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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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직후부터 이어진 지인들의 눈물바람에 당혹하고 조바심이 낫지만 두렵기도 한 마음에 미루다 이제 읽는다간신히 숨만 쉬도록 하는 통증을 동반하는 병증으로 잠이 오지 않는 나의 밝은 밤에 최고의 동반책이다.

 

나는 증조모를 단 한 번 뵈었다고 들었다기억은 없지만 사진은 남았다그 조우를 상상할 때는 늘 서로의 눈을 떠올린다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애정과 신뢰와 반가움을 담은 시선과 몸짓그렇게 기억하기로 정했다.

 

증조모조모모친나로 이어지는 100년이 넘는 책 속 이야기가 멀지도 남 같지도 않다다른 삶을 살았고 생각을 한껏 나눌 기회가 없어 결국엔 서로를 모른 채 헤어졌고 그러하겠지만우리는 타인일 수가 없다.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나도 그랬으니까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방어할 힘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격당하곤 하던 내 존재를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존심도 있었던 것 같다.”

 

사진 속에 여든에 가까운 증조모와 오십대 젊은 조모와 서른이 된 모친과 태어난 지 100일된 내가 있다사진은 늙지 않는 줄 알았더니 오십이 다 된 내가 다시 보는 사진 속 우리는 비슷비슷하게 닮아가며 나이를 먹은 느낌이다.

 

보고 싶지.” 할머니는 내가 마치 할머니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바라보다 입가에 힘을 줘서 웃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지 뭐.”

 

최초부터 최후까지 유전자를 추적할 수 있다는 모계로 이어 내려온 100여 년을 채운 삶이 회전한 듯 수평으로도 나란히 이어진다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느라 서로 맞닿은 몸들처럼.

 

어쩌면 우리 엄마로부터 이어졌는지도 몰라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그렇게 감탄을 잘하니 앞으로 벌어질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받아들일까 싶었어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우와하면서 살아가겠구나그게 나의 희망이었던 것 같아.”

 

나는 통곡하지 않았다심장이 쿡쿡 통증을 분출했지만 이야기는 눈물바람보다 통쾌하고 서늘하게 멋지다수없이 잃었고 강해졌다책의 말미에 내가 받은 것은 손수건이 아니라 앞을 헤집고 쳐 낼 다른 것이다밖은 어둡지만 살아 있는 모두의 용기로 마음은 밝아온다.


.............................................................

 

"나는 허블 망원경이 2003년에서 2004년 사이에 찍은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줬다천문학자들이 울트라 디프 필드’*라고 불리는 그 사진을오렌지빛보랏빛푸른빛흰빛을 내는 은하들이 검은 배경에 흩뿌려진 보석들처럼 보였다."


백삼십억 년 전 우주의 모습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그렇게 먼 옛날의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는 거야?”

맞아요.”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그 오래전 걸 어떻게 본다는 거야.”

그러게요근데 그게 가능하더라고요.”

할머니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네가 하는 일이 그런 거니?”

그렇게 대단한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할머니가 망원경을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도 지금 태어났으면 너 같은 일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내 조모와의 비슷한 추억이 생각나서 읽다가 잠시 멈추었다.

퇴계 직계손이란 이유로 평생을 비녀와 한복을 착장하고 한 여름에도 버선을 벗지 않으셨던,

자손들에게 한 번 목소리 높여 야단도 치지 않으셨던 분.

어떤 무수한 생각들을 품고 질문들을 하며 사셨을까.

 

물리학과를 가고도 늘 천문학의 세계에 머물고 싶었던

자신과 너무도 다르게 사는 자손이 전하던 말들을 들으시며......

어쩌면…… 나와 같은 세대로 태어나셨으면

천문학자가 되셨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조선규방가사를 읽어 주시거나 살아온 세월을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기특하게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어 녹취한 자료들이 잔뜩 있는데

다들 살아라잘 살 거라.” 하고 돌아가신 후

육성을 들으면 열도 못 세고 울음이 터져 정리를 못하고 두었다.

...................................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에 그애의 존재를 구겨 넣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백정의 자식이라는 말로 자신이 그애에게서 받았던 모든 느낌을 부정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없이 쓸쓸해졌다."

 ....................................

 

보고 읽고 쓸 수는 있었겠지만, ‘백정’* 이라는 단어를 일상에서 사용해본 적이 없다사전을 찾아보니 한자가 이렇다. ‘’, 흰 것은 오랫동안 부재와 부정과 결핍의 의미로 사용된 색이었나 싶다백정백수... 예로 들건 두 개 밖에 없네장정이 아니다란 뜻그런 존재였다.

 

백정 白丁

 

2. 역사 고려 시대에토지를 직접 경작하는 일반 농민을 이르던 말특정한 직역(職役)이 없었다.

 

3. 역사 고려 시대에서인(庶人계통에 속하던 한인(閑人). 단독으로 정호(丁戶)를 구성하여 토지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한 사람의 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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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허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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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6주년을 맞은 날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78년 만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날, MBC PD수첩에서 대한민국 국정원과 일본극우가 부당거래를 했다는 방송을 보고 충격을 받은 날,

 

그리고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대한 대한민국 언론은 단단한 내부거래를 한 듯 조용했다기막힌 노릇이나 광복의 실상과 현재를 깨닫기에 더 확실한 현상도 없을 듯하다.

 

먼 나라에서도 점령군의 앞잡이 정치인 노릇을 하다 상황이 바뀌자 돈 가방을 몇 개씩이나 들고 재빨리 달아난 대통령 소식을 들었다. “국민의 안위와 국가 보위에 관심 없는 통치자들은 동서고금 바퀴벌레처럼 생명력이 강하고 길다.

 

오랜 세월 서로 죽고 죽인 세월이 긴 일본과의 대전란 중 하나인 임진왜란 시대로 떠나 또 다른 장군을 만난다이 시대를 볼 때마다 세상 무능하고 속이 좁고 겁만 많은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선조를 만나기가 고역이다.

 

선조는 나라를 회복시킨 것은 명나라의 공이지 조선 사람들은 한 일이 없다고 단언했다곽재우 같은 의병장 등은 공신 선정에서 제외되었고 그 자리엔 피난 길에 선조를 따라나선 80여 명이 전쟁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내시가 24마부나 의원 등이 20여 명 포함되어 있었다.”

 

하필 곽재우 장군은 선조가 손수 과거시험에서 탈락시킨 분이다시험관은 2등이라 낙점했으나애민 사상부국강병의 경세철학군주와 조정에 대한 거센 항거로 악명이 높은 이었다시인으로서의 모습에 겹치기 쉽지 않은 기록도 보인다.

 

전하*께서는 신의 고언은 듣지 않으면서 신의 몸만 쓰려는 것은 다른 신하들처럼 관직으로 묶어두고 단지 부리기만 하려는 것입니다전하께서는 신하들을 개와 말처럼 여기면서 신을 그 가운데로 몰아넣으려 하지만 신은 로써 불가합니다.” *광해군

 

적들이 이미 이곳까지 왔소이대로 있으면 우리들의 부모처자들은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될 것이오이제부터 이 마을엔 상전과 하인은 없소오직 의를 위해 싸우는 형제밖에!. 지금부터 나는 이 전쟁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을 것이오전답과 가축은 물론 자식의 의복부터 처의 버선까지.”

 

역사서의 장점은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도 모두 다른 실상을 알려 준다는 점이다후대로 올수록 고증이 늘어나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저자가 KBS 다큐멘터리 담당 PD라 인물들이 상당히 입체적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곽재우는 모두가 도망갈 때 맨 먼저 칼을 든 의병장으로서 그 후 도교에 침잠해 홀연히 세상에서 숨어버렸다는 정도였다그러나 곽재우는 전쟁 중의 업적도 빛나는 것이었지만 특히 전쟁이 끝나고 그가 보여준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삶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들으니 홍의장군은(聞道紅衣將)

왜군을 노루 쫓듯 한다고 하네.(逐倭如逐獐)

그대를 위해 말하니 끝까지 힘을 다해(爲言終戮力)

곽분양처럼 되소서(須似郭汾陽)

 

출처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4777&cid=59015&categoryId=59015

 

자력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해 이런 방식의 광복은 미래를 위해 두고두고 어려움이 될 거란 원통해하셨다는 독립투사들의 통곡처럼 올 해도 어둡고 무거운 날씨를 동반한 광복절이었다매순간 만들어가는 현실이 곧 역사라 비법도 지름길도 없다.

 

틈나는 대로 때론 시간을 내어 배우고 잘못된 것들을 발견하면 끈질기게 고치고 사리를 위해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에 알게 모르게 참여하지 않도록 애쓰며 사는 수밖에 없다.

 

군주와 백성은 실상 하나이다백성이 편안하면 군주가 편안해진다군주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한다.”

 

대통령은 군주가 아니다이전 다른 글에서 언급했지만 굳이 나라의 주인을 찾으라면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이 주인이다그러니 서로를 편안하게 하는 정치를 모두 함께 고민하고 참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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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세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5
김미월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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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박물관 탐방 프로그램 강사이다월요일 아침불편한 감정황당하고 우연한 사건이 촉발한 생각들이 덩치를 불려가다 오랜 인연을 정리하기에 이른다.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이 이전의 일상을 확실하게 뒤집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일주일의 세계>라고 명명한 것에 공감한다.

 

연민과 사랑은 반드시 헷갈리지 말아야 할 감정들일까선택과 판단의 기준이 확실하다면 원하는 대로 정리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맞거나…… 필요한 일일 것이다혹은 어떤 사소한 이유라도 결정적 계기가 될 만큼의 허약한 관계였을 뿐.

 

그것이 계기였을까요그런 것도 계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어쩌면 애초에 계기 같은 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라 감출 줄 모르는 감정은 상대를 더 깊이 상처 입힐 수 있다정신병을 앓는 교사였던 엄마의 딸인 어린 정은소가 외할머니와 사는 왕따 오원화에게 가지는 우월감의 정체는 자신의 처지를 덜 힘겹게 견뎌보려는 약은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저는 제 말 속에 들어 있던 즉흥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던 그 견고한 악의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애에게 상처를 주고자 했던 저의 깊고 단단했던 진심을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으니 사과할 일도 없고 결국 화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상황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원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요.”

 

그 기억을 품고 자란 주인공이 선택한 남자 봉수는 어른이 된 남자 원화처럼 보인다소외되고 따돌림 당하는 인물이다


결국 은소는 어릴 적 원화에 대한 악의를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관계 속에서 재현해오다 월요일 아침의 뒤통수 가격을 봉수에게 고스란히 옮긴 것일까.

 

그에게는 마치 한파에 수도관이 얼어붙어 당장 세수도 못 하게 생겼는데그 원인이 자그마치 지구 상공의 제트 기류가 힘을 잃으면서 북극의 찬 공기가 밑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라는 텔레비전 날씨 뉴스를 볼 때처럼 비현실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을 겁니다.”

 

뒤통수를 맞은 건 내가 아닌데 마음이 후려치기 당한 것처럼 얼얼하다. 제 아무리 자기 합리화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인간은 말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하는 편이 정확하다.

 

눌어붙은 자국처럼 긁어도 벗겨지지 않는, 착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은, 자비 없고 가감 없는 존재의 여전히 이기적인 참회록 같은 이야기다.

 

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연민이 중요한 사람그러나 그 연민이 곧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선배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었습니다원화에게 아무 잘못이 없었던 것처럼.”

 

한 삼십 분 읽었나 싶었는데 끝에 다다랐고 사흘은 질문으로 맴돌 작품이다타인에게 가한 악의는 자신에게도 확실히 새겨진다는 강렬한 경고문처럼 섬뜩하기도 히다.

 

잠시…… 노골적이진 않아도 결국 우월감에 기반을 둔 선의는 그래도 추구해야할 선택지인지낱낱이 분석하고 비판하며 지양해야할 태도인지 고민하였다.

 

이토록 불확실한 삶도무지 모를 다채로운 모순 덩어리인 우리시간이 지나도 어느 아침 불시에 뒤통수를 가격 당할 정도로, 잊지도 못할 악의를 반복하는 일만은 적기를 바란다.

 

제가 제안하듯 명령하면 그 애가 동의하듯 복종했던 거지요.

 (...)

 그래서 그 애가 처음으로 뭔가를 제안했을 때 저도 모르게 흠칫했습니다.”

 

 

전화하지 마때가 되면 내가 할게.”

(...)

그럼나는 기다리기만 하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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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부
마르틴 쉬르츠 지음, 권오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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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 서적들의 깊이와 충실함은 읽기에 설레고도 두려운 경험이다이 책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해 방해가 거의 없는 아침 독서 일정으로 삼아 읽었다. 5개장으로 구성된 내용이 충실하나 읽기에 곤란할 정도로 어렵지 않고주장하는 바가 명쾌해서 예상보다 빠른 완독이 가능했다.

 

분명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의 유럽의 경제 정치 상황과 불평등에 관한 고찰인데한국 사회를 해석한 것이라 해도 무리가 없고바로 적용하면 좋겠단 내용들이 많이 놀라웠다산업 금융 자본주의에게 국경이 사라진지는 정말 오래되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소득불평등이 아니라 자산불평등이라는 내용에 경제적 불평등을 실질적으로 규정하는 구체적인 내용이다부동산 자산에 대한 열띤 논쟁이 그치지 않고 현실이 바뀌기보다 나날이 악화될 가능성만 높은 한국 독자들은 더욱 체감할 것이라 느낀다.

 

부유함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까과도하지 않은마땅한 부유함이 있는 것일까?”

 

자산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를 세계 각국에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행정등록 되지 않는 삶이 거의 불가능한 한국인이라서 즉각적인 느낌이기도 하지만자산가들은 탈세를 목적으로 여러 편법/불법으로 등록은 고사하고 있는 자산도 감춘다는 공공연한 비밀과,

 

납세자의 당연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시혜를 받고, ‘공짜를 탐낸다는 시선을 받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공고한 사회시스템을 생각하면 당연한 지적이기도 하다문서만이 아니라 각종 심사를 거쳐 가진 자산을 샅샅이 보고해야 하니까.

 

그러니 부의 과도함Überreichtum*을 측정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측정해야할 지가 불명확해지는 것이다한편으로는 능력주의 사회를 찬양하고동시에 상속재산을 통해 명백히 모순되는 시스템이 운용되고 있는 점도 평등과 공정에 대한 복잡한 이율배반을 실감하게 한다.


Überreichtum : 저자가 만든 신조어. Über + reichtum : 과도 + 재산

 

현대의 슈퍼리치들 - 2019년 기준 자산 10억 달러(약 1조 1440억 원이상은 2,153명이다정말로 이들의 부가 당사자의 능력에 따른 정당한 대가인가이들은 자산만 보유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협상을 좌우하고안전자유독립성을 정서적로도 부족함 없이 누린다.

 

부의 극단적인 집중은 해소가 될까날카롭고 명쾌한 지적은 무척 인상 깊었다해법에 있어서는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적어 더 그렇겠지만 저자가 제안한 것이 유의미하게 성사되는 장면들을 쉽사리 상상해내지 못했다.

 

교육은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한 개인의 재산 보유에 상한선을 두거나상속 세율을 높이는 방법은 저항이 거세어 실효성이 부족할 지도 모른다저자가 지적한 대로 부자들의 자산을 명확하게 파악한 자료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까.

 

소수의 손에 집중된 너무 과도한 부는 이미 오래전에 사회를 갈갈이찢어 놓았다. (...) 과도한 부자들에 대한 이미지와 우화에 맞서가난한 사람들노숙자난민들에 대한 현실성 있는 이야기가 제시되어야 한다.”

 

갈갈이: ‘갈가리의 비표준어발견!

 

여러 가지 이유로 미래가 불확실해진 시절을 살면서 가난이 모욕의 근거가 되지 않는 사회를 바라는 독자로서 이 책 덕분에 경제학자이자 심리학자가 주관하는 모임에서 철학자와 문학가들을 만나 진지한 담론을 나누는 풍경에 초대받은 것처럼 즐거웠다.

 

특히 경제학자이면서 심리학자인 저자의 특성이 잘 드러난 주장과 담론은 새롭고 흥미로웠다읽다 보면 가난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정치의 영역에서 문화수단을 이용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건가하는 무서운 기분도 든다.

 

부자들에게 유리한 감정정치가 과도한 부자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에 기여했다감정정치의 측면은 매우 과소평가되어 왔다. (...) 질투탐욕또는 분노와 같은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이 감정에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없다. 21세기의 과도한 부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특권을 정당화할 때 자신들이 미덕을 갖고 있음을 공공연히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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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로리 - 새장 밖으로 나간 사람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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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판데믹 시절에 사람이 마냥 반갑지 않고 낯선 이들은 더욱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현실도 만만치 않은상상해본 적 없는 세상이다<맬로리>에서도 등장인물이 새로 등장할 때마다 독자인 나도 일단 경계심이 들고 무섬증부터 스친다서글프다.

 

<버드박스>는 소재가 새롭고 특이한 점도영상으로서의 충격적 장면도 압권인 영리한 작품이다인간이 스스로 신체에 제약을 가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발상은 아찔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조건이다더구나 이런 삶을 강제하는 미지의 것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이 더욱 숨 막히는 긴장감을 더한다.

 

피해자가 어떻게 공격을 당한’ 사실을 전할 수 있을까이미 미쳐버린 사람들이…….”

 

<맬로리>에서 성급하게 알고 싶은 점은 바로 전작에서 불친절한 설명조차 없었던 이런 내용들이었다. 10년이 지났고 아이들은 자랐다하지만 삶은 여전히 위험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유지된다안전에 대한 강박이 이젠 별로 강박처럼 보이지 않아 기시감과 현실감이 지나치다.

 

절대 눈뜨지 마라!”

 

시각이 차단된다는 상상은 내게 최상위 공포이다듣고 말하는 기능이 없어도 보고 읽고 쓸 수 있으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런 의미로 <콰이어트 플레이스> 보다 <버드박스>가 훨씬 더 무서웠다.

 

맹인인데 미쳐버린 사람. (...) 아네트는 단순히 정신이 무너진 게 아니다그 여자는 눈이 보지 않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시각을 차단했는데시각이 없는 이마저 광기에 사로잡혀 목숨을 내던지다니 소름이 심하게 지나갔다코로나 이후의 일상을 뉴노멀이라 부르는 현재 인류 역시책 속의 구인류에 다름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

 

맬로리 역시 구인류이고살아남기 위한 목적 하나로 더 깊고 좁은 세상으로 숨어야한다가족과 지인들을 잃은 처지라 무슨 일이건 의욕보다 공포가 앞선다.

 

그런데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생존을 위한 장소에서 위험과 공포가 가득한 세상을 나서는 것이 옳은 선택일까그 과정에서 아이들 역시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할 거야또 한 번도 가지 않은 데로 갈 거야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정말로정말로 서로가 필요해.”

 

멜로리는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을 찾아 기차에 탑승하지만안대를 벗지 않는다이제까지 자신을 살려준 방식안전을 택한 것이다이에 반해 십대인 아이들은 꿈만 꾸었던 세상을 살아볼 수 있다는 열망에 들뜬다결국 자신처럼 목숨을 걸고라도 새로운 세상을 살고자 이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맬로리는 언제고 그들이 미쳐버릴 수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그리고 톰과 올림피아는 유일한 목표가 생존인 삶의 가치를 나름의 방식으로 깊이 생각해봤다.”

 

갈등은 거세나 낯선 내용은 아니다세상은 늘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데 우선하는 기성세대와 새로운 시도를 마다 않는 미래 세대와의 갈등과 대립이었다이상적인 것은 그 과정에서 공존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원인을 모른 채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이성적인 대응 방법을 찾기보다 두려움이 앞서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그러나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생존자가 되려면생존해 나가려면 체험의 공포를 넘어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말하기만 쉬운 줄은 잘 안다그래도 막는다고 막아지지 않는 것은 분명 있는 것이다특히나 위험과 두려움을 이야기로만 전해들은 세대라면 더구나새로운 세상자유로운 삶은 얼마나 찬란하고 탐나는 것인지.

 

이렇게 익숙하고 오래 된 주제로도 긴장감을 한편 내내 이어가는 작가의 필력을 새삼 느낀다그 긴장과 갈등의 끝에 작가도 맬로리도 아이들도 모두 바라는 숨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란 희망이 반짝이고 있기 때문인가 싶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크리처는 실존의 부재로 인해 상상 속에서 점점 더 막강해진다<버드박스> <맬로리>도 스릴러 장르라는데 공포물을 만난 느낌이다그들이 안대를 벗듯 우리도 마스크를 벗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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