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뉴노멀 - 이택광 묻고 지젝 답하다
슬라보예 지젝.이택광 지음 / 비전C&F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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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내가 만들어 나가는 것 이런 유의 문구들을 참 많이 보며 살았다너무 뻔하고 흔한 말이라 그 뜻을 진지하게 새기지도 않았다2021년만큼 하루하루의 현재도 미래도 모두 만들어가야하는 시절이 실제로 닥칠지 몰랐다. 2020년과 2021년은 인류사에서 시공간적 격차가 가장 크고 뚜렷한 경계를 그었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비전이 나와야 합니다.

신기원의 순간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야만주의로 퇴보하고 말 거예요.

 


2021년 1월 4일자 통계로 미국은 무려 2천만 명이 넘게 확진되고 35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이 와중에 아직 대통령임이 분명한 트럼프는 통계 숫자가 가짜뉴스라고 떠들고 선거결과를 놓고 조지아주 주지사에게 협박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2위에 올라 선 인도는 자체개발한 백신을 임상 없이 오늘부터 자국민들에게 투여하기로 결정했다.



백신이 얼마나 역할을 할지는 모르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코로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건 확실하다. AC(After Corona)의 시대,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라는 문구가 붙은 사회 각 분야의 논문들이 발표되고 온라인 학술대회들도 앞당겨 개최되는 분위기이고 기업 사장들은 저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선도하겠다는 인터뷰를 한다혼돈이 가득한 가운데 인류는 하루도 유예할 수 없는 스스로의 생존 조건을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

 


코로나 시절을 보건과 방역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해졌다이 위기는 기회로 삼을 만한 위기가 아닌 듯하다.* 인류가 상대하는 건 감염병이 아닌 듯하다오늘은 전국이 2.5단계에 체제로 전환되었다언제나 기대와 희망은 놓지 않으려 하지만일상도 심리도 이미 5단계쯤으로 살아온 이들도 있을 테고나는 절대 안 걸린다는 신념을 근거로 딴 세상을 즐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그러다 안 걸리심 제일 좋은 일이지만본인 포함 타인까지 감염시킨 경우 사회적 비용과 관련자 개별 보상까지 반드시 감당해주시길 바란다.

 

제 생각일 뿐이고 다행스럽게도 세계적인 석학들은 모두 기회일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국가와 협력하는 국가지역 사회와 협력하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제가 계속 강조하는 것처럼 국민이 신뢰하는 국가!

또 국민을 신뢰하는 국가가 필요합니다.

 

전 지구적 나눔과 협력이 바탕이 되는 새로운 국제주의 말이예요중략.

이제는 남들과 연대하는 것이 옳은 결정이 됐어요.

길게 보면 내 이웃의 안전이 곧 나의 안전이기 때문이에요.

저쪽에서 수천 명씩 죽고 있는데 내가 있는 이쪽만 안전할 수는 없어요.

 


한 번에 다 생각하고 줄 세우기에는 벅찬 복잡한 문제들이 줄 지어 있고인류 전체가 으쌰으쌰 합의와 행동에 돌입한다 해도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 부지기수일터인데언제나 그렇듯 기존 권력은 뉴노멀을 언급하는 그 순간에도 간절히 구질서를 회복시키고 유지하려 있는 힘을 다할 것이다뉴노멀은 각자도생의 새해 결심으로 이를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 반드시 구조적 변화가 필수적인데그 동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식도 고민도 모자라서 잘 안 보인다.

 

사라진 적도 없었던 불평등은 확실히 더 강해질 것이고 더 어긋날 힘의 균형은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시민이나 개별 이해당사자들이 관료기업정치조직보다 더 단결하여 더 오래 변화의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공학적 계산법을 누가 발표해주면 감사하겠다.

 


그러니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개인적 과제와 대안은…… 일단 열심히 배워서 질문을 계속한다불평등을 심화하는 시도가 눈에 띄면 가능한 방식으로 대항한다그 와중에 뉴노멀을 지향하는 할 수 있는 소소한 개인적 실천을 묵묵히 계속한다공감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 지지하고 응원한다가능하면 협력하고 연대한다그리고 끈질기게 믿고 버틴다정도이다.

 

제일 쉬운 일 단계책으로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형 인간으로 거듭 나기 위해 읽은 2021년 첫 책의 제목은 공교롭게도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이다. SBSCNBC가 기획한 <포스트 코로나 뉴노멀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 중에서 1부 철학 파트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편집한 책이다동영상이 함께이니 읽기 쉬운 참 좋은 교재 같다.

 

* 1부 철학, 2부 정치, 3부 생태, 4부 교육 분야이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MFtInytGPb98UUCjJHdsQw


가물거리긴 한데 2012년에 경희대 대강당에서 초청 강연을 끝으로 한동안 슬라보예 지젝의 사회철학을 접한 기억이 없다시의 적절하게 출간된 책이 반갑다다들 제 국가에 제 집에 갇혀 사는 형편이라 언론이 전해주는 것이 정보의 대부분이다각 국가별로 비판과 락다운과 인권침해와 정부정책 등이 다를 것이고 시간이 지나 그 모든 과정들이 어떤 결과로 수렴될지 불안하기만 하다코로나 피해가 극심한 유럽 국가의 철학자가 들려주는 형편이 궁금했는데 얼마간 해소된 기분이다.

 

한국이 파란만장한 역사를 극복해온 과정이

팬데믹 상황을 버텨내는데 자양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한국은 말 그대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국난극복이 취미인 이들이 한국인들이라는 얘기를 2020년 초여름쯤에 들었다파란만장하게 살아 봤으니 또 할 수 있지하는 건 좀 약이 오른다그것보다는 우린 많이 했으니 이번엔 누구 다른 이들이 해봐라가 훨씬 정의롭게 들린다진심이다.


이 모든 게 다 꿈이고 가상체험이고 잘 만든 신나는 영화처럼 구세주나 영웅이 딱나타나주면 좋겠지만그건 남들은 많이 봤다기에 열심히 원해도 나는 한 번도 못 본 귀신처럼 부질없는 바람이다


끈질기게 견디고 버티고 그래봅시다.

속 시원한 다른 좋은 방법 아시는 분들은 얼른 널리 공유해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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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1
황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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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名)하지 않은 존재들의 이름과 사소하고 시시하게 취급되는 일상의 시간들조차 열심히 불러주는 시인이라고 전해 들었다.

 

좋아하는 이들의 말에는 늘 솔깃하니 마음이 울리는 호평을 듣고 나서 만난 시인의 모든 시들이 잘 보이지 않는잊혀진지워진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들을 부르는 목소리로 들렸다시인이 돌아본 모든 존재들이 오래 소외당했거나 가장 쉽게 소외되기 쉬운 아주 사적인 존재들로 느껴졌다그 세상은 고공관찰로 파악되는 말끔한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20대엔 모든 시가 반갑고 좋기만 했다이제는 시를 읽는 일에 용기와 체력이 필요하다심지어 아는 시를 다시 읽는 일도 그렇다여전히 읽히지 않는 시들은 황당하고 속상하고 예나 지금이나 절창들인 시들 역시 강렬한 감정을 품은 만큼 난감하고 버겁다.

 

황성희 시인이 시 속으로 데려온 모든 사소한 존재들은 이전까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반짝거린다그리고 그만큼 시들 또한 만물을 주관할 능력을 키우며 성장해가는 듯 풍성해진다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미시세계의 원자들에 대해 전 세계가 연구하면서도 일상에서의 실체적인 소외는 못 보거나 안 보거나 한다그래서 사는 일이 너나없이 지치고 서글픈가 싶기도 하다시들을 읽을수록 내 일상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오래 전 융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기억에 남는 내용들 중 하나가 '우울depression'이라는 말의 공허에 대해서였다잘 생각해보면 우울하다라는 의 실체란 건 모호하기 그지없거나 공허한 호명이다. ‘우울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화에서 우울은 사라지고 신체적 느낌들이 대체된다머리가 아프다배가 아프다다리가 무겁다팔이 저리다…….

 

아예 우울함을 드러내지 않고 하루 내내 슬픈 느낌도 들지 않고 증상을 감추고 가리며masking 자신의 고통을 경시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는 가면우울증masked depression이 있다공식적인 진단 구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상당히 흔한 질환이고오히려 신체 통증으로 전혀 상관없는 진료를 받거나 검진을 받기도 한다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 강박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마치 한동안 정보폭탄 속에 사는 방식을 선택하니 판단할 시간도 정서적 여백도 없어 오히려 편안했던 2020년의 내 모습 또한 그렇다.



그래도 아프다는 신호는 몸의 어느 부위든 두드리게 마련이고내 경우에는 복통인 듯 아닌 듯 오락가락하는 위통이 달라붙어 있다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우울증을 어떻게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불안이나 우울과 꽤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신감에 나는 이번에도 단지 번거롭고 성가실 뿐이지만올 해 역시 생존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그런 시간이 이어질 거란 생각이 들 때마다 명치가 구겨지는 느낌이 든다.

 

[가차 없는 나의 촉법 소녀]의 시들을 읽으(려 노려하)며 마치 기억나는 시절부터의 시간을 누가 억지로 헤집듯 속이 울렁거렸다딱히 반드시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나는 알지 못하는 알려지기 싫은 기억이 떠오를 것처럼 불쾌했다날카로운 사회의식과 발화 방식과는 별개로 시인은 담담하게 자신이 감내한 고통을 이야기하는 정제된 작품들 안에서 시인의 언어들이 단정할수록 내 감정은 경계색을 현란하게 발산했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난동 직전>이라는 시를 며칠 째 잡고 읽고 또 읽었다말이나 글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단 한글자도 떠오르지 않아 마치지 못하는 업무처럼 갑갑했다. 2020년 내내어쩌면 더 오랜 시간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꼭 한번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난동이 새삼 아쉬웠던 심정 때문이었는지, ‘직전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아찔한 긴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헛다리를 짚었든 둘 다이든 별 상관은 없다.

 

난동 직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

단 한 가지 결말을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왔다

똑같은 모양에 머무르지 못하고 매 순간 무너졌다

...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무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한 번 정도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

흔들어보고 싶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차들이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댈 때면

가장 큰 경적을 울리는 차를 향해

왜 달려들지 않겠나

 

꽉 쥔 주먹으로 차창을 깨는

구체적 사건을 저지르고

피범범 손엔 팡파르처럼

왜 경적을 울리지 않겠나

 

어쩌면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급조되었는지 모른다

 

살가죽이 째지고

뼈가 부서지는 타격감을 위해서라면

 

모든 호흡이 매도당하고 낭비되는

쓸쓸함이야 얼마든지

 

아이약한 것어두운 것이런 존재들을 부르는 시인이라 감동하고 감사했는데 이번엔 시인이 불러내는 소녀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소름이 끼친다시사 뉴스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날지라도 동요 없이 들을 수 있을 일이 시인의 고민과 문제의식으로 표현되자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다제목에 등장한 소녀의 상태를 바로 아는 일도 성장을 보는 일도 두렵다시인은 반복해서 아직 악몽을 꾸는 어린 사람’, ‘자라지 않는 것을 선택이라며 쳐다보기 무서운 그 소녀를 부른다.

 

억지로 눈을 뜨고 끝까지 읽은 상당히 비겁한 모양새이긴 하지만어쨌든 다 읽고 나니 50번의 부름 - 50편의 시 을 통해 시인은 서서히 치유되고 추스르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벗어났구나 싶다자신의 언어만큼 용감하고 단단한 분일 것이다단 한 발도 떼기 싫어 다 잊히기만 바라는 그런 순간들이 여러 모로 멀쩡한 어른들에게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지 않는 나이라서 그렇다그런 어른들 말고도 이 시들이 필요한 소녀들은 이 시들을 만나게 될까……어차피 크리스마스 소원은 안 이뤄졌으니 다시 빌어볼까 싶다.

 

시인의 말

...

당신의 시간을 조금 빼앗고

내 방식으로 낭비해도 되겠는가

 

당신의 마음에 나의 상처를 새겨 넣고

조금 흔들어보아도 되겠는가

...

 

지난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이 이거구나시인의 시를 읽었다는 내 말은 이 말에 다름 아닌 것 같다.

 

말랑할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시어보다는 좀 더 다정스런 산문 글을 읽게 되리란 막연하고 멍청한 기대를 걷어차듯 시인의 에세이를 읽고 소스라치는 경험을 했다가면 우울증을 앓는피에로를 두려워하는 독자가 스티븐 킹의 괴물 피에로(IT)를 마주칠 줄이야황성희 시인의 강함은 에세이에서 절정을 맞는다자신의 일부로 녹아 붙은 태생적인 두려움의 정체를 찾고 시를 만나고 그 괴물의 근원과 시의 구동력이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이제 시인은 다시는 도망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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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료는 가능하다 - 한국 의료의 커먼즈 찾기
백영경 외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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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고 있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중요한 사안들이 있다이때 단편적인 지식 정보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판단해보는 기회를 주는 독서는 특히 귀중한 계기가 된다더구나 주제가 지극히 현실적이며 작금의 생과 사를 다루는 시의성이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매일이 불안하고 내일도 불안한 시절에그래서 계획과 정책과 실행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한 때에 도움이 되는 책이 출간되어 심신의 불안과 체증이 다소 해소되는 듯했다.

 

목차만 봐서는 분야별 의료 전문가들과의 대담 내용이 다 인가 싶지만아주 기본적인 팩트부터 현장 상황정책선입견과 세계관에 이르는 통합적인 구상을 담고 있다결론과 대답이 자신의 의견과 모두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여정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배웠다는 생각이 선명하게 들었다.

 

병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 있나요?

 

아주 간단하고 평범한 사실이라 미처 그 경험을 대한민국 의료현실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병원에서 태어나고 사는 내내 의료를 소비하다 병원에서 죽는 우리들. 그래서 물어야 하는 질문,

 

한국 의료는 사람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습니까?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재벌자본의 의료시장 장악의사파업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현장의 의료, K-방역과 인권의료 사각지대낙인화된 질병 등의 핵심 내용들이다뭔가 억울하고 이상하게도 이렇게까지 정확히 아는 것이 없었나 싶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읽다 멈추다를 반복하고 생각과 호흡을 천천히 하며 책을 읽다 보니 두서 없이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코로나 확진자수가 0을 기록할 때도 있었던 여름 한 때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를 시청하게 되었다임상 의학이 아니라 예방 의학 전문가이자 국립암센터에 근무하는 기모란 교수의 답변으로 진행되었다역학 조사공공 의료에 대한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듣는 기회였다지방의 병원 부족과 특히 그에 따른 산모와 신생아 사망률 증가라는 결과에 비추어 서울에는 카페보다 병원이 많다는 통계청 자료는 놀라웠다.

 

아무래도 AC(After Corona) 시절을 살며 새롭게 만들어야할 의료 체계는 보건 의료에 집중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고 판데믹이 언제든 가능한 국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에 큰 질병과 감염병은 최대한 사전에 대응할 준비를 하고 예방책을 예상하지 않으면 손 쓸 도리가 없어질 것이다이제 의료는 복지가 아니라 안보의 영역에 들어선 듯하다. 어쩌면 코로나 판데믹을 거치며 존망을 위협 당하는 국가가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명목상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라는 중국의 의료가 거의 민영화되었다는 사실도 코로나를 겪으며 처음 알게 되었다인구 1200만 명이 사는 우한시에서 코로나 확산 시기에 환자를 받은 병원은 단 3나머지는 다 영리병원즉 민간병원이었다고 한다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을뿐더러 국가가 의료문제를 포기한 상태라는 의견도 들었다끔찍하다.

 

대한민국이 공공성이 튼튼하고 강한 국가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안타깝게도 내 생각만이 아니라 현실도 그러하다공공의료시설 비율 OECD 국가 평균은 73%, 의료 불평들이 심각한 미국은 27%, 일본은 22%, 한국은 10%이고서울은 시립국립 병원이 4%이다대전광주울산은 광역시임에도 공공병원이 없다민간 병원의 년 수익은 보통 1조이며병상은 3000개 정도이다병상 하나에 3억 이상을 벌어야 한다그러니 평소에 활용할 수 없는 음압병상을 만들어 두고 1년에 3억씩 손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병상 부족이 연일 보도되지만 병상이 환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의료진이 더 필요한데 감염내과를 제대로 갖춘 공공병원이 없으니 인력을 배치할 수가 없다의사에 비해 수련과정이 필수가 아니기 때문에 빠르게 개원할 수 있는 치과와 한의사 배출 인원이 늘고 있고, 2022년에는 치과전문의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꼭 필요한 치료분야이긴 하지만현재 판데믹을 헤쳐 나갈 의료진 모집 분야에서 제외되는 직군이 치과의사와 한의사이기도 하다.

 

공공의료와 보건의료에 필수적인 공공의료병원과 중앙감염전문병원국립의약학계열전공의료진들의 증축과 증원이 시급해 보이는 형편이라 실제적인 관심과 고민과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쉽지 않을 난제임에는 분명하다가족 친지들 중에 분야가 다른 의료진들이 세 명인데모두가 타당한 이유로 의견이 다르다그리고 충분한 예산이 있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를 한 차례 뒤흔든 지난여름 의사파업. 정부의 공공의대 도입 방침에 반대해서 벌어진 전공의 파업 사태로 의료 공공성의 문제가 한국사회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나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한국의 의료 공공성 문제는 당위의 수준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아무 도움도 안 되는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욕설들이 가장 눈에 띈다정부의 정책과 사업은 시민들 의견과도 의료진 의견과도 다른 노골적인 의료산업의 거대한 육성으로 향한 듯하고 예산도 공감도 없이 첨단기술 논의들만 꽤 진지하게 제시하고 있다관련 예산 확보도 없는 듯하니결국에는 손 털고 거대 민간 자본에 맡기겠다는 작정인가 싶기도 하다.

 

재난이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인권의 문제이듯질병 역시 늘 불평등하게 작용하는 영역이었다건강과 의료는 유전자와 세포의 문제가 아니라가정직장사회국가 안에서의 사람들 간의 관계의 모습들이 연계된 주제이며오늘날은 기후재앙환경 정의의 문제로 영역을 확장해야 전체적인 모습이 비로소 완성되는 분야이다그런 줄 몰랐다고 할 분들이 없을 듯해 쓰고 나니 민망하지만 어쨌든.

 

의료 문제의 가장 큰 근원은 공급자와 수요자의 지식 차이가 현저하다는 것입니다이를테면 커피는 맛없으면 사람들이 안 가서 그 가게는 자연히 문을 닫게 되지만 병원은 공급자가 수요자를 창출할 수 있어요. MRI사진 보면서 의사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면 누가 그걸 거절할 수 있을까요최원영

 

양약도 기본적으로 70킬로그램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몸무게 가이드가 나와야 합니다윤정원

 

의료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민간의 역할우리가 바라는 의료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공공병원이라는 하드웨어에 치중하기 쉬운 논의를 비판적으로 살피며 결국은 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 강조놓치기 쉬운 소수자와 여성을 위한 의료의 영역좁은 의미의 의료라는 틀 깨기그간의 공공의료 논의와 정책 방향을 비판적으로 검토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시면 정말 중요한 정보와 주장들이 많으니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질병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있고스스로도 그러한 낙인을 내면화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아픔을 숨기고 살아갑니다이지은

 

돌봄이......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필요한 삶의 필수 요소라고 이해해야 합니다필요한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정의로운 상태일 것입니다김창엽

 

특히 하나마나한 얘기들만 주구장창 언론에서 반복되는 이유를 속 시원히 짚어주는 대목이 가장 마음에 든다추상적인 차원의 공공성은 동의하기 쉽고 구체적인 계획과 실행은 껄끄러운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또한 대담 형식은 더욱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주제를 다루는 느낌을 주었고 분명 따라 이해하기 더 쉬운 장점이 있었다.

 

어느 문제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특히나 의료 문제는 한쪽 끝을 잡아당기니 한국 사회 전체의 모든 묵은 문제들이 끝없이 딸려 나오는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아무 보탬도 안 되면서 쓸데없는 유포되는 저속한 정보들에 휘둘리지 말고 좀 더 진지하고 구체적인 태도를 갖추는데 적어도 내게는 무척 유용한 길잡이가 된 책이다대부분 그렇듯이 잘 될까 염려 가득하고 복잡한 심정이지만 읽기 전보단 훨씬 더 객관적인 불안의 내용을 갖게 되었다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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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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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https://blog.naver.com/jamo97/222187817065

 

외부 활동이 더 어려워져서 유난히 길 듯한 올 겨울, 차분히 가족들과 함께 책 읽는 시간을 갖고, 반드시 코로나 시절이 아니더라도 필요한 질문, 어떻게 살 것인가, 각자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고민해보며 읽고 싶은 책이다.

 

마치 작금의 인류에게 시의적절하게 격려와 용기를 전해 주려 온 것만 같은 작가이다. 모든 문학상을 거부하고 은거하면서 창작 활동을 한 그의 단단한 시간들을 작품을 통해 느끼며 짙어가는 우리의 불안 또한 달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격리와 유배가 아니라 은거와 배움과 성찰의 좋은 기회라고 그렇게 생각도 마음도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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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일기 - 공포와 쾌감을 오가는 단짠단짠 마감 분투기
김민철 외 지음 / 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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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파킨슨 법칙이라는 경제학 용어를 아십니까?

일을 완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주어진 시간에 비례해 늘어난다는 이론이지요.

마감하는 인간들은 모두 뼈저리게 공감할 겁니다중략.

마감이란 닥치면 해결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닥치면 이 아니라 닥쳐야’ 해결되는 일이더군요. 38

 

무시무시한 제목이다.

 

타협 불가 마감이 있는 거대 프로젝트 직접 참여하는 인원만 100여 명 에 참가한 살벌했던 그 해가 폭설처럼 떠오른다. 1년짜리 프로젝트인데 잘 마무리되어야할 시기에 이르러 팀원들에게 개인적인 불가피한 사정들이 마구 터졌다근로기준법인권 그런 거 없는 세상에서 누워 자는 수면은 격일로 하고 밤새 하는 카페에서 더블 에스프레소와 얼음물 들이 마시며 일하다 의자에서 졸며 아침을 맞았다.

 

그해를 어찌 살아남아 마감하고 사표 쓰고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일하러 일 년 간 떠났다일단 수입이 20분의 1로 줄었으니 2년 평균 연봉을 따지면 이런 방식으로 일하는 것은 세상 미련한 일이다.

 

이후에 혼자 마감을 지키면 되는 일은 10여 년이 넘게 한 번도 연기하거나 어긴 적이 없어 냉혈마감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한 거라곤 없이 땀 흠뻑 흘리며 수명을 불살라 지키는 마감인데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소음 하나 없이 적요한 공간에서 숨만 조용히 쉬며 작업하는 동안 테이블과 의자 주위로 머리카락이 투둑.투둑빠져서 떨어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이어진다이런 경험 없으시다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어쨌든 재깍거리는 환청이 들리면서 누군가의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제목이다.




출판사가 계약금을 보내놓고 기다리는 동안 첫 문단만 스물두 번 쓰고 나머지 시간은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면서 현실에서 안간힘으로 도피한 저를누구보다도 혐오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그런 저 자신을 위해 변명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중략왜 글쟁이들은 항상 돈 안 된다마감이 끔찍하다업계 상황이 치사하다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글을 끊지 못할까요중략너무 걱정을 마세요마감은 끝나거나 안 끝나거나 할 겁니다책도 팔리거나 안 팔리거나 하겠지요하지만 우리 인생은 언젠가 확실히 끝납니다우리 그냥 사랑을 해요이 우주를가련한 중생을마감 늦는 작자들을요숨바에서 온 편지

 

진심으로 그 심정을 다 이해하지만 결론에 대해서는 반만 동의하겠습니다.

 

그때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첫 마감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무엇을 마감하기 위해서는 그 마감 앞에서 혼자여야 한다는 걸절대적인 고독이 필요하다는 걸그것은 누구와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도 안 되며 심지어 누구에게 엿보이거나 들켜서도 안 되는 나만의 내밀한 직면이어야 한다는 것.

 

인생이 한 방으로 결정 날 수도 있는 대한민국의 입시 풍경이다권여선 작가의 글 스물에도마흔에도 마감 이라 뭔가 더 심오한(?) 상황인가 했다그래도 이런 풍경과 심정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통적이고 대중적인 마감의 경험일 수도 있겠구나 싶다.

 

나는 곧 마흔이었고마흔은 일곱 살과 다를 바 없이 세상이 하라고 시키면 할 수밖에 없는 무력한 나이였다불혹의 다른 이름인 부록처럼본문의 삶을 못 가진 나 같은 인간은 기꺼이 부록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감을 한다는 것은 끝내기로 한 것을 끝냄으로써 약속을 지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크든 작든 그건 내 삶의 흐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과 같다삶의 시간을 이쪽과 저쪽으로 구획 짓는 일이다마감 이전에는 내 모든 것이었던 하나의 세계를 그곳에 놓아두고 떠나는 일마감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고했던 자신을어쩌면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더 나아졌을지도 모를 그 세계에서 단호히 끄집어내 그 너머의 세계로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마감이란 말 앞에서 언제나 깊은 경외와 두려움을 느낀다.

 

권여선 작가의 글만 자꾸 되읽고 쓰고 있다이리 될 줄 아예 몰랐던 건 아니지만……어쩔 수 없다.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서 사랑하려면 목부터 곧게 펴야겠다고 생각했다사랑하는 일로 나를 해치고 싶지 않다무너진 몸으로 글 쓰는 일을 지랄이라 폄훼하고 미워하면서도 여전히 사랑할 걸 알기 때문이다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그것을 향한 사랑이 애증으로 변하는 것은 슬프고 고된 일이다

알콩달콩하고픈 마감에 나는 항상 앓고 닳고

 

웃다가 눈물도 나고 다시 웃기고마지막 문장에 홀린 기분이다. 강이슬 방송작가의 작품들을 막 찾아보고 싶으다.

 

주어진 일을 그저 일로서 맞이하는 것과그 일에서 나도 모르는 다음의 나를 얻어내는 것은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나아지고 싶다이 일로 인해 또 한 번의 다음이 있다면 좋겠다아직은 모르는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또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이런 마음을 잃지 않고 지금의 직업을 넓게 유지하고 싶다. 168

 

읽기 전에 미처 생각 못했던 것인데다양한 분야다앙한 직종은 마감 역시 다양하구나하는 것이다또 저만 몰랐나요그리고 마감 상황보다 더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저자들의 생각이다내 마감은 어떤 모습일까…… 조금 궁금하다.

 

나는 어떤 마감 스타일일까?

 

1. 사랑이 넘치는 박애주의자

"마감이 우리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가요우리 그냥 사랑을 해요."

 

2. 자신에 대한 신심이 깊은 Believer

"마감요내일의 내가 하겠죠!!"

 

3. 살아있고고로 마감하는 데카르트 형

"마감이란 그런 겁니다살아있다마감을 한다."

 

4.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소작농형

"마감 때만 되면 자꾸만 '딴짓'이 하고 싶어져요."

 

5. 믿는 구석이 있는 베짱이형

"마감이 어디 있어내가 원고 주는 날이 마감이지!"

 

좋은 욕심을 가진 사람들일수록 걱정을 하며 산다고중략인생을 윤택하게 하는 수고와 부지런함은 실은 실패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오는 거라고 했다쓰는 동안 이유 모를 불안함에 뒷목이 서늘해질 때마다 삶을 더 괜찮은 쪽으로 끌어당겨주는 걱정의 힘을 믿었다더 잘하고 싶어서 나는 지금 불안한 거라고그러니까 걱정 없이 마음껏 걱정하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휘리릭 읽으며 발췌한 책들도 그냥 읽었다 쳐주자며그런 후한 막바지 기준으로 분류해도올 해 읽자고 했던 책들 중 9권이 덩그러니 남았다그리고 다시 읽지 않겠다고 기증할 책들이 4상자에 가득하다.

...


그래 이제 그만 마감이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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