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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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여전히 회사에 가기 싫었고 회사에서 별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가기 싫었고 비슷하게 말도 잘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나았으므로 여름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방금 전 바에서 만난 여자는…….

 

[건널목의말]을 처음으로 읽으며문장에 담긴 기분이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프린트가 잘못된 것인지 난독증이 온 것인지 실컷 당황하며 일단 끈질기게 글자들을 읽어 보았다이야기의 방향이 휙휙 바뀐 모양을 화살표로 표시하면 중소 도시에 표지판을 다 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누군가의 혼잣말을 따라 읽기란 이렇게 어려운 도전이란 걸 처음 배웠다그러고 보면 남의 혼잣말을 따라 읽을 것 자체가 처음이다뭐랄까불편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농구하는사람]에는 다짜고짜 최인훈의 광장’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참고도서를 다 읽고 다시 오란 말인가오래 전 읽었지만 내 일상과의 접점이 적어 많은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심통이 더 나는 것인지이 단편을 읽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뇌가 멈춤’ 신호를 내려 멍한 것인지그런 극도의 불친절함을 가능성이라고 짚어 보기도 할 만큼 정신이 나갔다그 와중에도 특정 문학 작품들을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재밌고 신기해 보였다.

 

[이미죽은열두명의여자들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직접적인 처벌생각은 많지만 어떤 것도 말로 글로 남길 수는 없는 기분이다.

 

[자전거를잘탄다]를 읽으며 덕분에 자전거를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마지막으로 덤불 속으로 넘어지던 순간이 지나고 잘 타게 된 전환의 순간비로소 잘 타게 되었는데 잘 안 타게 되었다한국의 도시들은 자전거 타기에 참 별로다의외로 기후도 별로다.

 

[매일산책연습]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 중에서 사건의 명칭만 남은정말 오랜만에 들춰본 역사적 사건이 등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 광주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오래 전 근현대사 공부를 할 때 요약된 몇 줄로 읽고 넘어간 것이 전부라서처음으로 단일 사건으로 찾아보았다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한 점의 오점도 없었을 시대에,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쿠데타로 일으킨 신군부를 저지하기는커녕지지와 동맹을 강화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충격과 배신감에 비판을 넘어 여러 미문화원에 방화하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버마의 실시간 상황은 어떨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그칠 줄 모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식인과 형제살해를 자행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그 조상의 뇌로부터 거의 진화하지 않아서 뇌 자체는 여전히 아주 보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그래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특별히 더 야만적인 사회의 모습을 볼 때면 수치스럽고 절망적이고 답답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8개의 이야기들길지 않은데 짧게 읽히지도 않는다소설집에 정식 논문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설과 참고도서가 붙어 있고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하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쭉 전개하더니 막상 글로 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버리고 남긴 마음의 심상만 담겨 있는 전시회에 서 있는 기분이다내게도 예술경영을 전공한 친구가 있다그러니 선입견은 갖지 않겠다.

 

읽히는 것만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지치기도 하고 나른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사람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말과 추위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며삽을 들고 차라리 말을 묻는 상상을 한다그렇게 말들을 흩어버리고 자신은 따뜻한 곳에서 추위가 사라질 때까지 동면을 하고 싶다고몇 문장을 따라 읽었느냐는 정확한 수치와는 관계없이 이쯤에서 나는 갑작스레 무언인지 이해가 된다(는 착각이나 위로가 생긴다). 갈팡질팡엉망진창을 멈추고 차라리 동면을 할 수 있다면스스로는 멈추지 못하는 활동들을 그렇게 멈출 수 있다면그 한 때의 삶의 기록은 깨끗할 수 있겠다 싶은 기분모든 힘든 과정은 다 지나가고 찬란한 봄 날맑은 물과 반짝이는 풀과 잎들이 산들거리는 그런 완벽한 날에 잠에서 깨고 싶다는 기분.

 

매번 할 수 있을까이걸 왜 하는 걸까하는 고민을 한다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어느해인가 어쩌면 여러해 동안 그랬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쓰는 것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해 뜰의 잡초를 다 뽑고 있었다고 했다중략맞아 맞아 그때 그 넓은 곳 전체를 다 뽑아버렸지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이 작품은 내 가독성과 문해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려는 무렵그 대신 나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설핏 감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과 정리가 없는 상태를 못 견디느라 왜곡된 결말일 가능성도 많지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들려주는 게임과도 같은 방식에 휘둘려서 그렇지, ‘어쩌면’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을 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그것이 누구의 삶이라도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내일이 미래가 모르는 시간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사는 일은 누구라도 비슷한 반복이 반복되는 일이 아닌가……그러니 우리는 이토록 느슨하지만 같은 운명에 속해있지 않은가라고.

 

가끔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먼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것을 어두운 마음 없이 받아들인다. [농구하는 사람]


이 소설은 정신을 뒤흔들고 균열을 내는 독한 술이자 큰 망치이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읽으시길.
무지하고 무능하고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여러 차례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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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2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 균열을 내는 독서...도전할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네요^^

poiesis 2021-02-28 17:46   좋아요 1 | URL
쉽게 술술 읽히진 않았습니다. 여러 모로...
그래도 읽고 나니 뭔가 알듯 말 듯 남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솔뫼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참 반가워 하시기도 하더군요.
저는 처음이라 많이 낯설긴 했습니다. ^^
 
언어력 - 자주 말문이 막히는 당신에게
이도영 지음 / 창비교육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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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하는 두 분 변영주 감독과 정준희 교수가 뉴스타파에서 만든 영화 족벌 두 신문 이야기를 보고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을 보고 나서 어쩌다보니 바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언어력에 관한 정확하고 상세한 나만의 정의는 없지만그렇다고 하더라도언어력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두 분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라읽는 내내 기분은 양 극단의 방향으로 줄다리기를 했다.

 

인간의 언어력이 예술의 경지라 해도 과할지 않을 정도로 인간 정신의 아름다운 완결적 형식미를 갖춘 전달 능력인 한 방향과이 나이에도 가장 하고 싶은 말조차 간명하게 전하지 못하는 내가 서 있는 방향으로.

 

우리 모두는 어떤 형태로든 언어의 세계에 살고 있다. 혹시 장애가 있다면 직접 경험의 범위가 한정될 수도 있지만눈을 뜨면서 다시 잠들 때까지 온갖 종류의 언어들에 노출되고 언어활동을 계속하며 살고 있다심지어 꿈에서조차 언어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렇다고 평생 연습하고 사용한 언어에 모두가 능숙하지만은 않다는 기막힌 현실이다억울한 마음이 먼저 들지만호소를 하거나 화를 낸다고 바뀌는 것은 없으니 능력이든 기술이든 필요한 것들을 갖추어야 원하는 삶이 가능해진다.

 

뒤늦게 모국어를 제대로 배워 보겠다고 한 나에게 지인들은 정답을 가르쳐 주었다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무슨 배짱인지 그 정답을 두고 나는 한국어능력시험준비를 시작했다그러다 한자능력시험도 보고 한국어강사자격시험도 보고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자격증은 늘어났지만 언어력은 요지부동더 어색해지기만 했다거의 모든 문장이 비문 폭탄이랄까.

 

언어 구사력이 문제인데 어휘력만 늘려보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수년이 지나고 테스트로 할 수 있는 방법이 고갈되니 대안이 없어서 읽고 쓰기를 시작했다올 해는 매일 읽고 쓰는 것을 새해 결심으로 삼았다.

 

여전히 번역된 책들 중 일부는 영어책 원본이 더 쉽게 읽히는 경우가 꽤 있다한국어는 참 어렵다감을 못 잡는 것인지 맞춤법은 아무 진전이 없고 서너 번을 읽어도 늘 오타가 남는다.

 

시간을 보내지 않은 분야들의 책을 많이 읽다보니 용어들에 적응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리는 분야들도 많다인문/사회과학 전공자 분들 많이 부럽습니다. 언어가 정리되지 않으니 그 분야에 대한 사고 역시 갈팡질팡누덕누덕하다어쨌든 훈련 중이다그러니 이런 효과가 있다는 말에 귀가 온통 솔깃하다.



 

갑론을박 끝에 현재는 언어와 사고는 같지 않되언어가 사고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합니다우리는 특정한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그러다 보니 그 언어에 영향을 받아 그 언어의 사고법을 부지불식간 받아들입니다.”

 

편하든 불편하든우리는 대화할 때 상대방의 나이지위직업친밀감 등을 고려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상대방을 의식하는 거죠그러다 보면 존경비하겸양차별수직적 관계’ 등과 관련된 사고가 내면화됩니다한국어 사용자의 숙명이라고나 할까요.”

 

특정한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하지 못하면 그 단어가 의미했던 개념도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하여 사고를 갈고 닦을 수밖에 없습니다우리말이 소중한 이유죠거의 유일한 사고의 도구가 아닌가요?”

 

현재 교육학을 가르치는 분이라서인지책 내용이 친절하고 배려가 넘친다아주 친근한 매체들가요 가사나 문학의 구절을 소개하며 조용히 독자를 이끈다혹시나 집중력이 떨어질까 중간에 무척 기분 좋게 풀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문제들을 풀어 보도록 배치해 두었다테스트에 익숙한 세대라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한 조사에 따르면듣기는 우리 언어생활의 5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고 해요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85퍼센트는 들어서 안 것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죠듣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에너지도 꽤 많이 소비하고 고도로 집중해야 하는 일이지요


전문적으로 말하면능동적 이해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영어에서는 들리기’(hearing)와 듣기(listening)를 구분하고 있습니다사람들이 손쉽게 잘하는 듣기는 hearing이죠. listening을 잘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잘 들으면 인생 전환도 가능합니다.”

 

수다와 유머로 위장한 새로운 정보들이 가득하고 도전 욕구를 채워주는 난이도의 내용들이 뇌를 자극한다내 언어력에 집중하기보다 자연스레 느껴지는 저자의 언어력에 감탄하며 읽는다이 책을 교재로 한 학기 정도 수업을 받으면 더없이 좋겠다는자꾸만 체제 교육으로 향하고픈 기분이 또 들었다.

 

유익한 정보와 팁을 제공하는 실용서의 수준을 훌쩍 뛰어 넘어자신의 언어생활을 민감하게 살피고 남에게 차별을 행하고 있는지 고민하는 저자의 글이라 마음이 편하고 행복해진다.

 

장애우라는 단어의 차별적 내용에 대해서는 십여 년전 활발한 토론에 참여한 기억이 나는데맙소사아직 사용 중인 줄 몰랐다역시 사회 전체의 변화란 획기적인 계기로 소문이 크게 나지 않으면 참으로 더디게 이루어지는구나 새삼 절감한다.

 

가장 새롭고 특이한 용어는 집사람아내와이프 대신 현려자(현재 반려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는 것이었는데뭔가 세상 현실적이고 적확한 표현에 웃음이 크게 났다폭력과 혼란을 지양하고 책임감 있는 언어생활을 하자고 독려하고더 따뜻한 공동체를 같이 만들어 보자는 말을 재밌게 조용히 차분하게 따뜻하게 하는 분의 언어이니당분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소개해보려 한다#현려자

 

언젠가 다른 책에서 말이란 원래 적과 아군을 판단하기 위해 탄생한 도구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난다문화사회적 배경을 이해해야하지만 일부는 동의한다어쨌든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책의 저자 이도영 교수는 물리적 폭력 없이 모든 문제를 언어로 해결하는 사회를 꿈꿔봅니다.”라고 뜻을 밝히셨는데나는 물리적 폭력 이외에 다른 폭력도 한 번에 다 없어졌으면 하고 정월대보름을 맞아 큰 꿈을 바라본다물론 물리적 폭력은 확실히 가장 먼저 없어졌으면 한다.

 

무척 재밌게 읽었지만 내 언어력이 환골탈태한 효과는 아직더 잘 이해해서 기억하고픈 문장들만 잔뜩 생겼다그나마 밑줄 긋는 버릇이 없어 책이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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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1년
이인화 지음 / 스토리프렌즈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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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스릴러라지만예상을 아예 못한 바는 아니지만이 소설의 스케일은 일독으로는 자괴감을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다역사, SF, 판타지스릴러 장르 불문 안 읽어본 작품이 거의 없는데도 이동 구간들을 잘 기억하고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역사를 기반으로 한 추리 소설로 명성이 자자하고오랜 세월 구축된 스토리들이 특기로 정형된 이인화 작가의 노련한 작품이다추리소설을 즐기기 위해 아주 날 선 지능과 지성이 필요하다면이 소설은 잘 작동하는 날 선 지능만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 정보와 지치지 않는 지적 호기심도 요구한다.*

 

등장인물들 중 부계 조상 한 분이 등장하시는데소설 장치라 창작된 것인지 의도가 있어 그런 것인지 남의 집안일이라 단순 실수인지어쨌든 집 안이 달리 나온다화가 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살짝 묘한 기분으로 읽었다.

 

이야기 줄거리는 언급하지 않는 편이지만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일부 나를 위해서 정리해보았다그래봐야 전체 분량의 극히 일부이고 스포일러를 염두에 두고 이리저리 피한 내용일 뿐이지만.

 

우리의 희망과는 별개로 2061년 그 치사율이 흑사병 수준에 이른 바이러스는 코로나 61이란 새로운 명칭을 얻는다최악의 코로나 바이러스로 예측되는 존재의 이름은 아바돈이다한글을 사용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해서 한국인을 지배하게 된 세상주인공 심재익은 한글을 수호하고 훈민정음해례본을 지키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1443, 1896년의 인물들이 선택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따라 2061년의 사람들의 삶이 결정된다는 얼개이다.



재익은 의병들에게 성난 눈길을 돌렸다. “책 어디 있나세종 장헌 대왕께서 지으신 어제 훈민정음 어디 있냔 말이다!” 초조한 나머지 목소리가 잠겨 들었다중략재익은 마음이 너무 괴롭고 울적했다수 없이 탐사를 했지만 이렇게 파렴치한 짓거리는 처음이었다인생의 물밑은 얼마나 깊은가몰락의 밑바닥이 감옥살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태어나지 않은 부모미생전의 시간에 더 깊은 나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밖은 어두웠다한때 한국인들의 것이었던 사라져버린 삶이 저 어둠 어딘가에 스며있었다그리고 재익은 홀로 남겨졌다추호도 용서 없이 흐르고 또 흐르는 시간과 함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보다는 과거에 대한 후회를 압도적으로 더 많이 느끼면 살기 때문인지다른 시간 여행처럼 이 책에서도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가 현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장면들에 수정을 가하고 싶어 한다과거를 수정하는 순간바뀔 미래는 미래에서 온 주인공이 겪어 보지 못한 또 다른 미래일 터인데그 때의 판단은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인지나는 언제나 그 지점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진다이 소설만의 독특장 장치로서 현대과학과의 불필요한 논쟁조차 피하려는 영리한 의도인지시간이동의 방식은 육체를 이동시키지 않는 정신이동 방식이다.

 

홀로그램인공지능기계와 인간 사이의 혼종뇌에 전자칩을 이식해 몸을 인공지능에 임대한 인체 혼종 등의 다양한 SF 판타지 장치들로 등장한다새삼스럽지만 딱히 불가능한 기술 수준은 아니다 싶은 기분에 변화 속도가 참 숨 가쁘게 빨라졌구나 싶다그와는 별개로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인문학적 성찰이 넘치는 문장들은 2021년 독자인 내가 충분히 따라 갈 수 있는 내용들이고 시사성과 현실성을 갖춘 통렬한 비판들이 적지 않은 분량 나오기 때문에 진지하게 읽고자 하는 독자라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상당히 느려질 법도 하다.

 

탐사자들이 서로 적이 될 수는 있어하지만 우리 사이엔 어떤 규칙이 있다고우린 권력의 개가 아냐과학자들이지서로에 대해 기본적인 존경심을 가지고 있단 말야이번 일은 하면 안 되는 일이야.” “되는지 안 되는지그걸 너와 내가 결정할 수 있어?”

 

시간여행은 상용기술인 듯기술사용에 따른 어려움이나 부작용은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성공적으로 1896년으로 이동하면 독자는 SF 판타지 픽션의 세계로부터 순식간에 친일파친러파독립운동가독립협회의 무대가 차려진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마치 실제 현실의 인물들이 카메오 출현을 하는 드라마 풍경처럼 픽션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듯한 사실성으로 전개된다게다가 책 중간 중간의 정성스런 삽화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자료들처럼 느껴지는 지라 이 작품이 소설인지학문적 귄위가 있는 연구 자료인지 재밌는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작가가 얼마만한 공을 들여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모든 것에서 느껴진달까.

 

1896년에 발생한 아바돈의 치명적 옛것 치사율이 너무 높아 숙주를 너무 빨리 죽였던 바이러스 -의 이름은 데모닉이다바이러스가 일곱가지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변화를 보이게 하는 기술은 이도의 무지개라 명명된다구체적 역사적 사실들을 기억하는 것에 취약한 독자로서 제물포에서 여러 세력들이 격돌하는 장면은 역사 판타지물 게임처럼 박진감있고 구체적으로 느껴졌다이도(세종대왕우파좌파반이도파의 탐사자들로 나뉘는 각 세력들이이 원하는 것은 바이러스의 원형 균주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판데믹도 종식시키고 인공지능관련 산업 패권도 독점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니 이 모든 소란이 다 납득이 간다.

 

초라하고 애처로운 사람들이었다그러나 누군들 대단한 값어치가 있겠는가인생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데누군들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받을 수 있겠는가.

 

기계 혼종인인체 임대인철벅이유곽 창녀만인계 노름꾼세계공동어 운동가아편쟁이부두 하역 인부 그리고 시간여행탐사자들 등 흥미진진한 역할을 맡은 인물들이 가득하고판타지 픽션으로서의 새로움과 흥미진진함이 부족하지 않고역사 기록에 충실하게 토대를 둔 역사 판타지로서의 이야기들이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진다특히 1895년에서 1896년 구한말의 시기에조선왕조의 태조와 세종이 각각 여진족과 맺은 관계의 구체적 내용들이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으로서 설명되는 내용은 무척 흥미로웠다이제는 명칭으로만 남은 청일전쟁 역시인천 제물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다시 생생하게 이야기로 경험하고 나니역사서를 읽는 기분으로 몰입이 되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여진족을 팔천(八賤)이라 부르면서 백정무당노비광대 같이 대접했다서북 사람에겐 벼슬도 주지 않았다말로만 동족이었다여진은 조선에게 문명의 이름으로 복속당했다조선이 일본에게 당한 것과 똑같은 수치를 겪었다내가 문명이다더러운 반편들아게을러터진 무지랭이들아너희는 나를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흉내 내어야 해그러면 나와 같아질 수는 없지만 언젠가 비슷해질 수는 있을 거야 ……오만한 대동주의와 장형의식의 끝은 언제나 최악의 결별이었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이인화 작가가 이야기를 엮어 내는 기막힌 재능과 사회적으로 평가 받은 명성을 생각하면 별 일도 아니겠지만새로운 아이디어와 깊이 있는 통찰이 공존하는 점은 여전히 인상적이고 부럽기도 하다특히 감정의 과소비나 감정적 사치라는 표현을 문맥 없이 가끔 사용하는 나로서는 문자학적 사치라는 표현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하고 반갑기도 했다가장 발달한모두가 꿈꾸는 알파벳인 한글을 문명의 주변국인 조선에서 만들고 한국인이 사용한다는 사실이 사치라 하는 저자의 말을 읽으니사치와 낭비를 유쾌하게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기분이 들뜨고 사치스러워진다.

 

인간의 발음하는 분절음은 겨우 3천여 종인데 로마자는 그것조차 완전하게 표기하지 못했다인공지능 시대가 되자 각양각색의 발성 기관을 가진 기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기계들의 현란하리만큼 다양한 흡착음당김음기식음떨림음공명음 앞에 로마자는 무용지물이었다중략그 불어내고 빨아들이고 쯧쯧거리고 쉣쉣거리고 뢱뢱거리고 왤왤거리고똙똙거리는 소리를 표기할 수 있는 문자는 지구상에 단 하나이도 문자뿐이었다세종 이도(?)가 1443년에 발명한 이 문자는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하여 398억 5677만 2340종의 분절음을 표기할 수 있었다.

 

벨은 이도 문자의 출발점을 알았다고 생각했다모든 언어는 근원모음 아에서 시작되고 감탄사와 의성어로 이어진다전혀 다른 언어도 비슷한 감탄사와 의성어를 가지고 있다어미가 새끼를 보살피는 소리위험을 알리는 소리서로 좋아해서 함께 있고 싶은 소리서로 닮고 싶어 하는 소리소리는 생명이 우주에게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

 

동의하시나요근원모음이 라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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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 필립 K. 딕 단편집
필립 K. 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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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선생 본인이 화성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나도, 우리 회사도,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선생 마음속에서는 실제 여행과 같을 거예요. 그건 확실하게 보증하죠. 이주일어치의 리콜입니다.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전부 들어가 있죠. 이걸 기억하세요.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드립니다. 아시겠어요?”



<토탈리콜> 1990년 작품을 본 이들이라면 SF적인 상상으로 꽤 오래 즐거웠을 수도 있다허나 2012년 확장 감독판으로 처음 감상한 이들은 대체현실이라는 뇌에 전달되는 신호를 조작해서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이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더 현실감있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제부터 화성이 배경이든 사진이든 소재이든 등장하는 경험을 이어하게 되니 좀 재밌긴 하다어릴 적부터 좋아하고 존경하는 필립 K. 단편들이 담긴 두껍고 묵직한 책을 펼쳐 아까워하며 조금 읽어 보았다.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그럴 듯해 보여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가.

적어도 이성적으로 따져볼 때 그랬다.

하지만 이미 퀘일의 마음은…… 이성과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비밀업무를 수행하는 비밀요원 퀘일국방과학연구소가 임수 수행 후 기억을 모조리 삭제했지만당사자는 막연하게 비슷한 가상 기억을 원하게 되어 주식회사를 찾아가 기억 주입을 위한 상담을 진행한다.

 

실제로 겪었던 일과 일치하는 가상 기억을 원했던 겁니다중략.

그래서 퀘일 씨는 그저 막연히 화성이 자신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거라고 생각해온 거지요중략.

그들은 그것마저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욕구니까요.”

 

왜곡까지는 아니어도 점점 모호해지고 희미해지는 실제 기억보다 가상 기억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할 수 있지요.”

 

새로운 기억 주입은 실패하고 그로 인해 기억은 뒤죽박죽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주인공은 더 많은 것을 기억해낸다비밀업무가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경찰은 살해를 계획하지만퀘일은 도망치고 그 여정에서외계인들과 실제로 조우한 경험도 기억해낸다.

 

무척 사랑스럽게도 외계인들은 퀘일과 친구가 되었다는 이유로 친구가 살아 있는 동안 지구를 침공하지 않기로 약속했다그러니 퀘일이 죽으면?!

 

기억의 생생함은 정서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지그 기억의 정확성과는 관련이 적다는 충격적인 인지과학의 설명이 다시 떠오른다우리의 뇌는 어찌나 왜곡을 잘 하는지최종 목표인 판단을 완료하기 위해서라면 여기저기 끼워 맞추기도 자행한다


어쩌면 그런 뇌의 왜곡 체계에 대한 위로로 이 작품에서는 퀘일의 강력한 욕구사실을 진실을 기억하고 싶어 하는 그 욕구를 희망으로 등장시켰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현실에서 표출된 기억이 아니라 숨겨진 욕구를 어떻게 증명한단 말인가.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토록 오래 자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며 선택하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자신의 보존과 이익과 쾌락을 위해 뇌가 왜곡한 기억에 의존하면서도 내면의 진실한 욕구도 잊지 못한 채로.

 

비주류의 비주류의 비주류 취급을 당해 왔던특히 한국에서는 대단히 그러했던 스타트렉과 스타워즈에 대한 저 시큰둥한 반응을 기억해보면! - SF장르


스타트렉 무전기 디자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모토롤라의 검은 박쥐 휴대폰만을 사용했던 SF팬인 나로서는어릴 적부터 두근두근 설레며 읽던 필립 K. 딕 작가의 작품을 새로운 번역으로 새로운 표지로 새로운 출판사의 기획으로 거듭 만나는 일은 여전히 은밀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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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2021.2
과학동아 편집부 지음 / 동아사이언스(잡지) / 2021년 2월
평점 :
품절




이게 얼마만인지 가물거리면서 왠지 막 향수(?) 같은 것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두근거리는 과학 잡지이다과학을 전공하는 입장에 되고나서는 당시 번역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교과서가 모두 영어책이니 잡지조차 한국어로 읽을 생각을 못해본 관계로네이처Nature나 피직스Physics는 필요한 새로운 발표를 확인하는 참고 자료였지즐거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무척 신기술을 사랑하고 이해와 습득이 빠르지만 과학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는 모습에 얼른 내가 독차지 해본다... 추억 돋는 교과목이 한 페이지에 등장하긴 하지만 전체 구성이 어린이나 청소년용이 아닌 듯도 하다.



2월호인데 너무 늦게 펼쳐 보아 아쉬운 프로젝트 탄소중립 프로젝트 신청 기한이 지났다월간 잡지는 가능한 빨리 읽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기후변화에서 기후위기에서 기후재앙에서 그 재앙을 실시간으로 실감하고 사는 현실이 되었다휴스턴의 친구 가족은 전기와 수도가 끊겨 차 안에서 밤을 새우고촛불을 켜고 손을 녹이고줄 서서 식수를 구하는 진귀하고 기막힌 경험을 했다.

 

공공재로 관리 배급할 절대적 필요가 있는생존과 직결된 사회 인프라를 민간 기업에 넘긴 대가와 기후에 따른 재앙이 얼마나 광범위해질 수 있는지를 동시적으로 괴롭게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인류는 파리협정에서 지구온도를 1.5도 이상 올리지 않기로 약속했다하지만 이미 지구 평균기온은 1.1도나 상승한 이후였다탄소배출량을 줄일 기회는 0.4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2015년 이후 인류는 더 먹고 더 쓰고 더 사고 그렇게 더 신나게 살았다.

 

어쩌면 코로나 판데믹은 그런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마련된 기회일 지도 모른다어쨌든 이제 미룰 여유가 전혀 없거나너무 늦었거나 둘 중 하나이다어차피 다 틀렸다막 살아버리자는 공감대만 생기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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