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하나만 막고 올게
임태운 지음 / 시공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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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보다 같은 것을 싫어한다는 공감을 나눌 때 더 가까워진다고 하는데나는 SF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부분적으로는 함께 경멸당한 세월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우주선이 달에 착륙했고 학창시절엔 과학자가 되는 일이 곧 애국자가 되는 일이란 분위기 속에 자랐다그런데도 문학에서의 SF는 공상과학이란 천박한 번역 탓인지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갖가지 과학기술을 산업과 일상에 들여오는 일에는 아주 열광적이었으니 이런 모순적인 괴리는 무엇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어쨌든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문학 자체도 대접을 잘 받던 시절이 아니었으니... 이젠 그럭저럭 이해는 한다.

 

지금은 SF문학이라고도 불리고계간지도 있고특집으로도 다뤄지고영상화도 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평가는 너그럽지 않다아마도 SF란 퀴어와 페미니즘과 더불어 늘 젊은 소수의 영역일 지도 모르겠다이변을 일으켜 흥행몰이를 한다는 기사의 소재로 가끔 활용되는.

 

지금쯤 다 짐작하셨겠지만 이 책은 SF 단편집이다작년에 <화이트 블러드>를 무척 재미있게 읽고 신간 소식을 기다리던 작가 임태운의 작품이다장편이 좀 더 본격적이고 묵직하고 서사가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면 단편들은 훨씬 재기발랄하고 유쾌하고 재미있고 강렬한 가능성이 크다.

 

거의 매일 머리가 지끈거리고 짜증에 지지 않도록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으로 지치는 날들에 반가운 아군처럼 느껴지는 책이다표제작 <종말 하나만 막고 올게>를 당연히 가장 먼저 읽는다.

 

막장 드라마처럼 익숙하지만 불안하게 전개되더니 그야말로 SF적 급반전한동안 웃느라 잠시 읽기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뭘 적어야 스포가 안 될까 너무 고민 되어 가능한 안 적기로 한다너무나 일상적이고 웃기고 유쾌하고 뭉클하다최고다.

 

정말로 남편에게 외도 상대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울반점>은 전라도 사투리를 잘 몰라 감상이 부족할까 긴장하며 읽다가 누군가의 향수가 듬뿍 느껴지는 이야기에 에세이인가 싶다가긴장 덕에 머리가 아플 시점에 빵 터지는 사건이 생겨서 아주 재밌게 즐겁게 읽었다불량식품을 먹으며 묘한 쾌감을 느끼는 듯한 시간이었다방심하면 아주 많이 웃게 된다영상화 계약이 되었다니 결과물이 무척 궁금하다.

 

새로 생겼다는 저 중국집에서 뭔가 불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야.”

 

<궁극의 몸>은 작가의 데뷔작이고 3시간 만에 쓴 작품이라는데 시의적절한 소재라 현실 밀착적인 기시감을 느끼며 깜짝 깜짝 놀라며 읽었다인류가 바이러스로 이런저런 신체 변형을 겪는다마치 공고한 사회 계급제도를 넘어서는 일은 질병에 의한 막을 수 없는 변형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어둡게 던지는 것도 같다생각이 차분해지지만 좋은 작품이다.

 

제 오른쪽 검지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이빨에 끼인 돌개바람>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던 작품이지만프레데터와 드래곤볼을 모두 보고 읽은 경험 덕인지 의외로 깔깔 거리며 공감할 수 있는 조롱들을 많이 알아 차렸다그나저나 정말 이런 소재와 전개로 강요된 모성애 이야기를 다룰 줄 몰랐다천재!

 

나는 강해지기 위해 어머니가 된 건지어머니가 되는 바람에 강해져 버린 건지.”

 

<레어템의 보존법칙>은 정말 못 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드는 작품이었다게임에 열중한 바가 없어서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응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로봇이라서 다행이야>는 제목이 무척이나 친근하고 분위기도 막 따뜻해지는 바람에 감정의 방향을 틀어 적응하면서 차분히 읽은 작품이다인간의 상상력이비극을 막기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의도가 이렇게 슬프고 잔인한 목적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내다니... 인간으로서 당황했다.

 

그런데 또... 이런 우정...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갖춰야 하는지다른 존재를 자체로 존중한다는 건 어떤 말과 행동과 태도여야 하는지... 어려서 못했던 잘못했던 할 수 있었지만 덜 했던 모든 시간들이 후회되고 미안하고 부끄러워지는 작품이었다.

 

비밀은 충치 같은 거야.”

 

영상화된다면 가장 먼저 보고 소장하고 싶은 작품이다망치지 말아 주세요부디!

 

우리의 현실에서는 종말 하나 정도 막아줄게하는 누군가가 있을까.

당면한 위기 말고 이미 오래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은 여전한데 기억하고 있을까.

작가가 살뜰하게 담아 준 차별과 갈등과 범죄와 혼란을 웃다 울다하며 삶을 복습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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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충변화
최제현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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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에 대해 최초로 관심을 가진 것은 공자가 주역책을 아주 여러 번 읽어서 종이를 묶은 가죽 끈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이다주역은 모르지만 인류 문명 4대 성인으로까지 칭해지는 분이니 주역이 점치고 굿하는 매뉴얼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런데...... 마치 법전을 처음 들춰봤을 때처럼 독해가 너무나 어렵다조사와 어미 빼면 다 한자주역의 철학적 배경도 배울 수 있으려나 싶어 자신이 없었다그러니 여전히 아는 것이라돈 12간지내개 태어난 해가 어느 동물에 해당하는지 밖에 없다.

 

세상에 중요한 동물이 12마리라는 것도한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동물적 특성을 가진다는 결정론도 전혀 믿기지 않지만현재까지도 나는 내 동물 띠로 끊임없이 상기되며 살아야 했다.

 

제목은 무척 마음에 드는 책이다만나서 혹은 마주쳐서 충충돌하고 혹은 갈등을 겪고

변화변하고 혹은 서로를 발전시키고사람의 일만이 아니라 만물이 겪는 일은 다 이런 역학에 다름 아니다생과 사의 사이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경험하는 내용들이다.

 

태어난 해시는 고정되어 있지만세상 모든 만물이 변화하니최초의 주역이란 사주란 것은 그 변화에 인간이 어떻게 적응하고 저항하고 때로는 헤쳐 나갈지를 알려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주역의 역()이란 단어도 도마뱀의 형상이라고 한다.

 

같은 파충류이지만 거북이가 아니라 의외이다아마도 흔히 볼 수 있는 파충류인무해한 도마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 합충변화를 뜻하는 바뀌는 것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사주명리학과 유학에 관한 책들을 판데믹 이전 평생교육원에서 즐겁게 배우시면 부모님은 훨씬 더 재밌는 독서가 가능하실 것이고 나는 내가 읽을 수 있는 부분만을 만나 본다평생을 연구하고 연구소와 칼럼과 저서 활동을 하신 분이라 무척 쉽게 읽을 수 있는 평이한 언어들이라 좋다.

 

주역은 고대의 과학사상 같이 들린다만물을 보고 운행원리를 알고 싶어 했을 고대의 연구자들이 떠오른다현상을 관찰하고 통계를 찾아내는 일은 경험 감각에 의지하는 모든 과학의 기초적인 연구 방법이다.

 

그렇게 보면 주역의 괘들도자연의 섭이에 대한 과정을 표현한 수식일 것이다상형문자처럼 보여 아찔한 표현들이지만어쩌면 현재의 누군가는 수학을 이런 기분으로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가장 궁금한 점은 천지만물의 운행원리를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개별 인간들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과거현재미래까지 설명서처럼 보이는가 하는 지점이다공자가 전하는 말들은 일부는 과학처럼 일부는 문학처럼 들렸다.

 

정치를 중요한 가치로 두고 평생 자신의 정치철학을 현실화시키려 애쓴 분이라서인지주역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일상에서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존경하는 마음에 나도 그런 방점을 마음에 품고 책을 읽었더니 이런 구절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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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9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22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 서양 고대 철학편 만화로 보는 3분 철학 1
김재훈.서정욱 지음 / 카시오페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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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텍스트를 구하던 시절에는 정말 교과서처럼 이런 저런 책 목록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일단 개론서는 원작과 번역이 얼마나 훌륭하든 엄청난 인내과 체력과 끈기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나중에는 완독을 위해 읽기 하나 눈에만 비치고 뇌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신비체험도 하게 된다.

 

철학이 괴짜들의 괴딴 이야기들만이 아니라 진지한 근원적인 학문으로 소개되고 이해받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특히나 철학관들이 즐비한 한국의 상황은 철학 자체에 대한 오해와 오독이 더욱 공고했던 시절도 짧지 않았다.

 

더 이상 개론서도 전공서적도 읽지 않지만멋지게 갈무리된 대중서로서의 철학책이 끌려 읽을 때도 있다역시 좋다일상에서 수다를 열심히 떨지도 않지만 깊고 끈질긴 탐구적 대화도 부족하니 간혹 그런 추적 자료와도 같은 논리적 귀결을 따라가는 일은 즐겁다.

 

이 책은 북캉스 말고는 뭘 할 수 있나 싶은 시절이라 강박처럼 책을 구비하고 싶은 마음에 쏙 드는 멋진 책이다철학책이고 만화책이고 모르는 철학자들이 여전히 등장하니 재밌게 읽고 즐기고 배우는 기쁨이 공존한다.

 

두 종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이 신의 한 수!라 여겨지는 구성이다그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철학을 설명하는 캐릭터보다 설명을 듣고 배우는 캐릭터에 공감하고 몰입하기 좋기 때문이다나도 궁금한 질문을 대신 해주는 존재가 될 때도 있다.

 

재밌는 유머들도 있고 사투리도 나오는데 내용만 보면 철학적으로 허술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서양 고대 철학편이란 설명이 있듯이 고대 철학에 대한 큰 맥락을 따라 가며 꼭 만나야할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을 꼭꼭 짚어준다.

 

즉 서양 고대 철학에 대해 한 줄기로 쭉 정리되는 내용을 익힐 수 있다모르던 철학자들에 관한 내용을 읽고 나니 좀 뿌듯하다역시 지식은 일단 쌓는 맛!

 

이후 출간된 책들까지 읽게 되면 서양 고대중세근대현대에 이르는 쉽지만 부족하지 않은 철학사적 지식이 생길 것이라 기대한다접근성과 가독성이 좋은 인문교양서!


! 단점 하나 :  3분 철학이란 제목 때문에 자꾸만 컵라면 생각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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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간 - 사랑이라는 이름의 미스터리 일곱 편 나비클럽 소설선
한새마.김재희.류성희 외 지음 / 나비클럽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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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도 주제도 애타고 탐나서 천천히 읽고 싶은 책이다일곱 편의 추리소설이라니폭염에 판데믹 확산에 다 포기하고 싶은 시절에도 여름이 있어 이것만은 다행이야라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머리가 뜯어질 듯한 시간에도 한 편씩 쏙 꺼내 맛 볼 엄두가 난다.

 

여름엔 사랑인가여름의 사랑인가삶이 온통 풀 수 없는 미스터리라 아무도 정답을 모른다하니 책 속의 미스터리가 만만해 보인다물론 읽기 전 기분이다.

 

1. 한새마 <여름의시간>

 

표제작이라 늘 하던 버릇대로 처음 읽어 본다.

 

우발적 사고를 완전범죄로 만드는 여정이란 슬프고 더 슬픈 이야기이다사랑 때문에 또 이런…… 이란 안타까운 마음이 번지는 소재이다.

 

우리한테 끝이란 게 있을까요?”

 

그렇다고 흔하고 뻔한 구성과 내용은 아니다불안과 궁금증으로 뒤쫓는 마음에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이다.

 

대답은 그걸로 됐어요.”

 

사랑과 여름과 사고와 범죄란 모든 강렬한 소재들을 모아 이렇게 차분하고 선명하고 예민하게서늘한 감정의 온도의 유지하며 쓴 문장들이 정말 좋았다.

 

뜨거운 화염이 남편을 집어삼킵니다.”

 

첫 번째 작품이 완전두근거리게 재밌고 좋아서 다음 작품을 바로 읽어도 되나 싶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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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재희 <웨딩증후군>

 

단편 분량 안에서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이토록 생기발랄한 생명력을 충분히 갖출까 놀랍고 감사했다.

 

자신은 중년 부인들의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소비 욕구로 충족시켜준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무 설계를 해주고 미래를 보장해주는 보험 상품을 팔면서.”

 

풍문으로도 들어본 적 없는 소재라 신선하고 재미있었다인간은 인간의 수만큼 다른 증과 병을 앓고 사는지도 모른단 생각을 잠시 한다명명되지 못했을 뿐 실체와 실재를 누가 다 알까.

 

걔는 성적인 만족감을 다르게 느껴요.”

 

이 그렇다면 사는 방식도 다 다를 수 있다는 것다른 게 오히려 당연하다는 논리적으로 당연하고 현실적으로 위험한 수긍이 든다.

 

그러니 남을 내 뜻대로 휘두르려는 사적/공적인 모두 시도들에 강력한 폭력이 동원되는 것은 불기피한 일 일듯.

 

만약 이런 부분에 합의해 줄 수 있다면 계약서를 쓰고 공증을 받아요.”

 

좀 더 개인이 존중받는 사회를 선호한다고 말해온 세월이 길어 성주희의 제안에 뭐라 반박할 말이 없다천천히 읽고 즐기고 싶은데 한 호흡에 휘리릭잘 읽히니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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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홍선주 <능소화가 피는 집>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이번엔 진짜다.”

 

초반에 이리저리 재밌게 상상해볼 여지들을 펼쳐 주어 익숙한 소재인 듯해도 작가가 마련해 둔 비상한 반전을 기대하며 즐겁게 변주를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주연의 향 외에 다른 향은 섞여 있지 않았다.”

 

정확한 계산은 하지 않았지만 체감 상 꽤나 빨리 눈치를 챌 만한 강렬한 감정선이 보여서 여전히 결말은 기대되었지만 살짝 아쉬웠다.

 

끔찍하리만치 무신경하고 자기중심적인 저 천성이 언젠가 화를 부를 거라고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감정들과 그에 부응하는 장면들이 음성 지원되듯 생생했고단단하게 짜여서 널브러지지 않는 감정선이 마음에 들었다.

 

익숙한 향자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단편의 장점 중 하나장면이 바뀌는 속도가 빠르고 한 두 문장으로 깔끔하게 사연을 수렴하는 결말이 좋다시점들이 뒤바뀌며 전개되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세련되고 즐거웠다재미가 지극해서 읽는 일이 순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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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마란 <망자의 함>

 

후텁지근한 초여름의 밤이다제일 좋아하는 와인 두 병을 들고 집을 돌아가는 퇴근길은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던 8단 한 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휴가가 드디어마침내 내게 허락됐다.”

 

시작하는 세 문장을 보고 이 단편은 필히주말을 택해 읽으리라 비장한(?) 계획을 세워 두었다그리고 주말제일 좋아하는은 아니지만 간만에 와인을 사서 집에 왔다퇴근주말와인소설휴가(미정)... 무엇 때문인지 이 모든 것 때문인지 두근거리며 읽는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에서 이 모든 느긋함이 와장창어긋난다놀라고 당황하고 유쾌하다.

 

주인공의 감정선버릇강박까지 공감할 내용이 많아서나도 딱 이렇게 행동했겠다 싶은 것들이라 두근두근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집에서 이 아이가 사라져주기만 하면 된다얼른 이 사람들을 치루고 원래 계획했던 여유로운 휴가를 누리고 싶다훠이얼른 물러가라.”

 

그런데... 또 다음 장에서 이젠 약간 무섭도록 익숙한 상황과 심리가 등장한다작가님... 이거 제 얘기 같아요... 아니지요...

 

흔적조차 희미한 죄책감이란 것이 들썩였다. (...) 아이는 남았다금새 후회가 밀려왔다.”

 

불편한 친밀감을 느끼며 계속 읽는다여기저기 문장들이 자꾸 내 얘기 같다그래서 미칠 듯이 궁금해서 도저히... 그만 읽을 수는 없다.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하나씩 깨어났다모든 게 다엉망이다.”

 

예상 못한 행복한 이야기인데 눈물이 나는... 참 이상하고 신기하고... 안심이 되는 결말이다.

있었으면... 많았으면 좋겠다 싶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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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류성희 <튤립과 꽃 접힌 우산>

 

제가 죽였을 수도 안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대답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무슨 뜻인지 다 알 것 같아 흠칫하기도 합니다상상 속에서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이들은 많지만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해본 적은 없으니까.

 

상상 속에서조차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현실은 만만치 않고이상한 이들은 끝도 없고똥은 잘 피하면 된다 생각하지만 어느새 내가 남의 똥이 된 건 아닌지도 확인해보며 살아야 한다사는 일은 대체로 쉽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겪으면 저런 표정이 될까 (...)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서로를 금방 알아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말끔히 잊고 임신출산육아살림기타의 감정노동을 탁월하게 해내라는 사회의 주문이 얼마나 악랄한지 잘 알기 때문에 양육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나 판단은 안 하려고 하는데... 내용이 무시무시합니다.

 

모든 것은 현상이고 결과라고 하기에도 아이를 굶기고 학대하고 약물을 먹이는 건 인물의 육성이 들릴 듯한 생생한 대화 때문인지 현실의 보도 자료만큼 끔찍합니다그래도 마음을 다 잡고 깊은 숨을 쉬며 끝까지 읽습니다.

 

이제는 정말 실행해야 했습니다그 아이가 그 일을 해버리기 전에요모름지기 교사라면 학생을 지켜야 하니까요.”

 

아픕니다.

한 사람이 아니고 두 사람이라서.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일 거라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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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황세연 <환상의 목소리>

 

기억에 없어요처음 보는 사람이에요.”

 

예전엔 기억에 없다기억이 안 난다는 말은 거짓말일 거라고 믿었다일상적인 것이 아니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일종의 사건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분명 거짓이라 생각했다그런데 세상일이 대부분 그렇듯 선명한 두 개로 잘 구분되는 경우는 없다.

 

이후 나는 실제로 자신마저 속이는 허언증에 숙달된 사람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기억하는 사람타인에게 완벽하게 무심한 사람 등등 여러 유형으로 세상과 사람들과 살아가는 이들을 만났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사람의 기분을 이리 극단적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거지?”

 

적지 않게 반복되는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까지 무게감도 정서적 울림도 없는 상황 묘사가 놀랍다등장인물들의 감정과 목소리까지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의 우연이 가능한 걸까?”

 

결국 우연이 아니었지만 나는 결말에 정말 심하게 놀랐다반전 인물에 대한 묘사도 설명도 대사도 없었기 때문에나에게조차 완벽하게 투명 인물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범죄보다 아무 감동 없이 사랑을 말하던제 이익을 잘 챙겼을 뿐인 인물에 더 소름이 끼칠까중요한 것들이 제거된 듯한 이런 연애는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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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홍성호 <언제나 당신 곁에>

 

홀연히 사라졌던 예전 애인이 돌아왔다.”

 

사연은 아직 모르지만 자살 준비와 심리를 세밀하게 전개하는 문장들에 끌려들어 두근거리며 따라 읽다가 이 갑작스런 문장에 얼떨떨해졌다바로 이 순간에그 장소에이 인물이 나타날 수 있는 기막힌 개연성이 무엇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첫 번째 반전제 정신이 아니라 착각한 것이었다교차 구성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다면 계속 어리둥절했을 듯.

 

“(...)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반전에 잔 소름이 돋는다호의와 선의에서 돕고자 하는 행동들이 어떤 예상치 못한 결과로 이어질까 불안했다모두 거짓이 아니지만 결정적인 부분을 비튼 반복적인 거짓말이야기만을 위한 설정으로 읽히지 않아 섬뜩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떠날 것이다.”

 

시간의 구성이 다르게 흐르기도 한다달콤한 제목과 달리 의심과 불안과 감시와 통제가 동반되는 소유욕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진 듯 무시무시한 동력을 갖추고 있다그래서... 수민은 원하던 것을 얻은 걸까이런 방식의 사랑은... 잘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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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단편을 모두 만난 서운한 날이다모든 서사가 다 생각날 만큼 인상적이고 뚜렷한 드라마들이었다상상을 한참 벗어난 반전을 만나는 일도 즐거웠다추리 자체는 아주 가볍고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구성이다매일 기대되고 재미있었던 만큼 이별이 섭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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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펜의 시간 - 제2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유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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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을 보고 야구이야기라 짐작했습니다불펜은 보통 (구원)투수가 연습하는 공간으로 불리니까요어원을 따지자면 bull+pence이니황소를 막아 두는 장소즉 투우장에서 사용되던 공간이기도 하고노동자들이 일하러 나가기 전 대기하는 장소로도 쓰였습니다만.

 

이 책에는 처음 들어본 명칭이 나옵니다선발도 후발도 아닌 중간자.’ 이들이 살아남은 방법들이 적혀 있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습니다한편으로는 선후승패공수 이렇게 명백하게 구분되는 스포츠 야구와 중간자가 함께 서사를 이루는 구성이 기막히게 매력적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유명세를 몰고 오는 뚜렷한 성공도 아니고 모조리 패배한 것도 아닌 삶들은 중간자적인 삶일 수 있겠습니다숫자가 가장 많으니 드라마도 엄청날 것이고세상의 많은 부분들을 가장 밀접하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치일지도 모릅니다.

 

스포츠 분야 중 하나일 뿐이지만 야구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드라마승부조직시스템불합리부조리반칙범죄 등은 또 얼마나 대단할까요저자가 보여주는 인생들이 딱 야구판 같습니다. 사방에서 공이 날아오면 쳐내거나 못 치거나 하는 거지요때론 공에 맞기도 합니다.

 

다들 야구와 인연이 있지만누구는 야구판에 남고 누구는 떠나고 누구는 실력 이전에 성별 때문에 좌절을 당하기도 하지요문제는 야구판에 남아도 떠나도 좌절을 딛고 관련 업종에서 일을 해도 모두가 사는 일이 점점 힘들어 진다는 점입니다.

 

강도가 거세지자 진호는 선수로서 한계점이 다다르고 준삼은 성과만 부르짖는 직장인으로 살다 구역질이 나고 기현은 스포츠에 집중하는 기자로 살지 못하고 짐작도 못한 여타의 이해관계와 권력게임에서 그리고 여성 직업인으로서 지쳐갑니다.

 

이 세 명이 견디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이 불펜의 시간입니다이들이 세상과 삶을 향해 자신의 공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던지기까지그렇지만 이들이 스트라이크만을 노리는 것은 아닙니다이점은 삶과 야구 모두에서 참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고 배웠다그래서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았다하지만이번 기회는 놓쳐보기로 했다비열해질 기회까지 잡을 필요는 없다고놓쳐도 되는 기회도 있다고 일부러 볼넷을 던지는 사람이 알려주었다.”

 

야구 게임에서도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던져야할 때 유도해서 맞춰서 잡아야할 때가 있으니까요우리가 사는 모습도 때론 그렇습니다아예 공을 던지지 않는 삶이 가능한가 싶어 잠시 생각해 보지만... 우리 역시 던져야만 하는 순간에도 구질을 달리해서 작전을 짜니까요.

 

인생은 야구다몸에 맞았으니 진루하자, 1루로 간 다음에 생각하자.”

 

직장과 삶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불필요한 불편함부터 그릇된 불평등을 없애고 바로 잡고, 오래 짊어지고 살던 죄책감을 덜어내는 그 모든 과정이 쉽지 않는 경기처럼 느껴져서 내내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습니다언젠가의 지금의 내일의 나를 동시에 응원하는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망가지지 않고 자신들을 지켜내는 모습이 기쁘고 벅찼습니다누군가의 절망이 사라지고 누군가의 삶이 나아지면 그건 또 다른 누군가의 그리고 나의 희망으로 전이되기도 하니까요불펜에서 완전히 떠나지 않는 한 삶이란 여전히 희망 아닌가요.

 

혁오가 필사적으로 지킨 아름다움이 자신의 조각을 자극했음을누구나 아름다움의 조각을 가지고 있으며우리에겐 서로의 조각을 자극할 힘이 있음을.”

 

인생 한 방이지란 말은 너무나 양아치스러워 싫어했습니다. 9회말 투쓰리 역전도 확률상 유의미한가 시큰둥했습니다몇 년 전에도 9회말 투쓰리 역전 경기를 보긴 했습니다만야구만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하고 외치는 해설가들이 너무나 웃겼지요.

 

그럼에도 삶을 야구에 빗댄 이야기가 실망스럽지도 지루하지도 않습니다스포츠서사를 좋아한다는 점을 감안해도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남은 인생에 우리가 선발투수가 되어 스카우트될 일도극적인 만루 홈런을 성공시켜 승리를 이룰 일도 없다 해도 말입니다.

 

기자님이기는 게 중요할까요얼마나 중요할까요무엇보다 중요할까요?”

 

그래도 삶이 아직 남은 것이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까요. 저는 무엇보다 준삼혁오기현이 웃어서 최고로 좋았습니다글로도 미러링 효과가 가능한 것인지 저도 이야기의 끝에서 웃었습니다지옥도가 펼쳐질 듯한 시절에 대한 불안과 심적 고통이 큰 날인데도 즐거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기쁨과 예정된 모욕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준삼은 예정된 모욕을 선택할 것이다눈물을 흘린다 해도 예측 가능한 편이 좋다휴가가 끝나면 갈 곳이 정해져 있는 삶이 좋다.”

 

만신창이가 된 심정으로 살아갈 이 모든 미래를 모르고... 만루 홈런을 소리쳐 환호하던 그 시절처럼느긋하고 행복하게 좋은 이들과 여름 공기를 맡으며 야구 경기를 즐겼던 시간처럼. 잠시.

 

이 주임은 누구처럼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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