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로 숨 쉬는 법 -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김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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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20대에는 아도르노란 철학자의 철학책 읽기가 무서웠다도저히 모른 척하고 살 수는 없을 만큼 친한 친구가 굳이 학위 논문으로 아도르노를 저만 즐겁게 다룰 때에 이런 저런 괴롭힘을 당하면서 억지로 배우게 되었고좀 더 철이 들어서는 자발적으로 아트앤스터디에서 김진영 선생님 강의를 듣기도 했다그리고 지금무려 한 세기가 지나서인지 더 이상 막 무섭지는 않다.

 

차곡차곡 기억에 남았다고 자랑할 내용들은 안 떠오르고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상처는 다양하고 깊고통증의 간격에 겨우 숨쉬고 사는 건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같다어쩌면 더 지독한 통증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애써 익힌 적도 없는데반가운 기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다시 만나게 된다면 천천히 필사하며 찬찬히 잘 들여다보고 싶었다그래서 70 여 쪽 읽었나…… 하는 10분의 1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러니 이 포스팅을 읽으시면 도입부를 읽으신 겁니다. 이제 책을 본격적으로 읽으시면 됩니다. 

 

아도르노의 사유는 모든 것이 거짓말이다라는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이런 총체적 부정성으로 그는 안티 아도르노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습니다아도르노의 중요한 명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명제들>

삶은 살고 있지 못하다

잘못된 삶 안에 올바른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거짓이다

문화는 쓰레기다

모든 것이 자연의 표현이다

모든 것이 거짓인 사회에서 진실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가장 자연일 때 그것은 역사적인 것이며가장 역사적일 때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다

되돌아가는 일은 퇴행일 뿐이다

이론이 실천이다

 

모럴이란 걸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그냥 우리 삶의 뜻의미예요우리 삶이 파괴되었음에도 삶의 의미가 다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니그것들을 발견해내고 추출해내고 이론화하려는 안타까운 작업이다이런 식으로 <미니마 모랄리아>를 이해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본뜻이란 우리가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최소한의 도덕도 전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현대사회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이 끝까지 은폐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이 미니마 모랄리아’ 때문이라는 거죠그것들이 늘 가로막고 있다는 거예요그래도 이런 게 있겠지’ ‘이 정도는 있어라는 것들이 마지막 은폐된 진실로 가지 못하게 만드는 유혹이라는 거죠.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인식의 딜레마예요알고 나면 이미 늦었어요미리 알 수 있냐고요안 됩니다아도르노가 절대로 긍정성을 선취하지 않겠다고 얘기하는 것도 같은 의미죠그것은 경계를 넘어가버린 쪽에 잠재태로서 있는 것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해요.

 

우리의 사유가 미니마 모랄리아라는 도저히 걷어찰 수 없는 마지막 긍정성을 걷어차고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진리 내지는 진실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라고 봅니다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경계선을 넘어서야 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미니마 모랄리아’, 즉 도저히 버릴 수 없는 한 줌의 도덕이 아닐까라는 거죠.

 

우리가 과연 긍정성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우리는 언제나 사실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바라는 욕망을 봐요... 아도르노는 과감하게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합리성에는 그것을 넘어설 능력이 있다고 믿어요.

 

우리가 알아야 될 마지막 것을 알게 만드는 것은 절대로 무의식이 아니다그것은 우리의 의식이다.”

 

실제 우리 삶의 풍경은 어떨까요상처투성이라는 거죠상처의 정의가 무엇이죠패어 있음이에요있어야 할 것이 없으면 그것이 상처가 되는 거예요... <미니마 모랄리아>의 부제가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입니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하실 게 아니고요엄청난 고통의 발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두려운 것인지를요.

 

우리가 자신의 상처를 가감 없이 들여다보는 일은 굉장히 두려운 거예요다들 안 보려고 하잖아요무의식은 도망가요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돌려버려요그래도 살 만하지 뭐나는 남보다는 낫잖아이런 쪽으로 슬쩍 건너가는데 이 상처를 마치 지진계처럼 들여다보면서 그 안의 풍경을 꼼꼼하게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이 아도르노에게는 합리성이라는 것이죠... 사유란 굉장한 거예요생각한다는 것은 놀라운 능력이에요... 우리의 사유가 방해받지 않고 가고 싶은 지점까지 간다면 어디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는 겁니다사유는 그렇게 무섭고 강력한 거예요그런데 정치가경제가문화가 끊임없이 중간에서 사유를 차단시켜버리죠.

 

아도르노가 <미니마 모랄리아>를 쓰면서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믿음이 사유에 대한 믿음입니다오로지 그 믿음만으로...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읽어 보겠다는 것이 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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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시작은 아르테 미스터리 9
오리가미 교야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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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다른 존재를 어디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봄바람에 흔들린 적은 한 번도 없다취향 탓에 버릇 탓에 질환 탓에 봄이란 계절이 반갑지 않기 때문이었다꽃을 즐기는 기쁨보다 알러지로 숨이 턱턱 막히고 자다가 호흡 곤란이 오기도 하는 봄이 마냥 좋을 수는 없는 일고요하게 실내에서 책읽기 가장 좋은 겨울이 지나 뭐든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새 학기는 언제나 부담스러웠다단체 봄소풍게임도 장기자랑도 김밥도 매년 지루했다나를 제외한 세상 만물이 신나는 계절 같아늘 일정량의 소외감을 느꼈다.

 

그러다 한 여름 밤 문득 열기가 확 밀려나고 서늘한 온도 차이에 심장이 마구 뛰는 그런 순간이 있다잠들지 않아도 눈 뜨고도 마법 같은 무언가를 곧 목격할 듯이 심장이 요동친다아직 여름의 향기는 남아 있는데 이질적인 무언가가 밀려들어오고 있다는 불길하면서도 설레는 기분결국엔 계절을 차지하리라는 승리의 예감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여름에 상상해보는 가을.

 

그렇게 봄과 사랑과 연분홍과 라면에게서 정서적으로 먼 세월을 살았는데, 2021년 3월에 달달하고 애틋하고 마음 저린 감성적인 소설을 또 읽고 있다이번엔 극강 혹은 최고 레벨의 이야기인 듯하다. ‘단 한 번몇 마디 말밖에 나누지 못한 상대를 자신의 운명이라 믿고’, ‘다시 만날 날만을 기다리며 살아왔지만’,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목숨조차 아까워하지 않고 내던진다.’

 

가을은 좋아하는 계절이다.

달이 예뻐 보이고첫사랑과 만난 것도 가을이었다중략.

첫사랑의 얼굴은 9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얼굴뿐만 아니라 헤어스타일서 있는 모습밤바람에 나부끼던 옷의 주름까지도.

 

처음 만난 그녀에게 뭘 전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뭔가 말해야 한다는 마음만 앞섰다.

결국 입에서 나온 것은 단 한마디였다.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중략.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낫겠죠.”

 

9년 전과 똑같았다망설이면 늦는다다짜고짜 달렸다.

예의고 뭐고 따질 심정이 아니었다중략.

……당신은.”

도노를 보고 그렇게 말한 목소리도.

그때와 똑같다기억난다.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할 뿐이야중략.

언젠가 다시 만날 기회만이라도 줘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아카리에게는 짧은 시간이겠지만도노는 일생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9년 내내 좋아했어앞으로도 평생 좋아할 거야.”

 

예컨대 이 세상에서 머무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더라도 함께 있기를 원해서 한쪽의 인생이 끝날 때까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지다고 생각해."

 

2008년 12월 귀국 후 꽤나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잘 도착하지 못하고 지낼 때생일 선물로 받은 책 노희경 저자의 <지금사랑하지 않는 자모두 유죄>를 읽다가,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만큼만 사랑했고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하지 않았고그래서나는 행복하지 않았다중략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정말 죄책감이 들었다.

 

첫 눈에 반한 적도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해본 적도하여간 무모하고 죽을 듯이 미친 듯이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이 없었다그렇다고 슬프거나 아쉽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자의 필력 탓인지 유죄라는 납득이 순순히 들었다그 후에 기회가 있으면 꼭(?) 유죄를 면해보리라 결심했지만…….

 

사설은 이쯤하고 첫사랑의 순간그 설렘으로 직진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주인공하나무라 도노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아슬아슬 애틋한 이야기이다그리고 연쇄살인범도 등장하는 미스터리이며우리에게 익숙한 흡혈귀와는 다른 인간과 비슷한 흡혈종을 통해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자극적이고 직설적으로 지적하는 판타지SF이기도 한 꽤나 복합적이지만 복잡하지 않은 소설이다술술 금방 읽을 수 있다이렇게 쓰니 연쇄살인쯤은 가볍게 읽어요라고 뭔가 엄청난 얘기를 한 것 같긴 하지만.

 

사람이 이 정도로 피를 흘리고도 살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틀림없다여기는 살인 현장이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흡혈종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중략흡혈종은 괴물이 아니야특이한 체질과 능력을 지닌 걸 빼면 인간과 다름없어.”

 

의도적으로 옮기려고 들지 않으면 남에게 옮지 않고그 병에 걸린 게 내 탓도 아닌데중략앞으로 위험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관리하려 드는 사고방식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존중 없이는 공존도 불가능하다.”

 

흡혈종과 헌터대책반이라는 설정에추리미스터리에 무게감 더 얹힌범인 추적과 위협을 즐기다가 곳곳의 복선들을 회수하는 소설적인 재미가 있다캐릭터의 반전과 범인의 정체에 작가가 전하려한 메시지가 녹아 있다교훈을 주고 싶어 하는 일본 소설의 특징도 별로 불편하진 않았다충분히 재미있었는데, ‘노스탤지어 호러’ 장르에 대해 정의를 내리기엔 내 이해와 감상이 부족한 듯.

 

이 삶이 끝나는 순간네 곁에서 다시 태어날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My one and only.


..............


처음 배운 표현 오위합취 : 5개의 행성이 같은 별자리 안에 모이는 현상사전에도 안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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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라라 진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3
제니 한 지음, 이성옥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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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완결이다아주 간단히 10대 로코라거나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내 나이가 되면 조그마한 아이들이 성장하느라 온갖 애를 쓰는 모습이 애틋하고 사랑스럽고 걱정도 되고 무조건 응원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2018년 우리 집 큰 꼬맹이가 초6일 때영화로 먼저 보고 책을 읽었고가족들 모두가 나름의 웃음 포인트를 발견하고 재밌게 읽은 책이라그 시간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았다. 2권은…… 뭔가 영화도 책도 시큰둥했달까성장 과정에는 으레 이런 지루하고 우왕좌왕하는 시기도 있는 법이지 하고 지나갔다.

 

2권의 여파인지 쭉 잊고 살다가 넷플릭스에서 상영된 영화 소식을 듣고 기억이 났다이제 중3이 된 아이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물어보니대략(?) 기억이 난다고 설 명절 개봉 영화를 일단 보겠다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다.

 

https://tv.naver.com/v/17911537


나는 많은 걸 담아두는 사람이다영원히 지킬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매일 그 모든 걸 극복하며 서로를 선택하는 것이란 걸 처음에도 중간에도 끝에도.”

 

…… 10대라는 설정이 맞긴 할 텐데정말 굉장히 성장했다는 느낌이 먼저현실의 고민이 너무 커서인지, 10대 최고의 이벤트 프롬이 기대 만큼 설레지도 멋지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아 서운한 느낌이 두 번째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싶은 열린 결말이고 납득도 가지만 완결이라면서 한 권 더 봐야할 듯한 부족함은…….



10대의 독서도 감수성도 추호도 방해하지 말아야한다는 원칙(?)이 있어서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으으... 몹시 궁금하다연애세포가 벌써 다 사망하신호르몬과 체력이 매일 더 떨어지는정우성을 봐도 놀라지도 않은 나와는 다른 문화 경험을 할 것이란 짐작만 해본다.

 

유학 시절공부 잘하고 있냐는 안부인사가 참 무성의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 이 책의 아이들 역시 연애만 하는 게 아니라 사느라 크느라 참 바빴다.



귀엽고 사랑스럽고 진지하고 열심이고 모든 점이 좋았다고나는 빨리 나이가 들기만 바랐던 버거웠던 20대를 꽉꽉 채워가며 신나게 즐겁게 행복하게 지내라고 응원을 잔뜩 해주고 싶다.

 

나를 마치...... 네 모자 상자에 넣고 보관하려는 것 같았다고네 첫 번째 러브 스토리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다 끝났고너 혼자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것처럼 보였어.

 

이 대학에 입학한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뭘까하고 싶은 건 정말 많은데 하나만 딱 집어내려니 어렵다중략그러니까...... 모든 걸 다 해보고 싶다.



그나저나 우리 집 10대는 언제쯤 어떤 첫사랑을…….

 

마스크라도 벗어야 아이들이 서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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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들 - 인간 역사의 중요한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
김경훈 지음 / 시공아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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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진이 전달하는 이야기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사진 속 이야기는 때로는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합니다때로는 그 이야기가 오해와 편견 속에 읽히기도 하며 때로는 고의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사진은 오늘 우리의 이야기를 담는 타임캡슐이 되어 훗날 역사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사진 속 많은 이야기는 때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기도 합니다.

 

살면서 나만 모르는 베스트셀러들은 많고 많지만개중에는 나중에 알게 되면 통증처럼 느껴지는 책들도 있다또네이런 한탄이 절로 소리가 되어 나오는 책이 책의 저자인 김경훈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의 첫 번째 책은 <사진을 읽어 드립니다>이다.



개론 강의를 듣고 심화 과정에 도전하는 기분으로 두 권의 책을 펼쳐보았다무척 노련한 교수법을 가진 사진작가는 사진 보는 법이 아니라 읽는’ 법을 먼저 가르쳐주고다음엔 한 수 더 나아가 사진이 (직접) ‘말하고 싶은’ 것들이란 멋진 제목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현실이 아니라면 흥미와 재미만으로도 즐거운 이야기들이지만현실이라 때론 숨을 삼키고 입술이 마르는 긴장으로 심각하고 흥미롭게 읽게 되는 책이다.

 

사진이 우리 모두의 언어가 되어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고 해놓고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진보다 저자의 유려한 말과 글에 눈길이 더 오래 머문다재밌기도 하고 살짝 이율배반적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진이 말하고 싶은 것을 가장 정확하고 아름답게 전달하고픈 저자의 애정이라 믿는다.

 

뇌의 기능이나 인지 과학 혹은 양자역학 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사실성과 진실성에 대해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리 뇌의 프로페셔널한 왜곡 시스템과 고의로 그런 건 아니고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패턴을 만들어 대략 맞춰 판단하지 않으면 영원히 정보 분석만 하면서 아무 판단도 못하게 되어서 그렇다 기억력이란 내편인 듯 내편 아닌 능력은 이런 고민에 든든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프로세스의 약점을 동결하듯 순간의 진실로 실체화 시킨 사진이라면 가장 사실성에 근접해야 마땅하지만그 사진을 보는 주체가 다시 인간이라 또 다시 위의 오류체계에해석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더구나 사진에 찍힌 순간의 전후 맥락을 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사진과 짐작만으로 스토리를 완성시키고 상황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차분히 이런 저런 생각을 할수록 아찔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그런 경우들 중 사진의 피사체가 된 인물에게 실질적인 고통이 가해진 경우들이 얼마나 많을까지금은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시대누구나 찍을 수 있고 찍힐 수 있는 시대이다.

 

또한 디지털 사진의 복제와 무한공유는 유통속도가 빛과 같이 빠르다디지털 장의사라는 신종 직업에서 의뢰인의 디지털 사진이나 영상을 찾아 검색 0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상당한 시간이 요구된다고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디테일들은 사진이 촬영된 당시의 사회적역사적 환경에 의한 영향 그리고 사진을 보는 사람의 배경지식과 관점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됩니다바로 이 과정에서 의도적인 왜곡의 개입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사진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진기자로서 저자는 얼마나 고민이 많을 것인지짐작(할 수 있는 척) 해본다어쩌면 그 어려움을 위무하고자 저자는 이 책에서 이토록 친절하고 자세한 설명으로 그간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5년부터 2020년까지 백여 년에 걸친 다양한 사진들을 한 이야기로 수렴하며 논조를 유지한다는 것은 비범한 능력이다. 20여 년간의 현장 경험이 단단한 지지대로 기능하는 듯하다.

 

미국의 보도사진가 제임스 나처웨이는 중략그의 사진 한 장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제시해줄 수도 없고사회를 바꾸어 놓을 힘도 없지만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계기를 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관심을 원해서 돈벌이 수단으로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사진을 악용하는 이들은 사라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원하던 관심과 돈을 얻는 한은하지만 우리는 이미지의 소비자로서 그 범죄를 중단시킬 수 있다아주 간단하다관심과 돈벌이가 되지 않게 잠시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판단하고 행동하면 된다. ‘좋아요를 누르고 업로드할 것인지 아닌지를.

 

이미지를 소비하고 촬영대상에게 무례하고 왜곡을 위해 의도적으로 혼란을 부를 장면도 가능하고 아예 이미지 자체를 조작하기도 하는 시절의 인간 사회사진작가가 아니라 사진기자로서 사진의 역할에 진지하고 조심스럽고 책임감 있는 태도는 귀중하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언론 신뢰도가 밑바닥인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시사성과 사회성과 현실성을 모두 갖춘 책을 만난 덕분에 지식정보도 시선도 이해도 판단도 조금씩 좌표를 이동했다늘 그렇지만 긴 사족 같은 내 말을 적느라 책의 100분도 소개 못한 내용이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김경훈 기자의 중요한 이야기들이 담긴 사진들에는 늘 말하고 싶은 의미가 풍부하길역사의 기록 그리고 역사 자체로 불멸의 생명력을 얻길 응원하고 싶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902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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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갔었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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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 내용보다 작가의 근황이 궁금하여 읽기로 결정한 책이었다결론이 난 일이지만 존경과 사랑과 감사를 모두 거둬들일 순 없었던한 시절을 갖가지 감정들로 채워주던 신경숙을 다시 만나보고 싶었다그래서 다소 복잡한 심정으로 불안과 기대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기분으로 책을 열었다.

 

문장들이 담백해서 호흡이 곧 안정이 된다여전히 촘촘하고 정교하고 서두르거나 자극적으로 감정을 달구지도 않고통찰력과 정서는 비슷한 듯 다르게 절절하다.

 

가령, ‘그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흙먼지 같은 일생을 살기도 하는 게 인간의 삶이기도 하다.’ 평범한 문장에 별 다른 일이 아닌 듯도 한데마음이 잠시 흙먼지처럼 부옇게 되고 만다.

 

그리고 어젯밤엔 문득 내가 아버지를 보호하러 왔는지 내가 보호받기 위해 왔는지 구분이 안 될 만큼 불안해져 나는 작은 방 책꽂이에 꽂힌 내 오래된 책들 앞을 서성거렸다.’

 

이 문장은 괴이하게도 내 전생의 장면인 듯, 내가 본 영화의 장면을 기억해내듯 심상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친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잠시 어색했던 이를 금방 알아보고 기억해내듯 신경숙의 글이 스며들어왔다.

 

딸을 잃은 작가가 고향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가 함께 지낸 이야기이다문득 신경숙 작가도 글을 잃고 찾아갈 고향과 아버지가 계셨을까 뒤늦게 잠시 궁금해본다찬찬히 살펴보면 이 글에서 그의 그간의 세상살이들을 오롯이 다 보게 될 것도 같았다.

 

바쁜 시간에 어쨌든 쉼표가 찍혔고 순전히 내 짐작일 뿐이지만 그 시간의 틈에서 지나온 생을 분명 한번쯤은 훑어보게 되었을 것이다온전히 혼자 살아온 삶이 아니니 가족과 고향과 이웃들을또 그들과 얽히고설킨 많은 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그러다보니 아버지의 비밀도유년시절의 기억들도고향의 풍경들도고향집에 남은 추억들도동네사람들의 모습도 체온과 체취가 고스란히 느껴질 듯 그렇게 되돌아오지 않았나 싶다사진을 찍은 듯한 묘사와 서사들이 빼곡하다.

 

오래 슬퍼하지는 말어라잉.

우리도 여태 헤맸고나.

모두들 각자 그르케 헤매다가 가는 것이 이 세상잉게.

 

할머니들은 내 곁으로 바투 다가와서 손을 잡고 어깨를 만지고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두드렸다나는 산보를 하다가 할머니들에 에워싸여 느닷없는 위로를 받고 있었다내 마음에 팬 것들이 흐릿하게 뭉개지는 느낌이었다.

 

중간에 읽지 않고 덮을 수 있는 그런 힘없는 글이 아니라서 반가움과 안도감이 동시에 든다출간작부터 신경숙문체라고 느껴지던 문체는 거의 그대로이다아주 새로웠다면 섭섭했을 것이니 새롭지 않다고 실망스럽지는 않다.

 

모든 걸 다 계획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꺼낸 화제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니느긋한 산책길에 잠시 의자에 앉아 친구랑 이런 저런 얘기를 오래 나눈 느낌이 든다부모님은 별 일 없으시냐고 물었다가뜻밖에 모르던 일화를 듣게 된 기분날씨가 좋아서 울컥 슬퍼지지도 않고 바람이 좋아서 화가 치밀지도 않고그냥 다들 그런 슬픔이 있지힘들고 아팠겠다그렇게 차분히 건네는 위로 같은 분위기.

 

어떤 사실들은 때로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이라 시간이 흘러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끝내 사실일까싶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어떻게 그런 일이싶어서 사실이 우연이나 조작에 의한 것처럼 보이고 어떤 형식에 맞추기 위해 도식을 끌어온 것처럼 여겨지며 상상에 의한 허구가 오히려 사실처럼 느껴진다.

 

단죄도 비난도 판단도 아무 이유도 의도도 없었지만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자꾸만 작가의 모습을 찾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끝끝내 방해가 되었다신경숙은 자신의 서사를 아주 소중하게 작품에 담는 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그 버릇 탓이라고 변명해본다.

 

어쨌든 나는 이 책을 결국 오독하고 만 것 같다.

 

꽉 짜인 미스터리서스펜스스릴러추리 작품이 아니라면 반갑지만은 않은 분량의전혀 끌리지 않는 제목의 책을 신경숙이란 이름에 붙잡혀 읽었다.

 

마음이 뻐근하다.

 

그가 이렇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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