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심리학이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 실험으로 밝힌 16가지 심리법칙
펠리치타스 아우어슈페르크 지음, 문항심 옮김 / 반니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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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사회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및 그와 반대로 의식적이든무의식적이든 개인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의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이 책에 실린 사회심리학의 대표적인 실험은 16가지이다많이 알려진 흔들다리 효과, 피그말리온 효과방관자 효과, 충격적이었던 스탠퍼드 감옥 실험도 있고전혀 들어본 적 없는 하틀리의 편견 연구도 있다


한편 막연한 짐작과 대치되는 실험 결과는 흥미롭고 생각할 여지를 남겨 준다가령,

 

사람들은 목격자가 자기 혼자라고 생각할 때일수록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서는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타인이 함께 있으면 책임감이 분산되며 특히 그 타인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일 때주저하는 모습을 보일 때또는 아예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을 때 그가 체감하는 책임감은 더 약해진다.”

 

어쩌면 국가와 사회와 문화가 달라서 차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내가 경험한 한국인들은 좋은 의미로 연대하고 참여하는 유행도 거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물론 나는 실험 결과가 없어 근거할 만한 것은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의 글이고 독일에서 공부하고 근무하는 역자 소개에 어울리는 유럽의 심리철학의학을 아우르는 과학 프로젝트의 내용들이다어쩔 수 없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시대를 관통한 정신적 유산이 남았으리라는 의심도 든다.

 

권위자에게 복종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경제적 손해를 입는다든가 벌칙을 감수해야 하지 않았는데도 그들 대부분은 권위를 쥐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착실하고 무엇이든 잘 지키며 살았던 이들이 뜻밖에 불합리한 권위와 요청에도 쉽게 응한다는 주장을 여러 해 전에 접했다한편으로는 이해가 잘 되어 서글프기도 했다


가장 빈번하게 드는 예는 독일인들의 나치 지지 현상인데지식 정보가 부족한 독자로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예방법은 생각하자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자는 결심을 다지는 것뿐이다.

 

다소 무미건조한 과학실험 보고서와는 많이 다르고,  실험 아이디어 자체가 기발하고 웃기고 즉각 이해가 가지 않는 의외의 내용들이 있다연구자들이 무척 재밌게 연구했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연구실과 실험실에 머물 것이라 짐작되는 심리학자들이 사이비 종교 단체에 위장 잠입한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놀라운 실험이다. 1950년 대 초반에 인지부조화*를 연구하고 해소하기 위한 전략을 연구하려는 목적이었다.

 

인지부조화감정과 사고가 서로 상충할 때 발생하는 거슬리고 불쾌한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한 감정 상태페스팅거 연구팀의 관찰 실험 결과.

 

2021년에도 이런 현상은 없어지지 않았고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심지어 구체적인 근거와 증거가 있다 해도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려 하지 않는 이들은 규모가 큰 조직을 이루기도 한다


알지만 인정하기 싫은 거라면다른 이익 구조가 복잡한 거라면 오히려 안심(?)인데정말로 판단이 불가능한 인지부조화 상태라면 소통의 불가능함에 절망스럽다.

 

어둡고 무거운 현실 설명 이외에도 긍정적인 말은 어떻게 행동을 변화시키는지와 같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실리는 내용도아는 것이 적을수록 왜 사람은 비판적으로 변하는지처럼 뜨끔한 내용도 있다.


그리고 근래에 무척 무서워하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자꾸만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가스라이팅이 떠오르는 내용도 있다.

 

누군가 당신을 오랜 시간 동안 미친 사람을 상대할 때처럼 대하면 당신도 점점 자신의 정신상태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어딘가 아프다고 느낄 확률이 아주 높아진다.”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미쳤어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정신 못 차리네정신 없네라는 표현도 더불어서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만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위험도가 더 높고 치명적인 가스라이팅이 더 활발하게 지적되고 논의되기를 바란다누군가는 자각을 못해서 타인에게 이런 유해를 거듭 가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학술논문부터 SNS 상의 간단 테스트들까지 심리학을 언급하는 내용들은 우리 사회에 아주 많다그래서 새로운 것이 없다거나 익숙하다거나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을 수 있고, 그런 경험은 심리학 자체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불신을 높일 수도 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제약이 적은 시스템적으로 정교하게 마련되기 전 시절이라 활발한 실험들이 가능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지금은 어디서 누가 무슨 실험들을 하고 있는지 문득 모르는 분야의 일이 궁금해진다뇌과학 분야에 관심도 투자도 몰려 있지 않나 짐작만 해본다.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파악하기 위해더 나아가 통제할 수 있다고 인식하기 위해 사건의 앞뒤에서 어떠한 인과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눈에 비치는 모든 활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그 행동의 주체가 지닌 인격 등 성향적 요소에서 이 이유를 찾지만 상황적 요소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귀인오류attribution error

 

이 책은 내용과 맥락과 유효성에 있어 차별적 충실함이 있으면서도 제목처럼 재밌고 여전히 고민할가치가 있는 주제들을 담고 있어 어려움을 느끼기 보단 재밌게 잘 읽었다


상황을 살짝만 바꾸면 2021년에도 의도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 자행되는 각종 사회적 실험들의 심리학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무척 유용한 훈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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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없는 세상 - ; 플랜 B를 살다
밥장 지음 / 도트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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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계획은 야심찼지만 어느새 원하던 나이는 지났고 지금은 의욕도 계획도 없이 흐릿한 매일을 사는 기분이다재택근무란 편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시절에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기대수명의 연장은 어떤 의미일까각자의 느낌은 다르겠지만 현실적으로 우리의 노후도 아이들의 미래도 점점 가난해질 일만 남았거나운이 좋으면 우리는 늙어서 죽겠지만 아이들은 늙을 기회조차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안을 폭증시킨다.

 

어디서 보아도 다감했던 시가지한려수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느끼게 해준 아름다운 바다 풍경모든 것이 맛있었던 통영 여행이 그립다그곳에 살롱 호심이 있고작가들이 있고이 책의 저자는 어여쁜 그림과 글을 담아 전한다은퇴가 없다는 말이 숨 가쁘고 버겁지 않게 들리니 마법이다.

 

함부로 꿈을 강요하지 마세요.

억지로 술을 마시라는 거랑 다를 바 없으니까요.”


나이 오십에 통영에 집을 사고 문화살롱을 열고결심과 실행이 일단 무척 부럽다어디서 살 것인가는 늘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와 짝을 지어 어려운 문제로만 다가와서 나는 내내 답을 못 찾고 사는 기분이었다그 결과 할 수 있는 일을 겨우 해치우며 사는 일상을 감당하고 있다.

 

당신을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개념은 무얼까요?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여지껏 보고도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늘 복작거리는 틈을 비집거나 주차장에서 오래 기다려 차를 빼내거나 했던 통영의 북적거렸던 시절도 코로나와 함께 침묵에 잠겼나 보다살롱의 매출은 저자가 기대한 것에 훨씬 못 미친다자영업은 자기 건물이라 해도 영업을 시작하자마자 빚을 지고 매달 고정지출을 감당하고서야 숨을 돌린다고 하던데…….

 

장사가 되든 안 되든 꼭 내야 할 돈도 참 많다.”

 

저자는 전문가로서 정점을 지나고나니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져 있다고 전문성의 유통기한을 언급한다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모르는 나로서는 속도감과 치열함을 짐작만 해본다.

 

어떤 직업은 세상과의 속도가 빠르거나 느리게 어긋나고 어떤 직업은 세상의 속도와 아주 무관하게 지겹기만 한 일도 있다저저의 모친께서 언급하신 말 속에 내게 더 익숙한 세상이 들어 있다.

 

장사란 견디는 거야손님이 없어 심심하고 지겨워도 그냥 버티는 거야.”

 

스승과 선후배 지인들 중에 은퇴를 하고 가장 부러운 분은 코로나 전에 은퇴하시고 여행을 즐기신 분들 일상을 다시 만들어 가시고 매일 이전과는 바뀌어 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여행이란 사무실 칸막이 안에 갇혀서 서서히 말라가고 있는 나를 위해 새로운 씨앗을 던져두는 일입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 중 유사한 면모는 선명하고 물질화된 결과를 목표로 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 분들이다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고내 가족 내 집을 염려하며 살던 시절을 지나동식물과 환경과 사회를 찬찬히 살펴보시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하시는 대단한 분들이 많이 계신다그런 분들의 소식을 글로 사진으로 접하는 것이 감사하고 보람 있고 마음을 깊이 울리는 학습이고 격려이고 위로이다.

 

그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고 싶다

이제 높이보다 거리목표보다는 범위가 먼저니까.”

 

다정한 문장들과 그림들을 계속 보며 시간을 보내니 잠시 불안이 잦아든다감사한 일이다계획을 세울 수 없는 날들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계획을 실행한 날에 다시 이 책을 읽고 싶다마음 편히 통영을 다시호심을 처음 찾아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지구도 태양도 우주마저도

멀고 먼 시간 뒤에는

차갑게 식은 채로 정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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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마음챙김 명상 - 초기 불교 문헌과 수행법 안내
아날라요 비구 지음, 김수진 옮김 / 지식과감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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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한 지는 오래지만 아는 바는 거의 없습니다. 우연히 만난 틱낫한 승려께 걷기명상만 배워 계속 했을 뿐이니까요. 프랑스에 플럼빌리지에 사시던 제 유일한 명상 스승께선 불교 교리나 수행법에 대한 일체 말씀도 없으셨고, 우주의 목소리처럼 보편적인 사는 일에 대해서만 말씀과 글을 주셨지요. 베트남 민주화운동을 하신 젊은 시절 면과 이후 가르침의 내용들이 법정 스님과 닮으셨구나, 혼자 이렇게 생각하고 두 분 모두를 무척 경애합니다.

 

사진: https://plumvillage.org/

 

이 책은 무척 신기하고 권위 있어 보여 궁금한 책입니다. 호흡과 명상에 대한 수행법이자, 전혀 모르는 초기 불교 문헌 관련 내용이 있으니까요. 다들 그러신 건 아니겠지만 주로 내 자식, 내 가족의 복을 비는 대상으로 부처를 대하는 한국 불교와는 촌수가 아주 멀어 남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불교 학자이자 명상 스승인 아날라요 스님입니다. 최대한 대중서로서 명상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16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해주십니다. 그러니 불교 이론에 대한 치밀한 논증이나 설법서는 아닙니다.

 

수행법만 관심을 두신다면 앞의 여섯 장을 중점으로 읽으시고, 초기 불교 관련 경전들에 관심이 있으시면 나머지 분량에서 직접 발췌한 문장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쓰신 논평은 아마 처음 읽는 듯한데, 불교의 관점을 이해시키기 위한 친절한 논법입니다.

 

https://blog.naver.com/ksbookup/222463162276

(음성자료)

 

호흡의 기본은 우리도 다 아는 들숨과 날숨입니다. 저는 깊은 숨을 쉬는 것이 좋아서 - 실제로 통증도 좀 줄어드는 효과 - 걷기나 달리기를 좋아합니다.

 

호흡은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로, 우리는 호흡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가는 곳에는 호흡도 같이 갑니다. 그래서 호흡은 우리에게 현재 순간을 상기시켜 줍니다. (...) 오직 이번 호흡에만 우리는 마음을 씁니다. (...) 이렇게 현재를 상기키시는 것은 마음챙김의 주요 기능이자 사띠(sati, 팔리어, 스리랑카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적을 때 사용한 언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에 들어 있는 핵심 요소인데, 아날라요 스님은 이를 가리켜 우리가 유념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아나빠나사띠 슷따>라는 낯선 이름에 놀라지 마시고 내용을 읽으시면 16단계의 호흡과 마음 챙김 가이드가 나옵니다. 물론 상식적인 구분 이외에 호흡과 관련된 수행의 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깨달음은 그것이 점진적이든 완전하든 사소하다고 볼 수 없으며, 깨어남 자체 즉 체화된 깨어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깨달음은 무척이나 꾸준히 발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진지하게 책을 읽고 잘 이해하고자 하시는 분들에게는 불교에 대한 기초지식과 이해가 필요불가결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읽을 수 있는 것만 읽는 게으른 독서를 하는지라 모두 이해하려는 목표 없이 내용을 읽어 보았습니다.

 

해탈, 열반, 초월은 흔들림이 없는 마음 상태라고 하는데, 하루에도 지치도록 흔들흔들 거리는 저는 순간 진정을 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은 필요하지만, 아예 흔들림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는 일은 목표로 삼은 적이 없었습니다.

 

호흡과 명상이라는 수행을 통해 흔들리는 진폭을 좀 줄여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혹은 불필요한 불안을 조금은 진정시키는 상태를 배운다거나.

 

이 책에 따르면 16단계의 호흡 챙김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평화롭고 고요한 성질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끔 잠시라도 그런 상태를 경험해보면 좋겠단 생각을 합니다.

 

“16단계 각각은 하나의 현실에 들어 있는 분리된 특정 측면을 특징으로 하는데, 여기서의 현실이란 살아 있음, 지각이 있음, 그리고 몸, 느낌, 마음, 실제와 지혜라는 가장 중요하고 또 서로 완전히 포괄하는 차원들로 매 순간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현실을 말합니다. 언제나 요구되는 것은 똑같습니다. (...)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과 함께 단지 머무는 것인데, 호흡은 그 어떤 대상보다도 필연적으로 순수한 알아차림과 공존합니다.”

 

두통이 며칠 지속되어 어제 MRI 검사를 하고 다음주 화요일 결과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감사한 이웃이신 정세희 교수 - 뇌질환 전문의이자 교수, 수상 경력에 빛나는 마라토너 - 께서 올리시는 늘 재밌고 유익한 포스팅에 뇌에 관한 내용이 있어 이래저래 오늘은 반드시 운동을 충실히 하겠다 결심을 했지요.

 

걷기 명상으로 시작해서 조금 달리며 깊은 호흡을 하고 나서 읽으니 뭔가 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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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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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자산이나 투기로 살아온 삶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소득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다그러나 노동자는 미처 종류를 다 헤아려볼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다한 개인의 삶에서도 노동 조건이 다양하게 변화해가고흔히 말하는 철밥통 직업을 가지지 않는 한 조건은 극히 드물게 개선되고 대부분은 처참하게 나빠진다.

 

대학을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할 때는 이건 잠시이고 곧 원하는 일을 하면서 마음껏 뜻을 펼칠 직장을 찾을 것이라 의심하지 않았다계산을 꼼꼼하게 해서 소위 안정된’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을 한편 안타까워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쫓던 즐거움은 몇 해 지나지 않아 당혹과 포기와 좌절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오래 배운 것이 취업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어 강사자리를 전전하다외국기업 한국지사에서 일하다안정된 직장의 필요성을 뒤늦게 절감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부조리한 조직생활에 좌절했다다시 사기업에 취직해서 밤샘 근무를 격일로 하다 일 년 만에 몸이 엉망이 되었다그나마 계약 사기로 회사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소송에 휘말리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어떤 일이건 마감을 어겨본 적이 없었다하지만 하고 싶었던 공부를 오래하며 취업 최적기를 지났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 것과 같은 세월을 견뎌야했다뭘 그리 잘못 살았을까어제는 서로가 힘들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거래처 한 곳이 기어이 멈췄다불안이 덮치고 두통이 심해진다앞으로 내가 할 노동의 형태는 무엇일까.

 

그동안 아직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뉴스보도들에 심장이 긁히는 기분이 든다세상의 다양한 분야에는 하청노동자들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인구는 줄어든다고 해도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세상이라 간접고용된 노동자들은 언제나 보충 가능한 존재들이라 여긴다절박한 이들은 매일 늘어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겠지.

 

몇 달 전 집단 해고된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들은 부당한 해고에 저항하고 있을까다른 분야에 다시 간접고용되었을까. 2018년 화력발전소 산업재해로 사망한 간접고용 노동자 용균씨의 마지막 월급명세서 실지급액은 211만원이었구나용역업체는 311만원이나 가로채 갔구나원청업체 낙하산들인 하청업체 사장들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연간 억대를 받는구나.

 

8시간 업무를 기준으로 계약을 하고 야근 수당은 계산하지 못한다고 하던 내 경험은 이 책의 노동자들도 고스란히 겪고 있다급여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업무타인의 생계지급금을 쥐고 휘두르고 내치는 관리자들과 또 다른 을들세상은 코로나 전후로 나뉜다고 하지만 고용과 노동은 이전에도 지금도 이런 형태가 다반사일 것이고 저항과 노력을 통해 법을 바꾸지 않는 한 미래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 안전장치도 지금은 없어요도급계약서에 용역업체가 노무비를 전용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걸 수는 있어요그런데 그렇게 하는 곳은 없죠.”

 

그런데 현재의 그리고 미래의 나는 새로운 노동 계약을 할 때 이 조건을 요구할 수 있을까할 수 없는 변명을 더 열심히 찾을까낙하산 사장들이 퇴직 수순을 밟듯 챙겨 가는 여정에 하청업체의 운영 형태가 존재하는데이 모든 것이 다 합법이라는데.

 

1998년 파견법이 가진 간접고용의 위험성을 미리 알고서도 기업의 선의를 믿자고 사이비종교처럼 국민을 우롱했다는 걸 이제야 배운다. 2021년까지 모든 정부는 기업의 대변인을 자처했고 파견업체에 유리한 규제 완화를 계속해왔다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말 말고 행동을 보라는 말을 나는 신뢰한다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어떤 법을 발의했는지를 보면 공약을 광고하고 표를 구할 때보다 더 정확히 그 사람이 보인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선풍기와 목장갑을 지급하는 일물류센터 노동자들이 쉴 그늘막을 설치하는 일은행 경비원에게 마스크를 지급하는 일이 기업 경영을 어렵게 하고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일인가답답함과 기막힘을 거쳐 분노가 치민다사람들이 절규 하게 만드는 데에는 이 모든 것들이 퇴적되어 한이 되는 오랜 시간이 있었다.

 

모르겠다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끼는 숨막힘과 갑갑함이 실은 내 처지를 불안해하는 투사의 감정인지타인의 삶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제대로 된 인식에서 비롯된 공감인지이 감정은 솔직하다 하더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그 역시 거짓에 다름 아니다피할 수 있으면 다시 적당히 외면하고 희생 없는 응원과 후원만으로 면죄 받고 싶다.

 

중간착취’, ‘지옥도’, ‘원청’, ‘하청이라는 단어들을 세상으로 끄집어내고 기록하고 출간하여 알린 모든 분들의 결심과 노고가 감사하고 존경스럽다덕분에 나처럼 게으르고 비겁한 사람도 그 모든 악행의 배경과 노동 현실을 배웠다이제 나는 적어도 이 단어들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현실은 분명 좀 더 보이고 때론 고민을 할 것이며 뭐라도 참여하고 싶을 것이다.

 

착취 지옥의 한 가운에 계신 당사자들을 떠올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선 나를 생각한다보이고 느끼는 문제들이 있어도 남들이 해결하도록 빠져나가 산 탓에 여기에 이르렀을 것이다우리는 지독하게 불안하고 견디고 버티려는 힘이 빠져간다국회의원들과 고용노동부 직원들은 어떤 심정인가교묘해지는 착취 행위에 솔직하게라도 대응할 생각은 있는 것인가.

 

김훈 작가님 감사합니다.

이건 잘못이다라고 분노하시는 문장들 틈에서 잠시 긴 숨을 쉬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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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솔시레 -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조희태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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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사가 되고 싶던 꿈을 이루었고 글쓰기도 좋아하셨지만시력을 잃어버리는 시련을 겪으시고 소리책을 듣고 키보드 자판을 익혀 글을 남기셨다.

 

<줄눈 낙서 솔시레>로 소설가로 등단하셨고블로그 활동을 하며 글들을 올리시고 시각장애인 잡지에 글을 연재 중이시다.

 

피아노 화음으로 배운 화음솔시레시레솔에 열세 살을 위한 혹은 연령 무관 독자를 위한 어떤 이야기를 담으셨는지 궁금해서 펼쳐 보았다.

 

처음부터 줄곧 끝까지 읽지 말고 차례를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서 읽으라고 가르쳐 주신 요령을 따라 읽어 본다.

 

루이 브라유는 오르간 연주 실력이 뛰어나 갈채를 받으면서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점자 만들기와 점자 보급에 자기 일생을 바치었다.”

 

목차를 먼저 읽었는데 44명 중에 모르는 이들이 꽤 많다그리고 당혹스러운 소제목도 눈에 띈다어느 책이나 저자의 사견이 반영되기 마련이니.

 

이 많은 이들이 열세 살에 다들 기록될만한 무언가를 했다니 놀랍기만 하다나는 무엇을 했는지 기억을 오래 전으로 되돌려 본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플루타코스 영웅전> 등 책 읽기를 좋아해서 인쇄소 종업원 일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일화가 눈에 띈다완역본이 출간되어 이번 생에 마지막으로 읽겠다 결심한 직후라 열세 살이 아닌 독자지만 반갑다.

 

<프랭클린 자서전>의 내용 중에 어릴 적 권고 받은 가르침의 내용들이 많아서 신기하고 반가워 읽어 본다꼭 따르라거나 못 지키면 벌을 받지도 않았지만 어떤 것들은 오래 영향을 미쳤고 어떤 것들은 지금도 비슷하게 지키고 있다습관이 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절제배부르도록 먹지 마라.

시청률이 높다는 먹방이 끔찍한 내 정서의 기저에는 탐식에 대한 경고를 자주 들어서가 아닌가 싶다말기암 치료 중이라 식사가 고역인 분들이 먹방을 시청하며 음식을 드신다는 소식을 듣고 강렬한 감정이 좀 누그러지긴 했다그래도 여러 가지 이유로 먹방이란 프로그램은 참 난감하다.

 

침묵남에게 유익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마라.

만약 남에게 유익한 말을 하라는 것이 가르침이었다면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질서모든 물건은 제자리에 정돈하라.

살아보니 시간과 체력과 정신 낭비를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결단결심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라.

언젠가 꼭 한 번은 깨고 싶은 금기 사항!

 

절약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는 일에 돈을 쓰지 마라.

어째서 절약의 덕목인지 헷갈리지만오전에 병원에 다녀오면 세상만사가 귀찮지만 꾹 참고 포장배달에 돈을 쓰지 않는다아픈 건 나만이 아닌 것 같아서다른 사람들도동물도식물도공기... 다 아프다그 이유에 인간이 편리함을 찾아 하는 활동이 거대하게 자리한다.

 

진실남을 속이지 말라.

어떤 통계에선 인간은 하루에 거짓말을 100회 이상 한다는데 나는 내가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거짓말은 부지런하고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기도 하다.

 

정의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남에게 돌아갈 유익을 빼앗지 마라.

동시대의 남도 아니고 인간은 미래 세대의 유익을 빼앗았다우리는 어쩌면 늙어 죽겠지만 늙게까지 살지 못한 이들도 있을지 모른다정의롭지 못한 일이다오래 전 공부한 환경정의를 이제 현실로 실감한다.

 

청결몸과 습관의복 등을 항상 깨끗이 하라.

몸과 의복은 쉬운데 습관은 쉽지 않다.

 

평정사소한 일이나 일상적인 일에 흔들리지 마라.

매일 혹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흔들흔들한다.

 

(...)

 

위인전과는 많이 다른 인물 소개와 설명이지만 풍성한 이야기들 속에 관심을 끄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면 독서의 목적이 잘 성취되었다고 믿는다저자가 언급했듯이 순서대로 일독이나 완독하지 않아도 되는 점이 큰 장점이고 열세 살 한정이 아니라 가독 시간이 너그러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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