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여름 - 이정명 장편소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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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스릴러 소설이자 그 이상 - 장르 성격 상 줄거리는 모두 생략합니다. 무척 멋진 작품이니 읽으시기 전 세상의 스포일러는 모조리 잘 피하시길 바랍니다 . 


4장으로 구성된 목차에는 4명의 이름이 있다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일종의 가이드이기도 하다4명 모두의 심리와 서사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다시 연결 짓다 보면인간들 사이에 오고 가는 거짓말과 오해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특정한 누군가의 삶이 그 위력을 마주치면 평온한 모든 것들이 어떻게 망가지고 부서지는지 냉정할 정도로 말끔하게 그려내고 있다.

 

괴롭다나이 탓이래도 좋고 뭐라 해도 좋고…… 삶이 무너지고 뒤틀리고 휘둘리게 만드는 인력들이 무섭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읽겠다는 계획을 지킬 만큼 가독성이 굉장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맺은 인연들에는 우연이 항상 개입한다이웃이 되었을 뿐인데 삶이 완전히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로 재편성되었다그 과정에 실종되고 죽고 수감되고 병들고 구성원들 각자가 끔찍한 타격을 받는다.

 

이 모든 괴로운 과정을 거쳐도 끝내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는 진실은 25년 전 그대로 남아 버렸다모두가 진실부터 밝히자고 하기엔 각자의 신념과 인내심이 다 다르다결국 진실은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만 정리되었다.

 

타인의 기억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아무도 없다그것은 진실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는 말과 같다.”

 

자기에겐 숨겨진 뭔가가 있어드러나지 않는 재능인지 감춰둔 비밀인지 몰라도 난 그걸 끄집어낼 거야안되면 배를 갈라서라도 말이야.”

 

그 중 일부는 진실에 가까워 보이는 오해와 착각이었고진실 대신 오도된 것들을 진실로 받아들임으로써 또 다른 헛된 복수가 시작된다끝없는 고통이 이어진다마치 진실이란 게 이토록 불길하고 부정한 일들을 끌어 들이는 것처럼.

 

진실에 가까운 건 진실이 아니에요독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우물물 전체가 독약이 되는 거예요.”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으나 드러난 것은 가족과 이웃의 모습들이다사랑보다 야망이 우선인다정하기만 하고 의지할 수 없는두려워서 서둘러 거짓말로 진실을 봉인한감춰지지 않은 욕망과 질투와 죄책감과 그리고 분명 사랑이 모든 요인들이 생물인 듯 얽혀 들자 진실을 기억하는 일보단 망각이 쉬워졌다.

 

그들은 가난하고 똑똑한 애들을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아요반체제활동가나 노조위원장이나 지능범죄자 같은 우환거리가 되기 전에 자기들 발밑으로 기어들게 만들겠죠먹이를 던져주며 사나운 개를 길들이는 것처럼요난 고분고분한 척 부자들이 주는 미끼를 받아먹을 거예요.”

 

결말은 지극히 슬프다한 가지 불행이 발생하면 위로하고 도우려는 방식이 먼저 오지 않고 공포와 적의와 회피하고 싶은 마음들이 더 빨리 더 많이 도착한다피해자를 비난하는 방식은 유구한 역사가 있고 누군가에게는 현재 진행형이다더구나 때로는 다수가 그런 입장이기도 하다.

 

매번 정확히 바로 잡는 노력이 이루어지지도 않고 그런 노력이 있다고 해도 대대적으로 성공하지도 않으니고통을 빨리 덜고 도망치는 방법이 영리한 지도 모르겠다문제는 그렇게 감춰진 진실로 그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히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오래 침묵을 지켰던 이유는 서로 상처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오래 덮어둔 침묵의 내부에서 자라난 거짓이 그들을 파멸시키려 들고 있었다.”

 

이야기 속의 어린 소녀가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지만한편 그를 살아남게 만든 이유와 동력이 무엇이었을까를 낱낱이 알고 나니 참담하기 그지없다거짓에 기반을 둔 모든 감정과 노력과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상처는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나이테였다그녀의 영혼이 그려낸 무늬였고 그녀의 상처를 그리며 그는 자신의 고통 달랠 것이고 그 그림은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것이다.”

 

독자로서 추리나 미스터리 작품이 반가운 이유는 기분 좋은 과정의 긴장과 결말의 후련함 혹은 충격적일 지라도 시원한 마무리 때문이다마지막 장을 읽고 간만에 무척 맛있게 먹은 음식이 꼼짝없이 체한 기분이 들었다논리가 아니라 감정을 흔드는 여운이 깊고 긴 작품은 한참을 아프다.

 

예언처럼 우연처럼 20년도 더 전에 친구와 재미삼아 나눈 문장 - What is done can not be undone. What is undone can not be done. - 이 이 책의 대화로 떠올랐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하지 않은 일들을 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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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아티스트 - 삶이 예술로 바뀌는 터닝포인트, 제32회 히로시마 문예 참가작품
윤호전 지음, 윤성화 외 옮김, 박신영 화가 / 지식과감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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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력은 물론이고 참가한 분들의 다양성과 기획 자체도 놀랍고 몹시 궁금한 책이었다작가만화가화가신학자 네 분이 흥미로운 협업을 통해 만드신 책인데 장르는 경영에 속해 있다.



매일매일 연속되는 실패의 삶에서도 절대 쫄지 않는다고 한 저자의 말은 부러우면서도 샘이 난다실패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안온한 일상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삼가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어쩌다보니 실패하기도 전에 쫄아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이리저리 일 자체에 부대끼다생각이 많아져 현실보다 생각 자체에 부대끼다이직을 열심히 하기도 하고 뜬금없는 직업을 갖기도 했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했다저자가 말하는 변하지 않는 직장과 메신저 대변인 역할은 무엇일까라이프 아티스트란 낯선 개념과 더불어 여러 궁금증을 가지고 읽어 보았다.

 

특정 분야가 아니라 인생을 디자인하는 아티스트도 있다는 것.

아프고 슬프고 지친 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

 


우리는 힘든 순간 기존의 습관과 생각에 얽매이게 된다나 또한 그랬다기존의 선례를 찾기 시작했고 주위를 둘러봤다하지만 나와 똑같은 상황은 단 하나도 없다찾는 걸 그만두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한다.”

 

성과를 확인하기 전에 우선 그런 꿈과 기획은 참 보람 있고 대단한 직업이라 인정할 수밖에 없다예술이 작품으로 물성화되어 특정한 애호가들이나 감상자들에게만 전유되는 것이 아니라인생 전반에 걸쳐 살아가는 모습에 분명한 호의를 가지고 끼어든다고 생각하니 일단 멋지다이미 내용을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새로운 개념으로 만나는 나로서는 이런 일을 조력하는 전문가가 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오늘 한 가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내 마음을 지키고 싶다. (...)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조급하고 이유 없이 바쁘고 쓸데없이 긴장되고 본인은 돌아보지 않고 서로 판단만 한다.”

 

출간할 책,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글을 쓰는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끝까지 가는 것일까저자는 인용을 통해 죽기 살기로 쓴다고 한다비록 창작하는 글은 아니지만 맡은 일을 어떻게든 완료해야한다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짐작 정도는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책의 곳곳에 아주 힘찬 제안과 계획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생활 속에서 잘 녹아난 감성들이 배어있고 아주 사실적인 경험들이라 쉽게 공감하게 된다이 글을 쓴 마음이 무엇인지 일독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정도로 전하고자 하는 것의 전달력이 좋다.

 

여전히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직업이지만저자가 이 직업을 택한 이가 갖춰야할 여러 사항들을 들려주는 문장들을 보고 웃음이 났다물론 비웃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문장으로는 간단하고 쉬워 보이지만 실은 어려운 일이고이런 사람이 내 일상과 삶을 본 모습 그대로 예술로 함께 만들자고 해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은 상상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리액션 잘 하기

기분 좋게 기다려 주기

용기 갖기

바로 할 일과 여유롭게 할 일의 구분 등등등.

나와도 남과도 잘 소통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아주 짧은 비슷하게 맑고 따뜻한 분위기의 에세이가 50편이다한글영어일본어로 실려 있다분명 살짝 다를 분위기와 감성들이 제각각일 텐데 히로시마문예참가작인 글을 일본어로 술술 읽을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특이하게도 성공이 아니라 실패에 집중하는 이야기실패에 머물지 않고 일련의 과정으로 여기고 발을 떼는 이야기소소한 상상이 아니라 화려하고 멋진 우리 셋은 작가가 되어 전국전 세계로 순회강연을 다닐 것 등등 상상으로 기쁨과 힘을 주는 이야기들이다깊고 넓게 삶을 보는 이야기이다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내 시간이 읽는 동안 천천히 지나가는 좋은 기분.


라이프Life란 단어를 떠올리면 언제나 정물Still Life이 생각난다. 연관은 없지만 문득 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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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좀 아는 사람
닐 메타 외 지음, 김고명 옮김 / 윌북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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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두려웠다. Swipe to Unlock. 무엇을 누구를 후려칠 작정은 아니시겠지요.

 

갑자기 직종을 바꾸거나 전업을 한 것도 할 것도 아니지만 손이 가서 읽어 보았다.

 

IT 업체의 PM(product manager) 3인이 공동 저자이다닐 메타(구글 PM), 아디티야 아가쉐(마이크로소프트 PM), 파스 디트로자(페이스북 PM).

 

구성이 워낙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어 재미있을 부분을 쏙쏙 골라 읽으면 된다.

 

시작한 지는 기억이 안 날만큼 오래되었지만 지금은 곤란한(?) 점도 없지 않은 페이스북에 대해서 불편한 마음을 좀 덜고 시스템 작동 방식을 배워서 적어도 기분 상 정리가 된 내용이 유익했다. 1부 기초지식 파트에 있는 내용이다사용 기간과 무관하게 기초 지식이 없어서 불편했던 듯.

 

작년 여름 막바지에 여러 이유 혹은 핑계로 오랜 시간 들여다본 넷플릭스에 대한 내용도 볼만했다.

 

그나저나 접속을 안 한지도 오래고다큐멘터리 두세 편 본 것 말고는 이용률이 점점 심하게 줄어들었는데고민할 문제이다,

 

노드스트롬이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했다고처음 알았다이유를 정독해 봄.

 

특별한 목적이 있는 독서가 아니라 - IT 산업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다거나 하는 넓고 얇은 지식을 일독한 것으로 만족스러웠다일단 잘 읽지도 않지만 뉴스에 휘둘리는 일이 없으면 최선이다.

 

그나저나 IT 업체들은 그들만의 행동 양식과 결정 방식이 상당히 독특하다는 느낌이다트렌디한 산업에서 멀어져서 동향을 몰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계속 산업 전쟁 중인 미국과 중국의 비즈니스 모델이 달라도 너무 달라 조금 놀랐고아마존이 의약품 우편배송 라이센스를 가진 필팩을 인수했다고 해서판데믹 시절에 당연한 사업적 결정이었다고는 생각되지만 역시 놀라웠다.

 

마지막으로 가장 진정한 관심이 가는 분야는 자율 주행 분야이다일반 승용차 타입과 저속의 다수 인원이나 물품을 배송하는 캡슐형으로 설계가 구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교통을 비롯한 승차 서비스가 미래에는 구글과 아마존의 역량과 기술로 집약될 듯한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어느새 벌써 일상의 곳곳에 바이러스보다 더 촘촘하게 퍼져 들었구나 뒤늦은 감상이 든다. 별로 막 원하던 미래가 아니어서 그런가, IT 상식이 생활의 기본값이 되는 게 신나지는 않구나.  


노후에 나는 어딘가의 생태마을에서 자연인(?)처럼 살고도 싶다 - 아무런 쓸모가 없어 어디서건 안 받아 줄 듯...  😅😑😶 가능하면 자연은 자연대로 두고 인간은 겸손하게 사는 면적을 줄여가며 분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건만. 복잡한 심정, 두통이 오기 전에 이만 총총.

 

면허는 자신이 딸 테니 어른들이 자율주행차량만 사주면 승차시켜 주겠다고... 무척 멋지고 너그러운 제안인 듯 당당하게 요구하던 큰 꼬맹이가 살아갈 세상이 궁금해졌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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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형사 동철수의 영광
최혁곤 지음 / 시공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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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감이 팍 드는 그럴 듯한 설정에 본격 내용을 읽기 전 웃음이 났다미제사건은 그 자체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지는데이 책의 미수반은 다행히(?) ‘미심쩍은 사건 조사반이다.

 

특채로 경찰이 된 전직 기자정치적 출세 야망이 있는 경찰청장 앞길을 닦아 주기 위한 변방부서사무실은 경찰청 옥탑방다른 두 명의 팀원은 은퇴한 반장과 형사로서의 의욕이 전무한 맛집 탐방에 집중하는 경위경찰청장 앞길을 닦기 위한 배려라고 보기도 너무 신경 안 쓴 구성이 아닌가 싶었다곧 오해로 밝혀짐!

 

인문학적 소양이 깊지 못하나 얕고 넓게 아는 잡학 박사다동네방네 간섭이 심하고 엉뚱한 질문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다눈치 9단에 능청 연기의 달인이시다의전에 예민하셔서 잘 삐친다커피 애호가이고 반려견과 반려묘를 사랑한다그리고 노래방 흥에 능하시다.”

 

근무태도 역시 범상치 않다여가생활처럼 여유만만한 총책이자 주인공인 동철수는 오래 전 형사 콜롬보도 문득 생각나게 하는 캐릭터인데 정말 뜬금없는 방식으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들을 마구 제공한다그 능력을 잘 알고 채용한 것인지 우연인지 헷갈린다뭐가 되었든 사건 해결이 제일 중요하지!

 

<사건 1> 가왕의 이름은 하필현실 가왕이 떠오르면서 그의 삶과 죽음의 면면을 알고 나면 반전 내용과 이름에 무릎을 탁칠 작명이다이권과 유언과 죽음이 어우러진 사건.

 

<사건 2> 유명 유투버의 이름은 탁해서방송 수익금이 떨어지는 형편노천탕서재책상고향집해혼식사건 전반에 걸쳐 뭔가 찜찜하고 탁한 느낌이 느껴진다탁하다 탁해.

 

<사건 3> 유명 냉면집 <행복면옥백사장라이벌 가게 <효자면옥>. 사업실패한 아들의문의 심야 손님돈을 받아야할 사채업자자금사정으로 그만 둔 주방장유산과 보험금결말은 짐작보다 더 슬펐다더한 일이 현실이 있을 것 같아 상상 속에서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고.

 

<사건 4> 연예 기획사뮤지컬 배우악명 높은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악플음독자살살해인물들간의 긴장도가 가장 높을 듯했던 이야기는 사연 역시 그러했다오래전 시작된 사건으로 말미암은 이어지는 복수들.

 

<사건 5> 학원이사장 집에서 벌어진 인질 사건총격전범인과 경찰 사망또다른 경찰 상해당시 사망한 경찰이 미수반 팀원 주혜순 경위의 남편이다재수사가 재개되며 20년 전 사건의 의혹과 비밀과 진실이 드러난다.

 

어느 동네인지 궁금해지는 지극히 현실적이라 오히려 더 잊지 못할 경고의 의미가 큰 작품일 수도 있다돈벌이를 위한 자극적인 개인 방송연예계의 무자비한 경쟁 체계젠트리피케이션의 비극더 이상 타협이 불가능한 정도의 강제와 개별성늘 문제인 정경유착과 사학재벌 등등.

 

이야기 속 사건피해자들이 대부분 노년층이라는 점에 불편하고 아팠다현실의 약자들이 된 노년층의 모습이 자꾸만 겹치기 때문이다가난과 사기와 폭행노년층들이 경험하는 2021년의 불안과 공포는 어떤 모습일지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으려 했다급작스러운 관심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진지하게 관심을 둔 저자의 시선과 마음이 느껴져서 뭉클하고도 서글프다.

 

즐겁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시간을 기대한 미스터리스릴러 작품에서 함께 살지만 잘 보이지 않는 분들의 처지가 어떤지 차분하게 생각할 기회를 만났다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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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동자 안의 지옥 - 모성과 광기에 대하여
캐서린 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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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의학적 정의는 이렇다

무엇이 현실이고 현실이 아닌지를 분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개인의 정신적 질병객관적 현실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제목도 부제도 무섭고 강렬합니다분명 아주 아픈 이야기일거라 생각되어 못 읽겠구나 싶었는데친구가 선물로 보내준 두 권에 이 책이 있었습니다차라리 호러 스릴러라면 마음이 편하겠지만이 글은 회고록입니다출산 후 3개월 째에 산후정신증을 경험한 한국계 미국인 저자가 병증만이 아니라 병증에 영향을 미친 삶을 샅샅이 회상하고 발견하고 기억해내며 기록한 일입니다.

 

내게 사랑은 켄터키에 있는 집 뒷마당에 핀 무궁화와 같다중략혹독한 전쟁과 기근을 겪고도 굶주린 몸에서 화사한 꽃을 피울 수 있게 한 그 인내심이 스스로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강함은 약함이 되기도 한다.”

 

이것이 내가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 이유였다누구도 나를 알지 못하고경계가 없으며갇혀 있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중략나는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올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바람을 거스르며 울부짖었다.”

 

태어나 보니 가족인 사람들과 가정환경은 그저 당하는 조건이지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인 조건이기도 하지만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원래도 쉽지 않는 삶에 분명 더 묵직한 무게가 얹히고, 현실에서 단단해 지는 만큼 인간은 더 허약해지는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또한 선택하지 않았던 삶의 조건을 바꾸고 테두리를 벗어날 방법이 진학일 수 있지요. 우리에게도 낯선 선택은 아니라 봅니다. 단지 벗어나는 것만이 목표였다면 이후에 전혀 바뀌지 않는 상황에 더욱 힘겨울 잔인한 가능성도 남은 선택.

 

화가 났다나는 내가 매 맞는 여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 없었고 나를 그런 여자라고 여기지도 않았다중략두루는 나를 사랑했다너무나 사랑했는데 내가 까다롭게 굴었다나는 이 상황을 멈추는 방법을 몰랐다.”

 

저자가 연인 사이에서 폭력을 경험했을 거라 짐작도 못했기 때문에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느꼈습니다사람이 가장 연약하고 허약하고 다치기 쉬운 감정 상태일 때가장 친밀한 상대로부터 가해지는 폭력이란 세상에서 가장 아픈 고통을 동반할 것입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을 비난하고 어떻게든 이해하려한 모든 순간들이 멍들었을 것이고어쩌면 완치가 불가능한 상처들은 잠복 중인 바이러스처럼 출산 후 여러모로 약해진 저자를 한순간에 타격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다 지난 이야기라고 아무리 위무해도 안 하면 좋았을 그런 경험들은 마음이 아프고 아팠습니다.

 

배속의 아기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드루가 생각났다더 정확히는 그의 어머니인 리아였다그리고 처음으로 분노가 아닌 연민을 느꼈다내가 잉태한 아이가아름다운 존재를 뒤틀리고 추잡하며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쩌면 나는 우울이라는 것을 익숙하고 단지 번거로운 것으로 치부해왔는지 모릅니다약을 먹으면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멍해지는 느낌이 싫어 안 먹어도 그럭저럭 견딜만한 만성적인 질환일 뿐이라고살면서 큰 일이 있든 아니든 모든 순간에 모두 각자의 이유로 우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출산이라는 경험을 하는 산모는 사회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을 거라 짐작하지만 최소 절반이 우울감을일부는 우울증을 , 1천명에 1명은 환청과 망상을 동반한 산후정신증을 경험한다고 합니다(하지현건국대학교 정신의학과 교수).

 

임신으로 내가 내 몸과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내 몸이 미리 프로그램된 길을 따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였고나는 통제권을 상실했다.”

 

출산 후 내 몸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대신 이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말았다.”

 

내 정체성내 존재는 내가 깨닫기도 전에 바뀌었다내 세상의 중심이 이동했다모든 것이 이제는 이 다른 생명체와 연관되었다.”

 

분명한 병증을 겪는 이가 있으니 알고 이해하면 억울하고 잔인한 비난을 가하는 대신 위로하고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요그런 생각을 거듭하며 마음을 다 잡아 끝까지 읽어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2주간 머물렀다중략어머니가 떠났을 때 나는 가슴이 아팠다어머니나는 이 단어가 가진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엄마였고여전히 내가 엄마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나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었을까나를 따라오는 그림자였을까중략확신할 수 없었다.”

 

더 치열한 기록들이 이어지고 더 몰입해서 읽다 보니 이후의 내용은 필사를 하지 않았습니다두려워한 것보다 저자는 더 담담하게 기록했습니다촘촘함이 숨을 멈추게 했고 계속 읽을 이유가 되어 줬습니다


다행스럽게 저자가 천천히 차근차근 어긋난 마음을 바로 하고 뒤틀린 정신에게 제자리를 찾아 주는 여정을 걷기 때문에 힘든 이야기라도 지치지 않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만한 경험을 하고 그 시간을 기어이 빠져나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힘은 어떤 것일까.자신의 삶에서 주름졌던 많은 것들을 펴고 어느 구석에 찌그러진 채로 둔 자신을 비로소 곧게 일으킨 제가 느끼기에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이렇게 어두운 통로를 피할 수도 돌아갈 수도 없이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이만큼 생생하게 절감한 적이 없습니다인간을 이 수준으로 망칠 수 있는 일이 인간관계에서 자행된다는 점이 두렵고 이 수준으로 망가진 인간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점이 희망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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