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마법 (특별판 리커버 에디션) - 지식 세대를 위한 좋은 독서, 탁월한 독서, 위대한 독서법
김승.김미란.이정원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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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형태의 서재들을 만났다처음에는 내 것이 아닌 부모님 서재였고중학생이 되자 내 방 책장들에도 번듯해 보이는 세계문학전집들과 여러 시리즈들이 들어찼다날카로운 종이에 꼭 이상하게 손가락 사이를 베이며 방학 내내 밤이 늦도록 책 읽는 시간들은 매일이 판타지와 같았다.

 

어려서 집중력과 몰입이 더 좋았을까아니면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을까둘 다일수도 있지만 책 속 세계로 이동하는 것은 성공 확률이 아주 높았고도저히 진입이 불가능한 책들은 책장에 다시 꽂아 두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학교에 오래 머물게 되어 전공 따라 책장이 늘어가고 변해갔다책장으로는 다 감당이 안 되니 책장 옆에 책더미들이 여러 줄 올라갔다.

 

논문을 다 쓰고 제 정신이 돌아오니 전공분야가 아니면 절대 읽지 않을 책들은 필요한 사람들 찾아 나누고다시 읽지 않을 다른 책들도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책장이 비는 일은 없었다.

 

생각해보니 내 서재가 생긴 것은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이고모순적이게도 그 시기는 더 이상 학교에 머물지도 책 읽는 직업을 지속하지도 않기로 한 이후였다.

 

서재가 생겼다고 설명하기보단 서재집에 작은 침실을 두고 잠도 잤다라고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책들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사용하던 집.

 

그리고 종이책이 느는 속도보다 데이터베이스가 차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생활의 변화가 이어졌고한국어를 모른다는 자각이 들기까지 휴가 때를 제외하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일은 드물어졌다.

 

저자는 20년간 독서로 필요한 지식을 축적하고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공간이 서재라고 한다교육전문가로서 자신의 서재를 만들어온 과정을 담은 내용이 이 책의 구성이다.

 

책 선정구입배치독서법독서 이후 기록과 활용법축적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데이터에 저장하는 법까지 상세히 들려준다.

 

일정한 높이를 유지한 채 삶을생애를인생을평생을 조망하고이를 위한 다양한 정보와 깊은 지식체계를 바탕으로 최적의 판단을 내리게 도와주는 것이 바로 높이의 독서입니다.”

 

성장곡선처럼 독서습관이 처음부터 통찰에 이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 실제 삶에서 그러한 수준에 이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중요한 것은 충분한 통찰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그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야에서 시각이 나오고시작을 통해 시선 즉 관점이 형성됩니다폭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은깊이 있는 시각을 만들어내고날카로운 시선을 지니게 됩니다. (...) 시야는 폭이 넓어야 합니다.”

 

독서를 통해 바라는 바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책의 활용도가 다를 것이다활용법에 주목하지 않더라도 독서와 서재가 궁금한 이들에게도 흥미로울 책이다.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나는 생태 자연농이라는 영역에서 패러다임을 바꾸는 혁신의 삶을 살 것이다내가 깨달은 모든 지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지식이다나는 그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하고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 이것을 이룬 뒤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실은 저자의 원대한 제안에 기분이 들뜨기도 했다. “전 국민 전 세대 서재 만들기” 신제품 TV 광고보다 더 성공하시면 좋겠다 싶어 힘껏 응원해본다서재의 마법의 힘이여 솟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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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의 온기 - 출근길이 유일한 산책로인 당신에게 작가의 숨
윤고은 지음 / 흐름출판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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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기대한 것들은 따끈따근토닥토닥울컥뭉클하는 따스함들이다그런데처음부터 통증이 느껴지게 웃었다기막힌 기분 좋은 반가운 신나는 반전이라 아껴뒀다 막 힘들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순간에 다시 읽어야지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그냥 궁금해서 호로록 읽어 본다맑고 어여쁘고 아름다운 분이 쓴 닮은 글인데 여전히 반전도 위트도 웃음도 끝나지 않는다.  


빈틈이 그 빈틈이고 온기는 그런 온기이군요사전 말고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들에 담긴 새로운 이야기들이 이렇게 참 좋다.

 

우리 이런 대화 전에도 했던 것 같지 않아?

그런 대화를 또 처음인 양 나누면서 포착해야 할 세계.”

 

봄은 우리가 알던 모든 것에 유통기한 라벨을 붙여주면서 시작된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다고,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고 작년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꽃이든 말이든 무엇이든.

오직 지금뿐이라고,”

 

봄이라는 계절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담하게 말하며 살았던 세월이 길다그래서 봄에 관한 내용을 한번이라도 더 읽어 본다.

 

좋아하지 않으면 모르고 살게 되니까봄을 모른다는 생각이 요즘에 좀... 싫어진다.

 

나는 너무 앞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종종 앞서 슬퍼지기도 한다.

인생에는 아무리 앞서 생각하려는 사람도 절대 감지할 수 없는 강렬한 바람이 분다.

나의 슬픈 예감이 어느 공간에나 머무는 가벼운 먼지라는 걸 알게 만드는 바람.”

 

매일 줄이자고 결심하지만 실제 생각의 분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다앞서 생각한 것들슬픈 예감들은 내 것이 맞아도 슬프고맞지 않아도 슬픈 경우들이 많다.

 

어쩌면 누군가는 여전히 옛 방향을 바라보고 우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흔들림까지 태우고 자전거는 달린다망설임과 두려움은 올라탈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도 용케 따라붙는다기본적으로 무임승차다그러나 무임승차한 감정들까지 모두 끌어안고 자전거는 달린다우리 삶이 그런 것처럼. (...) 적당히 착각하기도 하고 포장하기도 하고 진짜로 그렇게 믿어보기도 하면서.”

 

자전거에 함께 타고 달린 것들이 이런이런 것들이었구나... 싶다때로는 흔들림이 강해 넘어지기도 했고망설임과 두려움에 멈추기도 했고그만 달리고 싶은 때도 있었고.

 

내일 내가 착각할 것들애써 포장할 것들진짜로 믿어보고 싶을 것들은 어떤 감정들일까꼭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궁금하다그러려면 일단 달려 봐야 할 텐데...

 

에세이란 저자와 독자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문학이긴 하지만라디오 애청자도 아닌 주제에이런 친밀감을 담뿍 느끼다니 무람한 기분이다.

 

폭염이 닥치기 직전의 계절에 잠시 아름다운 것들감정을 다독여 주는 것들작고 약하고 여린 것들그리고 빈틈들에 차곡차곡 저장해둔 온기에 손가락 끝을 대어 본 기분이다.

 

더운 날조차 기분 좋은 온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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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의 방 - 법의인류학자가 마주한 죽음 너머의 진실
리옌첸 지음, 정세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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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나 실험실에서 분석 업무를 보는 일만 하시는 분이 아니신 게 가장 놀라웠다. 더구나 자국도 아니고 해외 현장들을 방문하여 유골과 시신을 발굴하다시피 하며 신원을 찾는 일에 열의를 가지신 엄청난 분이셨다.


오래된 과거의 일만도 아니고 2017년에 412명이 죽은 미국의 비밀 묘비, 국경을 넘던 이들이 사막에서 실종 사망한 이야기는 참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DNA 검사로 실종된 이들이 사후나마 가족에게 돌아가는 일은 삶과 죽음은 동시에 존엄해야 한다는 목적에 부합한다.


미드 <본즈>를 보지 않아 독특한 매력과 지식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읽으니 거의 모든 내용이 새로웠고 기막혔다. 인간이 하는 일들은 한편 처참하고 다른 한편 참 숭고하다. 또한 연구를 위해 기증된 시신들은 귀중하고 꼭 필요한 재료이니 그런 결심을 해주신 분들도 존경스럽다.


이 책 덕분에 법의인류학, 법의학, 법의학의류분석가, 법의고고학자 등등 모르던 각자의 분야에서 이루어지는 협업을 알게 된 점도 유익하고 감사한 배움이었다. 뼈와 사후유품을 통해 당사자가 살았던 생활방식, 음식, 환경, 전쟁과 같은 시대상, 대량 사망 사건, 인간관계, 다잉메시지 등을 모두 밝혀내는  과정이 놀랍다.


죽음 이후에도 삶과의 접점들은 읽을 수 있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고스란히 남은 정보였고,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육신이 사라진 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엄청난 일이다. 실종자 유족들은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회복할 수 있다고 하니, 이분들의 작업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돕는 마무리이다.


그 마무리가 미흡해서 여전히 회복이 어려운 세월호 실종자 다섯 명과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리옌첸 법의인류학자는 참사, 인양 과정, 추무, 은폐, 적발의 과정을 모두 알고 있다. 


과거 인류학, 문화학적 이야기들이 담긴 뼈에 관한 이야기부터, 산업 혁명 시절의 직업병, 인류가 경험한 불평등의 세월, 도시화로 인한 흔적, 세계대전이 증언하는 인간의 야만성과 잔혹성... 죽음 이후에도 남은 인성을 들려주며 저자는 다시 삶과 죽음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하고 영위하는 방식을 고민하라 가르쳐 주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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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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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대해 잘 알 기회도 없었지만 정말 아는 게 없구나 싶은 초반 내용용어들을 일일이 찾다간 언제 읽을까 싶어 그냥 읽어 본다.

 

건축 상식이야 포기가 금방 되었는데건축물들을 전혀 모른 채 읽으려니……인터넷에 사진들 올려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밖에 남기고 온 것은 죽은 자이고밤의 어둠에 사는 그 무엇인가이고바람번개즉 자연이야인간한테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태어난 것은자의식 같은 것이 태어나 내면이 자라게 된 것은 자기들 손으로 집을 만들게 된 영향이 컸다고 생각해.”

 

이런 얘기부터 풀면 읽기 힘든 책인가 하실 텐데전혀사실 아무 것도 쓰기 싫고 내내 책만 읽고 싶다.

 

묵독하다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책 속으로 빠져드는 신비체험이 아주 쉬운 책이다문장 따라 홀홀 여행 다니는 설레는 느낌이 자연스럽고 강렬하다.

 

모든 유리창이 열리고 공기가 흐르기 시작한다여름 별장이 천천히 호흡을 되찾아간다.”

 

그 밝음은방의 어두운 곳에 놓인 과일바구니 속에서 어쩌다 석양빛을 받고 혼자 빛나는 오렌지 같았다.”

 

역시 강철북클럽 클럽장님은 진실만 말하신다이런 즐거운 경험은 말씀대로 번역이 훌륭하고 멋지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조용한 것은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고사람이 고독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라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는 거야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 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관련 사진들 찾아 두고등장하는 음악들도 찾아 들으며이것들이 없어도 부족하지도 않은 멋진 문장들 따라 다니면 된다그러다 보면,

 

이 동네에 가고 싶다.

이 동네에서 새벽에 숲길 산책을 하고 싶다.

이 동네 건축물들 구경하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덴장!

 

이런 울분에 싸인 욕이억울함이안타까움이 흘러넘치고보통의 지루하고 무덥던 지난 여름들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어 더 힘들고 서러워지고,

 

초록색 안개 냄새가 맡고 싶어지고정말 아사마산에서는 신나게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듯하고그 바람에 풀과 잎사귀들 냄새도 실려 오는 듯하고.

 

올 봄에도 삼색 제비꽃을 보았나어치새가 어떻게 울더라내가 경험한 삶의 묘사들이 왜 이리 빈약할까 속상하기도 하고,

 

동시에 묘사의 향연에 어느새 오감이 만족해서 스토리를 잊게 되고다시 정신 차리고 읽어 보려 하면 인물들이 헷갈리고 기억이 안 나서언제부터 이러는 거냐 분통을 터트리며 등장인물들을 모조리 정리해서 옆에 붙여 두고 읽어야하고,

 

그리운 집에 대해 그립게 읽고부동산 관련 논단을 갑갑한 마음으로 읽고건축가와 건축 이야기를 만나 다시 마음이 뭉클해진다계획도 의도도 의지도 아닌데 이런 독서의 흐름은... 좋구나...

 

내가 건축가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이 건물은 그 이전의 긴 중개축 역사를 포함하여 선생님과 그 주변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함께 여기까지 생명을 이어온 것이다오랫동안 잠든 채였지만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았다숨이 끊어진 것도 아니다.”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건축은 예술이 아니야현실 그 자체지.”

 

요란하게 살다 지치면다시 처음처럼장식이 없는꾸밈이 없는과장이 없는소박하고 단아하고 단단하고 본질적인 고유한 정신과 삶과 사람이 잘 보이게 된다이 책의 건축가 무라이 슌스케도 그러하다.

 

그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는 평상시 어떻게 해왔느냐의 연장선상에 있어여차하면 저력을 발휘할 생각으로 있어도 평상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으면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은 건축가로서의 ’ ‘내 작품’ ‘내 명성’ 이 아니다오직 어떤 집이 집주인에게 영혼의 안식과 육체적 평안을 줄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오로지 평범한 말들로 의식주 중 ’, 집을 만드는 건축은 삶과 직결되었다는 것을 설득해낸다.

 

제 살 집도 지어본 적 없고옷도 만들어 본 적 없고간단한 요리나 겨우 해 먹고 산 삶이 헛것인 듯 아득해진다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이제는 없어졌지만... 지금은 없지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면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은 나중에 생긴 것으로 아직 그다지 단단한 건축물은 아니라는 증거일 거야집 안에서만 계속 살 수 있을 만큼 인간의 내면은 튼튼하지 못해마음을 좌우하는 걸 자기 내부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찾고 싶다내맡기고 싶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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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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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는 듯한데나무 좋아하시나요저는 정말 좋아합니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 같다. (...) 스스로를 고립시킨 위대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우듬지에서는 세계가 속삭이고 뿌리는 무한성에 들어가 있다.”

 

섭섭할 정도로 결여된 믿는’ 능력으로 부러워도 갖지 못한 종교에 대한 일종의 동경 같은 것이 있었는데오래 전 나무를 믿는 종교인이 될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습니다마침 2,000년은 넘게 사셨다는 나무와 가까운 곳에 살던 차라 경외심이 한껏 커진 때였지요.

 

얼마나 경이로운 저녁과 밤이었던가여름 향기와 가볍고 따스한 거리의 먼지-하는 모기떼 소리전류를 띤 섬세한 후텁지근함이 공중이 퍼져서 은밀한 경련을 만들어냈다.”

 

저는 제 나무가 있습니다태어난 계절은 겨울인데 아버지께서 봄꽃나무를 기념으로 심어 주셨지요어릴 적엔 다들 자기 나무가 있다고 믿은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매일 저는 쪼그라들고 그 나무는 이미 오래 전 고가의 지붕을 넘어 지금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나와 내 어린 시절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내 고향은 이제 더는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지나간 시절의 사랑스러움과 어리석음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이제 나는 도시를 떠나 어른의 삶을 견뎌야 했는데삶의 첫 그림자들이 이 며칠간 나를 훑고 지나갔다.”

 

봄이면 고혹적이고 환상적인 자태가 되는 제 나무와 달리 저는 아름다운 일향기결실... 뭐 하나 제대로 내보이지 못하고 삽니다오늘도 별 이유 없이 자꾸만 퉁명스러워지는 마음이 걸러지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도록 있는 힘껏 붙잡고 버텨야했지요.

 

사색과 성찰이 모자라 그런가 싶습니다혹은 비축이 잘 안 되나 봅니다어느새 텅텅 비었다 시끄러우니... 이런 날엔 나무를 보며 시인이자 작가인 헤르만 헤세가 남긴 것들을 읽는 일이 도움이 됩니다모든 시와 문장들을 다 읽어낼 수는 없지만...



실은 멈칫거리게 하는 표지의 복숭아나무 그림 탓에 읽기를 미뤄둔 참이었습니다복숭아 알레르기가 심해서 어릴 적부터 복숭아를 먹은 기억이 없어 맛을 모릅니다지인들이 엄청 맛있는 과일인데 안타깝다고 자주 놀리기도 했지요심리적 요인 탓에 복숭아 형상조차 반갑지는 않습니다.

 

무척 아름다운 세밀화들을 감탄하며 보다가도 복숭아 그림과 관련 글들은 후르륵 넘깁니다공감하기엔 적대적인(?) 세월이 너무 길었습니다그런 한계에 심난하기도 한 심정으로 읽다 보니 헤세에게도 나무는 친구이자반가운 세계이자일종의 신앙처럼 느껴져 뭉클합니다.

 

제일 좋아하는 나무 밑에서 읽으면 가장 좋겠지만대신 2018년 생일 선물로 초대받은 지나간 전시회가 떠오릅니다이 책을 읽고 알고 배우고 생각도 다듬어 본 후 전시를 봤으면 어땠을까 아쉽기도 합니다제대로 감상을 못한 기분귀한 줄 몰랐던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든든한 나무처럼 헤세의 다정한 위로들이 이 작고 아름다운 책에 시와 에세이로 한 가득입니다다른 문학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의 그림과 시들과 에세이들은 각자가 조용히 차분히 찬찬히 만나야할 듯해서 별 도움 안 되는 하소연 같은 글을 이만 마칩니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딸각거림

 

 

쪼개져서 부러진 큰 나뭇가지가

여러해 동안이나 매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메마른 소리로 노래를 딸각거린다.

잎도 없고 껍질도 없어,

텅 비어 활력도 없이 너무 긴 삶에,

너무 긴 죽음에 지쳤어.

나뭇가지의 노래 오래 단단하고 끈질기게 울린다.

고집스럽게 울리고은밀히 두렵게 울리네,

한 여름만 더,

한 겨울만 더.


Knarren eines geknickten As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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