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 비룡소의 그림동화 48
먼로 리프 지음, 정상숙 옮김, 로버트 로손 그림 / 비룡소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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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년도 더 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2020년에 여전히 멋진 표지로 24쇄 출간! 여전히 재출간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내용은 흑백이고 검은 잉크에 담근 펜으로 그린 그림체이이다한국의 수묵화처럼도 보이고 나는 이 펜화가 좋다그리고 미처 못 봤지만에니메이션은 캐릭터들이 더 많이 나와서 재미있다는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한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축제초식동물인 소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상대방에 적대감을 고조시켜 억지로 싸우게 만드는 그런 일이 언젠가 사라지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더 다양한 문학과 예술로 이 메시지가 많은 이들에게 전달되면 참 좋겠다 싶다.

 

혹시 투우사가 빨간 천을 흔드는 것만으로 소를 흥분시킨다고 알고 계시는 이들이 있을까 사족을 붙이자면투우사들은 황소가 화를 내게 하기 위해 작살칼로 상처를 입힌다최대한 오래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학대하며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환호성을 지르며 즐기다 마지막에 자비를 베푸는 양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구역질이 나는 잔혹변태폭력적인 문화상품이다스페인 대도시를 중심으로 투우 경기가 중지되는 일도 있지만 하루 빨리 사라졌으면 한다.



예전엔 주인공 페르디난드에 집중하느라 재빨리도 잊어버린 페르디난드의 엄마가 무척 멋져 보인다다른 소들과 다른 아이의 행동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가장 좋아하는 장소에서 행복하게 지내도록 내버려두는 일그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정상성의 범주에서 나오려하면사회적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적다면심지어 외모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자식들에게부모들이 실제로 보이는 태도들을 아주 솔직하게 조사하고 분류하면우리가 가진 가정과 가족에 대한 이미지의 일정 부분 정도는 반드시 균열이 갈 것이다.



다행히 페르디난드는 그런 엄마의 굳건한 마음을 닮았는지 자신 역시도 주변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남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주눅이 드는 법이 없다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그러니 싸우라고 주변에서 무슨 짓들을 하건 가만히 앉아 꽃향기만 맡는다나도 일희일비는 관두고 잠시라도 이런 태도로 살아 보고 싶다.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이야 어쩔 도리가 없다 하더라도타인을 자신의 선입견으로 너무 빨리 평가하는 일이나 왜곡하는 일은 충분히 주의 깊게 조심해야한다편견과 편애가 강한 나는 언제나 이 점이 걱정이고 그래서 판단에 자신이 없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아이들이 읽기에도 좋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고 믿어 주는 이가 없어 힘들었던 어른들이 읽고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도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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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다음에는 책방에서 만나자
김지선 지음 / 새벽감성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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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갛고 보드라울 것 같은 표정의 책이 도착했다.

베이비 핑크가 옅게 퍼진 표지에 이렇게 귀여운 곰돌이가 담긴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을까.

손에 잡히는 무게조차 포근하다.

표지 글씨를 가만 보면 타닥타닥 타이핑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소설이라고누군가의 일기장일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무엇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잃는다는 것과 같다책방의 책들은 종별로 한 두권많아야 다섯 권 정도만 갖추고 있는 책방이라서 하나의 책이 판매가 완료되면 그 자리는 새로운 책이 차지한다.”

 

두 걸음이면 충분하다는 작은 책방이라지만다락방도 고양이도 있다.

 

책방이 다락방까지 연장된 장소라니,

작가와의 만남도주제가 정해지면 모이는 모임도티타임과 수다타임도

낮잠을 자고 간다고 청하는 손님도 있다니,

 

사장은 참 다양한 모임을 만들었다얼마 전엔 공기 반 소리 반이라는 주제로 공기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정말인지 공기 대회에서 사람들의 수다가 반이었다사장이 만들어 낸 모임 명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시간이었다수다의 절반은 공기놀이의 룰에 관한 거였다.”

 

한적한 골목간판 없는 작은 책방이라는데 다들 아시고 살뜰하게 즐기시는 일상이 뜨겁게 부러웠다.

 

어릴 적엔 문구점 주인좀 더 커서는 서점 혹은 북카페 주인꿈을 이루기 위해 아무 것도 애써 노력하지 않았지만, ‘이라고 하면 여전히 순위 안에 당당 자리하는 모습이다대신 문구와 책들이 가득한 대형서점을 신이 닳도록 다니는 것으로 욕구를 채워 왔달까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마의 공간매번 똑같은 고민을 하는 안타까운 나그래도 덕분에 갖가지 추억이 가득하다늘 그곳으로 만나러 나와 주던 친구들 보고 싶네.

 

서점을 하게 되면 제가 원하는 것좋아하는 소품과 간식과 음료만 잔뜩 쟁여 둔 엄청나게 불친절한 서점 주인이 될 것 같고편견과 편애로 공기가 무거운 사적 취향 가득한 책들만 가득할 것 같지만안 맞으면 서로 안 만나고 사는 거지이런 속 시원하고 후회 없는 태도로 삶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참 신나는 상상이다.

 

사장은 책방에는 다양한 카테고리가 있다고 답했다어떤 곳엔 책을 사러 가고 어떤 곳엔 책을 읽으러 가고 어떤 곳엔 책을 쓰러 가고 어떤 곳엔 책이 있어 그냥 좋은 거라고.”

 

적요한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아는한적한 곳인데 햇볕은 잘 드는작은 공간인데 유리창 밖의 풍경은 널찍한방문한 누구나 둘러보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는책이 잘 읽히고 글이 잘 써지는그런 서점을 그려본다.

 

자꾸만 상상을 하다 보니 백만 년 만에 그냥 있어도 심장이 두근두근 거리는 게 느껴지고 행복해진다책 사는 거책 읽는 거책 쓰는 거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고 가는 공간을 지키고 유지하고 사는 일.

행복한 상상의 끝에 후유증이 크고 오래갈까 두렵다.

 

책에 대해 잘 모르고작가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일 년 넘게 책방에서 일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든 책은 책마다 좋은 점이 분명 다 있다는 점이다.”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본전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모든 책에서 얼마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독서에 관한 한 냉철한 낙천주의자가 되고 싶은 그는 일개 평범한 독자일 뿐이다.”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김경욱

 

간혹 서평글을 쓰면서 별을 네 개 표시하면 친한 이들은 그 의미를 알고 말을 건다무슨 일이냐고

읽으라고 만든 책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생각 없이 다 읽히면 별 다섯 개적어도 별 숫자로 다른 평가는 할 수 없다


그리고 나만 읽을 수 없는 글이라는 가능성이 언제나 있으니내가 받은 느낌이 무슨 대단한 평가씩이나 될까그저 이런 기분이 들더라그 정도만 적을 수 있는 것이 서평의 정체가 아닐까 싶다.

 

내가 일하는 동안 한 번이라고 책방에 들렀다면 당신의 이야기가 이 책 속에 담겨있을지 모른다아직 책방에 오지 않았어도 괜찮다다음 책엔 당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으니 언제든 놀러 와 주라내가 일하는 동안에.”

 

놀러와 주라!

 

이 표현만큼 강렬한 제안을 당분간 찾지 못할 터이다.

 

놀러 가서 한참을 놀고 싶다.



그리고 참,

 

사장님책을 내는 작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예요?” 새벽 네 시를 지나 아침으로 향하는 시간이 시간이 이상한 걸까누군가는 꿈을 꾸고 있을 이 시간에 잠을 자고 있지 않으면 현실에서 꿈을 꾸게 되는 걸까문득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사장에게 물었다.”

 

이건 에세이다뭐가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찾아보자하는 마음이 설핏 든 순간도 있었지만곰돌이의 심리를 진지하게 살피고 그 변화를 알게 되니 이건 소설이야로 판단이 순식간에 바뀌었다모든 것이 환상 장치 같기도 하고 긴 초대장 같기도 하고 서점 브로슈어 같기도 한묘하게 매력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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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와이너리 여행 - 식탁 위에서 즐기는 지구 한 바퀴
이민우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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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코너 앞에 서서 아무 와인도 못 고르고 헤매다가 그냥 나왔다대단한 와인을 사려던 것도 아닌데 눈 감고 아무거나 집어도 되는데무엇을 고민하는 지도 모른 채 고민하다 못 샀다집이 가까워질수록 이 무슨 신박하게 멍청한 짓인지 기가 막혔다간단한 판단도 불가능할 정도로 혈당이 떨어졌나……달달한 포르투 와인에 자꾸 눈이 가긴 하던데…… 정말 달짝지근을 싫어해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 거 안 단거 두 병을 사면 되었을 텐데……화가 나는데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건 비참할 정도로 무의미한 짓이라 결국 화도 못 냈다.

 

와인을 못 마시니 와인 책이라도 읽자면면이 놀라운 점들이 참 많은 작가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지만이민우 저자 역시 변화무쌍하고 역동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이력이 대단하다변화를 시작한 시기의 위태함도내내 집중을 유지한 와인에 대한 열정과 애정도 그렇고관련 분야에 뛰어들어 기어코 전문가가 된 짧지 않은 시간의 모든 노력 역시 그러하다도멘 바롱드 로칠드의 한국 담당이셨다니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등장인물처럼 느껴진다.

 

이력에서 짐작해보면 저자의 첫사랑이자 진짜 사랑은 프랑스 와인일 것이다다른 와인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프랑스 와인을 빼곤 와인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점 정도는 와인 공부가 아무리 싫은 나라도 알고 있다단지 너무 많은 정보와 이야기와 찬양에 지쳐 다른 이야기도 듣고 싶을 뿐.

 

160년 동안 명예와 지위를 지키고 있는 그랑 크뤼 와인최고의 와인을 맛보기 위한 13가지 사유인간의 수명보다 긴 프리미엄 와인을 만드는 샤토 라피트 로칠드줄 서도 못 사는 로마네 콩티지나친 세계화와 상업화를 비꼬며 와인은 죽었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도마스 가삭을 시작으로 14세기부터 교황의 와인을 만들어온 샤토뇌프--파프나폴레옹이 패한 후 외교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프랑스를 구한 샤토-오브리옹 등 프랑스 와인의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야기들을 취할 듯한 유려한 표현들로 풀어 놓으시고,

 

프랑스의 와인 생산지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포도나무를 한자리에서 보기가 쉽지 않다그 이유는 지역에 따라 심을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중략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교육과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포도나무를 심는 것을 규제하고 있다반면 관련 규정이 까다롭지 않은 미국이나 호주와 같은 신대륙의 경우다양한 포도나무를 하나의 포도밭에서도 볼 수가 있다.”

 

두 번째 아비뇽 교황인 요한 12세는 지역 와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요한 12세는 샤토뇌프--파프 마을에 교황의 성을 짓도록 명령하였고 직접 포도밭도 조성하게 되는데바로 이때부터 샤토뇌프--파프의 와인이 교황의 와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샤토뇌프--파프는 와인의 황제 혹은 와인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전 세계 애호가들의 입맛을 지배한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가장 사랑하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랜 휴가를 보내기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도평생 한 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한 농부들을 많이 만났다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와인은 항상 훌륭했다농부들의 시간과 열정이 같이 블렌딩된 것처럼 말이다어떤 와인들은 와인 메이커의 성격을 닮기도 한다음악을 좋아하는 농부들은 종종 수확 철의 포도밭에 음악을 틀어 놓기도 하는데이들의 와인은 왠지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이 난다.“

 

나로서는 반갑고도 감사하게도 마지막으로 토착 품종과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와인을 만들어내는 스페인칠레이탈리아 등 세계의 대표 와이너리 12곳을 소개해 주신다재배된 포도를 60~120일 건조시켜 와인을 만드는 이탈리아의 아마로네와 레치오토’ 이야기를 읽으며 무력한 그리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현대 회화 작품처럼 쿨하고 시크한 오퍼스 원’ 이야기를 해주셔서 순간 연상 기억이 번쩍어딘가 킬리카눈 킬러맨즈 런 카버네 소비뇽Kilikanoon Killerman's Run Cabernet Sauvignon과 Riesling이 있(어야 한).

 

이 섬뜩한 제목 - killerman's run - 의 호주 와인은 로버트 파커가 21세기 최고의 레드와인이라고 격찬했는데도 불구하고 롯데칠성에서 4만 원대에 판매를 시작했고실제 구입가는 2만 원대였던 미스터리한 유통의 와인이다유사품인가 의심하며 구입한 친구가 명절 선물로 한 세트 하사한감사히 받았지만 민트 초콜릿 맛이 포함되었단 설명에 화들짝 놀라 치약은 삼키는 거 아니라 배워서 민트 차도 못 마심 너무 잘 보관했다 잊어버린 와인이다그나저나 이 이름은…… 호주의 사냥 전통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뜻이신지…… 궁금했는데 리즐링 옆면에 설명이.



 맛은…… 다음번 와인 코너 앞에서 더 이상 망설이지 말 이유를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너무 익어버린 무화과 향이 나는 듯한 메독, 작은 새처럼 가벼운 메를로, 흙내가 올라오는 키안티, 이 중에 뭐든 고민 말고 몇 병 사서 쟁여 두련다.

 

무라카미 류는 그의 소설 와인 한 잔의 진실에서그가 마신 칠레 와인이 남미 무용수의 모습과 같다고 했다와인은 병이 오픈되기 전부터 이미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여행한 파리의 골목을 상상하며 진열대의 프랑스 와인을 고르기도 한다진지한 와인 메이커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다그들은 와인의 품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이나 자신들이 만든 와인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을 한다.”


이 글을 이 책에 담아 주신 이민우 저자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오늘 나의 동아줄이 되어 주었다. 어느새 이런저런 정체성이 생길 정도로 오래 많이 마셔 버릇했다.  21세기 최고의 레드 와인과 로버트 파커와 호주 국민들께 사과의 말씀을...... 그저 제 길들여진 입맛이 문제이며 온전히 취향의 문제라는 점을...... 모든 게 너무 새롭고 낯설어서, 저는 첫눈에 반하는 유형이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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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조선의 또 다른 풍경 - 풍문부터 실록까지 괴물이 만난 조선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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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무척 재밌겠다 흥분했더니 이미 블로그 연재로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유명한 SF작가였다어린 시절 전래동화에 충격을 받아 마음이 멀어진 내게 한국의 괴물들은 대부분이 새로운 내용들이라 충분히 재미있었다


그래도 백과사전 형식의 괴물 소개서란 캐릭터에 관심이 아주 많은 이들이 아니라면 이어지는 이야기가 없어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귀중한 자료라곤 생각되지만 SF작가의 작품으로 새롭게 창조된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기분을 나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이야기를 입어 살아난 괴물들이 태어났다너무나 차분하고 단정한 목차를 보고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백성왕조해외이 얼마나 순차적인 예상 가능한 괴물 소개 방식인가! - 드디어 좀 더 다채로운 괴물 이야기를 들어보자신나서 읽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부터 열하일기까지 각종 사료에서 발굴한 스무 괴물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증적이다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건 확실하다고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시니나는 부럽기만 하다괴물이든 귀신이든 나는 뭘 목격한 경험이 없다귀신 만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막 싫어하는데도 굳이 만난 이들도 많던데막 만나고 싶어 하는 나는 왜 여직 기회가 없는 것인지귀신도 꺼리는 성격적 결함이 있다는 건가 괜히 막…….



조선괴물지도 정말 멋지다!

마음 같아선 당장 짐 싸서 시동 걸고 지도 따라 여행을 떠나고 싶다.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1, 2, 3장의 주제는 백성과 괴물들’, ‘왕과 괴물들’, ‘외국에서 온 괴물들이다. 1장을 읽다 보면 재미와 흥분은 사라지고 마음이 아파지는데당시 수많은 백성들이 이해하고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괴물들을 자꾸만 만나는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왜 이렇게 힘든지 이유를 알아도 자신들의 힘으로 바꾸지 못하니 반복되는 힘든 시간을 위로하고 가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자 괴물을 아주 열심히 믿게 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소문으로 떠돈 괴물 이야기들은 임금님과 대신들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나영웅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담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삼구일두귀(三口一頭鬼)’ 이야기에서는 조선 전기 전라도에 살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재미로 하는 게임’ 캐릭터들이 아니라농업이나 어업과 관련된즉 생계와 관련된 괴물 이야기들이 많다간혹 도움을 주는 삼구일두귀와 같은 괴물이 등장하는데, “부자 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일기예보만 누가 알려줘도 좋겠단 소박한 바람에 속이 상한다굶지 않고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만 살면 좋겠다왜 이런 인간 같지 않은 괴물이 할 법한 짓들을 하냐고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선 시대 중기의 이야기책 어우야담에는 고려 임금 우왕이 죽기 직전 자신도 용의 자손이라며 그 증거로 웃옷을 벗어 용 비늘이 돋은 피부를 보여주었다는 전설이 실려 있다이성계 일파가 고려 임금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처형하려고 하자자신은 고려 임금의 자손이라고 항의하며 용 비늘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는 일이 녹록하지 않은 것은 왕가의 임금도 마찬가지였는지권력이 집중된 곳이라 오히려 더욱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짓들이 남발했는가 싶다비참하기 그지없는 짧은 생을 살고제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기막힌 비극적 인물인 사도세자의 경우에는 그럴법하다 싶기도 하지만성종과 같은 조선왕조를 통틀어 성군이라는 임금들 중 한 분의 시대에도 괴물의 기록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도깨비는 무당이 섬기거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귀신또는 신령 같은 대상이다심지어 임금의 아들을 해치는 음침한 주술까지 들어주는 듯하다…… 영조 시대 무당과 추종자들은 도깨비를 전염병 귀신과 비슷한 괴물로 믿었다고 추측해볼 만하다.

 

영화 물괴를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그 괴물의 연원이 연산군과 그의 사냥개라는 점 역시 설명이 흥미로워 몰입해서 읽었다친자식처럼 키웠지만 결국 남보다 못한 태도로 연산군을 쫓아낸 정현왕후의 죄책감과 더불어왕가 역시 권력 다툼에 언제든 실각하고 쫓겨나고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누구라도 안전망이라곤 없는 삶을 살았던 시대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저자는 한 가지 더 유의미한 지적을 하는데왕가가 이 지경일 때원래도 살기 힘들었던 백성들의 형편은 어땠을 거냐고 그렇게 묻는다어쩌면 집권을 위해 다투던 서로가 서로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터이고이 모든 세력집단들은 자신들이 외면하고 잊어버린 백성들에게 괴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조선에 괴물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라고 한 저자의 말이 의심할 여지가 없어진다.

 

부족하고 익숙하지 않은 괴물 지식이지만 3장을 읽다가 금두꺼비가 한국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항아(嫦娥)’ 설화가 원조라는 사실에 좀 놀랐다금두꺼비는 해외파 괴물이었다그래도 이 설화는 짐작할 수 있듯이 혼란하고 힘겨운 상황이 아니라 적어도 금으로 만든 두꺼비를 상상해볼 여유 정도는 있었을 때 만들어낸 것이라 짐작되니여가 시간이면 이야기 정교한 상상과 거짓말 를 만들고 들려주는 인간만의 그 독특함이 사랑스럽다.

 

그리고 우연히 며칠 전 읽은 소설 속에서 조선 태조와 세종의 여진족과의 외교 정책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바로 그 세종의 북방으로의 영토 확장 침략 으로 여진족 계통의 북방 이민족 원주민 -에서 유명하던사람 1만 명을 잡아먹었다는 만인사(萬人蛇)’ 괴물이 조선에 소개되었다 한다. 1만 명의 피가 뭉친 만인혈석(萬人血石)’을 품은 괴물은 그 지역에 얼마나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들려주었다.

 

어쨌거나 역시 재미있는 소재들이다곽재식 작가 이전에는 한국의 괴물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멋진 모습들로 모이는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쓸쓸해지기도 한다식민지와 전쟁이란 어느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뭉텅 베어내는 대단한 단절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삽화들이 참으로 고상하고 유려하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고 묘하게 그리운 기분이 든다아주 어릴 적 조부모님이 입혀 주신 꼬까옷을 입고 아얌에 운혜까지 야무지게 차리고 친지들 댁에 인사를 다니던명절과 의복으로 한 조선 체험 시절이 기억나서 그런가보다.

 

인간만이 번성하고 무서운 것 없어 온갖 패악을 저지르며 인간답지 못하게 사는 세상이 신나지도 즐겁지도 않다코로나가 의료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총체적 대응이 필요한 일이듯쉬운 일 별로 없는 모두의 삶에도 인간 말고 더 다양한 많은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대화도 위로도 나누면 좋겠다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태어나고 힘을 갖추지만인간에게 꾸짖음과 가르침을 줄 수도 있는 괴물들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싶다.

 

선하거나 악하게집 안처럼 가까운 곳이거나 외국처럼 머나먼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 괴물들은 어떤 한 가지 기준이나 편견을 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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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람들
박솔뫼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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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잘 쉬고 여기로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고 마음을 다잡고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마장의 말처럼 달리는 사람이 될 수가 없나 나는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데 쓸 힘이 없었고 점심을 먹고 저녁에 뭐 먹지 생각하는 것처럼…….

 

여전히 회사에 가기 싫었고 회사에서 별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에 가기 싫었고 비슷하게 말도 잘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서라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그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훨씬 나았으므로 여름은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방금 전 바에서 만난 여자는…….

 

[건널목의말]을 처음으로 읽으며문장에 담긴 기분이 전혀 공감이 안 된다는 건 아니지만프린트가 잘못된 것인지 난독증이 온 것인지 실컷 당황하며 일단 끈질기게 글자들을 읽어 보았다이야기의 방향이 휙휙 바뀐 모양을 화살표로 표시하면 중소 도시에 표지판을 다 세울 수 있겠다 싶었다누군가의 혼잣말을 따라 읽기란 이렇게 어려운 도전이란 걸 처음 배웠다그러고 보면 남의 혼잣말을 따라 읽을 것 자체가 처음이다뭐랄까불편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농구하는사람]에는 다짜고짜 최인훈의 광장’ 속 인물들이 등장한다참고도서를 다 읽고 다시 오란 말인가오래 전 읽었지만 내 일상과의 접점이 적어 많은 내용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심통이 더 나는 것인지이 단편을 읽어 나갈 수 없다는 판단에 뇌가 멈춤’ 신호를 내려 멍한 것인지그런 극도의 불친절함을 가능성이라고 짚어 보기도 할 만큼 정신이 나갔다그 와중에도 특정 문학 작품들을 이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재밌고 신기해 보였다.

 

[이미죽은열두명의여자들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직접적인 처벌생각은 많지만 어떤 것도 말로 글로 남길 수는 없는 기분이다.

 

[자전거를잘탄다]를 읽으며 덕분에 자전거를 배우던 때를 떠올렸다마지막으로 덤불 속으로 넘어지던 순간이 지나고 잘 타게 된 전환의 순간비로소 잘 타게 되었는데 잘 안 타게 되었다한국의 도시들은 자전거 타기에 참 별로다의외로 기후도 별로다.

 

[매일산책연습]에서 한국 근현대사의 무수한 장면들 중에서 사건의 명칭만 남은정말 오랜만에 들춰본 역사적 사건이 등장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의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 광주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오래 전 근현대사 공부를 할 때 요약된 몇 줄로 읽고 넘어간 것이 전부라서처음으로 단일 사건으로 찾아보았다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한 기대와 선망이 한 점의 오점도 없었을 시대에,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하고 쿠데타로 일으킨 신군부를 저지하기는커녕지지와 동맹을 강화하고 제5공화국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일련의 과정들을 보고 충격과 배신감에 비판을 넘어 여러 미문화원에 방화하는 격렬한 사건들이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미국이 신군부의 군대 동원을 용인했다는 정황이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버마의 실시간 상황은 어떨지 불안하고 걱정이 된다그칠 줄 모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식인과 형제살해를 자행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그 조상의 뇌로부터 거의 진화하지 않아서 뇌 자체는 여전히 아주 보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그래야 하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특별히 더 야만적인 사회의 모습을 볼 때면 수치스럽고 절망적이고 답답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8개의 이야기들길지 않은데 짧게 읽히지도 않는다소설집에 정식 논문의 분위기를 풍기는 해설과 참고도서가 붙어 있고본론으로 바로 들어갑시다!하며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쭉 전개하더니 막상 글로 전할 수 있는 것들을 모조리 빼버리고 남긴 마음의 심상만 담겨 있는 전시회에 서 있는 기분이다내게도 예술경영을 전공한 친구가 있다그러니 선입견은 갖지 않겠다.

 

읽히는 것만 읽으면서도 무엇을 읽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지치기도 하고 나른해지기도 한다.

 

[우리의 사람들]에서 저자는 자신이 말과 추위를 힘들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며삽을 들고 차라리 말을 묻는 상상을 한다그렇게 말들을 흩어버리고 자신은 따뜻한 곳에서 추위가 사라질 때까지 동면을 하고 싶다고몇 문장을 따라 읽었느냐는 정확한 수치와는 관계없이 이쯤에서 나는 갑작스레 무언인지 이해가 된다(는 착각이나 위로가 생긴다). 갈팡질팡엉망진창을 멈추고 차라리 동면을 할 수 있다면스스로는 멈추지 못하는 활동들을 그렇게 멈출 수 있다면그 한 때의 삶의 기록은 깨끗할 수 있겠다 싶은 기분모든 힘든 과정은 다 지나가고 찬란한 봄 날맑은 물과 반짝이는 풀과 잎들이 산들거리는 그런 완벽한 날에 잠에서 깨고 싶다는 기분.

 

매번 할 수 있을까이걸 왜 하는 걸까하는 고민을 한다안 해도 나에게 아무 지장이 없는데 왜 하는 것일까매번 왜 하는지 어떻게 가능하게 할지 생각하면 괴롭다.”

 

어느해인가 어쩌면 여러해 동안 그랬다고 들은 것도 같은데 쓰는 것에 대한 압박이 너무 심해 뜰의 잡초를 다 뽑고 있었다고 했다중략맞아 맞아 그때 그 넓은 곳 전체를 다 뽑아버렸지뭔가를 강한 신념을 가지고 오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매번 끊임없이 이걸 왜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그때 직접 듣게 되었다.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이 작품은 내 가독성과 문해력으로 감당할 수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려는 무렵그 대신 나는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설핏 감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결론과 정리가 없는 상태를 못 견디느라 왜곡된 결말일 가능성도 많지만.

 

아주 익숙한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들려주는 게임과도 같은 방식에 휘둘려서 그렇지, ‘어쩌면’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 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을 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그것이 누구의 삶이라도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내일이 미래가 모르는 시간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사는 일은 누구라도 비슷한 반복이 반복되는 일이 아닌가……그러니 우리는 이토록 느슨하지만 같은 운명에 속해있지 않은가라고.

 

가끔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다고 생각한다저를 위해 무언가를 한순간 포기해주십시오저의 고민을 떠안아주십시오나 역시 아주 가끔 누군가의 불덩어리를 삼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물론 곧 사라지는 생각이다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먼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르고 누군가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것을 어두운 마음 없이 받아들인다. [농구하는 사람]


이 소설은 정신을 뒤흔들고 균열을 내는 독한 술이자 큰 망치이다.

마음을 단단히 하고 읽으시길.
무지하고 무능하고 미미한 존재인 자신을 여러 차례 만나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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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2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아주 유능한 의사라면 나는 아주 말 잘 듣는 환자가 된 기분이다... 균열을 내는 독서...도전할까 말까 망설여지기도 하네요^^

poiesis 2021-02-28 17:46   좋아요 1 | URL
쉽게 술술 읽히진 않았습니다. 여러 모로...
그래도 읽고 나니 뭔가 알듯 말 듯 남은 것들이 있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솔뫼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참 반가워 하시기도 하더군요.
저는 처음이라 많이 낯설긴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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