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 스타킹 한 켤레 - 19, 20세기 영미 여성 작가 단편선
세라 오언 주잇 외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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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크 스타킹 한 켤레 A Pair of Silk Stockings(1897) 케이트 쇼팽 Kate Chopin
 
단편이라지만 자연스러우면서도 치밀하고 숨차게 이어나가는 사건을 통한 심리가 완벽하게 이해되고 안타까워서 정말 한 호흡에 읽었다.
 
서머스 부인이 살아가는 일상의 고단함에, 건전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현실에 적응하려 애쓰느라 처박혀있던 개인이 느껴져 참 먹먹하다.
 
우연히 생긴 여윳돈으로 잠을 못 이루면서 아이들 이것저것 해주려 생각을 거듭하다, 실크 스타킹이 손에 닿는 순간, 감촉이 불러낸 내 자신의 무시되고 거세되었던 욕망과 취향이 걷잡을 수 없이, 바이러스처럼, 확산되고 연계되는 장면들. 해석과 분석과 평가 없이 묘사만으로 전개되는 생생함이 인상적이다.
 
꿈이 깨면, 되살아난 갈망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염려되고 안타깝다.
 
다 해진 낡은 돈지갑이 두둑해진 걸 보자 수년간 누리지 못했던 자존감이 솟아났다. 중략. 보기에는 하루이틀을 몽롱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듯했지만 사실은 이것저것 떠올리고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 자신은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불건전한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과거에 빠져 있을 시간이라고는 일분일초도 없었다. 지금 사는 일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했다. 미래가 흐릿하고 수척한 괴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면 간혹 질겁하는 일은 있었지만, 다행히 내일은 오지 않았다.
 
서머스 부인은 할인 행사 매대로 가지 않았다. 중략. 면 스타킹을 벗고 방금 산 실크 스타킹을 갈아 신었다. 그녀의 예리한 정신이 작동하지도 않았고, 사리를 따져보거나 그러한 행동의 동기를 만족스럽게 설명해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고되고 피곤한 작용에서 벗어나, 그녀의 행위를 지휘하며 그녀의 책임을 덜어주는 어떤 기계적인 충동에 몸을 맡겼다. 살에 닿는 실크의 촉감이 얼마나 좋은지!
 
새 스타킹과 부츠와 딱 맞는 장갑이 그녀의 태도를 기적처럼 바꿔놓았다. 그것들로 인해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고, 잘 차려입은 사람들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 전체를, 무대와 배우와 관객을 하나의 폭넓은 감각으로 받아들였고, 한껏 흡수하며 즐겼다. 희극을 보고 웃었고 또 울었다. 중략. 연극은 끝났고, 음악도 멈췄고, 관객들이 밖으로 쏟아져나왔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사실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이 전차가 아무데도 결코 멈추는 일 없이 그저 계속해서 한없이 자신을 태우고 가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애끓는 소망, 강렬한 갈망을 알아챌 수 있을 마술사가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간만에 단편의 묘미와 재미를 제대로 느꼈다. 나머지 단편들도 하루 하나씩만 먹을 수 있는 별식처럼 꺼내 먹을 생각이다.
 
* 그녀 자신은, 그녀의, 그녀는, 그녀의, 그녀의, 그녀는, 쉬지 않고 등장하는 표현...... 꼭 필요한 번역이었을까, 빼고 읽으니 훨씬 깔끔해서 참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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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토피아 - 우주를 닮은 뇌 속으로 여행을 떠나자
조은수 지음 / 뜨인돌어린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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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몇 권인가의 뇌과학인지과학인지신경학 책들을 읽었다이미 사람들은 정신과 마음 현상을 뇌 부위의 기능으로 설명하는 것을 어색해하지도 새로워하지도 않는다이 분야는 이제 자연과학의 울타리는 가뿐하게 넘어서 의사결정’, ‘자유의지’, ‘도덕과 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질문들에도 모형을 들고 접근하고 있다.

 

전공자가 아니라 깊이는 몰라도 가만 읽다 보면 우주만큼이나 신비롭고 아는 바가 적다는 생각이 든다암흑물질Dark Matter -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때 dark란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모른다는 뜻 이 우주공간의 약 95%. 뇌는 85%가 물뇌연구는 이제 겨우 100여 년우주와 뇌 중 전모가 먼저 밝혀지는 것은 무엇일까연구실험 예산을 더 많이 확보한 쪽?

 

어린이과학책을 읽으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두고

 

여기 연필을 들고 입장 가능한 두뇌 놀이 공원이 있다. ‘를 여행하는 이야기인데 너무나 귀여운 책이다반가운 오즈의 마법사 허수아비가 등장한다여기서 작은 설전이 벌어졌는데오즈의 마법사가 원제가 The wonderful wizard of Oz이고 허수아비는 The Scarecrow라고 아이들은 기억하는데왜 저는 the straw man이 떠오를까요제 뇌에 무슨 일이…….



뇌 과학의 주요한 내용을 정말 유쾌하게 풀어내었다뇌를 말랑하게 해준다는 두뇌 놀이들이 가득한 이런 책을 어릴 때 만날 수 있는 요즘’ 아이들이 부럽다거부감 없이 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고스란히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모습도 부럽다얘들아과학자를 불경죄로 막 죽이던 시절도 있었단다~

 

매일 우주적 스케일의 엄청난 꿈을 꾸지만 기억을 못한다는 슬픈 이야기가 떠오른다아이들은 자신들의 뇌가 가진 가능성들을 무한히 상상해보고 즐거워할까행복할까그들이 꾸는 꿈이 궁금하다.

 

그럼 뇌가 없어 유명한 허수아비는 어떤 뇌를 선택했을까요.


결정적 스포라서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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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필통 안에서 - 제10회 비룡소 문학상 수상작 난 책읽기가 좋아
길상효 지음, 심보영 그림 / 비룡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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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 시작 전 진짜 오랜만에 학교 갈 준비하느라 아이들 허둥대던 날이 생각납니다. 필통 속 정리하는 일 정말 재밌어 보였지요. 그 중 최고는 역시 마음에 드는 연필 골라 사각사각, 깎아서 채워두는 일이지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좋아하는 연필과 문구 이야기라 정말 사랑스럽고 귀엽습니다. 연필이 너무 좋아 친구들이 다 샤프펜슬을 쓸 때도 한결같이!^^ 또르르 말릴 듯 깎을 때 나는 나무 향도 정말 좋지요. 지우개가 달린 연필도 없는 연필도 동그란 연필도 각이 딱 잡힌 연필도 흐려도 진해도 다 좋습니다. 40 여 년간 연필을 깎다 보니 이젠 결이 빛나는 경지인 듯!^^

 

그러고 보니 어릴 적 꿈이 문구점하는 것이었네요. 온갖 것들로 빛나고 신나고 재미나던! 지금도 서점가면 문구코너 앞에서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표지부터 사랑스러운 책, 사랑을 가득 담아 승승장구하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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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맞지 않는 아르테 미스터리 18
구로사와 이즈미 지음, 현숙형 옮김 / arte(아르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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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을 오마주하였다라고 하지만 훨씬 더 자극적이고 충격적이다마카롱과 불닭볶음면과 홍삼가루를 번갈아 입에 넣어 맛을 보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해 본적은 없지만 - 극강의 자극적인 맛들이 반복되는 기분이 들었다.

 

줄거리를 최대한 간략화해보면, 10대에서 20대 청년 중 은둔형 외톨이나 백수들이 다양한 형태의 괴물의 형태로 외형이 변하는 사건이 전국적으로 발생한다카프카의 변신에서와 달리이들은 동물식물곤충무생물형 등으로 다양하게 변하는데인간이었을 적 신체 특징이 어딘가 남아 있다!

 

그렇게 변한 인구수가 증가하자 정부는 이 현상을 이형성 변이 증후군이라 칭하고 서류상으로 사망처리한다문제는 가족들인데대처 방식이 사회적으로’ 흥미롭다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듯외형의 변화에 관계없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참아온 감정의 폭발로 살해안락사유기 등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은둔형 아들인 유이치를 돌보는 미하루는 두려워하던 그날을 맞게 된다아들 유이치가 애벌레형태로 변이한다아주 극단적으로 납작한 캐릭터로 등장하는 남편은 불량품 취급을 하며 당장 내다 버리라고 하지만미하루는 아들을 계속 돌보고자 한다.

 

유일한 자조 모임 물방울회 역시 각자의 변이가족과의 관계 변화에 따라 이합집산하게 되고 미하루가 외출한 사이 남편 이사오는 변이한 아들 유이치를 기어이 산에 유기한다미하루는 어두워지는 시간 산길을 헤매며 아들을 찾아 헤맨다.

 

미하루가 생각하는 행복한 인생이란 평범한 대학을 나와 평범한 회사에 취직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노후를 맞이하는 것이다그렇다면 평범이란 무엇인가?

 

지극히 평균적인중략딱 중간 정도중략아래쪽은 안 된다중략고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중략부모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보통 부모라면 자식의 행복을 바랄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미하루는 유이치가 보통 아이이길 바랐다.

 

유이치가 바라는 인생은 무엇일까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우유부단하고 장래 계획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가중략엄마인 내가 생각하는 길이 옳은 것이라고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했다.

 

미하루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보통 사람들이나 모두라는 거대한 범주에서거대한 틀에서 낙오된 듯한 감각그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하게 느껴졌다.

 

유이치가 스스로 바라는 일을 하고원치 않는 일은 하지 않는 것중략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중략아이가 할 수 없는 것을 조금 거들어 주는 것.

 

부모에게 계속 부정당한다면 일그러져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외모가 망가지지 전에 이미 마음이 망가져버렸던 것이다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유이치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그리고.…… 어머니의 목을 조른다.

 

이미 너무 많은 스포를 했지만그래도 혹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읽는 것만으로 마음이 짓눌리는 듯한 유이치의 심정이 드러난 원문의 내용을 천천히 잘 읽어 주시면 좋겠다.비슷한 연령의 아이가 있는, 그 아이와의 관계로 힘들어하는 독자는 어쩌면 읽기 힘겨울 지도 모른다고 짐작해본다. 혹은 아주 좋은 육아서로 느껴질 지도.

 

절대적인 맹신과 신화의 압박을 멀쩡하게 견딜 수 있는 이는 없다어디든 누구든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게 되어 있다대부분의 인간이 가장 먼저 접하는 사회적 관계, 가족의 온갖 면면들을 불편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다물론 당사자에게 모든 책임과 비난을 돌리는 속편한 이야기는 아니다사회파 미스터리 작품으로서의 서사에 충실하다소재가 엄청나게 자극적이라 지루해질 틈이 없어 너무 늦은 밤끝까지 읽고 말았다.


人間いてない 

표지는 일본판 원작이 훨씬 내용과 합치한다.

디자인에 과문한 나로서 비교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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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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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틱낫한 승려를 만나고 나서이다함께 명상을 시작하기 직전당돌하게 시끄러운 마음으로 조용한 방에 앉아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물었다무례를 탓하지 않고명상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된다고 알려 주셨다그 중 걷기 명상나의 걷기는 그 조우와 함께 시작되었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함께 대화하며 걸어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하지만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삼십분 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금 고통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답이 없을 때마다 나는 그저 걸었다생각이 똑같은 길을 맴돌 때는 두 다리로 직접 걸어나가는 것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다그러니 힘들 때는 대자로 뻗어버린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걷는 사람의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려보면 좋겠다죽을 만큼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에겐 아직 최소한의 걸을 만한 힘 정도는 남아 있다.”

 

힘들다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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