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다는 것 (양장)
김중미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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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가라니. ‘빈곤 체험관이라니뭘 체험하겠다는 것인지 담당공무원 업무보고서를 들여다보고 싶다그러고 보니 영화 기생충의 흥행과 수상 이후 반지하 체험관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도 기억이 설핏 난다마음을 놓고 느긋하게 살 수가 없네부끄럽습니다제발.

 

영화가 아무리 인기를 끌어도 세상은 그 엄청난 사기 사건의 피해자인 노인주부가난한 사람들의 삶에는 주목하지 않았다우리의 삶은 영화에서처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아무리 구차하고 힘들어도 도망갈 곳이 없었다그래서 하루하루를 이 악물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은강동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타인과의 어깨동무로 살아남았다슬픔이든기쁨이든노동이든공간이든무엇이든 나누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은강동이다그 가난을 모르는 이들이 쪽방 체험관 따위의 터무니없는 구상을 만들어 냈다가난은 진열대 위에 전시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제일 좋은 것을 잘 알아보고 골라 선택하는 일만 반복하며 살아야 한다고 우리는 실제로 그런 교육을 받았다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공동체와 연대를 이야기하는 이 글 속의 열아홉 살 청년들을나는 이제 청년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라도 슬쩍 이들 옆에 앉아 보고 싶다.

 

지우는 내가 사람을 너무 잘 믿는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나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그 착한 사람들이 다 나처럼 가난하고 힘이 없는 게 문제이긴 하다그래도 마음이 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숫자가 늘면그것도 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동생이 무척 좋아하는 작가시라 오래 전엔 반가운 강연에도 함께 가곤 했다오래 전이라 써서 그런지 참으로 옛 일 같다다시 그런 환한 빛 아래서 육성을 듣고 얘기를 나눌 시절이 오려나출간해 주셔서 기쁘다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위로를 받았다.

 

모르는 건 약이 못 되고 누군가를 깊이 벨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들려주면서도 여전히 빛나는 것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글로 담은 작품이다. ‘김중미.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출간되고 20년이 지나는 동안 주변의 이웃들은 정규직 노동자에서 계약직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역사 속 어떤 시대도 가난한 이들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하지만 그래서 미래도 가난한 자들의 편이 아닐 거라고 체념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우리는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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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라 그래 (양장)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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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은 에세이라고 쓰고 나니 더 할 말이 없다.

 

읽어 보세요이런 덧 말 정도?



챙겨주고 싶은 이들을 불러 갓 지은 밥을 맛나게 먹이는 걸 좋아한다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밥심이 조금은 보탬이 된다고 믿는다.

 

사람은 세월이다친구 역시 함께 보낸 시간과 소통의 깊이로 헤아려야 한다. (...) 모두 나를 양희은 답게 만들어 주는 소중한 사람들더 챙기고 아껴주며 살 작정이다.

 

집에 계시는 남의 집 엄마들이 부럽기만 하다가 머리가 크고 나서야 엄마는 비교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박이 터지는 건 어쩌면 운이지만정성은 이쪽 몫이다잊지 말자.

 

내 삶에도 틀림없이 저렇게 중요한 부분을 옥죄고 있는 편견열등감자격지심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한다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이토록 힘찬 위로이게 양희은 방식!

 

https://www.youtube.com/watch?v=d8fiENcFkzI


오래전 방송복귀(?) 하실 때 반주는 기타 하나면 충분해요!”하시고

목소리로 무대를 다 채운 공연을 잊을 수 없다그때도 지금도 멋지다.

성시경씨 파트가 먼저 나오고 1분 50초 정도에 등장하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6WIRQKiSI8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온종일 치운 집안 곳곳에
어느새 먼지가 또 내려앉듯
하루치의 시간은 흘러가
뭐랄까 그냥 그럴 때 있지
정말 아무것도 내 것 같지 않다고 느껴질 때
가만히 그대 이름을 부르곤 해
늘 그걸로 조금 나아져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내 것인 한가지
늘 그댈 향해서 두근거리는 내 맘
오늘이 멀어지는 소리
계절이 계절로 흐르는 소리
천천히 내린 옅은 차 한잔
따스한 온기가 어느새 식듯
내 청춘도 그렇게 흐를까
뭐랄까 그냥 그럴 때 말야
더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 게 서글플 때
숨 쉬듯 그대 얼굴을 떠올려봐
늘 그걸로 견딜 수 있어
모두 흘러가 버려도 내 곁에 한 사람
늘 그댄 공기처럼 여기 있어
또 가만히 그댈 생각해
늘 그걸로 조금 나아져
모두 사라진다 해도 내 것인 한가지
늘 그댈 향해서 두근거리는 내 맘
늘 그대 곁에서 그댈 사랑할 내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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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의 심리학 - 서운한 엄마, 지긋지긋한 딸의 숨겨진 이야기
클라우디아 하르만 지음, 장혜경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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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어렵고 멈칫하게 되는 주제이다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 심리학이라는 학문으로 접근하는 것이 정말 도움이 될까 싶은 생각도 든다만약 책을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 결심을 하거나 행동을 바꾸는 일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야말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단계일 것이다다행히 그런 심각한 상황은 아니고 별 다를 바 없이 간혹 마음이 부대 끼는 것들이 있으니 다시 책을 읽어 본다.

 

독일 작가가 쓴 책이고 한국 작가가 옮겼다딸의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이해와 화해를 위한 책이다얼버무리기 보다는 솔직한 입장을 솔직하게 옮긴 책이고 8장의 <더는 못하겠다면>을 읽고는 조금 놀라기도 했다잘 지내든 그렇지 못하든 그럴 수 있다는 정확한 현실에 대해 가감 없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처음인 듯도 하다.

 

이론을 풀어 적용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심리치료사인 저자가 연구 결과들과 치료 경험을 통해 만난 사연들을 소개하는 자료에 충실한 책이다사연들마다 저자가 전하려 하는 메시지는 빠지지 않는다사례 중심의 이야기들이 주는 공감과 위로는 생각보다 기대보다 크다다양한 이들의 다양한 상황들을 만나면서 일단 자기 비하와 비난과 위축 등의 축소되는 사고 판단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관계와 삶에 대해 공통적인 면면들을 이해하고 용기가 나기도 한다가독성 높은 대화 방식의 에세이처럼 읽힌다.

 

왜 가도 가도 끝이 없을까요?”

엄마와의 문제는 절대 끝나지 않는 걸까요?”

엄마에게 다가갈 때마다 그 모든 해묵은 상처가 화산처럼 폭발하는 듯한 분노를 느끼는 딸들의 이야기.”

내면아이의 깊은 상처

이 세상 모든 딸들과 엄마들이 지닌 상처의 백과사전이자 치유 모음집.”

성장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치는 응원의 책.”

 

모두 다 낯설지 않은 문장들이지만 단 하나의 선명한 정답도 못 만난 문제이기도 하고무섭지만 말 그대로 끝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엄마라 해도 자식에게 완전히 충분하게 완벽하게’ 사랑을 줄 수는 없다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자식들에게 결핍성 욕구가 생길 수 있고 그 욕구는 살다가 불쑥 튀어나와 삶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저자는 엄마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딸에게 제안한다성장하고스스로를 치유하고원하는 삶더 나은 삶을 살아내고가능하면 엄마의 상처까지 치유하는 존재가 되라고.

 

오늘 상처 입은 아이는 훗날 상처 주는 어른이 된다.”

 

딸에게만 가혹한 것이냐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나조차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밖에는현재에서 출발해서 미래로 나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이런 여정을 살아가려면 우선 이해해야한다그리고 화해해야한다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서로의 삶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을수록 더 어려울 것이다.

 

작가 역시 심리치료를 하면서 가족의 애착과 관계 역학이 성인인 딸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하여 연구하고임상 치료 시에는 신체지향적 심리치료와 대화치료를 가장 많이 활용한다고 한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영화를 보듯’ 엄마의 삶을 바라보고여성이자 인간으로 이해하고딸인 자신도 독립적이고 온전한 인간으로 인지하고그러면서도 유기체처럼 완전히 떼어지지 않는 관계라는 것도 이해하고이미 살아 온 엄마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아무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하고내 엄마는 완벽해야 한다고 기대하지 말고인정하고 존중하는 부분들을 늘리고가능한 관계를 평화롭게 유지하자는.



르누아르 풍 책 표지가 아름답고 평화로워 무척 슬프다. <Young Mother> 메리카스사트작품 제목을 알게 되니 더 슬프다표지 그림 속 엄마가 어려서내 나이로 짐작해 본 내 엄마가 엄마가 된 나이가 아득하게 젊어서저 말간 얼굴의 어린 딸이 성장하며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순간들이 쉽지 않아서.

 

세상에는 어떤 상처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존재로 성장하고 거듭나는 이들이 있다그에 비해 나는 대단한 상처도 대단한 부담도 없지만 작은 일에도 지치는 기분이 든다사랑을 간절히 구하지도 않고 원망과 비난을 쏟아내지도 않지만잘 엉키는 감정 덩어리는 사라지지도 않는다깜냥이 이 정도 밖에 안되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변명처럼 자주 사용하지는 말아야겠다저자는 분명히 성장하라고 제안했다.

 

생각해보면 부모보다 해주는 것 없이 요구만 많고 무례한 이들도 만나게 된다다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쉽지 않은 어느 하루가 무한 반복되는 듯 난감한 기분은 어쩌면 사라지지 않고 어쩌면 옅어지겠지만일단 무척 마음에 드는 인용문을 만났다.

 

빛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어둠은 안 봐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인리히 베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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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노자를 만날 시간 - 숨 고르기가 필요한 당신에게
석한남 지음 / 가디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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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월요일 휴일을 몇 번 만나겠어신나는 휴일, ‘노자’ 뜻은 다르지만 책 읽으며 놀고 싶을 때 만나기 좋은 호칭이시라 읽었다동양철학과 노장사상에 대한 기본기도 없으니 맘 편하게저자께서 수백을 넘는 주석이 달린 글이니 단정도 말고 즐겁게 읽으라셔서 더욱 편하게 읽었다.



<도덕경>을 읽지도 않고 도덕경을 해석한 책을 읽어도 되나잠시 멈칫거렸지만 어차피 고문헌은 못 읽으니 언제 읽어도 직역에 가깝게 해석된 글을 읽어야 한다<도덕경>은 5600여 자, 81, 1-37장이 도경, 38-81장이 덕경이라 분류된다춘추시대 말기 실존 인물인 노자의 성명은 처음 알았다성은 이이름은 이(), 자는 담(). 신기하다이름은 이고 자는 귓바퀴 없음’ 2,600년 전 작명법인가.


Lao Tzu leaving the kingdom on his water buffalo

https://www.theschooloflife.com/thebookoflife/the-great-eastern-philosophers-lao-tzu/


나는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아야겠다류의 욕망은 구체적으로 없었고비교적 일찍부터 경제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을 이루는데 집착했다독립이라 적으면 거창하지만 실은 내가 필요한 생활비를 자급하고 그 덕분에 재정 지원에 따르는 불필요한 간섭을 줄이는 방식의 단순한 내용이었다알고 보니 다들 별 말 없이 하는 일을 별나게 선언하듯…….

 

그러니 노자께서 평균의 삶을 위해 애쓰는 것들을 말리시는 내용은 편안하게 읽고 지났다큰 소원이 없이 살아온 삶이 도움이 될 때가 간혹 있다.

 

有無相生(유무상생있음과 없음이 서로 생겨난다.

우주에 속하는 모든 일상이 모두 그러하긴 한데선생의 뜻은 헤아릴 방법이 없어 아쉽다.

 

咎莫大於欲得(구막대어욕득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내가 살아 보니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는 욕심은 곤란하다언제나 반드시 필연적으로 화를 부른다하지만 그런 시도는 그치질 않는다그러니…….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무위에 이르게 되면하지 못할 것이 없다.

무위에 이르고 싶다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전지전능이 아님을 잠시 잊고 욕심이 막 났다이래선 노자께서 말하는 작위가 없는 유위가 아닌 무위에 이르긴 어려울 듯네게 맞는 방식으로 살아라는 것과 상통하는 것인가.

 

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잘 모르는 혹은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말을 많이 하는 상황들은 지겹도록 보긴 했다정확히 알고 배우고 말을 줄이고 잘 듣자.

 

信言不美美言不信(신언불미 미언불신신뢰가 가는 말은 아름답지 않을 수 있고 아름다운 말은 믿기 힘들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표현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잘 꾸민보기 좋은이란 뜻으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화술화법 말고 발화자가 전하려는 내용에 더 집중하면 들릴 것이다오래 전 영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는 분의 강의를 수십 명이 집중해서 무척 즐겁게 들었다감탄하고 배울 내용이 가득했다그러니 외국어 공부하실 때 발음과 문법에만 힘을 다 쓰지 마시길중요한 것은 늘 언제나 담고 있는전하려는 내용이다모국어도 마찬가지지만.

 

뭇 사람들이 평하듯 내용들이 부드럽고 다감하다공자의 <논어>를 오랜 시간 좋아한 지라 두 분의 차이가 잘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가볍게 읽었다어려운모르는 한자를 찾아보지 않고 계속 읽은 방식이 뜻밖에 편안했다.


해치는 법 없이 만물을 이롭게 하는 하늘의 도다툼 없이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는 성인의 도예전엔 높이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쳐 두었던 말씀들이 이제는 선후판단 없이 편안하게 생각해볼 심적 여유가 있다이해 수준은 별 다를 바 없더라도힘을 뺀 것이 아니라 나이 탓에 힘이 빠진 것이라 해도 다행이다 싶다그 덕분에 내 삶에서 다투고 해치는 일이 덜하리라는 그런 기대가 높아졌으니.


2,600년 전 스승의 글을 만나니 무해한 존재로 살아가길 원하는 2021년 어느 저자가 떠오른다무위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삶의 방향은 무해를 향해 똑바로 보고 가보려 한다가능한 열심히 무해하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변하고 있는 방향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연이든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쪽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안도감을 준다는 것이다.

그저 사는 대로 살아지기 전에

스스로 신념을 가꿔가며 사는 일이

오래오래 성장에 대한 영감과 안정감을 줄 거라고 믿는다.

 

<무해한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신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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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작품의 재구성
강용수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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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읽어 본 적 없는 철학자에 대한 ~카더라 식 이야기들 중 니체 관련 내용은 초인과 권력에의 의지가 있었다맥락 없는 짧은 인용은 권력에 대한 욕망이 솔직하고 엘리트주의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위험하지만 무척 매력적인 이미지로 해석되었다이는 일종의 해방적 역할은 하는 지라 우아하고 고상하고 아닌 척하는 기성질서에 대한 저항과 반감에 복무하면서 근거 없는 내용치고는 꽤 오랜 세월 널리 회자되었다.

 

20대에 읽어 보고 싶었지만 무척 존경하는 교수님이 니체를 먼저 읽고 나면 철학사에 중요한 다른 저작들을 읽기가 힘들어진다고 만류하셨다신뢰하는 분의 말씀이라 진지하고 성실한 기분으로 칸트의 이성비판을 먼저 읽었다후회는 물론 없다칸트 선생 역시 무척 신뢰하고 존경할만한 분이고, 특히 저술에 있어 치장과 과장과 억측이 없는 아름다울 정도로 정직한 고찰을 하신 분이었다.

 

이후 분야를 달리하는 전공 공부로 인해 니체를 잊고 살다가, 2005년 한국의 니체 전공자들이 니체 전집 2권을 완역/완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읽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조각나고 왜곡되고 오도된 것들은 시원하게 바로 잡힐 거란 기대를 했다아래 인용은 니체편집위원장 정동호 교수의 출간 당시 인터뷰 내용이다출처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8763.html

 

니체는 초월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념과 신앙은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생의 의미는 이 땅 위에 있다고 했죠그런데 초인이란 번역어는 그 본래의 뜻을 왜곡하고 말았죠니체는 초월적 존재를 반대했는데 말이죠독일어 위버맨시는 형이상학적 미몽에 쌓인 지금의 인간을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이라는 뜻으로 쓰였는데도 미국에선 수퍼맨’ ‘오버맨으로우리말에선 초인으로 바뀌었어요.”

 

전집에서 위버멘시는 적당한 우리말을 찾지 못하고 원어의 발음대로 표기됐고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로 수정됐다고 한다.

 

권력힘을 뜻하는 독일어(Macht)를 니체는 정치사회적 힘뿐 아니라 에너지생명물리법칙 같은 자연의 힘을 말할 때에 주로 썼습니다권력이란 번역어는 그 뜻을 왜곡합니다.”

 

니체 사상은 생명윤리학에서도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그는 내세의 소망이라는 짐을 잔뜩 지고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정신이 자유의 쟁취를 만끽하는 사자의 정신으로 변했으나이제는 기만과 미몽을 벗은 순수긍정의 어린이’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왜곡되지 않은 생명순화되지 않은 자연 생명을 강조했습니다.”


2

 

그리고 2021기분으로는 백만 년 만에 니체작품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니체의 문화철학으로 독일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대학에서 박사를 받은 강용수 교수께서 대표 작품 다섯 개를 현대어로 친절히 풀어 재구성한논리적 순서로 글을 재배치해서 비전공자인 나와 같은 독자도 읽을 수 있는(?) 글이다입문서나 해설서가 아니라 좋다.

 

고심 끝에 그는 인간은 약속이 허용되는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 비극 예술의 균형이 깨어지게 된 원인은 음악에 대한 가사(언어)의 과도한 지배다.”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강물도 모두 받아들이려면 사람은 먼저 바다가 되어야 한다.”

 

영원 회귀는 (...) 인간의 선택과 결단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인간의 지위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겸손함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유사하며 정신은 교활함의 결과일 뿐진화나 창조의 궁극적인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능력들의 서열거리적대시키지 않으면서도 분리하는 기술, (...)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함을 갖지만 카오스와는 반대되는 것이 니체의 (...) 본능의 전제 조건이다.”

 

차라투스트라에 따르면 선한 인간은 사실 악한 인간이다. (...) 그들은 진리와 미래를 희생시켜 자신의 존재를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니체의 윤리관예술관인생관종교관자서전을 다는 아니지만 잘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선정되었고 설명은 상세하다나로선 무척 흡족한 한 상 차림 같은 책이다니체가 망치를 들고 어떤 것들을 깨부수며 살았는지 신나게 재밌게 읽었다.

 

예전의 오독자들과 이유는 다르지만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인물임에는 확실하다여러 평가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현대적인 인물인지는 몰랐다기본기와 깊이와 탁월성을 가진 철학자가 정면으로 덤벼드는 체제 전복을 위한 지적 사고여전히 그리고 오랫동안 니체와 그의 철학은 거듭 그 매력을 재평가 받고 인정받을 것이 분명하다.


3

 

마지막으로 이번이 아니면 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무척 사적이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덧붙여본다니체의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운명애파티피플이 되어 요란한 반주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고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연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살면서 내게도 경직되고 오만한 생각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순간은 없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노래를 처음 우연히 들은 순간 마치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착실히 들어 가사가 다 떠오르는 것도 아니고, “니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아모르파티가 젊은 시절 자신을 흔들어 놓았다며 간단 설명한 작사가에게 심층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라 성실한 비판을 할 순 없지만 마음에 든다고 학자의 사상에서 한 구절을 떼어와 맥락 없이 희화해도 좋을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지 않나그 대상이 오래전 사망해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면 더구나.

 

자신의 철학을 왜곡한 21세기 한국대중문화사의 이 현상이야말로 니체가 뜻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운명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라는 부정성을 포함하는 긍정을 담고 있는 일화로 보인다.

 

니체가 전하는 철학적 성찰은특히 자신에 대한 성찰은 삶의 여정을 통해 낯설고 고민스럽게 평생 마주해야할 질문이며자신의 행동이 선악에 휘둘리거나 좌우될 때의 선택과 결단과 책임으로 이어진다.

 

매 순간 선과 악의 근원에 대해주류의 지위를 성취한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가치를 끈질기게 따져 묻는모든 것을 전복하라!’는 다소 격한 구호로 연상되기도 하는 사상적 성취이다.

 

상업대중문화에서 주류로서 성공한 사례들을 자랑하는짜릿한 작업을 즐긴다는백 억 대 수익 구조가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내용들과는 섞일 수 없는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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