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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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 죽고 싶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너무도 곱게 물들었고 하늘은 어쩌면 저렇게 푸르고 이 마당의 공기는 샘물처럼 청량하기만 한 것일까.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3 여름방학의 어느 날, 보충수업을 마치고도 해가 지지 않아 유독 지친 날이었다. 유리문이 달린 어머니 책장을 소파 위에서 무심히 넘겨보다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옆에, <裸木>발견했다. 표지의 모든 문자가 한자로 표기된, 내용은 세로로 적힌 책이었다.

 

만났으나 알지 못한 작품과 작가, 그래도 나는 그 순간을 <나목>과의 첫 조우로 기억한다. 그 책장에는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여러 권 있었고, 해를 거듭하면 나이를 먹듯 책이 계속 늘어갔다.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생기면, 오랜 버릇처럼 책을 꺼내 펼치곤 했다.

 

사람들은 원래가 똑바로 선 채 움직이지 않는 세상이 권태롭고 답답해 못 견디게 태어났나 봐.”

 

20111, 한 해 프로젝트를 연말에 겨우 마무리하고, 올 해도 그렇게 살아야하는 건지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30대 막바지의 오후였다. 계약서에 서명을 할지, 파쇄할지 사이를 왕복하다가, 미칠 듯이 팽팽해진 신경에 지쳐가던 중, 박완서 작가님이 영면에 드셨단 소식을 화면으로 보았다. 어머니께 그 소식을 전하며 오래 전 그 날 오후가 잠시 떠올랐다.




 

일 년 휴직을 신청하고 나는, 평생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국어를 공부했다. 어떻게 공부할지를 몰라서 한국어능력시험 준비를 시작했지만, 그 핑계로 문학책을 실컷 읽었다. 한자도 없고 세로줄도 아닌 반듯하고 하얀 종이 위의 나목을 다시 만났다. 나이가 더 들어서 본 경아의 발칙함과 맹랑함이 새삼 눈에 띄고 부러웠고, 그래서 아주 조금 미웠다.

 

내가 죽은 후에도 타인의 인생이 있다는 건 참을 수 없다. 다시 전쟁이 몰려왔으면. 지금의 나는 전쟁에 의해 구제받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반백頒白의 반백半白이 되어, 차분하고 아름답고 튼튼한 표지를 착장한 세 번째 나목을 만난다. 내용을 다 아는 작품을 삼일에 걸쳐 다시 읽었다. 새롭게 번역한 문장인 듯 생경하게 느껴지는 행간들을 자주 만났다. 매운 음식을 잘못 삼킨 고역 같은 쓰라린 감정이 올라왔다.

 

정해진 삶을 낙오하지 않고 따라가는 듯 멀쩡하게 굴었던 20대의 , 문득 다 혼란스럽고 두려웠지만 내색할 수 없었던 , 이제 꿈을 다 잃어서 안전해진 독자가 되었다. ‘경아의 울울한 시선과 고단한 발길을 따라 다시 그 시절의 한풍 속을 헤매 다녔다.

 

어머니의 눈에 다시는 어떤 느낌이 담기지 않았다. 부연 눈이 다만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목숨을 끊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확실하게 삶을 거부하고 있었다.”




 

전쟁을 겪지 않아 모른다는 말은 틀렸다. 그 전쟁은 모르나, 이후로도 전쟁은 그친 적이 없었다. 종류는 많아지고 상흔은 다양해졌다. 어떤 전쟁은 감쪽같이 일상으로 위장을 해서 종전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이 땅에 사는 몇 명이나 그늘진 데가 조금도 없어서 (...) 화사한 식물에 가까운, 만개한 꽃 같은 표정들을 한 이국의 아가씨들처럼 살 수 있었을까.

 

오십년쯤 살아보니, 외면하고 회피한 순간이 아무리 많아도, 불의의 사고처럼 누군가의 아주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을 목격하게도 되고, 가식 없는 나의 것이란 가난과 황폐뿐이라는 자각에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나인지 남인지 모를 너절한 풍경을 할 수만 있다면 다 부숴버리고도 싶었다.

 

다정한 친절을 결심해도 서로 나눌 수도 도울 수도 없는 자기만의 고독을 앓고 있음을 서로가 알고 있는 무한반복을 산다. 삶은 그렇게 때론 공포가, 때론 다 같이 고가의 망령에 들려 붙들린 포로들처럼 생기를 잃은 의무의 강제노역 같기도 했다.

 

늙기 전에 반드시 죽겠다는 결심은 회환도 없이 무가치해졌다. 초침의 속도로 숨 가쁘게 삶의 재미난 것을 재빠르게 잃어가는 것도 삶의 비밀 중 하나라는 것을 배웠다. 그러다 문득 제 정신을 잠시 차린 사람처럼, 망각을 앓은 이처럼, 오랜 질문을 되풀이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 나만 빼놓고 저희들 끼리끼리는 다 알고 있을 게다. (...) 나만이 사람들의 어떤 질서, 대열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자식뻘 나이인 경아가 어머니의 죽음을 두고 조작한 말은, 버림받은 아이로는 살 수 없다는 절규로 느껴진다. 나를 사랑하고 걱정해서 기다리다 병이나 죽어버린 어머니, 라는 신화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취한 마지막 끼니 같다. 사실이길 바라며 주문처럼 내뱉은, 가련한 아이의 애달픈 간구懇求.

 

갇힌 내가 스스로는 할 수 없는 해체를 상식적이고 속물적이고 정상적인 삶만을 꿈꾸는 타인의 도움으로 이룬다. 그건 분명 어떤 구원이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담지한 공간을 해체하며, 나는 관계의 단절을 육신의 해체처럼 격감한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해체로도 존재는 삭제되지 않는다.

 

다만 나는 후원의 은행나무들만은 그대로 두기를 완강히 고집했다. (...) 나는 아직도 그것들의 빛, 그것들의 속삭임, 그것들의 아우성을 가끔가끔 필요로 했다.”





 

고목은 나목裸木이 된다. 나목이 되어 골격뿐인 나신裸身을 드러내고도 위엄을 잃지 않는다. 나무의 본체는 겨울에 드러난 그 모습이다. 태어나 자라며 생긴 온갖 상흔을 수피樹皮에 기록한 맨 몸. 잎도 꽃도 생명의 본체가 아니다. 늘 드러나 있는 진실은 때론 보이지 않을 뿐.

 

인간도 그럴까. 나신이 진실이자 본체일까. 인간이 벗어던져야할 옷가지는 몇 개일까. 인간의 진실은 무엇일까. 어딘가는 가려지고 얼룩지고 감춰진 고유한 무늬를 새겨 넣은 존재가 각자의 본체인걸까.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고독한 존재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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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24-06-27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이 정말 예뻐요^^

poiesis 2024-06-28 17:29   좋아요 0 | URL
^^ 경애의 마음으로 최대한 단정하게 헌사드리고 싶었답니다. 알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2024-07-31 1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8-04 1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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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김민환 지음 / 솔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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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에 대해 잘 모르고 산다. 대학시절 이후로도 여러분들이 언급하시고, 백낙청 선생님도 꾸준히 언급하시지만, 진지하게 공부를 해본 적이 없다. 소설이라면 간접체험을 하게 해줄 거란 기대가 컸다. 일상의 태동으로서 사상을 만나보고 싶었다.

 

동학이란 것이 대체 무엇인가? 공부하는 사람들로서, 그것이 뭣인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겄는가?”

 

소안도라는 생활공간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이들이 시대와 어우러지며, 개인사를 써내려가듯 이야기가 전개된다. 동학은 소개되는 단계이나, 이를 핑계로 작은 권력을 가진 이들은 제 출세의 기회로 누군가를 희생시키려 한다.

 

동학에서는 가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여.”

 

옷조차 제대로 챙겨 입을 줄 모르던 일본인들을 무시하면서도 같은 섬에서 함께 살아가던 조선인들은, 시대가 변하고 입장이 바뀌고 문물이 달라지는 변화에 충격을 받고, 각자의 신념대로 반응한다.

 

성냥도 석유등에 버금갈 만큼 생활에 이로웠다. (...) 처음에 사람들은 성냥을 도깨비불이라고 했으나, 원료인 석유황을 빨리 발음한, 성냥이란 말로 굳어졌다.”

 

갑오년이 지나고, 시대적 갈등이 더 깊어지고 심화되면, 늘 마주하게 될 참담한 상황이 소안도에서도 일어날 거란 생각에 조금 기분이 무거웠다. 얼마나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날 것인지. 그런데! 이야기는 그런 전개가 아니었다. 악의를 가진 인물, 화해할 수 없는 입장들이 부딪치긴 했지만 작은 섬의 작은 언덕 같은 고저로 해소되곤 했다.

 

헤어지자는 말은 가라는 말이고, 또 만나자는 말은 생각을 돌이킬 시간을 주겠다는 말이다.”

 

육지의 상황과 사람들의 반응은 더 격렬하고 상대적으로 소안도의 갈등은 불가능과 원수를 대적하는 필사적인 분위기는 없었다. 뜻을 가지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터전을 찾은 이들의 삶터이기 때문일까.

 

속 시원한 사이다보다, 어렵게 고민하고 조금씩 합의를 보는 과정이 더 좋은 나로서는 그들의 결론이 궁금해서 놓지 못하고 계속 읽을 수밖에 없었다. “등대”(로 상징되는 무언가)를 부수자는 결정은 내가 생각한 상징의 의미였을까.

 

동학에서 말하는 선천시대가 가고 후천시대가 오는 모습이, 성별과 민족으로 완벽하게 갈라지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고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모습이라면, 동학은 초기의 평등사상처럼 친절하고 이타적인 이들의 아름다운 꿈처럼 고운 개념이다.

 

해를 입을까 마음 졸이면 지켜본 소설 속 인물들이 나는 만나본 적 없는 소안도의 주민들 같기도 했다. 꼭 생각도 삶도 사랑도 나눌 이들과 함께 많이 웃으며 어려운 시절을 잘 사셨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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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되다 - 인간의 코딩 오류, 경이로운 문명을 만들다
루이스 다트넬 지음, 이충호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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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지능이 매우 뛰어나고 유능한 유인원 종인 한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결함이 있다. 인간 이해를 위한 종합 교과서 같은 이 책은 시작부터 시원하게 할 말을 다 하고 상세 설명을 펼친다.

 

기대하고 이상화한 내용과는 달리, 인간의 뇌는 완벽한 합리적 사고와 거리가 멀고, 인지 결함과 버그도 넘쳐난다. 이는 경험적으로 증명된 바가 무수하다. 중독에도 취약하고, 자기 파멸의 길도 걷는다.

 

그런데 이 많은 결함은 약점이나 부작용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타협한 산물이다. ‘생존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완벽을 추구할 여유가 없었다.어떻게든 해나가고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제약이 생존 조건이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오랜 질문에 이 책은 모든 능력과 제약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답을 제공한다. 아프리카의 조상으로부터 크게 진화(변화)하지 않은 채,생리와 심리의 거의 모든 측면은 10만 년 전과 동일하다. , 사람을 정의하는 기본 측면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환원주의에는 경계심이 강한 편이지만, 설명의 신빙성과 설득력은 관련 연구 데이터와 결과를 살펴보고 판단하면 될 일이다. 인류학과 사회학의 최신 연구들은 어느 소설보다 흥미롭다. 재밌어서 빨리 더 배우고 싶은 조바심과 분량이 줄어드는 아까움 사이를 왕복하며 밑줄을 죽죽 그었다.

 

샘플북의 1장은 우리 자신의 진화 - 문명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돌아보는 내용이다. ‘무리(짓는) 편향과 초능력과도 같은 생존에 필수였던 협력 능력이 진화적으로 동일한 능력 발현이라서, 쓴 웃음이 나고 어깨에 힘이 빠진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문명은 반응성 공격성을 줄이고 순행 공격성을 남겼는데 - 두 공격성을 문명 이전의 존재처럼 가진 이들도 여전히 있지만, 인간은 잔인한 동시에 상냥하다는 것에 아무 모순이 없어서 허탈하기도 하고 정신적 경직이 풀리기도 한다.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서 언어와 무기가 동시에 필요한 상황, 공격성을 증대시키고 적은 비인간화하는 목적의 군사훈련시스템, 경계 내의 폭력 사용을 독점 행사하는 조직체로서의 국가, 이 모든 것이 협력의 산물로서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 서늘하다.

 

자산 교환의 한 형태로서 상호 이타성미래 투자로서의 유대를 생물학적으로 매개하는 옥시토신이 만든 신경화학반응인 우정, 진화적 도움이 필요한 시기를 대비한 보험으로서 진정한 친구까지, ‘인간은 몸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생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전무했다고도 느낀다.

 

실망과 절망은 아니고, 오랜만에 과학이 전하는 맹렬한 실체에 존재가 광광 울리며 배우는 기분이다. 싸늘하고 쓰리지만 재밌다. 1장 분량인데, 벌써 다 소개할 수 없는 내용들이 아쉽다. 특히 뒷담화가 인간 문화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정교하고 핵심적인 진화 결과물인가는 충격적이다.

 

요즘 활발히 명명되는 도파민은 역시 강력하고 다양한 영향력 - 처벌의 즐거움과 사회적 결속 - 을 미치는 요인이며, 도덕성과 종교와 법체계의 기능에 대해서도, 진화와 문명의 관점에서 다시 보며, 독자로서 답을 고민해본다

 

- 인간의 본성은 평화적인가 폭력적인가

- 독재를 견제하기 위한 협력 체계를 진화시킨 인간 사회에 계층화가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식출간본에 이어질 상세 내용은, 가족, 풍토병, 유행병, 인구,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 코딩 오류, 인지 편향이다. 1장에 비추어 여전히 흥미로울 거란 기대가 크다. 이 책이 제공할 빅히스토리에서 촉발될, 인류가 자신의 문명을 바라보는 시점의 진화가 개인과 사회적 규모 모두에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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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짧음에 관하여
딘 리클스 지음, 허윤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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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물리학, 과학 철학,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저자의 이력과 논문 주제들이 무척 흥미롭다. 20세기의 나도 물리학에서 설명하는 시간이 새롭고 놀라워서 논문 주제로 삼았다.

 

20대엔 전혀 실감하지 못했던 인생의 짧음을 지금은 매일 느낀다. 한 주나 한 달 단위로 사라지는 시간감각을 애통해하며 사는 중이다.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그 생각만 떠올려도 생이 안타깝고 애틋하다.

 

감정적이고 동시에 엄정한 현실인 이 주제에 대해 차분하게 읽으며 배우고 생각해볼 기회가 반갑고 귀하다. 짧은 한번뿐인 인생, 인류는 좀 더 평화롭고 즐겁게 서로 어울려 살 수는 왜 없을까... 늘 궁금하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그러면서 과거 사건들이 더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차단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에게 중요한 온갖 함의가 있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인생을 준비하다가 인생이 끝나버립니다.” 세네카,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의 첫머리

 

작고 가벼운 책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서, 한동안 가방에 넣어 다닌다. 이 책은 외모와 달리 깊이 판 문장의 우울 같은 사유가 가득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하고 살가운 어조를 띤 문장들로 기록되었다.

 

팬데믹의 울울한 시간 동안, 누군가는 이런 글을 쓰고 있었구나, 생각하면 올려다본 먼 하늘 한쪽이 반짝거리는 듯하다. 슬프고 황망한 갑작스런 이별이 많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에도 적합한 시기였다.

 

죽음은 유한한 경계를 제공하기 때문에 의미에 결정적이다. 사실 그게 이 책의 핵심이다. (...) 존재에 생기를 불어넣고 효용을 주는 선물로 여겨야 한다.”

 

통째로 외울 듯 밑줄을 많이 그었지만, 다 읽고 나니 오히려 주제 파악이 간명하게 된 듯해서 기쁘다. 30년 전에도 지금도 늘 관심사이자 미스터리인, 시간 자체와 그 시간의 일방향성, 그래서 정해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죽음, 그 끝. 그리고 그 과정인 삶의 애달픔과 애틋함과 안타까움.

 

기적처럼 태어나 반드시 죽는다, 는 운명을 알고도,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하지 못하고 산다. 때론 그저 존재하기만하거나, ‘크게 낭비하기도한다 시간 도둑*. 그런 시간을 다 모으면 체감 인생이 더 길어질 지도 모르겠다.

 

* 어떤 일을 정말 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루는 경우

 

헷갈리게 하지 않는 이 책은 주제에 밀착해서 조언을 거듭 건넨다. 짧은 생을 제대로 살아라” “낭비하지 말아라” “숙고해서 행동하고 미래를 만들어라”... 세네카가 하지 말라는 걸 다 하면서 사는 중이다. 또 반성한다.

 

죽음이 점점 선명해지는 반환점을 돈 나이라서, 그 조바심과 안타까움을 이 책에 적힌 미래의 가소성으로 바꿔 읽으니 격려가 된다. 중요한 건 행동이라고 동의하면서도, 미래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만 하다 멈춘다. 운이 좋아 먼저 행동한 이들의 덕을 보며 살아볼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인지 기능이 손상되지 않은 채 고령으로 생존 중이라면, 그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를 또 부끄러워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의지적 행위이고 가지치기 과정이 필요하다. 관계도 사물도 공간도 시간도 좀 더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지향하는 미래가 현실이 되려면, 열심히 상상하고 행위로 선택하는 것만이 시간 병**이 아닌, 본래적 삶***을 사는 방식이다.

 

** disease of time, 미래에 대한 형편없는 의사 결정,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저지르는 행위

 

*** 의식이 있고 의미가 있는 좋은 삶. 행동과 목표가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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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닌 여자들 - 역사에 늘 존재했던 자녀 없는 삶
페기 오도널 헤핑턴 지음, 이나경 옮김 / 북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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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한국사회에서 목격한 갖가지 관련 상황들이 떠오른다. 정책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실하거나 웃기지도 않는, 모욕적인 내용들 - 쪼이는 댄스, 여성 조기입학, 돈 줄게 애 낳아 등 - 이 다수다.

 

인구가 81억이 넘었는데 여전히 모자랐는지, 인간과 닮은 AI도 만들고 싶어 하는 기이한 욕망이 투자를 받는 과학 기술의 시대에, 여성을 국가가 동원 가능한 자궁 수로 계산하는 전근대적(?) 태도는 현상 유지 중이다.

 

숨을 고르고 책을 펼쳤다. 문자를 통해 들썩이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미국 사회의 여성은 애 낳는 일을 어떻게 파업해왔는지 읽어본다. 로 앤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자유주의 인권국가에서 여성 공동의 경험, 그 역사를 만나본다.

 

여성이 자녀를 갖지 않는 이유와 연결된 여러 가지 문제의 역사를 살피지 않으면,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파업보다는 개인의 선택처럼 느껴진다.”

 

여성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임신 위험을 설파했기에, 임신중지 시술을 살인죄로 재판한 1800년대 미국 기독교 사회의 사례에 놀라 읽다가, 피임 방법들이 4천 년 전, 기원전 1900년으로 거슬러가서 더 놀랐다. ‘현대인은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한 건가. 여성이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는 짐작보다 다양했다.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익숙하고 가시적인 이유는, 여성과 모성은 가정에 머물러야 하고 근로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200년 된 믿음, 그 탓에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 사람들은 자녀를 최소로 갖거나 갖지 않는 것이다.

 

이미 커리어가 삶의 일부라는 인식은 실재하는데, 유자녀 여성의 임금과 경력 불이익은 성별 차가 모욕적으로 크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갖고 싶지만 갖지 못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되는 방법은 꼭 혈연이어야만 할까.

 

시험관 시술이 실제로 약속하는 것은 여성을 생물학적 어머니로 만들어 자궁에 가치를 회복시켜준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있고, 그 실패로 인해 여성은 선택지가 적었던 과거보다 더욱 실패한 존재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이 전혀 안전하지 못한 사회를 생각하면, 어른들이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떠올리면, 생각은 더 복잡해진다. 동시에, 아이 생산자로서 스트레스를 받는 성인들의 삶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래서 아이 말고 친족을 만들자는 운동이 흥미롭다. 과거 공동체에서 함께 양육하던 방식처럼, 똑같지는 않더라고, 낳지 않은 아이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을, 미래 세대들에게 우리가족과 마음과 헌신을 열자는 제안이다.

 

어머니와 어머니가 아닌 여성 사이에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구분은 여성의 택지를 제한하려는 의도였다. 이 재밌고 새로운 책을 통해 나는 역사적으로 늘 존재했던 엄마 아닌 여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의 개인사와 관련 기록이 우리의 역사다. 우리는 동시대인들은 물론 그들과도 연대할 수 있다.

 

역사서는 늘 좋아하지만, 특별히 개안을 돕는 책이다. 한국의 엄마 아닌 여자들도 언젠가 출간될 수 있을까. 읽는 것으로 연대를 시작할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며, 존경하는 엄마 아닌 여자의 기록으로 감상을 마무리한다.

 

사망 7개월 전, 한 기자는 보부아르에게 전 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운동에 어머니상으로 간주되는 데 대한 소감을 물었다. “터무니없는 비유죠.” 보부아르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어머니 말을 도통 듣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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