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 ㅣ 문학동네 청소년 53
전삼혜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4월
평점 :
기억인지 혼재인지 안온한 어린 시절에 그저 상상해본 불행과 슬픔의 잔재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특정 작품과 정서에 반응하는 눈물샘이 있다. 감정의 밀도가 아주 높고 노골적으로 울어라~ 울어라~ 하는 이야기보다는 웅장한 서사구조에 감동을 크게 하는 경우가 잦다.
자라서 과학자가 되고 우주비행사도 되고 지구도 구하겠단 생각을 하던 세대science kids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정서는 골고루 스며있어 연주도 단품 보다는 오케스트라가 좋다. 헤드폰으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것은 인간 소외의 대표적 사례라 느끼긴 하지만.
“수없이 태어나는 별들을 위해 우주는 스스로의 몸을 넓혀 새 자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어린 별들은 두렵지 않을까. 자기 주변의 세계가 자꾸자꾸 커지는 것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이. 나는 이제 겨우 어른이 되었는데 어른들은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말한다. 말할 수 없이 넓은 이 우주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웃분들은 이제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다소 뜬금없는 제 얘기들은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단 고백이다. 대서사 구조의 이야기, 결핍과 비관은 깊고 어둡고, 갈망과 연대는 높고 황홀한 그런 거대한 격차가 좋다.
우주공학의 최정상을 차지한 연구단체는 또한 사업을 막대한 이윤을 거둔 기업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달에 표면에 메지시를 개기는 도구를 만들어 달 자체를 이윤 창출을 위한 거대한 광고판으로 만든 것이다. 그 모든 욕망이 들끓는 지구로 소행성이 날아오고 있다.
“엄마.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몰라서 그 미움을 모두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나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다른 하늘 아래 서면 별자리가 바뀐다. 같이 본 하늘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는 곳은 오직 여기뿐이었다. 흐려지는 기억과 떠나는 사람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 안에서 나는 변화하고 싶지 않았다. 변화를 막을 수 없다면 내 자리만이라도 못 박아 두고 싶었다.”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창작 이야기라 해도 ‘지구멸망’이란 말은 마음을 깊이 찌른다. 인류가 오래 살아남아 우주의 비밀도 더 알게 되고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과 삶을 대하는 방식이 이토록 멋지고 존경스러운 이들이 사라지는 이야기는 절망적으로 슬프다. 부디 뜻밖의 희망이, 해법이 나타나주기를, 지구와 더불어 생존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었다.
‘걷다 보니 어른이 되었다’라고 시구처럼 자신을 소개하는 전삼혜 작가의 시침 뚝 떼는 정갈하고 아름다운 문장이지만, 내용은 죽도록 사랑하는 이야기였다. 다 읽은 나는 흉통을 느낄 정도로 아프다. 열렬히 살자던 젊은 날이 막 떠오르면서 더 늦기 전에 힘껏 사랑하고 싶어지는 위험한 작품이다. 이 모든 것을 208페이지에 담은 작업이 기적이다.
“암흑물질에 대해 천문학 책은 외로운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빛을 잡아 두지만 관측되지 않는다고. 단지 은하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별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끌어들이고 있으니 거기에 암흑물질이 있다고 하는 거라고. 나는 암흑물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SF를 태어나면서 좋아한(듯한) 나는 등장인물들이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처럼 반갑다. SF의 고전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의 매력이자 위대한 메시지는 다른 인종들과 생명체들이 만나서 친구가 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설정이다. 여전히 먼지만한 지구 행성의 30%도 안 되는 땅 위에서는 피부 색깔이나 국적이나 종교나 나이나 성별이나 성지향성 등등 온갖 시시한 이유들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들 있지만.
“사회는 어떤 일에든 자격을 묻고 자격이라는 말로 선을 긋는다.
어리기 때문에,
신체가 불편하기 때문에,
버림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무언가를 해내지 못할 거라는 확신. (...)
궤도 밖으로 밀려난 주체들이 사랑을 하고, 세상을 구하려 한다.
최종의 최종까지.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또 한 번 확신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단 하나의 자격이 필요하다면 바로 간절함이라고.”
천선란 『천 개의 파랑』 저자.
이 책을 읽고 <1987>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감상이 떠올랐다. 텍스트 기록과 사진의 불연속적 자료로 만나다 영상 자료를 보니 일련의 흐름 속에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무언가를 했구나, 이건 안 되겠다, 이건 못 하겠다, 스스로 그어 놓은 인간으로 사는 한계선에 임박해서 불안하고 두렵지만 선택과 행동을 했구나 하는 것들이 한 눈에 보였다. 경중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게 되었다. 모두의 무언가가 중첩을 거듭하여 보강된 파동을 만들고 거대한 물결을 밀어내듯이 그렇게 진행된 것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않은 사람들의 강인함과 보드라움이 빛이 닿지 않는 달의 뒷면에 따뜻한 구원으로 도착한다. 저자는 현실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시선의 힘으로,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진보와 희망의 세계로 상상하는 힘으로, 주류와 규범의 가장자리 밖에 더욱 집중하여 미래의 인류 - 청소년을 위로하고 살리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열일곱, 사랑을 받지 못해 주는 방법도 느리게 배우던 우리에게 첫사랑은 봄바람이라기 보단 태풍 같았지.”
“슈, 우리의 궤도가 평행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평행선이 아니라면 하나쯤은 교차점이 있지. 우리는 그 보육원에서 교차점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멀어졌다 해도 교차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교차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하기를.”
무슨 말을 보태야 할까요.
혐오로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과 나에게.
그 혐오 속에서 우리가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는 일이,
지구로 날아오는 소행성의 방향을 비틀고 표면을 깎듯
예전보다 나은 삶을 위한 우리의 최선이라는 것 외에는.
전삼혜
혹 이 책을 읽으시게 되면 리아, 제롬, 리우, 단, 루카(캐롤린), 세은의 이야기를 잘 읽어 주시고 힘껏 응원해주시길 바란다.
“나의 자유. 나의 등을 밀어 준 바람. 나의 울음 가득한 밤을 지켜준 사람. 나의 룸메이트. (...) 네가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올 희망으로. 설령 이 지구에 내가 없더라도.”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