이고, 언제라도 그것들이 나의 길라잡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은 날 끝까지 그런 기회가 없더라도 최고의 간접경험이 될 것을 믿는다.

다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가 하나같이 그러했듯이.

다음의 내용은 잘못 알려진 상식이나, 알면 재미있을 듯한 상식 관련 내용을 눈에 띄는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유홍준 선생의 입담은 예전부터 유명했으나, 이런 소소한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는 답사기를 자칫 고루하게 만들지 않은, 연령대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는 큰 매력이자 장점으로 보인다.

달리는 차창 밖의 풍광을 바라보면서 역사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은 답사의 즐거움이자 작지 않은 배움의 기쁨이다. 지나가는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면 그 순간 자연 풍광이 역사의 현장, 전설적인 이야기의 고장으로 바뀐다(...). 돈황 답사를 하면서 내가 국내답사와 다르게 느낀 점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만큼 상상한다'는 것이었다. 35-36

풍수에서 산의 경우는 남쪽이 양이고, 강의 경우는 북쪽이 양이다. 그래서 함양 땅은 산과 강의 양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두 함, 볕 양, 함양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서울의 강북을 '한양'이라 부른 것도 마찬가지다). 37

진나라의 수도 함양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진시황의 아방궁이다. 아방궁이 하도 유명해서 사람들은 진사황이 짓고 살던 호화로운 황궁의 이름으로 생각하곤 하지만 아방궁은... 궁궐의 이름도 아니었다... 아방의 아는 가깝다는 뜻이고 방은 곁 방 자와 같은 뜻으로 합쳐서 근방이라는 뜻이다. 즉 함양궁 근방에 있어서 아방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말하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한 '지붕 낮은 집'인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집을 아방궁이라고 헐뜯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37-39

중국의 모든 유적지에는 반드시 명시가 따라붙는 한시의 전통이 이어 문화유산의 가치와 의의가 더욱 드러난다. 한시는 중국이 세계에 대놓고 자랑할 만한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두목지가 불과 20대에 지은 [아방궁부]는 아방궁의 호화로움을 표사한 것도 절창이지만 마지막에 세상을 향해 던진 대목은 가히 명구로 삼을 만하다.40

(상당한 분량이라 여기서 올리진 못하지만, 절창이라는 점에 동의하며, 많은 분들이 읽어 볼 수 있길 바란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족들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역대 왕조들은 한사군과 한구군의 울타리 안쪽을 강역으로 삼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토가 그때보다 3배나 더 넓어진 것은 아주 예외적이고 최근 일이다. 이는 만주족의 청나라가 한족의 울타리를 벗어나 변강민족과 동질성을 내세워 티베트를 흡수하고 위구르 지역에 신강성을 설치한 것을 중화민국이 그대로 계승한 결과이다. 오늘날 중국이 소수민족 문제로 골치 아파하는 것은 이들을 자율적인 삶에 맡기지 않고 직접 통치하면서 생긴 문제이다. 50

(기회가 있다면 티베트의 역사와 독립운동, 티베트 승려들의 죽음을 담보로 한 저항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답사객들과 중국을 답사하다보면 중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 정도에 따라 자연풍광에서 인문풍광으로 옮겨가는 강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는데, 경험적으로 말해서 [연의 삼국지]를 읽은 사람과 아닌 사람은 차이가 많다(...). 그중 최고로 나는 [비데오 삼국지]를 꼽는다. 56-57

(...)사실 중국이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무형유산이 한시라면 유향유산은 도자기와 청동기다(...). 그리고 주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문화의 뿌리이고 원천이다. 공자님도 정치의 이상으로 생각한 것이 주나라였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제기의 원형은 모두 주나라 청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내가 서울 답사기에서 예찬한 종묘의 제기도 따지고 보면 주나라 제기의 조선적인 세련미었다(...). 경복궁 건설의 모델로 삼은 [고공기]는 [주례] 마지막 편에 나오는 것이다. 63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오히려 인생의 자산으로 삼은 이들을 이야기할 때면 꼭 사마천을 빼지 않고 말해왔다.

"주나라 문왕은 구금 중에 [주역]의 64괘를 풀이하였고,

공자는 진과 채 사이에서 액을 당하고 [춘추]를 펴냈고,

굴원은 방축되고 [이소]를 지었고,

손빈은 다리가 잘리고 [손자병법]을 썼고,

쿠마라지바는 18년간의 유폐 생활 중 한문을 배워 불경을 번역했고,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펴냈다." 85-86

평생 유배객 신세를 면치 못했던 소동파는 [세아희작, 아이를 씻기며 장난삼아 짓다]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며 총명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놈의 총명함 때문에 일생을 그르쳤다네.

이에 원하노니 우리 아이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아무 탈 없이 무난하게 정승판서(공경) 되거라. 89

(...) 저녁 후 한잔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이백의 술 권하는 시를 하나 읊겠다고 했다(...), [월하독작,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 4수 중 두 번째 노래였다.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성이 없었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응당 주천이 없었겠지.

천지가 술을 사랑했으니, 술 사랑하는 것 하늘에 부끄러울 것 없네.

듣건대 청주는 성인에 비길 만하고, 탁주는 현자와 같다 하니

성현들도 이미 마셨거늘, 굳이 신선이 되길 바라겠는가.93-94

중국술을 고고학적으로 말하자면 갑골문자와 청동기에도 술 주 자가 새겨져 있으니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을 알 수 있는데, 1983년에 역시 우리가 오늘 지나온 섬서성 보계시 미현(양가촌)에서 신석기시대 앙소문화의 술 전용 도기가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대략 6천 년 전부터 이미 술을 빚었다는 얘기다. 95

잔도는 2천여 년전, 진한시대에 전란을 치르면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삼국이 쟁패를 다투는 내전으로 전국이 싸움터로 변했던 [삼국지]의 전투현장에서 정정에 달하여, 검각도에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잔도가 가설되었다. 잔인한 전쟁이 낳은 유산인 셈인데, 이것이 나중엔 험준한 산길을 닦는 데 이용되어 전국의 유명한 명산엔 다 잔도가 가설되어 있다. 108-109

(...)바야흐로 우리는 잔도를 따라 본격적으로 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221개의 석굴의 7천 8백 불상 중 과연 어느 굴의 어느 불상을 눈여겨볼 것인가(...). 무엇을 어쩌자고 하나의 절벽에 천년을 두고 그렇게 많은 석굴을 조영했던 것이며, 시대마다 불상의 모습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고 가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상이 그 불상으로 보여 나중에 머릿속에 남는 것이라곤 '불상 한번 많구나!'라는 인상뿐이다. 이럴 때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 있다. 110-112

"맥적산석굴을 보았으면 중국엔 참으로 위대한 석굴문화가 있었구나라고 감동하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왜 우리나라에 이런 전통이 없냐고 기가 죽어야 합니까. 이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신감 내지는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되는 법입니다. 불교는 인류가 낳은 위대한 종교로 이를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아시아의 민족들은 고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였고 신앙의 형태는 그 나라 그 시대, 그리고 자연환경에 맞게 만들어져갔습니다. 138-139

이제 우리는 남의 문화를 볼 때 그 자체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보면서 세계사적 견문을 넓혀야지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나 없나를 생각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꼭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올바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지만 공연히 민족적 자괴심을 갖는 것은 진실로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중국의 석굴사원을 찾아가고, 일본의 사찰정원을 감상하고, 한국의 산사를 답사하는 보편적 시각을 가져도 좋을 만큼 우리는 문화적으로 성숙해 있다고 믿고 있고, 또 그만한 국제적 위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41

중국 답사기의 1권은 돈황 답사'까지'의 내용이며, (유홍준 교수가 첫 답사 시의 아쉬운 점을 보완하기 위해 2차로 떠난 답사) 2권에서 '돈황'답사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독자의 흥미를 돕기 위해 조금 소개하자면, 2권에서는 돈황 약탈자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드라마스러운 이야기가 전개된다.

특히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발견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먼 과거가 아니라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화재들이 어떤 약탈 과정을 거쳐 도착했는지 등, 현재의 우리와 관련이 깊은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꼭 2권까지 많은 분들이 읽으시길 바란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늘 기대 이상일거란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의 다음 편을, 중국편 3권을 애타게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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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말해요
조지 섀넌 지음, 유태은 그림, 루시드 폴 옮김 / 미디어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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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말해요]란 얘기를 들으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저 수화 못해요, 죄송합니다."

상상력 바닥인 저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손으로는 모든 걸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사랑해" 말해보세요.


이런 손 다들 필요하시죠?

고양이도 손으로 얼굴을 닦고 있는 건가요?


달콤하게 잠을 깨우는 엄마 손,

야옹이 컵에 우유를 따르는 언니 손,

아가와 걸음마 하는 아빠 손,

아가와 인형놀이하는 내 손,

.

.

.

.


손으로 못하는 건 뭐가 있을까요?


야옹이 친구를 재우는 아가 손,


그렇지요, 손으로 책을 들고 읽습니다,

저는 주로 책을 눕히고 손으로는 넘기면서 읽지만요,ㅎㅎ


하루를 마치고 쉬고 있는 엄마, 아빠,야옹이, 그리고 내 손이네요,


그렇군요,

손으로 뭔가를 할 때 사랑해 라고 말하는 것 이아니라,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였네요.


마음의 모든 경계가 풀리는 아동문학책이지요,

덧붙여 올 봄의 무시무시한 황사와 미세먼지가 잠시 잊힐만큼 아름다운 그림들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손이 해주는 일, 서로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며,

손으로 책을 들고 읽어 보면 포근포근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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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도 계약이다 - 안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
박수빈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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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통해서 인류가 생존하는 한 사랑을 하고 실패를 하고 혹은 성공을 하는경험들은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스토리들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문화 전반의 소재거리이며, 사회 전반에 온갖 비용과 법과 제도의 실행을 요구하는 그야말로 전방위적 사건들이다. ‘사랑과 연애라는 소재를 완전히 제외하고 남을 수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몇 개 분야의 학술논문쯤이 아닐까. 그러니만큼 그에 대한 누적된 고민과 좌절과 특히 실패담들이 계절풍처럼 변함없이 떠돌거나 되돌아오지만, 그에 반해 유용하거나 확실한 도움이 될 조언과 지혜는 늘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안일한 태도로 임했던 지난 연애들을 돌아보면, 나는 연애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을 지루하게만 느꼈던 것 같다. 상대방을 꾸준히 애정을 가지고 대해야 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기보다 내 삶의 기본 값인 것처럼 여긴 적도 있었다.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지 않는 상대방을 두고 그의 방식을 알아보거나 인정하려는 노력 대신 넌 나를 사랑하지 않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너의 얕은 감정 때문에 나는 너무 외롭다고 직접 상대방에게 하소연한 적도 있고, 때로는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수십번 수백번 엑스 표를 치고 그와 헤어져야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다 이별을 맞이하기도 했다. 11

 

연애라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 ‘둘 사이의 배타적 경험을 지칭하는 것이니, 둘이서 해결할 수 밖에 없고 타인이 그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이 강력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사이의 관계맺기라는 점에서 연애는 완전히 개별적, 사적, 비공개적 행위가 아니기도 하다. 우주공간을 떠도는 우주선 안에서가 아니라면, 연애 역시 당사자들이 속한 사회행위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외부에서,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적 조언을 해 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조언이 해결책으로 작용하는 사례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현직 변호사가 자신의 사적 경험들을 통해(본인과 주변인물들) 깨달은 점들과 더불어 안전하고 자유롭게사랑하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해 연애도 계약임을 기억하라는 현실적인 사랑학 가이드를 제공한다는 장점을 가진 책이다. 계약을 통해 행동과 감정이 제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꼼꼼한 사전 계약이 사랑과 연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들려준다.

 

계약을 잘 유지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작업은 계약을 체결하기에 앞서 서로가 서로에게 계약 목적에 맞는 상대방인지를 제대로 확인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계약이란 상호간의 의사의 합치를 의미하는 만큼, 계약서라는 종이 다발은 서로의 의사가 합치되었다는 증표에 불과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계약의 내용대로 약속을 하고 이것을 지킨 의지가 있는가, 이 계약을 체결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완료될 때까지 계약이 유지될 수 있는가 같은 사전 점검 과정이 잘 이루어졌는지 여부이다. 14

 

연애와 계약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직관에 들 수도 있지만,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 이 두 소재를 쉽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잘 엮어서,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피할 수 없이 들려 오는 뉴스들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이 험한 세상에서 자신들을 지키며 연애할 수 있는 가이드를 제시하는 점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고 묻던 박원의 노래 노력의 호소처럼, 노력과는 관련이 없거나 없어야만 한다고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노력과 무관할지 몰라도 그 사랑을 유지하고, 상대방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상대방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분명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을 유지하고 전하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 과정이 연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연애에는 노력과 신뢰가 필요하고,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 제대로 된 교섭 과정이 필요하다. 마치 계약처럼. 15

 

이는 저자가 갈등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 체화된 변호사로서의 직접적 장점일 것이고, 다행스럽게도 내용 전반이 무시무시한 사례의 나열과 비장한 호신술과 같은 맹약들이 아니라, ‘썸 타기와 사전 교섭’, ‘임대차 계약시 등기부등본열람과 비교되는 상대방의 연인 유무 확인’, ‘양다리와 이중 계약등 웃음을 유발하는 유쾌한 발상으로 진행된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마크 다시(콜린 퍼스)가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에게 “I lile you very musch just as you are”(너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해)라고 말할 때 브리짓이 받았을 그 설렘을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흉내낼 수 없었고,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을 하고 상대방에게 온전하게 솔직하기는 어려웠다. 23

 

이 많은 것들을 덮어놓고 물어보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으레 내가 너를 좋아하고 너도 나를 좋아하니까 우리는 당연히 같은 생각일 거라 넘겨짚고 연애를 시작했다가는 기대와 다른 행동들에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전, 가볍게라도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서로의 입장을 내비치고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시간을 소위 썸을 탄다라고 하는데 썸을 타는 단계는 그래서 계약에 비유하자면 계약 교섭 단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31

 

몇 년 전 소유와 정기고가 함께 부른 이라는 노래가 공전의 히트를 했다. “요즘 따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니 꺼인 듯 니 꺼 아닌 니 꺼 같은 나가 주요 가사다. 연애는 서로가 서로의 것(소유물)’이 되는 것이고 썸은 바로 그 직전 단계라는 뉘앙스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가사에 공감을 했다. 소유권자에게 소유물을 통제하고, 이용하고, 변형하고, 처분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사귀는 사이가 되면 연인에 대해서도 그러한 권리가 발생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해온 것 같다. 그러나 단지 사귀는 사이라는 이유로 연인을 통제하려는 태도는 현실에서 많은 문제를 낳는다. 통제를 거부한 상대방에게 가하는 연인의 폭언이나 폭력이 마치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 것마냥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79

 

적어도 연애 상대방이라면 저 사람이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여기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연애는 한쪽이 다른 쪽을 소유하는 관계가 아니다. 소유권이란 소유물을 법률이나 사회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사용하거나, 이를 이용해 이익을 얻거나,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 연애 상대방을 사용할 수도, 이용해서 이익을 얻을 수도, 처분할 수도 없다. 83

 

또한 연애는 노예계약이 아니다. 연인이라고 해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다 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혜적으로 마음을 주고, 관계 유지에 필요한 행동을 주고받는 계약일 따름이다. 남자가 나무라면 여자도 나무라고 여길 줄 아는 사람과 연애를 해야 한다. 남자가 배라면 여자도 항구가 아니라 배다. 망망대해를 함께 운할할 배여야 한다. 83

 

더구나 이 비상한 시기에(어느 한 시대가 여성에게 덜 폭력적이고 덜 위협적인 시대가 있었나 싶긴 하지만), 데이트 폭력, 불법영상물 유포 등 디지털 성범죄가 매체의 특성상 광범위하고 막대한 파괴력을 양산하는 이 시기에 반드시 널리널리 배포되기를 원하는 지침서라 소개하고 싶다. 특히, 스토킹이 진정한 사랑과 용기라고 여전히 일부 인정받는 사회적 이해로부터 벗어나, 디지털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스토킹 또한 애초에 계약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는 점, 싫다는데 열번 찍으면범죄라는 점이 상식화 되기를 바란다.

 

질문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대답해야 할 필요나 의무는 없다. 무언가를 요청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을 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구애 상황에서도 반드시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는 없다...... 연애는 양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특정한 관계를 맺기고 약속하는 계약과도 같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계약을 체결할 의무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33

 

연애관계에서는 둘 사기에 발생하는 문제를 제삼자가 해결해줄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의 합의와 교섭을 통해 해소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하다. 다양한 연애관계가 존재하고 때로 서로의 역할이 불균형한 관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사귀기로 약속을 할 때는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연애를 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어느 한쪽의 강압이나 구걸에 의하지 않는 것, 사귀는 과정에서 서로 할 말은 하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 목에 칼을 들이대며 나랑 나랑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라고 말한들 그게 무슨 연애관계의 성립이겠나. 마찬가지로 나랑 서귀어주기만 하면 모든 걸 다 해줄게라며 울며불며 매달리는 사람의 구애를 마지못해 받아들인들 그건 그것대로 연애라고 하기 어렵다. 86-87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100% 예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런 경우, 민사 및 형사소송으로 맞설 수 있는 방법 등의 상세한 법적 조언도 들어 있어, 사랑이 범죄로 돌변했을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지침도 얻을 수 있다.

 

3부 이것은 연애가 아니다

 

원나잇의 원칙: 낯선 사람과의 설렘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조건들

데이트폭력: 더이상 개인의 사생활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 은밀한 공간에서는 카메라를 든 당신의 연인을 경계하라

스토킹범죄: 거절하는데도 열번 찍으면범죄다

 

연애도 계약이라는 묶음을 보는 순간, 뭔가 막 이해타산적인 관계를 연상하는 오해로부터 좀 더 나아가, 오히려 서로가 서로에게 섬세하게 노력을 기울이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행복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 안전해서 더 큰 행복으로 귀결되는, 덜 아프고 더 행복한 사랑법을 함께 고민해보는 노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애는 헤어지더라도 결코 연애를 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 함께 쌓은 추억, 데이트로 지출한 비용과 시간, 친구들에게 공유했던 이야기들, 그 어떤 것도 주워담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연애는 해지할 수는 있어도 해제할 수는 없는 특별한 계약이다(계약의 해지안 계약을 끝낸 시점 이후부터 계약관계가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해지 시점 이전까지는 유효하다는 의미이다. 해제는 계약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계약 시작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소급적용해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35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이행하도록 강요하는 사람과는 계약을 이어나갈 수 없다. 그런 사람과는 연애라는 계약을 파기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불공정함을 마주하며 산다. 연애에서마저 이러한 불공정함을 견딜 이유는 없다. 내가 원하는 신념을 지키고 존중하는 다른 사람과 제대로 합의된 연애를 하자.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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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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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에 대해서라면 아래 포스팅의 내용에 더할 나위 없이 동의한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8261844&memberNo=35799573&vType=VERTICAL

 

영국에 조앤 K. 롤링(Joan K. Rowling)이 있다면, 한국에는 단언하건대 "구병모" 작가가 계시다. [해리포터]가 아이들을 위한 성장소설만이 아닌 것처럼, 구병모 작가의 '영어덜트'소설들 역시 '성인'인 내게도 더할 나위 없는 감동과 각성을 불러 일으켜주는 작품들이다.

 

부디 성인들이 다 읽어 보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다 읽고 집 서재에 하나씩 꽂아 두면 '성장기' 가족들 중 누구라도 함께 읽을 기회도 될 것이다. 장담하건대 일단 책을 읽기 시작하면, 단언컨대 끝을 봐야 할 것이다. 또한 한 권도 안 읽은 사람은 있을 지라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다작 작가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다면 한국에는 역시 "구병모" 작가가 계시다. "또 하가시노 게이고 신작이라고?!"라고 느낄 만큼 신작 출간 소식이 자주 들리지만 10년 동안 12권의 하나 같이 재미와 감동이 충만한 '위험하기 그지없는' 선물을 주는 작가가 우리에게도 있다.

큰 조카에게 선물하기 위해 처음 산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를 조카보다 더 재미나게 읽고, 이제는 조카를 핑계로 매번 희열을 느끼며 다른 작품들을 읽고 있다.

 

그 작품들 중 가장 최근의 것이 [버드 스트라이크(2019)]이다.

재미와 감동은 물론, ''가 성장기일 때 이런 글을 읽었다면 꼼짝없이 빠져 들었을 것이 분명한, 익숙하고 세련된 이야기 방식으로 양심을 콕콕 찔러대는 문명 비판과 사회 비판 내용들이 가득하다. 뭘 어떻게 하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나 매번 같은 의문스런 감동이 든다.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오래된 미래"와 같은 내용들이 곳곳에 있다. 이번에도 작가가 정성과 사랑을 다해 말을 거는 지금 '성장기'인 세대들에게 말 못한 질투를 느끼며 읽었다.

비판이 많다고 해서 교훈이 주가 되는 그런 글이 아니다. 달달하고 애달프고 씩씩하고 용기 있는 사랑과 아픔과 책임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아름다운 직물 사이사이에 교훈들이 자연스럽게 무늬를 이루고 짜여져 있다.

곤경에 빠져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법과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사람을 사랑하는 법.

"나는 그 사람을 만난 걸 후회하지 않고 그 사람과 함께 한 시간도 부끄럽지 않아……. 나는 그 사람이 도시에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 같은 건 알고 싶지도 않았고 묻지도 않았어. 우리에게 귀한 것은 이름뿐이었으니까. 서로를 부르고 대답할 수 있는 이름. 부르는 순간 세상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평화와 친밀감과 흥분을 동시에 주는 이름. 단지 소리 내어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체취를 상기할 수 있는, 동시에 서로의 껍질 안쪽에 자리한 영혼이 돌출되고 마는, 그런 이름말이야." 88

"도시 사람들은 합리와 계약과 문서를 중시하면서도 그 못지않게 그것을 저버리거나 변형하거나 위조하기를 일삼지,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그런 들쑥날쑥한 규격을 지닌 도시 사람들의 눈에 우리 삶의 방식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기본적으로 관계에 대해 묵인하고 자유 의지에 맡긴다……. 우리는 모두 초원조의 아이들이지 다른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으니까." 88-89

"세상의 모든 엄마가 자식을 낳아 놓은 것에 대해 일일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사죄하면서 사는 건 부당하고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그렇다고 해서 비오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다.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93

"세상에서 바람직하고 아름답다고 하는 형태와 과정을 갖춘 사랑이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구하고 살리는 것도 삶의 이유이자 의미가 된다면 그 마음을 귀하게 품어야 할 것이었다." 119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을 비롯해 부모와 사회가 어떻게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한 통렬한 반성들.

"……. 아이가 자신의 처지를 지나치게 잘 인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규격에 맞도록 어깨를 움츠린다는 게,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안 그래도 작은 날개가, 비오의 마음에 영향을 받아 더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더 크게 활짝 펼칠 자격이 없다 하면서." 121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122

"인사가 늦었지.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이른 나이의 성급한 결정이라고 생각지 않아.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무언가는 옳고 바람직하거나 다른 것은 그릇되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아. 축복과 경애의 입맞춤을 전하며." 296

[버드 스트라이크]라는 제목만 들었을 때는 살짝 마음이 쿵하면서 서글프고 우울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제 버드 스트라이크란 명칭에는 마치 "새들이 인간들을 공격했다"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지 않은가. 물론 새들이 항공기로 빨려 들어가면 결과적으로 큰 사고가 나지만 그렇다고 그게 "새들이 (의도적으로) 인간들을 스트라이크 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삼천포로 무한정 빠질 것같아 관련 심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기서 멈추려 한다. 어쨌든 그래서 살~ 마음이 불안으로 동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역시...... '거의 아무 위협이 되지 않고 그들끼리 평화롭게 살고 있는 익인()''저 하고 싶은 대로 막 살면서 다른 건 다 망가뜨리면서 수탈과 부정으로 얼룩진 문명인(인간)' 에 저항하는 장면이 내용에 있다. 그리고 그래서 사건이 전개된다. 작가가 담고 있는 정서에 깊이 동감할 수 있어서 더 반갑고 더 서글펐던 책읽기 경험이기도 했다.

 

역사나 시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에 다름 아닌, 소위 현재 지구상의 '선진국들'이 자유무역이라는 허울 아래 어떻게 제3세계에 수많은 부채를 지웠는지.

 

"도시에서 감미나 우리온의 가죽을 비롯해서 미과와 은각안 같은 수많은 것들을, 우리를 보호해 준다느니 백 년도 넘는 오래전부터의 통상조약이라느니 하며 이런저런 명복으로 거둬 가는 일은 내 할머니의 할머니 시절부터 있었던 일이라 우리 세대는 그것에 익숙하고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못 하고 살았지. 하지만 대체 도시에서 우리의 무엇을 돌봐준다는 거지? 그들이 한 일이라곤 주로 자기네 말을 가르치는 학교와 수도 시설을 놓고, 자기네 공산품이라면서 우리가 원한 적도 없는 합성수지로 된 물건들을 잔뜩 갖다 안기는 대신 세금을 뜯어 가는 일인데. 말이 좋아 무역이지 실은 미과나 은각안 같은 사치품은 규정보다 더 많이 도시로 흘러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중 모르는 사람은 없어." 94

 

"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빼앗길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지요의 얘기처럼 능력 대신 평화가 보장되는 게 나을 것도 같았다. 원해서 그런 힘을 갖고 태어난 게 아닌데...... 그때 루는 고개를 들어 은각마의 희고 눈부신 뿔과 천진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빼앗길 것이 남아 있는 한, 도시가 존재하는 한 완전한 평화란 익인들에게 꿈만 같은 이야기." 117

 

인간이 죽을 때까지 성장을 멈추지 않는 모든 어른들도 구병모 작가의 소위 '영어덜트' 소설들을 만나보기를 희망한다. 나는 운 좋게 그런 기회를 가졌고, 지금은 작가가 가능한 오래 작품활동을 해주시기만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는 독자이다. 다른 많은 경애라는 작가들이 많지만,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은 문득 잠시 떠오를 때라도, 마치 '성장'하는 묘목이 봄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몰랑해지고 간지러워진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러하다.

 

올 해 이제 3월 말...... 언제 또 만나려나......길고 긴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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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강경석 외 지음, 이기훈 기획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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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에 기념일로 지정해 둔다거나, 10주년, 20주년... 하는 식으로 주기별 기념식을 하는 일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된 단일 사건에 대한 평가가 그 당시에도, 그 후 100년이 지날 동안에도 '제대로' 고찰, 평가되지 않은 경우라면, 늦어도 너무 늦은 것이고, 늦었더라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이 한 두해에 될 일이 아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뿐만이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종교 등등 전 방위적 연구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니, 그야말로 다음 100년이 필요한 거대 프로젝트처럼 들린다.

 

올 해 3.1 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이 대통령직속기관 정부주도로 이루어졌고, 이전부터 각종 단체들의 학술대회와 관련 학자들의 발표가 이어져왔다. 그 모든 시간과 자료들이 모이면 윤곽이 드러날 터라 믿는 한편, 단기적이고 단일적인 기획 말고, 좀 더 진지하고 장기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절실하기도 하다.

 

특히나 역사적 단일 사건들의 해석이 집권세력에 따라 달리 해석되고, 더 나쁘게는 노골적으로 정권이익을 위한 정치적 의도로 왜곡되기도 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점에서 가시적인 기념사업보다는 다양하고 균형 잡힌 연구와 시선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촛불의 눈으로 3.1 운동을 보다]는 역사학뿐만 아니라 문학, 종교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3.1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모색한 학문적 시도의 일환이로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의 좌담 3·1운동 100주년이 말하는 것들에서는 3·1혁명론을 둘러싼 학술적 맥락과 정치적 함의 등을 두루 살피며 각 연구자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치열한 토론이 펼쳐진다.

 

혁명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에서부터 미완의 혁명’ ‘현재진행 중인 혁명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까지 폭넓은 논의가 오가는 가운데, ‘역사를 당대의 맥락 속에서 파악할 것인가 혹은 그것의 현재적·지속적 의미를 적극 발견할 것인가라는 역사학의 오래된 과제이자 본질적인 쟁점을 3·1혁명 논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바로 얼마 전 3.1.만세운동의 데자뷰와 같았던 촛불광장의 모습과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 국민이 대표가 되는 주인이 되는 자각이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3.1.운동과 촛불은 역사적 맥락을 나란히 한다고 보인다.

 

교과서적 서술에서 3·1운동은 거족적 항일투쟁으로 평가하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3·1운동을 대한독립만세’, 즉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꿈꾸었던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3·1운동은 그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민족운동만이 아니라 공화정을 추구한 민주주의운동이었다.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기훈은 3·1운동과 깃발을 통해 만세시위 당시 민중들의 움직임에서 어떻게 공화의 정신이 싹텄는지 탐색한다. 특히 당시 시위 현장에서 사용되었던 깃발과 격문, 선언서 등의 구체적인 매체(미디어)를 통해 당대인의 의식 속에서 국가, 민족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자리 잡았고 자신들의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 실증적으로 살핀다.

 

또한 만세라는 축하의 행위가 고종의 국장 당시 수행되었다는 점을 예리하게 파고들며, 이러한 수행이 어떻게 군주정의 종식, 공화정의 탄생과 연결되는지 분석한다. 당시 깃발과 격문에서 자주 발견되는 내가 대표다라는 언술은 민중 스스로 인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의 출발점으로 평가할 만하다.


또한 3·1운동과 촛불혁명의 연관성을 파악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운동의 현장에 다양한 주체들의 염원, 새로운 시대에 대한 지향이나 욕망이 있었다는 점이다. 촛불혁명 이후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등장, 미투 운동 등이 이어진 것처럼 촛불이 지핀 변혁의 움직임은 이 사회에서 억압받아온 목소리들이 터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게다가 3.1 운동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17세 유관순 열사를 벗어나지 못한 기억을 확장하는데 도움을 주는 내용도 무척 흥미롭고 유용하다. 만세운동으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희생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후 살아남아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의 중요성도 반드시 제대로 평가되어야 하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어쩌면 살아내는 일이 죽음보다 힘겹고 지난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장영은은 3·1운동과 감옥에 갇힌 여성 지식인들에서 3·1운동에 직접 참여한 당대의 여성 지식인이 그 경험을 어떻게 자신들의 역사로 구축해나가려 했는지 살펴보고 있다. 장영은은 3·1운동이 교육받은 여성이 조직화된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 첫 번째 경험으로 평가하며, 이들에게는 3·1운동이 독립운동의 의미를 넘어 역사의 지분을 확보하고자 했던 권리투쟁이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언론인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최은희의 역사서술 작업을 통해 식민지와 해방, 국민국가의 설립 등 정치적 격랑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공적 역사로 만들어가는 일련의 투쟁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으로 살핀다.

 

이 책의 구성 중 극우태극기집회로 대표되는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답답하기만 했던 의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부분은, 3·1절과 태극기 집회에서 다양한 민중의 목소리, 억압받은 자의 목소리를 헤테로토피아적 외침으로 규정하며 3·1운동의 기억투쟁 과정에서 헤테로토피아적 외침이 억압당해온 이유를 한국 개신교의 근본주의적 신앙에서 탐색한 부분이다.

 

3·1운동의 공적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피면서 한국 개신교에서 근본주의 신앙이 압도하게 된 배경, 3·1운동의 재기억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기억투쟁에서 반공주의가 승리한 이유, 근본주의와 반공주의가 결합한 이데올로기가 한국현대사에 미친 영향력 등을 검토한다.

 

마지막으로, '국사'라는 과목에만 집중되었던 교육 방식으로 인해 한국사를 이해하는데 이해의 폭을 제한받은 시간이 오래되었던지라, 세계사적 흐름과 세계사의 배경을 바탕으로 민족사를 연결하여 살펴보는 방식이 반가웠다.

 

3·1운동은 한국인에게 대단히 민족적인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것은 세계사적 흐름과 조응하면서 발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19192월과 5월 사이에 한국, 중국, 인도, 이집트에서 줄지어 독립운동이 발생했다는 것은 그 방증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베르사유체제와 윌슨의 민족자결 원칙은 전 세계의 피식민국가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해주었고, 당시 국제질서의 구조적 변동은 동시다발적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김학재는 3·1운동의 한 세기에서 이를 민족사와 세계사의 결정적 조우라는 말로 표현한다. 또한 그는 3·1운동을 미완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3·1운동의 과제(공화주의, 평화로운 국제질서, 균등한 사회)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3·1운동은 한반도 차원의 독립국가를 염원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분단과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평화를 향해가는 현재의 남한과 북한에게 공통의 기억과 자원이 되어준다. 3·1운동이 세계질서의 변동을 관찰하고 기회를 포착한 능동적 대응이었듯이, 지금 3·1운동을 발판으로 삼아 남북의 시민들이 새로운 한반도 질서를 구축하는 데 이 책이 길잡이가 되리라 기대한다.

 

명칭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현재적으로 재해석되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견들과 의견들을 가감 없이 기록하였으므로, 이 책은 정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이러한 토론의 과정을 3·1운동의 현재성에 대한 열띤 논쟁의 출발점으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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