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되는 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3
최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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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살면서 겪어내는 무수한 일들 중에 덜컥마음을 꺾어 주저 앉히는 것이 무엇일 지는 당하는 그 순간까지 모르는 법이다. 어린 '태희'의 이야기를 느긋하게 읽다가이 정도의 행복하지만은 않은 경험쯤은 별난 것도 아니잖아하는 무심해서 가학적인 생각이 슬며시 떠오르는 순간에 다행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프게 기억하면 선명하게 아픔이 되는 것이고고민이 있어 괴로우면 괴롭게 기억되는 것이다그 모든 아픔들이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지의 물음들에 스며들었다가 지치도록 소환되기도 한다.



흔히 증거로 제출되는 유년기의 불행한 경험이 언제나 곧바로 이후의 삶을 예상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닐 수도 있다그 사이의 시공간을 당사자가 어떻게 지나왔는지틈과 간격을 뛰어 넘었는지바로 앞에서 멈춰 버렸는지도무지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태희가 마주친 어려움들과 반응하는 양식을 보고 어린 시절 때문이지하고 비열할 만큼 게으른 분석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니까……어린 태희가 어른 태희의 원인이거나 과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이 둘 사이에는 원래부터 세상에 없는 경우이기도 하지만 단절이 없었거나이 둘은 동일한 아픔을 경험하고 있는 여전한 동일인이라고 느낀다.

 

나는 꺾이는 중이었고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어머니와의 전화 내용이 너무 슬퍼서 왈칵 눈물이 났다소천하신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이백만원의 돈과 편지를 남기셨다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응을 쏟아내는 태희를 읽으며 이 정도로 망가졌었구나싶어 내게 있어 태희라는 인물이 지금 막 태어났구나하는 감정이 생겼다짜증과 절망과 무력감으로 짓눌린 태희의 삶을 보듬는 것은 편지 쪽이다.

 

편지는 이상하다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중략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할머니가 남기신 편지글 내용이 위로와 위안이 되는 관여 방식이 아니라태희가 자신에게 편지를 쓰는 자구적인 노력이라는 방식을 통해 시공간의 통로가 연결된다태희라는 존재에 표시된 무수한 단절과 틈이 신선한 상처처럼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면작용한 힘의 정체가 무엇이건 편지가 오가는 시공간의 연결은 분명 치유의 행위일 것이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나의 미래는 나.”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자칫하면 나조차 될 수 없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오직 나만이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더하기(+)의 삶과 빼기(-)의 삶*, 연산을 위한 수치들은 힘겨움의 척도가 아닌 듯하다어린 태희가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일하게 주어진 삶에 적응하는 방식아픔이건슬픔이건힘듦이건어려움이건 자신의 삶에 고스란히 얹어 두는 법 말고는 몰랐던 시절이 묵직한 더하기의 세계이다.

 

반면 성인이 된 태희가 참고 참고 또 참으며 모든 시간 빠져나가게 둘 수밖에 없었던그래서 무기력하게 잃어버리는 삶의 내용들이 빼기의 세계이다그러니 더하기와 빼기라는 삶의 방식은 둘 다 오답으로 작동하는 연산체계이다그래서는 어떤 형태이든 우울하게 견디다 망가지는 길 밖에 걸을 수 없다.

 

이 작품에서 어린 태희의 삶이 전개되는 내용은 (+) 표기로어른 태희의 것은 (-)로 표기되어 있다.


할머니는 짧은 유서에

 

잘못과 사랑은 나눌 것.”

 

이라고 남기셨다.

 

누구나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듣긴 하지만 뜻하는 대로 늘 살지 못하는 실천 지침 나누기(÷). 사칙연산기호로 표기된 의미는 바뀐 외모만으로도 낯설고 새로운 힘을 얻은 듯 보인다음식을 나누고시간을 나누고기쁨을 나누고즐거움을 나누고사랑을 나누고슬픔을 나누고아픔을 나누고어려움을 나누고산다는 일은 온통 나누는 일이다더하기와 빼기만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

 

하지만표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더라고슬픔과 아픔과 어려움을 나누는 일이 사회적으로 불편한 장소와 순간들은 어쩌면 여전하다어른이 되어 사회의 중심부로 이동할수록 더욱 그러하다타인과 물리적 세계를 자신의 존재와 명확하게 구분하여 적합한 행동과 변별력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살지 않으면미숙하고 공적이지 못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불편한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이는 어른스럽다는 말이 아이들에게 칭찬으로 사용되는 세상에서도 동일하다.

 

할머니는 잘못과 사랑 모두를 나누라고 적어 두셨다둘이자 하나인 태희들은 편지를 쓰고 받는 방식을 통해 존재, 관계,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나눈다.



형편없는 우리를 위해서는 뭔가를 할 자신이 없어그래서 핑계가 필요해지금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핑계네가 핑계가 되어주면 좋겠어.”

 

내 안에 갇힌 나를 꺼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래 봤자 나는 나겠지마트료시카처럼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매순간 달라질 수도 있지만똑같은 존재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지만그 모든 것도 일 뿐이다내가 되는’ 법이란 나는 언제나’ 나라는 것을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순간도 내가 가 아닌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나는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리고 내가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영속성을 지닌 모든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엄마 아빠처럼 자신을 견딜 수 없어 상대를 증오하는 방법으로 정신없이 화를 내며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어린 시절의 내가.

 

이거 야광이다.

말해 주려고.

 

원치 않던 모습들이 모두 한 번에 사라져주진 않을 것이다그래도 태희()에겐 아픔슬픔어려움힘듦을 마주할 새로운 힘이 보태졌을 것이다그러니,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남들은 절대 알지 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지를 모른 채 체념한 상태라면,

지금처럼 고인 채로 매일 짜증내며 조용히 썩어 가는 삶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최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 안의 무수히 많은 ()’,

모두 다른 모습으로 살아 온 모두 ()’,

같은 온기로 손을 잡아 줄 단 한사람인 ()’,

떠올리자.


가장 크고 화려한 마트료시카를 열어

안의 어둠 속에 갇힌 ()’를 찾아내자.

 

어떤 내 모습이라도 부끄럽지 않고,

내가 나눠져 달라고 부탁하는 초라한 것들을 힘겨워하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켜줄 단 하나의 무수한 ()’,

 

내 말을 영원히 들어주고

내 마음을 알아 줄 유일한 위안인 ()’,

 

나의 꿈이자 나의 미래인 ()’,

모든 순간 새로운 내가 되고 있는 ()’,

만나자.



.........................

 

현대문학 핀시리즈는 작가의 작품과 예술가의 작품을 접목해서 한층 더 아름답게 두 작품 모두를 소개하는 기획이다전체적인 책 디자인무게감표지의 예술작품내지의 글이 모두 감탄과 경이를 부른다서른세 번째인 이 작품은 타이틀title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표지 제목<Untitled>소설의 제목<내가 되는 꿈>과 더할 수 없이 친밀한 동행을 한다참 멋지다.



최진영 작가의 2019년 출간작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고 그칠 수 없는 화를 뿜다울음을 울다 심신이 탈진한 경험이 있다작가가 그리 의도한 작품은 전혀 아니지만 자그마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처럼 새 책을 펼치기가 무서웠다<내가 되는 꿈>은 필요한 만큼 예리하고 섬세하고 아프지만나는 2019년의 내가 아니라서그때보다 좀 더 내가 되어 온 나라서명치가 조이는 견딜만한 통증만 느끼면서 모두 읽을 수 있었다다음 생의 우주를 치밀하게 준비 중이다라고 여전히 자신을 소개하셔서 무척 기쁘다다음 생에도 최진영 작가와 같은 시공간을 나누는’ 우주에 태어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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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 - 새로 읽는 한미관계사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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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회자되던 한국인은 국난극복이 취미다라는 말은 농담도 가짜뉴스도 코로나 방역에 한정된 것만도 아닌 역사적 사실이다그렇게 된 것은 한국인들이 특이하게도 그런 취미를 즐겨서가 아니라 뭐라 형언할 수 없이 지독한 지정학적 위치가 중차대한 요인이다.

 

대륙을 건너오기도 했을 터이고 대양을 건너오기도 했을 최초의 한반도 정착민들은 초기에는 바로 그 지형 덕분에 수많은 부족들이 명멸하는 중에도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들만의 영역에서 생활문화유적을 남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구분되어 살 수 있었으나이동수단이 발전하고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주변 거대 공룡들로부터 끝없는 침략을 당하게 된다.

 

1,000번이 넘는 부침 속에서도 독립국가로서 언어정치문화사회 체제를 유지한 것은 한 편으로는 기적에 다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를 이어가며 견뎌낸 경험이 유전자에 명시되었을 처절한 고난을 겪었다는 뜻이다불편(?)하게도 과거의 공룡들은 현실의 강대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중국일본 주변에 포진해있다.

 

유기적이고 복잡한 요인이 작용했지만어쨌든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의 본질이 우호적이지 않은 현실의 반영인 듯무척 먼 곳의 이웃과 동맹同盟’ 관계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이 길다동맹이라 해서 온전히 평등한 파트너십이라고 믿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고 사실 또한 아니다계약 주체들 간의 관계만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현실의 약속은 존재한 적이 없다이는 다자간 외교의 모습일지라도 체계가 잘 잡힌 프로세스라기보다는 각국의 이익 관계에 따라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시시각각 급변하는 혼돈의 벽과 더 닮아 있을 것이다.

 

한미관계는 내용을 다 알아도 볼 때마다 어처구니없는 불평등한 사기계약,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관계가 시작되었다막장처럼 비유하자면 불리한 조건들만 가득한 사기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배신까지 한 관계랄까시작은 그러했다힘세면 다 그럴 수 있는 야만과 혼돈의 시절이다여기서 퀴즈배신은 단 한번이었을까요둘 사이에 폭력이나 위협 등 강제성의 흔적은 없었을까요?

 

아마도 1/10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영원한 동맹이라는 역설>의 가치들 중 하나는 근현대만이 아니라 미국이 강화도 공격!”이라고 외친 순간부터 대한민국 공화국의 정권별 관계 변화까지다양한 관점들은 물론이고 깊이 있는 역사적 이해와 분석을 통해미국이라는 존재가 한반도에 끼친 영향을 큰 판에서 볼 수 있게 들려주는 점이다.

 

동네에서 제일 힘이 센 친구라서 든든하기도 하지만 그 친구 모르게는 맘대로 화장실도 다녀오지 못하는 불편함이 공존하는우방이자 가스라이팅 가해자인 듯그 이상의 다양한 모습을 지닌한반도 지정학 못지않게 복잡하게 얽힌 운명의 상대이다즉 끊임없이 살벌한 외교 게임을 벌여야 하는 대상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반도를 꼭 집어서 눈도 한번 안 떼고 일일이 지시를 내릴 만큼 큰 관심을 일관되게 차별적으로 보여줬다는 말은 아니다오래 전 영국에서 친구들과 산책하다 웃긴 엽서들을 구경했는데문구 중 하나가 미국인의 세계 이해법이라는 것이었다We,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the rest of the world.

 

웃겼지만 웃기기만 한 것은 또 아니라 마침 학교에 초청 받아 오신 미국인 교수 두 분께 물어보았다물론스몰토크처럼가볍게재미난 답변을 기대한다는 표정으로그런데두 분이 슬프고 난처하고 등등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자신들은 정말 그렇게 학교교육을 받았다고 하셨다그야말로 예상 못한 충격서늘한 파장이 피부 위로 지나갔다.

 

이 책에서 정리된 내용을 읽다 보면 미국이 전 세계를 내려다보며 자국에 유리한 입장을 키워나간 일련의 과정이 보인다그 시행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거나 동맹으로서의 신의를 지킨다거나 하는 절대 굽히지 않는다사수한다는 원칙은 없고 자국 이익을 최우선한다는 대원칙1원칙만이 눈에 띈다그걸 비난하려는 건 아니고 할 수 있지만 주변국들을 살피고 세계 평화를 위해 진정한 수호자로서의 역할이었다면 아름다울 수 있었겠다, 그런 순진무지한 생각을 해본다.

 

복잡하고 앙금이 없는 것도 아닌 여전히 불편하기도 한 관계이지만 한미관계는 굳건히 유지될 것이다군사동맹은 미국과 수출입동맹은 중국과의 비중이 더 높은 대한민국으로서는 분쟁이 없어도 늘 분쟁지역인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한 여전한 줄타기를 이어가야한다더 이상 누구도 누구의 편을 무조건 적으로 들기 어려운 시대이며미국은 역사적으로 누구보다 더 단호하고 냉정하게 자신들의 실익을 위한 결정만을 반복해왔다설혹 그것이 타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군사쿠데타를 지원하는 일일지라도설혹 그것이 무관한 수많은 양민의 목숨을 대가로 요구할지라도.

 

오늘도 일본 스가 총리와 대중국전을 선포하는 당만 바뀐 미국대통령의 모습과 발언을 잠시 듣고 보았다트럼프가 아이언맨처럼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영웅이 되고자 했다면 바이든은 동맹을 이유로 중국전에 임할 것이다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국난극복을 취미처럼 해치웠지만 외교전에 돌입하는 일은 갈수록 복잡하고 힘겨워질 것이 뻔하다부디 우리도 쓸 수 있는 카드를 모두 다 영민하게 다 쓸 수 있기를이번엔 이용당하지 말고 생존과 번영을 위한 외교전에서 대한민국이 미국을 우리 카드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에서 건방지게 1/10이라 했지만 1/100쯤 되는 일독이다. 이 책이야말로 독서모임을 통해 함께 읽고 배워야할 충실한 텍스트이다. 아쉬운 것들이 줄지 않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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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숨
조해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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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이런 식의 설명으로는 이 소설이 전하는 분위기와 섬세함을 전혀 소개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고통으로 탁한 숨을 내뿜는 병실에서

옆에 앉아 가만 토닥여 주며 숨결이 편하게 잦아들 때까지 지켜보고,

이불을 올려 덮어 주고,

조용히 일어나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나서는 이가 들려주는 차분하고 온기 있는 병상일지…… 같다.

이런 느낌은 단지 환한 나무 꼭대기의 주인공 강희의 직업이 간병인이라서가 아니다.

 

이곳에서라면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듯 남은 생을 소모할 수 있겠다는 뜻밖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제로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때 내 시계엔 숫자와 눈금이 없었다.”

 

다만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 행복은 가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그들의 그 한순간을 위해서가까스로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하나는 또 한 번…… 하나의 숨을 쉰다.”

 

슬퍼지니 생각이 너무 많아지다 쓸쓸히기도 하여 몸이 꺼질 듯 정신이 까무룩할 것도 같은데,

작가가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걸어와 옆에 앉아 주는 기분이다.

전작 <빛의 호위>의 잔상이 남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과 환한’ 이란 제목이 이어져서 연상이 드는 걸까.



환한 나무 꼭대기에서 환하게 빛을 내는 달빛한 시절의 허무가 헛것 같았고 사는 것도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그곳에서 사슬 모양으로 내려오는 빛의 입자로 빚어졌으므로 때가 되면 다시 그것으로 흘러가 부서지고 허물어질 거라고도 말하고 싶은.”

 

부조리부당모멸굴레 죽음폭력모욕절망범죄협박거절싸움으로 버무려진,

멀쩡하게 산 채로는 관둘 수 도 없는 현실 곳곳에 작가의 시선이 머물다 떠난다.

 

세상 어디에도 나와 똑같은 모양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만 같았다감정적으로 친밀한 사람이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 말하지 않으면 실체가 되지 않는 거라고나는 그렇게 믿었다그건내가 가진 허약하지만 유일한 보호막이었다.”

 

그때는내가 남대문 시장 앞 사거리에 허약한 마음 하나를 두고 왔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 허약한 마음이 숨기고 싶은 파편이 되어 30년 넘게 언어의 외피를 써보지 못한 채 내 삶의 궤도를 떠돌아다니리란 것도그때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여러 문장들 사이에서 내가 아는 얼굴들이 떠올랐다모두들…… 왜 결국은 약하고 선한 건지그들이 독한 이들보다 마주 보기가 힘들어 슬쩍 슬쩍 피하기도 했다잘 지났다 드디어 끝났다 시원하다고 했던 20대가그때 만난 이들이 실체 없이 기억 속에서만 재생되는 건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저는 다만소설을 읽고 난 뒤 달라진 독자의 내면 풍경을 상상하며 다시 쓰는 것그것만을 할 뿐입니다."


아마도 저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을 것입니다내 고향은 문래라고나의 문장()은 그곳에서 왔다()......”

 

내 부모도 내 이름에 장소를 넣었다그래서 오랜 시간 태어나 자란 곳이 정체성인 양 느끼며 살았다수십 번도 더 지나친 문래*는 오늘에서야 흥미로운 탄생과 신비롭고 어지러운 성장을 거친 모습으로 이해되었다.

 

* ‘물레를 달리 이르는 말고려 시대에문래(文來)라는 사람이 처음 이것을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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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를 가짜라고 생각할까 - 가면 뒤에서 불안한 당신을 위한 심리학
산디만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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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본 영화 <라 붐>의 소피 마르소에 완전 홀려서 당연히(?) <유 콜 잇 러브>를 보고 몰리에르에 대해서도 잠시 집착하였다희곡을 읽었는데 번역 상태를 감안하고도 무척 재미있는 작품들이란 느낌이 왔다게으른 성격이 아니라면 그때 불어 공부를 시작해도 늦은 건 아니었는데어쨌든 몰리에르(Molière), '타르튀프 혹은 위선자(Le Tartuffe ou L’imposteur)'에도 이 단어가 등장한다.

 

그러니까그리 드물지 않은 현상 또는 증후군이라는 것이다저자 역시 성공한 이들 중에는 빈번하게평균 70% 정도의 사람들이 한 번 이상 겪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질환이 아닌 경험으로 분류하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 한다.

 

언제라도 사람들이 내가 껍데기일 뿐이란 걸 알아차릴 것 같아요” 엠마 왓슨

 

불쑥불쑥 내가 사기꾼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있어요내 자리가 내가 있을 곳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요.” 페이스북 최고운영자(coo) 셰릴 센드버그

 

그리고 이 책의 저자 산디 만 박사 역시 경험이 있다.



"사기꾼이 자기 가치를 증명하려면 매사에 완벽해야 한다실패는 자신이 가짜라는 생각만 키울 뿐이다그들은 실패는 물론이고 어중간하게 하는 것도 두려워한다중략자기에게는 자격이 없다고 믿으며 언젠가 재능 결여가 들통나 지금껏 쌓아온 부와 명성을 삽시간에 잃을 것이라는 공포를 느끼며 산다."

 

"한때 사기꾼증후군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야심만만한 출세주의자들의 병으로 통했지만이제 더는 이들만 겪는 증상이 아니다자신이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여기는 엄마자신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느끼는 아빠인기가 없어서 고민인 친구심지어 신앙심이 부족해 면목이 없다는 사람도 저자의 상담클리닉을 찾았다."

 

어쨌든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통계 수치가 늘 확실한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느끼는 불안이고 증상이다저자는 그런 점을 잘 이해해서 사기꾼 증후군 진행 과정을 설명해 두었고자가진단테스트까지 마련해 두었다.

 

진행 과정은 단순하다성공할 것 같지 않았는데성공했다면운이 좋아 성공한 것즉 세상 사람들이 내가 순전히 운이 좋아 성공했다는 것을 언젠가 알아차릴 거라는 불안이 동반하는 증상이다그러니 정체가 타인들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지면 과도한 노력을 하고속마음을 숨기고멘토를 찾고완벽주의 성향을 보이고칭찬을 무시하거나 성과를 폄하하여 자신을 불구*화한다고 설명한다.

 

* ‘불구라는 표현이 비하발언으로 분류되는지 아시는 분께서 댓글 등으로 말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가진단테스트에는 18개의 항목을 계산해서 36점 이하일 경우에는 증후군이 있다고 평가한다저는 OO점으로 증후군의 점수 범위에는 속하지 않았다온라인에서 할 수 있는 다른 테스트가 있는 지 찾아보았다결과는 역시 증후군 범위는 아닌 것으로.



경험의 수준보다 더 빈번하고 깊이 증상을 보이는 이들에게는 심각한 문제일 수 있으나우선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히 사실을 파악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나처럼 꿈이 늘 작고 소소한 성공에 만족하는 이들과 달리 이 증상이 심한 이들은 스스로가 부여한 목표가 무척 높기 때문에 분명한 능력과 실력이 있음에도 결국 그마저 부정하고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프다목표 달성을 못한 것도 괴로울 텐데그나만 성취한 것들로 인해 스스로를 사기꾼이라 인식하다니명백하게 남을 해하거나 이익을 취하려는 의도로 한 일이 아니라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최후의 경우너도 나도 일정 정도 운에 성패가 좌우되기도 하고 결과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살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행운에 미안해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기꾼인 를 완결무결한 타인들이 언젠가 발견하고 단죄할 거란 불안에서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지 않을까.



비교적 최근에 투병말고 치병이란 표현을 들었다설사 내가 마음이 헝클어질 정도로 사기꾼 증후군에 휘둘린다 해도 한 번에 완전히 제거해 버리겠다는 또 하나의 지나치게 높고 완전무결한 목표를 세우기보다자신이 그런 문제를 겪고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감정의 균형을 잡으려 애써 보면 좋겠다인지하고 이해하는 일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한 출발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저자가 모든 장에 마련해둔 실제 사기꾼증후군 사례를 담은 케이스 스터디를 읽어 보시는 것을 권한다환경과 배경이 다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기꾼증후군이 내가 원인이 된 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적어도 자기비난과 비하에서는 상당한 거리를 둘 수 있을 거라 믿고 싶다.


다소 무겁지만 절망적이지 않은 내용의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이가 있다. impostor란 단어와 심리적 특성의 일부를 공유할 수도 있는 단어 - snob - 를 공식적으로 구사하신 분, 어쩌면 사기꾼증후군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기록할 지도 모르는, 남이 하는 평가 따위 일언반구 신경 안 쓰실 듯한 건강하고 멋진 분.


다음 수상 소감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


! imposter를 찾아보니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애용하고 의지한 온라인 어원사전에 나오지 않는다얼마 만에 이렇게 놀랐는지 느슨한 정신이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 impostor (n.) 다행히 라틴어 원형대로 찾으니 나온다.

 

1580s, "swindler, cheat," from French imposteur (16c.), from Late Latin impostor "a deceiver," agent noun from impostus, contraction of impositus, past participle of imponere "place upon, impose upon, deceive," from assimilated form of in- "into, in, data-on, upon" (from PIE root *en "in") + ponere "to put, place" (past participle positus; see position (n.)). Meaning "one who passes himself off as another" is from 1620s. Related: Impostrous. For a fem. form, Bacon uses French-based impostress (1610s) while Fuller, the church historian, uses Latinate impostrix (1650s).

 

imposteur̃pɔstœːʀ] 

 

시간이 넉넉하신 분들은 프랑스어사전을 찾아 꼭 발음을 들어보시라녹음한 분이 이 뜻을 경멸하는 듯한 어조로 발음이 들린다오래 기억에 남을 듯해 의도치 않게 프랑스어 단어 하나가 학습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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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무지개! 작지만 소중한 1
테리사 트린더 지음, 그랜트 스나이더 그림, 조은수 옮김 / 두마리토끼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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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집 꼬맹이가 토끼띠라서, 그림책은 가족 모두 좋아하는 지라 반가운 책인데, 운이 좋아 감동 실화를 알게 되고 마음이 한 가득 뭉클해집니다. 


실화가 훨씬 더 감동을 주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습니다왜 그럴까요아무래도 기획과 설정과 창작의 짜임새에 비해 이야기 구조도 내용도 단순할 텐데요.

 

아마도 좌절과 포기를 생각해본 우리가 그래도 보고 싶은 현실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창작물 속의 결말이 아무리 시원해도 현실의 작은 선함이 더 뭉클한 것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지개 그림은 점점 더 퍼져 뉴욕 헌팅턴 타운의 마을 전체를 감쌌습니다.”

 

이 책의 단 한 문장이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마음에 퍼지는 기분에 잠시 움직이질 못했습니다물리학 전공자로서 무지개가 뭐 그리 신기한 것도 아니고 신비로운 것도 아닌데이른 봄 잠시 환상처럼 나타났다 섭섭하게 사라져 버리는 연둣빛처럼무지개의 존재감 역시 그러하지요그래도 누군가 무지개다라고 하면 다들 찾아보게 되지요마치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빛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것처럼 설레고 기쁜 표정을 다들 하고서 말입니다.

 

판데믹 그림책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마음을 파고들듯 아프지만판데믹 시절을 견디는 어른들이 전망과 분석과 경고를 하는 시간에도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책이 여전히 나오고 그 세상 속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건강하고 멋지고 빛나는 모습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있잖아, 어떤 이야기에든 시작과 끝이 있대.


여기가 있으면 저기가 있고......


그리고 그 사이에 무언가도 있지.

 

답답하다갑갑하다불안하다화가 난다이런 말들을 자주 하고 살았습니다그래도 되는 세월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거리로 나가 기물을 부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대신 상한 마음과 감정을 자주 말과 글로 긁어냈습니다다정하고 따듯하고 의지가 되던 모든 이들이 다 사라져버린 것처럼 굴었습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는 동안사라졌던 이웃들이반가운 목소리들이그리운 산책길들이즐거운 시간들이 잠시 다시 떠들썩하게 들리고 보이는 듯 했습니다여전히 그들에 기대어 살고 있는 투정 많은 제 자신도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환한 얼굴을 언제나 온전히 다시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영문도 모른 채로 마스크를 열심히 쓰고 잘 살아온 아이들에게 깊이 미안하고 감사하고 미안합니다확진사망실직경제 손실 등등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모든 피해들에 매일 주목하면서도아이들에 대해 어른들이 정식으로 사과 한 번 한 적이 없다는 새삼스런 자각이 듭니다.



 

아이들도 피해자입니다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빛나는 생명력으로 움직이며 세상을 연결해준 메시지가 이 그림들입니다미국영국독일캐나다 곳곳으로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합니다그런 아이들을 알아 봐준 저자들 테리사 트린더그랜트 스나이더 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흐리던 마음 한편에 비가 와도 사라지지 않는 무지개가 불빛처럼 들어왔습니다.


 

미래에는 더 안전하고더 행복하고더 너그럽고더 정의로운 곳에서 지금을 돌아보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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