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곳으로 가자 - 능력에 요령을 더하면 멋지게 갈 수 있다
정문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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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상처 받은 만큼 상처를 주게 되고

아는 것이 많아지는 만큼 겁을 내게 되어

새로운 시도 앞에서 자주 무력해진다.

그럴 때 참고할 만한 어른스러운 태도와 감정 관리의 매뉴얼을 모았다.”

 

정확한 순간은 모르지만 나의 관심사들 중 어른과 죽음은 중요한 순위에 자리매김하고 있다심오한 철학적 숙고를 위해 동기화되었다기보다는 막연하게나마 생각했던 어른의 모습을 아무리 살펴봐도 에게서 찾을 가능성이 없고, ‘죽음이 예상 밖으로 주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나와는 다소 무관한 일이라는 생각이 균열되었기 때문이다언젠가의 미래의 일이라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었다.


사춘기四春期에 사춘기思春期를 동시 다발로 겪고 있는 기분이다.

 

20, 30대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나이든(?) 이들의 생각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이제는 나는 되지 못한 어른이 된 이들먼저 경험하고 고민한 분들의 생각과 이야기가 궁금하다.

 

나쁘지 않은 것과 좋은 것은 다르다. (...) 자신의 감정을 대충 처리해버리지 않을 때 그동안 내가 보지 못했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좋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추구하고 가지려고 노력하고그런 일들을 잘 안 한다에너지 레벨의 높이가 개인마다 다르다면 나는 한 다섯 칸 정도머릿속에 마지막 칸의 빨간 불이 자주 깜빡거린다그러니 취사선택에 집착하는 편이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자꾸만 나쁜 예언을 하는 걸 그만두자.”

 

안 그랬고 안 그러는 것 같은데…… 최악을 상상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한다.

 

시간이 걸리지만 본질적인 해답은 나의 강점을 키우는 일뿐이다감정의 기울기를 받아들이고 안달하지 않는 것.”

 

강점을 키우면 끔찍한 인간이 될 것 같지만백신 접종을 1차라도 맞은 이들이 많아져서 예상 보다 많은 친지와 지인들을 만나거나 안부를 주고받으며처음으로 상대에게 담긴 감정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들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내가 세워 둔 이미지를 상대 앞에 펼치고 내 생각대로 대했거나혹은 상대가 보여 주고 싶은 이미지 앞에서 반응했거나관계가 그랬나보다하는 생각이 들 만큼 확실한 순간들도 있었다.

 

다들 나이가 들고 여러 이유로 약해지고 지치고 혹은 이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이유는 모르지만 어쨌든 화면을 유지할 힘이 사라지고 실상 그대로 만난 기분이 드는 경험이었다좋다편하다이제 와서 민낯을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오래 쌓인 애정이 뒤집히진 않는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힘들면 이나 체면’ 같은 건 좀 더 편하게 그만두어도 좋겠다다 비슷하게 살아간다누구나 늙고 약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지력이 낮아지고친절하고 상냥하게 사람을 대하도록 서로가 노력노력노력.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걸 기억하고 신세 한탄만 하는 데서 벗어나기,

내가 특별한 존재여야 하고 세상이 내게 우호적일 거란 기대를 내려놓기.”

 

세상의 가치 있는 일 대부분은 가성비로만 따졌을 때 효율이 낮다.

결국 다 똑같지라고 세상을 뭉개서 보지 않고 (...)

세상은 자세히 알고 나서는 절대 똑같다고 말할 수 없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커피도 다 마셨고 눈도 아프고 읽을 만큼 읽었으니 더 좋은 곳으로 가자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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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지도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을 찾아 떠난 여행
에릭 와이너 지음, 김승욱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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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행복은 실패할 수 있는 기회다>

 

그녀와 제러드는 난민이다. (...) 그들은 새로운 땅새로운 문화에서 더 행복하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을 옮긴 쾌락의 난민이다대개 쾌락의 난민은 깨달음이 순간을 경험한다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자기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분명하게 깨닫는 순간.”


난민이라는 단어를 이런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나름의 정서적 정리 과정이 필요했다이유가 무엇이건 태어나고 자라며 사회화가 이루어진 곳에서 머물지 못하는 내외적 동기로 이들을 가리킨다는 말에서 수긍이 가는 지점이 있다.

 

다른 한편 자신이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이 정도로 확실하게 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어디서든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디서 살지 고민이 더 많아진 나로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면 나는 뭘 간절하게 원하는 게 참 없는 삶이다.

 

저자가 행복을 주제로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지도를 그리는 이유를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 속에 담지된 것들을 관찰하는 시선을 일독을 마치니 스르륵 이해가 된다순서를 바꾸지 말고 다시 읽으며 나라를 배치한 구성을 느껴봐야겠다.

 

프롤로그에서 뜬금없이(?) 동양철학 강연하는 영국 태생 철학자 인용이 있어서 이건 무슨 미쿡적인 취향인가 하고 넘어갔는데그 역시 공간과 공간 인식과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 이야기로 이제 잘 엮인다.


만약 내가 원을 하나 그려놓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 그것을 벽에 뚫린 구멍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바깥쪽보다 안쪽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다하지만 사실 이 두 면은 항상 함께 다닌다. ‘바깥이 없으면 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있는 장소가 우리의 사람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향과 가족이라는 관계이자 공간을 상징하는 명절 기간이면사회 전체가 명절 치르기를 제1행사로 삼고 종종 찬미하는 언론 보도들을 접하면그런 장소와 관계 속에서 가장 큰 폭력을 경험하고 상처를 입은 후 홀로 지낼 이들은 어떤 심정일지 마음이 아프다.

 

지난 4년간 국내 친족 성폭력 발생 건수 3천 건 이상

암수율*이 높은 범죄라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 범죄 발생 후 공식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비율

- 60% 이상의 피해 생존자가 미취학 아동초등학생이고 부녀간 아동 성폭력이 다수

가족이란 이유로 절대적 침묵을 강요당하고 신고도 못 한 채 극심한 고통을 겪음

성인이 되어서도 누구에게도심리 상담 시에도 털어 놓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공통의 것들을 찾고 없으면 만들고 강조하며 공동체로 살아야 하는 혹은 필요한 이유들이 많아 호들갑도 신비화도 이해는 하지만 사회 문화적으로 이렇게 강제도 압박도 강한 사회도 별로 없는 지라폭력과 상처가 없는 나조차 때론 질린다.

 

고향과 가족’ 공동체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하고 확장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도 자신을 생각해보는 일도 조금은 더 장려되길 바란다사익이 공익에 우선하는 삶을 살다 불타고 물에 빠져 죽는 시절이니까.

 

....................................................................................

 

행복 연구를 하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인 것 같아요.”

벤호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인류의 능력에 대해 영원한 믿음을 갖게 될 거 아닙니까?”

아뇨꼭 그렇지는 않아요.” (...)

 

사람들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나한테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행복의 격차가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나는 비밀을 파헤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적이고 인상 깊었던 반전이다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에 대한 짐작과 일반화는 이렇게 확실한 오해일 수 있다는 소위 뼈 맞는 공부를 한 셈이다.

 

연구 주제가 행복이지만 연구 동기는 인류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닐 수 있다실상 비교 연구란 세상 모든 것을 정량화해야 하는 연구 방식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일 수 있다.

 

그러니 행복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불행을 찾아내야 한다행복이 최대치를 기록해서가 아니라 불행이 최대치를 기록해도 그 격차가 클수록 선명한 연구 성과를 달성하게 된다.

 

결이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실험 과학 훈련을 받으면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과학은 실제로 눈 먼 행동을 많이 한다그런 약점을 잘 알아서 기업은 연구 투자비로 과학자들을 조종한다공학과 산업과 결부된 분야의 연구자들은 모두 이 그물 안에서만 생존한다인류의 자산이 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쓰일 과학은 그렇게 사유화된다.

 

혼미한 의식의 흐름인 듯 무지하게 이상한 글이지만  이만 총총.

 

어쨌든 오늘도 살아 있는 우리 모두는 최대한 행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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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세요, 제가 준비해 놨어요 - 여행자를 유혹하는 여행 만들기의 세계 일하는 사람 4
신재윤 지음 / 문학수첩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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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불러내는 기억과 감정이 만만치 않다설레었던 적도 지긋지긋할 적도 있었다그래도 여행가방은 여행이건 출장이건 그 기간을 살아내는 필수품들로 가득한 귀중한 존재였다몇 번이나 반복하는 생각인지 모르지만이런 시절을 살게 될 줄 몰랐던 모든 순간들이 짙은 후회로 남는다젊은 시절 추억은 기억에 담는 거라 여겼던 나를 기어이 사진 속에 담은 이들에게 나이 들어 감사한다기억보단 사진이 더 선명하다.

 

관광개발연구원이란 직업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관광을 예매한 적도 단체 여행을 간 적도 없어서일까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애증의 시기가 반드시 온다고 하는데저자는 여전히 여행을 좋아할까표지에서 눈을 떼기 싫어 한참 생각만 돌돌 굴리다 펼쳐 읽는다여행을 갈 수 없는 시절의 주말에.

 

관광객이 아니라 개발자의 시선으로 읽는 책이 무척 흥미롭다남들 먹고 노는 이야기는 잠시 멈춰 시선을 담은 문장들이 없다면관음증처럼 느껴져서 읽기가 민망할 때도 있다시리즈 명칭대로 일하는 사람에 충실한 서사라 마음이 편하다.

 

여느 회사처럼 프로젝트 기획제안보고 모두 문서로 이루어진다당연히 보고서 지옥! -를 거쳐 나아가는 장면들기발한 아이디어가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아쉬었던 결과적인 이야기들, K-투어 열풍과 관련된 글로벌 쇼핑 관광 나는 가볼 일이 없겠지만 프로젝트들의 에피소드들직업 상 어쩔 수 없는 프로출장러로서의 삶과 견문록이 담겨 있다.

 

디자이너에게 완벽함이란 무엇인가를 추가할 것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상태다.” - 생텍쥐페리

 

누군가의 노고로 개발한 것인지 전혀 모르고 만났던 영원 젊은 달 제이파크’ 이야기에 급 호감을 느껴 책에 얼굴을 더 바짝 대고 읽는다. ‘대지예술이란 컨셉이 확실한 개발이지만 지역 경제를 살리고자 너나없이 개발한 관광 상품들이 이런 시절엔 어떤 역풍으로 돌아갔을지 마음이 무겁다.

 

제주추사관담양의 관방제림부여의 궁남지통영의 나천칠기와 목공예 배우기 상품 등... 내가 좋아한 곳들이 꽤 나온다관광과 단체 여행이란 형식만 빼고 관광개발원이 개발한 여기저기를 즐겼네비로소 깨닫는다.

 

도시재생이란 이름을 단 부서가 지자체에 생긴 지는 꽤 되었는데페인트칠하고 벽화 그리는 것 이상의 어떤 일을 하는지 사실 무관심했다매년 예산의 범위 내에서 뭐라도 할 터인데토지와 건물 비용이 비상식적인 서울에서 문화비축기지와 서울로 7017이 도시재생의 상징으로 마무리 된 것이 새삼 놀랍다.

 

잘 살아 보세로 기억되는 시절 사실 나도 별 기억이 없다 에 깡그리 부수고 시멘트로 발라 없앤 문화유산급 자산들이 많았을 텐데, ‘한국적이라는 것이 꼭 어느 시대를 표방하거나 상징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겠지만식민지와 전쟁을 겪고 난 국토의 문화 단절과 가난이 분하고 서럽기는 하다.


혹시 여행 꿀팁을 기대하셨다면...... 많이 있다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이렇게 모르던 직업을 알게 된 기쁨이 크다책을 다 읽었고 표지를 봐도 두근거린다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이들과 함께 마음 편히 판데믹 시절이 말이야~” 옛 이야기 하며 여행할 날이 이번 생에 다시 올까.

 

나는 왜 그토록 여행에 열광하며여행 분야에서 직업까지 갖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여행하면 행복하니까.”

 

“‘설렘이라는 감정은 우리의 일상을 권태롭지 않게 만들어 주는,

식재료로 비유하자면 후추와 같은 존재하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설렘이 행복으로 충족되지 않고 가끔은 실망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하지만 그 설렘 덕에 여행하고 싶은 욕망이 지속되고,

더 넓게 보면 우리 일상도 지탱되는 것이 아닐까?”

 

오래 전 휠체어를 이용하는 친구와 유럽을 함께 여행한 적이 있다일과 여행이 혼재된 상태이긴 했지만 업무 내용은 벌써 잊었고휴식과 여행은 감정까지 남았다어떤 도시는 내가 이미 여러 번 와 본 곳이라 재밌게 소개와 안내를 해줘야지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짧은 여정에 벌써 중세 유럽의 포장이 잘 유지되어 내려온 울퉁불퉁 길에 양가적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길조차 수백 년 유지되었구나좋겠다부럽다 하는 마음과 동시에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돌들을 파내거나 새로 포장을 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동시에 보았다.

 

친구의 전동 휠체어 배터리는 덜덜 떨리는 길을 가느라 참 빨리도 방전되었고나는 이런 저런 감탄을 섞어 소개하려던 야심을 많이 접어 넣어야 했다그런 여행도 이제는 다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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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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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륙에는 버터라인이 있다버터를 일상에서 상시 섭취할 수 있는 생산량을 기준으로 나눈 것이다지금에야 의미가 없지만 자연스럽던 습관은 식생활로 특성화되어 버터와 올리브를 재료로 하는 식문화를 구분하는 요리를 만들어 내는 요인이 되었다.

 

나는 올리브유를 잔뜩 먹기 위해 바게트를 딱딱하게 굳게 두는 사람이기도 하지만버터는 더 탐욕스럽게 좋아했다버터를 싫어하거나 기피할 수는 있지만 그 이유가 맛이 없다는 것은 이해 못하는 인간이었다.

 

유럽에서 떠돌아다니며 워크숍을 하다가 더 이상 이렇게 못 살겠다고 느끼고 급작스럽게 귀국해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 계기는 버터를 넣어 구운 바삭크라상과 카푸치노를 먹었는데도 공항 울렁증이 느껴졌던 순간이다.



남성연쇄살인결혼사기실화여성 혐오가부장제 그리고 버터연쇄살인마 한니발 렉터의 살인 액션과 식인 식도락을 사뿐히 밟고 지나가는 미스터리이자 여러모로 결이 다른 불온한 작품이다.

 

실화라고 해서 기지마 가나에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뜻밖에 한국에 보도된 자료가 많았다헤드라인만 봐도 가관이다첫 페이지의 헤드라인만 모은 것이다.


 

가지이 마나코는 엄청나게 잘 먹겠지뚱보잖아그런 뚱보가 용케 결혼 사기를 쳤네역시 요리를 잘해서 그런가?”

 

뼈에 구멍이 나고 시력이 나빠지고 심지어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갈비뼈를 한두 개 자르게도 만드는날씬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조건화가 거의 대부분의 생애 주기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사회이다.

 

그런 사회 그런 직장을 목격하고 침묵하며 사는 취재 기자 리카는 뚱뚱한 몸으로 살아가겠다는 선택에 필요한 상당한 각오,’ ‘타인의 시선에 압사당하지 않고 자신을 인정하는’ 가지이에게 압도당한다.

 

현실과 소설 속 풍경이 교차되고 겹치면서 버터 녹듯 해서 헷갈리지도 하지만 이 책을 쓴 저자와 소설 속 리카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정리하니 깔끔하다즉 언론인 주제에 보도 사건의 본질보다는 조롱삼기 쉬운 짜라시생산에 더 불타는 경쟁을 하는 변태적 사회 현상과 이에 조종당해 더 열을 내는 대중을 다룬다옛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불량식품 먹은 듯 속이 부대낀다.

 

사용하고 싶지 않은 속어인데 한 단어로 대체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묘하게 책의 매력을 더하던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는 저자 유즈키 아사코의 인터뷰 내용 - “이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파헤쳐보고 싶었다.” - 을 기억하며 수사를 위한 독서를 시작했다물론 그 전에 버터 재료 요리를 실컷 먹었다.

 

만약 내가 다음에 당신과 얘기한다면,

당신이 절대 마가린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일 거예요.”

 

마가린이라니리카나는 거의 가지이만큼 분노(?)했다.

 

다이어트만큼 무의미하고 쓸데없고 지성과 동떨어진 행위는 없어요.”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한테 여자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워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어요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요페미니스트와 마가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성의 내용이 태연히 문장들 속에 담겼지만 이런 불가해성이 현실에서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가지이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생각하다 보니 일본 페미니즘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정중히 예의를 다해도 원하는 인터뷰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음식뿐이라는 가지이와 레포rapport를 형성하기 위해 리카는 가지이가 미션처럼 제안하는 음식들을 먹는다.

 

그러다 가지이가 수감 전에 다니던 요리 교실 살롱 드 미유코 얼마나 프렌치한 이름인가! -에서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치며 결사반대했던 요리에 대해 듣는다.

 

그런 건 살롱 드 미유코 답지 않다고너무 프랑스요리 이미지가 없다나뭐라나.”

 

나한테는 칠면조구이를 대접할 사람들이 없다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당신은 호흡이 괴로워지고이제 어디에도 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 학생들이 미워지고한시라고 빨리 발자크의 주방에서 떠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겠죠.”

 

리카가 가지이에게 석방이 된다면 나의 칠면조 구이를 와달라고 한 말에 가지이는 울음을 터트린다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지... 재밌게 짐작해 보시길

 

이 책을 읽으면서 버터 요리에 다시 홀리는 독자인 나와, 레포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잃었던 미각과 그 이상의 것들을 찾아 가며 엄청나게 체격이 커진 리카는 가지이의 또 다른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그런 나른하고 퇴폐적인 생각을 잠시 했다.

 

가지이와 리카에게 음식의 용도와 의미가 달랐듯이우리 각자에게도 삶에 관해 수없이 고치며 그려본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있다모두 다른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적어도 세상에서 팔리고 있는 버터의 종류와 가격 수보단 많을 것이다.

 

불쑥 들어간 모든 베이커리에서길 위의 노점에서도 맛있다고 느낀 파리의 빵들이 쏙쏙 떠오르고 오믈렛 접시들이 휙휙 지나갔다기억은 오래될수록 환상으로 변질될 지도 모른다.

 

가지이 마나코가 프랑스 요리와 에쉬레 버터 당시 일본에서 고가 버터로 유행이었나 보다 에 집착하는 것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신조가치생존방식에 대한 환상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을 것이다.

 

단지 숭배 받기를 원했으니까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은 어렵다잠시 잠깐 홀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리카는 남은 칠면조 식재료로 일식 요리를 하겠다고 하며 이 환상에 종지부를 찍는다.

 

미스터리물이라 나름 스포를 피하려 애쓰며 불친절하게 마무리한다그런데…… 여전히 버터한 음식을 먹고 싶다내 현실의 스릴러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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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전부는 아니지만 - 새로운 맛으로 자신의 멋을 만든 여성들
김나영.이은솔 지음, 조희숙 외 대담 / 북스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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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사람을 인터뷰한 책이니 따로 찾아가며 만나게 되지 않을 분들도 덩달아 행운처럼 알게 된다지식도 이해도 관심도 없이 살았지만그래서 완전히 낯선 일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이상할 정도로 매번 재미있다.

 

가령맛을 둘러싼 총체적인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김혜준 대표가 하는 일이 그러하다자신을 레스토랑이 있기까지 모든 것을 연결하는 기술자라고 칭한다그의 일 속에서 우정도예의도노동도정당한 대가도음식을 다루는 사람의 의지도 모두 배운다.

 

아주 넓게는 음식요리 분야에 계신 분들이라 할 수 있고각자가 이룬 삶과 일의 면면을 알수록 모두 다 접점이라곤 없는 일가의 수장들로 느껴진다그런 느낌은 단지 어디어디 대표라는 타이틀이 아니라일과 삶을 관통하는 철학과 세계관에 크게 좌우된다.

 

수원식단 신계숙 교수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음식과 같고도 다른 중식의 세계에 대해 알려 준다다른 나라의 음식을 배운다는 것이 어째서 언어문화를 모두 알고 배워야 가능한 것인지왜 그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멋진 주장을 펼친다공감!

 

음식이라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들을 창조해내는 이들이지만또한 먹으면 사라져버리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간 감상되는 예술품을 지치지도 않고 계속하는 무서운 예술가들로 보이기도 한다.

 

가장 뜻밖일 정도로 놀란 만남은 맥도날드 최현정 셰프님이다프랜차이즈 셰프의 존재에 대해 상상이 미치지 않았달까나는 이제까지 패스트푸드는 식품 영양학 전공자들이 개발해내는 음식이라 생각했다.

 

한식공간의 조희숙 셰프님은 내가 짐작한 분위기와 글이 비슷하셔서 마치 지인과도 같이 느껴졌다음식을 맛보았으면 만난 적은 있다고 해도 되는 걸까많은 분들이 어째서 스승으로 그렇게들 존경하시는 지 단호하고 든든한 스승의 모습을 감동과 전율을 느끼며 읽었다.

 

저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같은 것을 반복해서 습득하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사계절을 두세 번은 반복하면서 재료를 경험하고 요리를 해봐야 좀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 저와 그들이 생각했던 시간의 양이 절대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쉽지 않았던 거죠.”

 

제게 현장에서의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이제 여기까지네하는 마음보다는

끝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해두고 싶어요.”

 

그리고 이슬기 셰프님시절이 이렇지 않으면 오마카세 예약을 당장 하고픈 분이다아주 가끔이지만 불편하고 불쾌하게 느꼈던 오마카세 테이블에 대한 우려를 정확히 보고 계셔서글로 담으셔서 놀라고 반가웠다무척 복잡한 역학이 작용하는 지라 경험과 느낌은 철저히 사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족을 붙인다.

 

음식을 잘 내는 건 기본이고손님이 나를 신뢰하게끔 만들어야 해요.

셰프를 신뢰할 수 없으면 식사 시간 내내 불안할 수 있거든요.”

 

여자라서 더 주목받는 게 있고,

여자라서 더 평가절하되는 것도 분명히 있을 거예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알아서 판단하게 내버려두고 있어요.

이런 말들에 발목 잡히기보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해야죠.

저를 찾아주시는 손님들이 좋은 경험을 하는 데에 온 신경을 쓰고 싶어요.”

 

행복하고 허기 졌던 읽기였다나가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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