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얼지 않게끔 새소설 8
강민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리두기단계가 격상된다는 소식에 잠시 숨이 턱 막힌다

눈도 오지 않는 2020년 겨울은 또 어떤 모습으로 버텨내야할까.

모두의 생활 방식과 질병이 누구와도 무관하지 않게 가시적으로 촘촘히 상호 연결된 시절,

연대에 실패한 불안한 개인들은 혐오로 뭉친다는 글을 읽었다.

꼭 이런 때가 아니더라도 이해하고 이해받고 의지하고 의지가 되는 한 사람은 소중하다.

 

소설이 쓰인 2019년의 겨울은 이상고온현상이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그 어떤 때보다 춥고 매서웠다.

겨울을 앞두고 그해의 10월과 11월에 연달아 세상을 떠나야 했던

두 여성에 관한 소식 때문이었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기사들의 틈새에서 우울과 슬픔을 겪었다.



지극히 평범한 생활공간에 더없이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흘러 가다가,

가끔씩 추리 스릴러처럼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와 표현들이 등장한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여름,

모든 것은 희진에게 달렸다.

그리고 햇빛 알레르기.

 

어린 시절 면역력이 모자랐는지 여름이 시작하는 어느 날엔 늘 피부과를 방문하며 컸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기도 하고물속에서 나오기 싫게 피부가 뜨겁기도 했다.

더위를 모르는 이와 햇빛 알레르기가 심한 이이렇게 두 명흥미로운 캐릭터들이다.

특히 송희진씨,

아무리 이상해도 그렇게 주저 없이 타인의 신체를 계속 꿋꿋하게 열심히 관찰하다니요.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지만저는 인경씨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거면 지금 이 상황을 함께 감내할 만한 이유로도 충분하고,

어쨌든 나름의 책임감도 생기고요.

 

중략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말을 보태지 않으셨잖아요그런 소문들에.

 

의미 없는 동조와 편가르기에 말 하나 더 얹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좌절이 되는지

모를 것라고 덧붙였다.



사람들 참 편하게 생각하잖아요.

여름에 더위 많이 타면 으레 살쪄서 그렇다건강하지 못해서 그렇다,

정말로 여름을 버티기 힘든 사람들도 있는데 속 편한 말을 잘도 한다니까요.

그거 다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운동하라고.

 

그러면서 겨울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추운 게 버티기 힘들다싫다 그러면 체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밖에 나가서 좀 뛰어보기라고 하라고,

노력 부족이라는 이야기를 어쩌면 그렇게 사계절 내내 돌려 막기처럼 사용하고 그러는지.

 

참 이상하죠저는 더운게 싫을 뿐인데싫은 건 이유 없이 그냥 싫은 건데

사람들은 뭔가 늘 이유가 있고 숨겨진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걸 캐내는 걸 유난히도 좋아하고요.

 

뭐랄까,

작가는 이토록 예민하고 영리하게

평범한 모두의 잔인하고 비열하고 집요한 공격성을 모두 다 보고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엔 잔뜩 들어간 힘이 스르륵 풀리도록 만드는 선의와 온정과 희망을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체인 양 들려준다강한 사람이다.

뜻도 모르면서 문득 작가의 이름 - 강.민.영. - 이 주는 느낌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즈음 회사에선

내가 백혈병이나 조류인플루엔자니 하여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중략. ‘그때부터 뭔가 좀 이상했다는 심증의 빌미가 되었고

결국 그 소문은 나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소설의 직장인들의 모습이 과거의 풍경인지 완전히 달라진 미래의 일상인지

더 이상 모르겠다서글프게도 현재의 매일은 더 이상 아니다.

 

누군가의 생사를 확진하는 소식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듣는 시간 속에

두 사람이 시종 조용하고 소소하게 들려주는 우정과 연대의 이야기가 편안하다.

 

더 잘 팔리는 것은 언제가 사랑이라우정은 지나치게 폄하되기도 하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살아가는 긴 시간에 우정은 자주 아쉽고 부족하다.



정말 누구나 이렇게 순간적으로 변할 수 있는 거라면,

그리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버텨내고 있는 걸까.

 

지구가 한 번 공전하고 제자리고 돌아왔을 때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아무도 다치지 않고 죽지 않은 채 손을 맞잡고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두 여성의 이야기,

그 과정을 전하고 싶었다.

 

봄이 오면 떡볶이부터 먹을 거예요맥주 한 캔이랑.



덧붙일 모든 말이 점점 더 사족처럼 느껴지는 담백한 글이라,

발췌하고 필사하는 문장들만 이어졌다.

서평이라 할 수 없는 글이 되었다.

 

마음 들볶을 일 없이 확실한 선의에 안심하며 읽어서인가 싶다.

간절히 원하지만 구할 수 없어서 기대하지 않았던 것,

노력과 눈물이 모두 보상 받는 관계,

그런 따뜻함이 기적처럼 사고 없이 미래를 보장해줄 것 같은,

내 이야기였으면 하고 바랄 그런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돕는 일도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일도낯설고 어색한 일이 아니면 좋겠다.

어쩌면 거기에 연대와 희망이 있을 거란 소원 쪽지를 걸어 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비 팜
조앤 라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이비 팜Baby Farm행복하고 즐겁고 합법적인 농장일 리는 없을 것이다내가 대리모 출산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들어 봤나 가만 생각해보니 의외로 놀랄 만큼 오래 전이다그때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별 생각이 없었는지완전 딴 나라 괴짜들의 일이라 치부하고 말았는지아니면 사실이든 무슨 상관이야라는 태도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보단 이후에 농장이란 사업 명으로 운영되지만 실은 공장식 축산업에서 이루어지는 축산 동물들의 임신과 출산 과정을 알게 되어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잔혹하게 분업화된 공정 생물의 기능이 철저히 분업화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임신 출산이 정해진 일정에 따라 의학적이고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평생 임신 출산만 반복하는 역할이 있고그렇게 태어난 동물들은 성별에 따라 수명도 정확히 정해져 있다. 좀 더 살다가 육류로 가공되거나 바로 산 채로 죽임을 당해 사료가 되는 경우로 나뉘어진다.

 

소설에서 인간이 직접 육류로 소비되거나 사료로 분류되지는 않지만어쨌든 이 베이비 팜은 주문 계약에 따라 인간 아기를 만드는 공장이다등록 사업명은 골든 오스트 농장.’ 임신출산에 육체를 제공하는 이들은 호스트(참으로 기만적인 이름이다)’라 불리며당연히 비밀유지계약서와 기타 등등의 계약서들이 요구되고외출도 외부인과의 접촉도 불가하다.

 

작가인 조앤 라모스는 필리핀에서 출생하여 6세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이다라모스는 미국에서 무엇을 느끼고 보고 생각하며 살았을까……소설의 시작은 필리핀 출신 여성들의 이야기이다미국으로 일하러 온 여성 노동자로서의 그들의 혹독한 삶은 어째서 그들이 그 농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지를 담백하게 설득한다이 일을 하는 여성들이 왜 있냐고 물으면 가장 상식적인 답변은 ’ 아니겠는가이 농장에 필리핀 여성들만 호스트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백인 여성들도 있으며 이유는 같다그들 모두는 번호로 불린다.

 

마치 최고급 리조트처럼 운영이 되지만호스트를 위해 준비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의사간호사영양사마사지사트레이너코디네이터들은 축산공장의 전문가들처럼육류를 소비하는 인간을 위해 동물들을 관리하는 것처럼돈을 지불하고 아기를 구매할 고객들을 위해 호스트들을 관리하고 감시한다어쨌든 매월 받는 돈에건강한 아기를 무사히 출산하면 거액의 보너스를 보장받는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될 거라 예상할 수도 있지만이 소설은 주로 4명의 캐릭터들이 각각의 1인칭 시점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아마도 결론 부분에서 이들의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며 뭔가 폭로나 실마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게도 된다아주 자극적으로 아기 매매와 임신출산공장에 대한 이야기들만 집중해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읽고 나니이는 캐릭터 각자의 현실을 통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차별 인종성별국적가난으로 인한 몇 중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들 -을 진하게 느끼게 하는 장치라는 생각이 든다그리고 뒤로 갈수록 임신출산육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 가까워진다.

 

충분히 흥미롭고 몰입도 뛰어나고 전개가 매끄러운기대보다 많은 이슈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뇌세포들은 매일 SNS 세계로 사라져만 가는지…… 정확한 과정은 흐릿한데…… 김영하 작가의 글을 오랜만에 읽었고북클럽 얘기가 나왔고[완벽한 아이책소개를 읽고 경악해서 읽어낼 자신이 전혀 없었는데뭔가 발칙한 관련 글을 남겼는지 복복서가*에서 책이 왔다롯토가 당첨된 양 놀랐습니다감사합니다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어,란 핑계로 며칠을 흘끔 거리기만 하다가 표지의 아이가 뇌 속에서 계속 달리고 있는 느낌을 떨칠 수 없어 책을 펼쳤다.



<On the Run>

출생 전부터 인질로 살도록 정해진 감옥을 박차고 달려 나온 아이배경이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완벽한 아이]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4세부터 19세까지 겪었던 사실이다작가 모드 쥘리앵은 자신의 이름을 등장인물에 붙인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드 본인이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실제로 발생한 알려지지 않은아는 이들은 모른 체한 극악한 범죄이다모드는 부모에게서 탈출한 뒤에도많은 도움을 받으며 새로운 삶을 살게 된 후에도두 아이의 어머니이자 심리치료사가 되어 살게 된 후에도더 필요했던 모든 세월이 지나, 38년이 흐른 뒤에야 이 글을 썼다.

 

나는 깨달아야 한다나는 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길 임무들을 완수해야한다내가 아버지의 계획만큼 해내지 못할까봐 두렵다나는 너무 허약하고 서툴고 어리석다나는 아버지가 무섭다거인 같은 몸집강철도 뚫을 듯한 눈길의 아버지 앞에서면 오금이 저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가 퍼부어대는 욕을 듣고 그가 날리는 따귀를 맞아가면서 나는 아코디언과 피아노 외에도 기타클라리넷바이올린테너 색소폰 그리고 트럼펫을 배운다여덟 살이 될 때면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에 충분한 무기를 갖추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하든 전부 다 나를 위해서라고 되풀이해 말한다자신의 삶을 온전히 나를 위해예외적 존재가 될 운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나를 키워내는 일에나의 형체를 빚고 조각하는 일에 바치고 있다고 말한다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사랑했다고도 한다.

 

아버지라는 자 루이 디디에의 교육 방침은 학대와 고문이다그 방식대로 아이를 양육하면 초인이 완성된다고 믿는다이렇게 진지하게 미친놈이 있어! 그런데 그 미친놈이 계획한 대로 결혼출산양육이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죄다 진행된다이쯤 되면 이 정도 미친놈이 살기에도 더없이 좋은 세상인 것이다.

 

6살짜리 여아 자닌 를 구매해서 제 자식을 초인으로 양육하기에 (저 혼자 생각에)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교육시키고, (저 혼자 생각에)아이 낳을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해서 아이 낳고, (저 혼자 생각에)보충이 필요하다고 믿는 다종다양한 학대를 첨가해서 초인키우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모드가 탈출하기 전까지 어머니는 아이의 보호자가 아니라 남편의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깊은 충격과 슬픔과 울화를 동시에 그리고 반복해서 느끼며 읽는다.*

 

아동학대는 근절된 적이 없으니 최근까지도 아동학대 사건이 발견되면 발생률에 비해 드물게 사건화 되는 현실남편을 왜 말리지 않았냐고 아는 것도 생각도 없어 보이는 난폭한 질문을 하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자닌의 경우처럼 6살 때부터 완벽하게 통제된 삶을 산 경우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만성인이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폭력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남은 온통 망가진 또 다른 피해자에게 그 말밖에 할 말이 없는 건지물론 어머니 쪽이 주범이나 적극적인 공범으로 밝혀진 사건들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이런 부모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전부였을 아이인데그래도 모드가 탈출했다는 사실이그 생명력이 비현실적일 만큼 대단하게 느껴진다망가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은 모드의 판단들과 행동들을 내가 뭐 아는 게 있어 평가할 수 있을까단지 확신범에 대한 단죄와 처벌의 부재가 견디기 힘들게 짜증나서 눈도 마음도 흐려진다정성스럽게 미친 인간이 정말 1960년대 프랑스에 살던 루이 디디에 하나뿐일까모드의 표현에서 연상되는날개가 잘린 채 새장에 갇혀 피에 젖어 있는 수많은 인질들의 모습이 번뜩 떠올라서 소스라친다.

 

나는 죽음의 냄새가 떠다니는 그 지하실에 갇혀 있는 시간이 죽도록 싫다허리가 아프고구역질이 난다고기들은 아무리 싸도 끝이 없다하지만 최악은 송아지를 잡을 때다고기가 '질겨지지않게 하려면 평온하게 긴장을 푼 상태에서 잡아야 하는데송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도축꾼은 치아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입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렇다니까요동물 진정시키는 일은 어린애들이 잘해요특히 여자아이가 최고죠!"

 

나는 린다에게 오리깃털을 자르는 끔찍한 가위질 소리겁에 질린 오리가 똥을 지릴 때 나는 냄새 얘기를 해준다사실나 역시 우리 집 연못의 오리와 다름없는 신세다아버지와 어머니가 내 한쪽 날개의 깃털을 피가 나도록 바짝 깎아버리고 나머지 한 날개의 길고 아름다운 깃털을 지니게 만들었다.

 

모드에게 밀착해서 읽다 보니 완벽이 어찌나 폭력적으로 들리는지살면서 완벽을 경험한 사람이 있나흠이 없다는 건 또 뭔가사물에는 몰라도 적어도 사람에게 자질로서 요구할 말은 아니어야한다고 단어에도 감정이 마구 투사된다다 읽고 나니 미치광이 아버지가 바라던 초인 자식을 완벽한 아이라 여겼다는 정보를 주려고 이 제목을 정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안 그래도 헝클어진 마음이 더 갈팡질팡한다어쨌든 누구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잖아대상도 없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르튀르한테 가서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이 나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위안이다나는 아르튀르에게 빠짐없이 얘기한다중략전부 다 한다내가 옆에 앉아 이야기하면 아르튀르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귀에 입을 대고 말하면 아르튀르도 린다처럼 간지러울 텐데그래도 내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내가 나의 슬픔을 속삭이는 동안 아르튀르의 귀는 미세하게 전율하고그 전율에 내 마음이 풀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보고 있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중략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삶을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삶에 맞서 벽을 세우지 않는다반대로 삶을 사랑하고그 안에 잠기고필요하다면 아예 깊숙이 빠져버린다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뭐든지 겪어볼 만한 가치가 있어더 이상 두려워하지 마."

 

어느 날 처음 보는 도스토옙스키의 책을 찾아낸다나는 충격에 빠져 읽고 또 읽는다내 마음을 그토록 강하게 흔든 주인공은 바로 내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마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사람이야도망쳐!”

 

나에게 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2번은 소중하다오래 전에 데콩브 선새임이 악보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곡을 목표로 나아가렴언젠가 같이 하자꾸나.“ 헝가리 랩소디는 나에게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영원히 이곳에 묶여 있지 않을 거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셰퍼드 린다집 오리 피투말 아르튀르조랑말 페리소, <적과 흑>의 마틸드, <지하로부터의 수기>, <페스트>, <레미제라블>, <파리의 노틀담>의 주인공들이그리고 탈출 동아줄 역할의 몰랭 선생길에 마주친 누군가의 미소와 조건 없는 친절도움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생물학적 가족 이외의 생명들과 음악과 문학이 모드의 진짜 가족이고 친구이고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내 얼굴로 다가오고아버지의 긴 손가락이 내 이마 위에서 열을 확인한다이제 그 손이 내 뺨을 어루만져주길 나는 온 힘을 다해 기원한다손가락 끝으로라도 한 번만 만져준다면 바로 그 순간 이 집과 철책과 담이 사라지리라우리는 함께 바깥에서 자유롭고 행복하리라하지만 손길은 없다아버지의 손가락은 내 이마를 떠난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지만…… 생존에 꼭 필요한 부모의 애정과 손길을 온 힘을 다해 갈구하는 어린 아이의 기원이 찔리는 듯 아프고 슬퍼서 한참 울음이 났다마침 혼자여서 금방 그치지도 못했다울고 나니 사는 일이 허정하게 느껴지는데생각만은 업무 이행 중인 듯 또렷하다.

 

살면서 정정당당 공명정대 허심탄회하게만 상대를 대하고 의견을 나누고 설득을 하며 살지는 못하거나 안한다특히 아직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존재가 아니라고 암묵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을 대할 때는 솔직담백진실한 태도보다는 살짝 살짝 악의 없이 속이거나 교묘하게 설득하거나 과장하거나 약간의 조작을 가하는 방식이 보다 쉬운 혹은 영리한 선택일 경우가 있다.

 

자세히 읽지도 않았는데문득 전교 일등만을 원하고 강요한 어머니를 살해한 고수험생 사건이 떠오른다좀 더 오래 전손톱속옷가방 검사를 하던 시절머리칼과 치마 길이를 정하고 규정 위반이라 판단되면 인신을 구속시키던 시절그 모든 일들의 결이 루이 디디에가 한 짓과 다르지만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그저 한번의 미소가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음을,

공격적인 말 혹은 눈길이 한 사람의 세상을 어둡게 할 수 있음을 모두 알게 되기를.

 

살면서 내가 의도가 없었거나 무지의 소치라 하더라도 학대한 이는 없나식은땀이 흐른다못된 말은 참 많이 하고 살았다딱히 남을 공격하려는 심사는 아니었다고 변명해본다 나는 먼저 뭘 하는 타입이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공개적으로 합의한 것도 발표한 것도 아니라 남들은 모르는데혼자 딱선을 그어 놓고 누가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마치 내가 너를 오래 인내했으니 이건 네 책임이다이런 최후의 결전처럼 서늘한 감정을 실어 날카로운 말의 방패를 휘둘렀다정당방위라 믿었다.

 

몇 달 전 아동학대를 같이 잘 지켜보자며 배지들이 몇 개 도착했다여기저기에가방에도 달고 다니지만충실히 행동한 적이 없다여러 아이들이 눈에 띄어도 한번 살펴보려 한 적도 없다무슨 생각이었을까학대 받은 아이들이 내 배지와 인간성을 한 눈에 알아보고 스스로 다가와 사정을 조리 있게 잘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겠지라고 정리했던 건가.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아동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본회의를 통과했다이것의 의미는 지금까지는 아동권리보장원 직원들이 아동학대 가정을 방문해 조사를 하려 해도 부모가 완강히 거부하면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웠는데이제는 재학대 방지 조치에 실효성이 더해졌다는 것과아동학대는 더 이상 가정사가 아니며학대는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는 뜻이다내 집구석 일이라고 간섭 말라고 당당할 수 없다는 얘기다, OOO OO!*

 

우리궁수자리 태생들지구본은 나를 꿈꾸게 하는 경이로운 물건이다.

 

궁수자리 태생지구본을 보며 많은 꿈을 꾸었다.

지구본은 돌릴 수 있어도 지구의 인류 문명은 멈춰 죽어 가는 시절이다.

지구의 어디서든 탈출 결심이 선 아이들이 달려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여전히 있는지…….



..............................................................

 

*김영하 작가와 정은수 대표는 문학동네와 협업을 하는 독립브랜드 출판사를 운영하는데작가가 기획하고 발굴할 수 있는 운영 체계이기 때문에 출간할 수 있었을 작품이 [완벽한 아이]라 생각한다실없이 위치정보를 찾아보고 서울청 유실물보관센터 근처인 것도 혼자 의미심장하게 느낀다.

 

담고 있는 정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고 사용해본 적도 없는데, ‘빡침이란 단어가 어떤 느낌인지 감이 왔다요즘 아이들이 더 힘들게 사는 게 맞나 보다.

 

지난해에 벌어진 아동학대 사건은 총 345건으로 2015년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했고재학대 비율도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해 작년에만 3431건에 달하는 재학대가 발생했다(기사요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둑전쟁 신들의 게임 7 - 게임의 서막 바둑전쟁 신들의 게임 7
진서 지음, 최우빈 그림, 강나연 감수, 재단법인 한국기원 기획 / 주니어김영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권에 이르니 제가 아이에게 바둑 용어들을 배워야할 정도!^^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랑 기술을 물어봤더니 천호가 이렇게저렇게 했다고 흥분해서 전해 주네요. 축머리, 비축, 회돌이 축, 포석 약점 찾기 등등. 이렇게 좋아하니 7권은 네 용돈으로 사라고 권해봐야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언의 철학 여행 - 소설로 읽는 철학
잭 보언 지음, 하정임 옮김, 박이문 감수 / 다른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20세기에 정말 큰 도움을 받은 감사한 박이문 선생을 21세기에 다시 감수글로나마 만나 뵙게 되니 그리운 마음이 가득하다. 2017년 소천한 선생이 잠시 현장 복귀를 하신 듯 반갑다<소피의 세계Sophie's World>는 명불허전 재미있고 좋은 책인데도 비교 우위라고 하시니 576쪽이나 되는 이 책철학의 주제들을 다룬다는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했다이제 철학책에 손이 잘 안 갑니다세상엔 다른 재미난 책들도 많다는 걸 알아버렸…….

 

라떼는’ 입문서라도 참 천편일률적 구성에 힘을 들여야 꾸준히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대부분이었고수업 교재는 영어책이나 독일어책이 선택되었다장단점이야 있겠지만 진지하고 묵직한 분위기와 학습 방식에 엄청 지쳐서 내용 이해와 발제에 모든 체력을 쓰고 정작 중요한 질문들을 떠올릴 여력이 없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술기운을 빌어 술자리 뒤풀이 토론이 활발했……. 그러니 여행journey의 시작이라고 적힌 목차가 기분 좋고 매력적이고 아주 조금은 억울하다.




압박과 억압에서 벗어나 여유만만 책을 뒤적이다 보니라떼에 한동안 유행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의 구성이 떠오른다논문보다 대화에 최적화된 추론과 예시들이 많아서 철학 주제의 화술에 능숙해지고 싶은 이들이라면 두고두고 유용할 책이다나도 청소년기에 만났다면 청년기에 철학적 방황(?)을 덜했으려나 아쉽기는 하지만꼭 청소년만을 위한 책도 아니다혹시라도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질문에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렸던 과거의 기억이 있는 분들은 어쩌면 이 책을 통해 말끔한 기분을 맛보거나 훌훌 털어버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각각의 주제에 대한 설명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이 책은 The Dream Weaver: One Boy's Journey Through The Landscape Of Reality원제처럼 신비롭고 흥미로운 소설이다이언이란 주인공의 꿈속에 현명한 노인이 나타나 철학 훈련을 시켜준다 이런 꿈꾸고 싶으신 분~노인과의 꿈속의 대화부모와의 아침 시간의 토론친구 제프와의 하루어떤 것이 현실이고 어떤 것이 꿈인가의외로 미스터리 추리물처럼 혼란스러운 재미난 설정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이 부모 수상하다이 친구 이상하다그래서 노인은 미리 이런 이야기를 해두었을 지도.


나는 철학이 일종의 범죄 현장 수사와 같다고 생각한다중략.

당신의 세계는 우리의 범죄 현장이다중략.

철학은 결국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최첨단 기술이다.”

 

이언,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방식과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사이를 구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단다

전자즉 사물이 나타나 보이는 것을 현상이라 하고

후자 즉 인식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을 실재라고 한단다

알겠니?”

 

여기서 질문!(그냥 떠오른 질문책 내용과는 거의 상관이 없......)

 

1. 실체가 확실한 나의 육체인 뇌가 경험하는 일 -이 실재 현상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2. reality란 언제나 실재하는 것인가아니면 내가 realise한 것만이 실재하는가 - make your dreams come true.* realise your dreams. materialise your dreams. 이런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현실의 구현성과 동작성이 언어 표현에 남은 것이 아닐까.

3. 그렇다면 reality와 intelligence는 어느 쪽이 더 큰 세계인가.


* true와 dream이 무슨 관련이 있나하고 이상한 표현이라 늘 생각했다

여러 해 전 어원학etymology하는 분께 문의해보니 14세기 후반에 true가 real과 동일한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속이 시원하게 이해되진 않지만 언어란 우린 이렇게 해!” 면 족한 것그런 것.



이미지와 영상 조작은 구별이 불가능할 수준에 오른 듯하고가짜뉴스조차 매번 진위 판단이 어려운 시대이다조카의 부탁으로 함께 한 VR 체험에서 내가 경험한 어떤 현실보다 더 생생한 실재적 체험을 했다뇌가 섹시하다는 표현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다들 이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진심 모르겠습니다인간의 뇌는 자극을 정말 좋아하니 이 책을 읽는 동안에도 즐거워할 것만은 분명하다.



만취한 듯 글을 쓰고 있는 듯한데…… 어쨌든독해와 이해의 최고봉 칸트 철학 포함 등등의 철학서들을 외국어로 죽자 살자 읽어본 전공자로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뿐이다혹시 이 소설을 읽다가 화들짝 놀라거나 멈칫할 내용이 나와도 책을 덮지 마시고 호기롭게 무시(?)하고 흥미로운 부분들만 맛나게 먼저 읽으시길그렇게 즐기시길 바란다.

 

13개의 철학적 주제에 대한 답을 찾거나 외우지도 마시고,

13개의 기차역처럼 생각하시고 내리고 싶은 곳에 내려서 머물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하며 여행을 즐기시길.

 

153명의 인용된 철학자들을 모두 찾아서 공부하지도 마시고,

153명이 이 책의 여기저기서 등장하더라도 친하고 싶은 이들과만 통성명을 하시고 대화를 나누시길.

 

정보와 지식보다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방식과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하니,

2000년이 넘게 다뤄지는 주제들이 한 눈에 파악이 안 되도 괴로워하지 마시길 바란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관한 정보로서의 지식의 축적이나 무엇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의 연마가 아니라우리가 일상적으로 믿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 반성적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 경이를 발견하고 그 경이를 풀기 위한 논리적 사유를 추구하는 능력의 행사 자체라는 것이다박이문.

 

논리학은 수학적 사고에 필요한 기술이 아니라 자체가 철학분과이다.

 

모든 것이 존재할 수도 있고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면 어느 시점에서는 무가 존재했을 거예요

그러나 존재는 스스로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항상 존재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무만 있겠죠.”

 

예전에 이런 구절을 만나면 오른쪽 뇌가 지끈거리면서 암호 해독과도 같았던 하이덱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막 이런 책이 떠올라 괴로웠다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문장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런 생각들 다 내려놓고 내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해 그저 차분히 한번 생각해보기만 하는 문제를 풀려하지 말고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시간을 보냈다. 20대에는 머릿속이 시끄럽고 마음이 복달 거려 수업 준비하다 울기도 했는데 뭘 모르겠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제 뇌가 비명을 지르진 않는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일 거야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다른 사람을 돕고다른 사람과 교감도 해야 해

그러면 결국 세계와도 교감할 수 있겠지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을 거야

그게 인생의 의미가 아닐까?



인생의 의미The meaning of life는 찾지 않은 지 오래이다포기한 게 아니라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그보다는 의미의 수명The life of meaning을 정확히 아는 것이 더 자주 중요하다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사안들도 모두 정해진 수명이 있다그걸 하염없이 붙잡고 헤매고 있는 건 짧디 짧은 인생을 확실히 낭비하거나 모범적인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다.



너는 사실에 대한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단다.

너는 생각하는 법을 배웠어.

어떤 것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의심하는 자세 말이야.

현실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속에 무한한 깊이를 감추고 있다는 것도.

 

꿈들을 여행하며 철학적 사고를 훈련받는 14살짜리를 따라다니며 통통한 책을 다 읽고 나니동시에 내 과거와 꿈속을 덩달아 헤매고 다녔더니그 번다한 층층 사이로 자유연상처럼 시가 한편 떠올랐다형이상학이라 우겨야 될 혼란스러운 서평의 마지막에 이게 다 고려된 철학적 배치였다 끝까지 우기며 남기려한다.

 

쓰러진 의자 박소란

 

고아처럼 웅크려 잠이 들었네

얘야,

무슨 꿈을 꾸었니?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꿈에서 저는 의자가 되었어요

의자로 살다 의자로 죽었어요

저런악몽이로구나

무서워요

사람들이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요 자꾸만 죽은 몸을 일으켜 세워요

자꾸만

무슨 꿈을 꾸었니물어요

저는 거짓말해요

아무 꿈도 꾸지 않았어요

 

마지막이라 했지만 덧붙이는 말 완전 주정 수준이네……. 이 책을 통해 철학적인 태도와 생각에 빠진 첫 번째 계기는 뜻밖에 표지의 띠지였다띠지의 각도를 바꾼 것만으로도 인상적인 사고의 회전을 경험했다대단히 철학적인 디자인이라고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감탄했다내용은 잊어도 이 띠지와 표지의 존재감만은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을 한다.



진짜utterly totally 끝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0-12-06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책삼아 서점가서 이 책을 들었다, 놨다하다가 결국 놓아두고 왔는데 다시 가서 집어와야겠네요! 좋은 소개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한주 되세요!ㅎ

poiesis 2020-12-07 23:5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많은 분량 걱정 안 하시고 즐겁게 읽으시길 막 응원하겠습니다. 무탈, 건강, 안전,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