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여자들
다이애나 클라크 지음, 변용란 옮김 / 창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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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제목만 읽어도 누구나 내용을 짐작할 주제이기도 하다그러면서도 미적인 기준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 있어서 여러 기준처럼 작용하는 마름에 대해서는 누구도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를 꺼린다.

 

얼마나 말라야 제대로 마른 것인지잠시 생각해보니 나도 명확하지는 않다간혹 프로필 숫자를 보면 뼈가 비었거나 내장이 없어야 가능한 몸무게가 아닌가 싶은 경우도 있는데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단 생각이 무서워 차라리 거짓이라 믿고 싶다몸무게를 줄이려고 마지막 갈비뼈를 잘라 낸다거나 위를 절제하는 수술은 이미 오래전에 실제로 이루어졌다.

 

물고기의 혀에 흡착해 살아가는 기생충인 키모토아 엑시구아는 아가미를 통해 숙주인 물고기 안으로 들어간다암컷은 물고기의 혀에 달라붙어 혈관을 절단해 근육을 괴사시켜 혀가 떨어져나가게 한 다음남은 혀뿌리에 붙어서 보철물처럼 움직이며 혀를 대신한다. (...) 과학자들은 이 기생충에 감염된 물고기들이 대부분 중량 미달임을 확인했다.”

 

어쩌다 마른 것이 예쁜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을까참 기괴하고 이상한 미감이다몸이 마른다는 것은 영양 섭취가 나쁘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신호로 해석된 시간이 더 길었음에도 불구하고그 중에서도 한국은 특정 직업 분야도 아니고 전 여성이 외모에 관한 선입견차별강박혐오에 노출되어 사는 사회이다.

 

타인의 몸무게와 속옷과 머리 길이에 일일이 간섭하고 욕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생업조차 그만두게 하는 폭력적인 자들이 무리지어 사냥터를 누비듯 돌아다니는 사회이다적어도 온라인상에서 이들은 아주 대담하고 한 건 해치울 때마다 먹어치웠다라고 표현하며 일부는 수입을 얻기도 한다.

 

인간 소외와 차별의 절정은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보면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예쁜 것들이 성격도 좋다.”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성형외과 의사에게 살려 달라 부탁들 해야 할 지도 모른다몇 년 째인가 종합병원 흉부외과 지원이 없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현실 한탄은 그만하고 책 내용을 소개해본다. 2003년 14세였던 쌍둥이 자매 릴리와 로즈는 성격이 아주 달랐다마치 쌍둥이가 한 면의 성격을 따로 나눠 가진 것처럼 언니 릴리는 적극적이고 활달하고 동생 로즈는 소극적이고 내향적이다.

 

동생은 언니가 되고 싶어하는데하필 그 방법이 마른 여자가 되는 것이다그 결과 동생은 거식증을 언니는 폭식증을 겪으며 둘의 몸무게는 3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나게 된다이후에는 끔찍할 정도의 숫자에 이른다. 2012(23세 릴리: 122kg, 로즈: 27.5kg)

 

우리는 모래시계였다한쪽의 내용물을 비워야 다른 쪽이 채워졌다우리는 서로 달라지기 전까지만 똑같았다.”

 

아주 마른 사람을 보고 그 이유만으로 멋지다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산 나는 마른 것과 인기의 상관관계가 기이하고 놀라울 뿐이다아무래도 미디어 영향이 크겠지만다들 꿈이 비쩍 마른 청소년 아이돌일 리도 없을 텐데생존 근육이 무척 중요한 나이인지라 더 공감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시선과 미디어가 모두 특정한 몸의 형태를 선망하도록 사람들을 세뇌시킨다특히 여성들의 몸은 흔히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 여성의 날씬하지 않은 몸은 곧장 게으름과 자기관리 실패를 의미할 때가 많다.”

 

하지만 거식폭식알코올 중독 등이 왜 일어나는지는 이해한다이런 행동은 당사자가 고통스럽게 느끼는 것이 있다는 것정신이 망가지기 전에 그 고통을 몸에 퍼부어 정신이 미치지 않게 버텨보는 것이다그러나 자해와 다름없는 이런 식의 전이는 결국 자신을 살리는 것일까죽이는 것일까.

 

거식증의 핵심 개념은 모순이다. (...) 우리는 죽도록 굶주릴 때 가장 충족감을 느낀다. 우리들만 누리는 느린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우리는 몸을 포기함으로써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우리는 자신을 말살하면서 눈에 띄기를 열망한다.”


출처http://psycheblog.uk/2018/04/30/characteristics-of-anorexia-nervosa/


거식증 환자는 극단적인 체중 감소를 경험한다그러나 잃어버리는 것은 그 이상이다머리카락손톱치아친구가족자기 자신을 잃는다세상에 대한 감각을 잃는다먹지 않는 것 외에 중요한 게 뭔지도 잃어버린다그러다 결국 모든 것을 잃는다목숨까지도그는 탐욕스럽다거식증 말이다.”


머리가 찢어질 듯 복잡한 기분일 때우연히 자해한 것 아닙니다 몸을 살짝 다치니 머리가 맑아졌다인간의 뇌는 한 번에 하나의 고통만 인지한다고 하는데 신기할 정도로 정신이 편안했다다행스럽게 읽고 들은 것들이 적지 않은 나이라 이후에 기분이 복잡할 때 몸을 자해하는 일로 이어나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은 아마도 짐작보다 많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특히나 탈출할 도망갈 방법도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가해를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며칠 전 지인의 추천으로 <노는 언니>라는 프로그램 영상을 보았다넘사벽 국가대표들과 메달리스트세계 순위권 프로 운동선수들이 나오는 지라 거리감이 엄청난 몸들을 지녔는데도 한편으로 영상 자료가 무척 편안했다몸에 대한 표준도 지적질도 없어서이다.

 

자기 분야에서 원하는 목표를 위해 어떤 몸이 필요한지 잘 아는 프로들이라 세간의 청순가련함 따위는 그들에게 쓸모도 가치도 없는 점이 유쾌했다너무 웃기고 솔직한 이 언니들은 잘 먹고 잘 놀고 운동에 열심이었다.

 

이 프로는 왜 공중파가 아니란 말인가십 대들 몇 년 씩 굶겨서 속옷 같은 옷 입혀서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돈 벌게 해주는 것보다 공적으로 다뤄야 하는 사회적 가치가 더 있지 않을까이렇게 쓰지만 정말 순진하게 수익구조를 몰라 그러는 건 아닙니다답답한 호소랄까요...

 

이 책은 음식과 다이어트라는 주제를 두루 아우르고사랑이 관련된 관계부재왜곡결핍집착동성애와 우정에 대한, 첫 작품에 쏟아 부을 만한 엄청난 열정과 노력이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담았다소설이고 번역이지만 저자도 역자도 언어를 넘어선 삶과 연구에 있어 주제와 근접한 분들이다.


쌍둥이 자매의 사투이면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장편 소설이 주제의 진지함과 분량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를 만나기를 간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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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이 당신이다 - 주변을 보듬고 세상과 연대하는 말하기의 힘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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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야기하기 전 남기고 싶은 표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책은 표지 코팅이 없습니다.

반짝반짝 띠지도 없습니다.

책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유해물질이 사용되는지

책들로 가득한 서재에 오래 머무르면 건강이 나빠질 거라 합니다.

 

인간의 건강만이 아니더라도

책 만드는 일이 환경에 무감하면 더 서글프지요.

마케팅출판업계 사정도 모르는 철없는 소리인가요.

20년도 더 전부터

먹고 사는 게 중요한데 쓰레기 치우는 소리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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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가진 말을 거르는 체의 형태와 기능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글은 말을 한 번이라고 걸러서 나오는 기록물이다이렇게 쓰니 생각나는 대로 적고 오타도 잘 못 보는 글을 매일 쓰는 입장이라 뭔가 깊이 찔리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즉 글이 보관되고 반복되는 것에 비해 말은 휘발되고 일회성일 경우가 더 많다.

 

비교적 즉각적이고 직설적인 말은 발화자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려 준다영국인들은 첫 단어의 발음만 들어도 그 사람의 계급을 알 수 있다고들 하던데처음 그 말을 비웃던 나는 시간이 지나 계급 이상의 것을 알게 되었다발음억양어조자세태도분위기... 우리는 전 존재로 자신의 정보를 밝히며 산다.

 

우리는 언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다태어나자마자 따라야 할 말의 규칙들이 내 몸에서 새겨진다여기서 빠져나오려면 언어의 찐득거리는 점성을 묽게 만들어야 한다.”

 

이는 한국에서도 점점 더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는데아주 좁은 영역에서 살며 비슷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던 내가 여러 사회 경험을 하면서 나이와 더불어 경험이 늘어나 보고 듣고 판단한 자료가 늘어난 점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기쁘게(?) 지적받고 배운 점은 내가 만들어 놓은 언어에 대한 보수적인 관점이다맞춤법보다 우리가 쓰는 말에 더 맞게 고쳐야 한다는 지적아직도 동의하는가에 대해서는 미결정의 상태이지만 이런 주장이 분명 반갑기도 하다.

 

모든 사람에겐 말을 비틀거나 줄이거나 늘리거나 새로 만들어 쓸 권리가 있다.”

 

이 책의 제목 <말끝이 당신이다>는 동감하는 동시에 자기반성 모드로 읽어야할 듯한 기분이 들었다사적인 관계에서는 합의한 당사자들만 좋다면 의례적인 말끝을 사용하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가령 반말 사용이 무례가 아니라 친밀감의 표현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다그나저나 낮춤말높임말 이런 언어는 언제나 바뀌려나희망이 없는 건가... 문득.

 

말끝이 친밀도관계의 성격위계권력관계를 나타낸다는 것은 일반 상식이다가만 생각해보면 글이 입말에 가까울 때 나는 말끝이 더 길어진다. ~습니다, ~않을까요 등등그건 친구들과 떠들 때 외에는 반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왜 반발이 당연한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더구나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라면.

 

그 외에도 대중매체의 발달로 말끝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일축약해서 쓰는 말들이 의미 전달이 어려운 점 등은 가능한 자주 유의해야 한다여러 해 전이긴 하지만한글을 모르는 분들도 많은데, KBS MBC SBS YTN JTBC 이런 방송국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를 대화에 사용하고 표기하는 일은 옳은 일인지 뒤늦게 자각하고 놀란 기억이 있다현실은 아주 다층적으로 심각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다.

 

언어를 파괴한다는 항의와 알아들을 수 없다는 호소가 있지만 축약어 만들기를 막을 도리가 없다말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말을 말답게 잘 사용하지 못한 일화들이 없지는 않다근무처에서 받은 전화에서 상대방이 아무 말도 안 하기에 왜 말씀 안 하시냐 했더니 자동응답기인줄 알았다고그렇게까지 인간미를 없애고 기계처럼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선거 준비로 말들이 떠들썩해지고 있다이전에는 잘 들리지 않던 말들도 미디어가 활성화된 덕분에 원한다면 얼마든지 반복해서 찾아 들을 수도 있다정치인이 되겠다고더구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은 위계에 익숙하고 어느 조직이든 권력의 최상층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이들이다.

 

더구나 관료로 오래 일한 이들은 여지없이 삶을 말로 태도로 드러내보이게 된다천재 연기자가 아니라면 그렇다 하더라도 지속적인 연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이런 이들이 진심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국민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고 한껏 겸손을 표한다.

 

내용이 물론 가장 중요하지만 살짝 들어본 그들의 말은 실망스러운 점들이 꽤나 벌써 많다한글 사용도 오류가 많고 말하는 법도 참 미숙하다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 같이 알아듣는 생활의 결과인가자꾸 스스로 찔리는 부분이 많이 평하기가 편하지만은 않다.


사실 가장 놀라고 걱정되는 것은 이전에도 언급한 문해력literacy이다한글이 배우기 쉬운 언어라 글자는 다 알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한국 고등학생들 문해력 수준이 20% 내외라고 해서 무척 충격적이었다장문의 글을 못 읽고 읽더라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스마트하게 제목사진영상만 누리고 사는 탓일까.

 

나도 아주 늦게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지금도 하는 중이고 진전은... 만족스럽지 않다그래도 한편 아주 쉽게 어휘 공부도 할 수 있고좋은 글들도 찾아 읽을 수 있고원하면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필사도 할 수 있다말끝이 자신을 나타낸다고 공감하는 이들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말끝을 만들어 나가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 잘 몰랐던 김진해 저자는 자신의 글을 집중력이 가장 좋은 800자 내외로 다듬기 위해 노력을 치열하게 하신다고 한다내용의 순도와 더불어 형식의 정제성도 뛰어나리라 기대한다주제와 더불어 어휘들을 함께 공부할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늘 그렇듯 100분의 1도 소개 못한 내용입니다. 풍부한 주제와 멋진 글이 가득합니다.


...................................................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말을 덧붙입니다.

 

O린이장님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 ~장애암유발(암 걸릴 뻔), 병맛사춘기냐갱년기냐보통은일반적으로세상은원래그걸돼지야개야닭이야등등 그 외 단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욕설과 비속어들.

 

힘껏 기억해서 같이 줄여 나가면 좋겠습니다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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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파버 을유세계문학전집 113
막스 프리슈 지음, 정미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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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개봉작인데 이제 알게 되었다원작 책을 먼저 읽고 싶었기 때문에 아직 감상 전이다.

 

영화 원작의 제목이 <호모 파버>faber*이고 유네스코에서 개발도상국에 대한 기술 원조’ 업무를 담당하는‘’엔지니어인 주인공 이름 역시 발터 파버faber인 것은 당연히 우연이 아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환경을 개척하는 인간을 호모 파버Homo Faber라 일컬었다.

 

1957년에 기술문명과 과학에 대한 비판이라니현재에서 돌아본 그 시절에 대한 평가에 의아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예민하게 결과적인 문제들을 예견할 수 있는 이들은 존재하고 작가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테크놀로지와 근대과학에 기반을 둔 문명에 필연적으로 야기될 환경 문제 역시 1970년에 이미 제기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더구나오히려 이성주의와 합리주의가 가진 결함을 목격하고 이해하는 후대로 이 책을 이제야 만난 일이 다행이라 여긴다.

 

주인공의 기능적인faber 면들을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묘사처럼 담은 문장들이 도입부터 내내 눈에 띈다숫자와 확률이 등장하고, 고립된 개인주의적이고 건조하고 피로하다.

 

나를 예민하게 한 건 바로정지해 있는 비행기 엔진이 공회전하며 덜덜거리는 진동이었다.” “한 단계씩 가속치를 올리며 굉음을 내는 엔진 때문에 이름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녹색 점멸등마저 짧은 순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마치 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면도를 한 뒤 전보다 더 자유롭고 안정된 기분을 느끼며 난 면도하지 않은 상태가 정말이지 싫다.”

 

장님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신체의 연장으로서 기계를 인지하는 세계관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문장이다발터는 사람이 지겹고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다시선은 기계에서 발하는 신호에 고정되어 있고 창 밖 풍경 역시 기계 장치에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엔진 고장으로 비상 착륙을 할 때까지의 상황을 철저히 기계적으로 보도하듯 전하는 묘사에 살짝 숨이 막혔다.

 

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 모든 일이 그리된 게 우연 이상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 하지만 그렇다고 숙명이란 말인가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수학이면 충분하다.”

 

호감이 가는 인물이나 흥미로운 서사에 끌리는 것도 아니지만 멈추기 싫은 기분으로 계속 읽는다문장이 짧고 깔끔해서 지치지 않고 한 문단씩 읽어 삼키며 달리는 기분이다.

 

쉽지 않은 대작이라는 명성을 듣고 읽기 전부터 엄청 긴장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는데 무척 재미있다아직 모를 뿐 인과를 설명할 수 없는 괴이한 일은 없다고 믿는 내 취향에 잘 맞는다.

 

한편으로는 주인공의 성향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여행 장소들이 갑작스럽기도 하다익숙하지 않은 장소들이 끼어들 때마다 상상이 가능할 정도의 정보가 필요한 나는 일일이 찾아 보느라 읽는 속도가 느려진다.

 

과학과 합리성이 체화된 인물이 그 두 가지 모두가 부재한 신화와 운명의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장엄한 공간의 대비가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처럼 격렬한 갈등과 혼란으로 분출되리란 기대가 무척 컸다어쩌면 내가 모르는 모든 장소의 의미는 발터의 내면을 상징하는 섬세한 활용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획한 일정에 누구든 무엇이든 느닷없이 끼어드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그래서 삶에 끼어든 혼란과 과거와 만남에 대해 발터가 느끼는 혼란을 짐작하고도 남음이다불편하고 불쾌한 내 일상의 균열과는 비교도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딸과 만나게 된다당연히 감동과 눈물의 재회는 없다.

 

스스로를 잘 훈련시켜 정돈되고 오류 없이 살아가려는 발터에게는 그 대가로 결여된 것이 있다내게는 결여보단 거래의 결과라 보이지만 인간 사회가 기대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선의를 베푸는 인간이다법을 어기지 않으면 벌을 받지 않지만 칭찬도 감사도 받을 수 없다.

 

시각 기능이 무척 중요하고자기실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이 무척 중요한 수단인 독자로서의 나는 남성이라는 것을 빼면 발터와 별반 다를 게 없어서인지그에 대해 내가 느끼고 구축한 감정은 선명하다이해한다는 기분이 들어서인지 그가 “(...) 모르겠다흔들린다분노한다울었다라고 할 때에도 새삼스럽게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발터처럼 일에 자부심이 크다거나남성성을 찬미하거나인간의 기술문명이 자연을 극복하고 정복하기 위한 수단이라 믿지 않는다하나의 세계관에 큰 의미와 가치를 두어 다른 문명을 비교하거나 시혜적인 입장을 견지하지도 않는다.

 

다른 독자들은 그를 어떻게 여길지 무척 궁금해진다그가 지닌 결점으로 인해 경멸할까아님 동정할까혹은 공감할까.

 

완독 후 가장 부러워한 것은 그가 50세에 여행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맞이한 것이다어느새 틈만 나면 가능한 삶을 잘 정리할 생각을 하는 50세 이전의 독자로서 불쑥 무모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무척 부러운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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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심리 수업 2 : 실전편 - 아이를 살리는 엄마의 여섯 단어 엄마 심리 수업 2
윤우상 지음 / 심플라이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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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양육 과정에서 가장 굼금해하는 여섯 가지 주제기질훈육공부자발성대화 코칭에 대한 기본 원칙과 철학을 담았다.”

 

실전편이란 소개대로 방법론이 알차게 소개되어 있다그렇다고 건조하고 명료하기만 한 방법을 계속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저자가 깊이 공감하고 다정하게 전해 주는 위로와 격려를 충분히 잘 느낄 수 있다.

 

육아 관련 책은 내가 셀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을 것이고배울 것들이 가득한 제안들로 채워져 있다배워도 늘 모자란 듯하고 남들은 다 잘 하는 것도 나는 실전에서 제대로 못하는가 싶은 불안과 자책이 없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는 더 열심히 보충해서 할 것들이 아니라힘들고 버거운 목록의 가짓수를 줄이자고 말해줘서 무척 마음이 가벼워지는 감사한 내용이다. 99개를 완료했으니 1개 더해 백 개를 채우자보다잘 할 수 있는 거 몇 개를 꾸준히 해보자란 말이 더 뭉클하다.

 

엄마와 자녀 관계는 세상에서 오직 그 둘만의 독특한 관계입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훈육은 부모의 가치관을 자녀에게 세뇌하는 무서운 심리 작업이다불안과 두려움을 심어주면 저차원 훈육이고 사랑과 칭찬을 심어주면 고차원 훈육이다.”

 

부모 머릿속에 자발성이라는 단어가 1순위로 들어가야 한다. (...) 자발성은 몸에서 나오는 것가능한 한 자녀에게 신체 활동을 할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

 

아이의 놀이는 그리고 딴짓은 점을 찍어대는 행위다. (...) 그렇게 모인 점들이 이으면 선이 되고면이 되고공감이 되고새로운 세계가 된다. (...) 제대로 된 놀이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하나는 이고 또 하나는 함께.”

 

혼자 노는 일이 빈번하고 불가피하고 두뇌게임처럼 머리로 노는 일이 많은 시절이라 잊히지 않는 구절이다.

 

우리 애가 느리네가 아니라 다른 애들이 빠르네가 맞다.”

 

엄마가 정답을 버리면 아이는 스스로 인생의 정답을 찾는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면 안 된다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아이는 엄마 삶의 중요한 일부일 뿐삶의 전부가 아니다.”

 

걱정과 불안이 많은 것은 사랑의 변형이기도 하다그래서 모두 다 살피고 가능한 도움을 주고 힘든 거 어려운 것도 대신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누구라도 이해 가능하다그러니 그런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조언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쩌면 엄마의 삶이 재밌어 지면엄마도 재밌는 일을 발견하면 아이에게로만 향하는 마음을 조금은 놓을 수 있지 않을까그런 생각을 해본다그럴 수 있는 엄마들이 매일 더 많아지길 간절히 바라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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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개념 잡는 기후변화 - 9가지 핵심 질문으로 빠르게 마스터하는 중학 과학의 기초 단번에 개념 잡는 시리즈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 외 지음 / 다른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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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에 날씨와 기후에 대해 설명하고 시작하는 내용이라 신뢰가 큽니다저는 그 구분이 가장 기본이라 생각합니다.

 

날씨와 기후는 확연히 다른 말입니다날씨와 비슷하게 쓰는 말로 기상이라는 용어도 있습니다날씨기후기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아볼까요?”

 

이 질문에 혼자서 답변하실 수 있는 분들은 더 읽으실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친절한 책을 어린 시절 못 만나봐서 과거의 기억을 뒤져봐도 저는 불쌍하게(?) 기후 관련 논문을 읽으면서 기후에 대해 공부한 기억 밖에 없습니다그러니 어려운 기체 역학에 더해 무척 어려운 문제로 인식이 되었지요.

 

어쩌면 그렇게 공부한 어른들이 열심히 배운 바를 잘 정리해서 친절하게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학교 수업 이외에 같은 과목 교사들이 함께 모여 책을 출간하는 일도 참 멋지고 존경스럽습니다.

 

우리는 기후변화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 받은 첫 번째 세대이며행동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마지막 세대.” 그레타 툰베리

 

지난 80만 년 동안의 이산화탄소와 기온 변화를 담은 그래프를 보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아지면 기온이 높아지고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어지면 기온이 낮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양이 기온 변화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입니다과학자들은 앞으로 이산화탄소 농도가 450ppm이 된다면 지구 연평균 기온이 2도 이상 올라갈 것으로 예상합니다따라서 현재 400ppm이 넘었다는 것은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라 볼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로 일어나는 많은 변화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이 바로 물과 관련한 부분입니다홍수나 가뭄해수면 상승태풍식량난전염병 발생 등 많은 문제가 결국 물의 순환과 연관 있기 때문입니다지구에서 물의 순환은 생물체에게 꼭 필요한 현상입니다.”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재해를 맞아 입은 피해도 문제이고더 장기적으로는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문제가 관건입니다


코로나 판데믹 상황에서 가장 1차원적이고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마스크 제조 공장이 자국에 없어서직전까지 선진국이었던 국가의 시민들이 매대에서 싸우고 사재기하고 폭력 다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그야말로 재난 영화에서나 보던일부의 이기적인 사람들이나 할 법한 모습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마스크가 아니라 식량이라면 어떻게 될까요대한민국에서 농업은 사양산업이고 고령인구가 하는 일이고 농지 확보는 언제나 개발 논리에 밀려났습니다그 결과 식량자급율은 40% 대이고 곡물자급률은 20%입니다삼면이 바다이고 육지는 막혀 있으니 비상시에 식량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근대 이후 공업 정책을 우선 했으니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하시겠지만우리가 선진국이라 부르는 다른 나라들은 많게는 200%에서 적어도 100% 곡물 완전 자급률을 매년 이루고 있고 이를 위해 농지와 농업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식량은 기본적인 국가 안보 사항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진지하게 덧붙여 봅니다아직 예비후보라 정식으로 대통령 후보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한 후보가 경자유전 농민이 농지를 가진 권한 을 없애자고 하더군요이제까지 식량완전자급률을 달성한 국가들조차 기후위기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으로 경자유전을 강화하자고 법을 개정하는 마당에 말입니다.



 기후 변화는 먹느냐 굶느냐의 문제입니다미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지금 닥친 문제입니다시급한 문제입니다개인의 문제도 아니고 국가 정책 대안이 긴급한 문제입니다. 아이들과 더불어 어른들도 우선 공부를 해두면 왜곡, 날조, 선동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니 조금은 더 안심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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