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169/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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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농사. 뿌린만큼, 아니 정성들인만큼 알토란 같은 열매로 피어나리라.

자식 키우는 일이 농사와 아무리 비슷해도 다른 건 다르다. 밭이야 내가 들인 노고만큼 내 것이지만 아이는 내가 들인 노고가 얼마든 내 것이 아니다. 밭에서는 내가 심은 열매가 나지만, 아이는 저 홀로 심은 꿈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안 자란 열매도 없고, 잘못 자란 열매도 없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이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 될 일. 그러니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수시로 다짐하는데, 사춘기 농사가 여름 농사라 그런지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가 쉽지는 않다. (158-159/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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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서사

늙은 아빠를 추억하던 가계부가 문득 쉽지 않은 시대를 아등바등 살았던 한 사내의 서사로 다가온다. 그 서사는 찬 소주 한 병을 홀로 들이켜는 아빠의 모습보다 어쩐지 더 서글프다. 그러면서 묘하게 더 크고 더 웅장하다.(118/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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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1 아버지와 영수증

아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영수증은 2001년 11월 초에 발행됐다. 일부를 적어봤다. 한 달 월세보다 비싼 방에서 하루 먹던 식대보다 비싼 밥 드시고, 내가 마지막인 줄 모르고 사준 백만 원짜리 양복은 아깝다고 입지도 않더니 70만 원짜리 수의 입고 가셨다. 가계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통장의 마지막 잔액은 2,473원. 나중에 사후 통장 정리하느라 은행에 갔더니 이것저것 빼고 백 원 정도가 남았던 것 같다. 나는 그 영수증들을 아빠의 가계부에 끼워놓고, 사는 일이 편치 않을 때마다 펴본다. 내가 5천 원짜리 전문점 커피를 마시는 동안 아빠는 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셨구나, 내가 애인과 놀러 다니던 날에 아빠는 찬 소주 한 병 안주도 없이 마셨구나, 마치 그 사실 때문에 사는 일이 편치 않은 것처럼 가슴을 두드리지만 모든 후회는 참회가 아니라 변명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115-116/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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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자식이란...

일주일 넘게 1월 1일자 신문을 들고 다니며 주위에 자랑하던 아빠는 한 달이 지나서야 시상식이라는 게 있고, 그곳에 내가 당신을 부르지 않았다는 걸, 시상식에는 다녀왔느냐는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고서야 알았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부끄러운 존재인 거냐, 아빠는 격노하다 조금 울었는데,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상금을 혼자 쓰려고 그랬다는 말은 아빠가 부끄러웠다는 말보다 더 나쁜 말이었다. 뭐가 아니라는 설명은 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그런 건 아니라는 말만 하다가 내가 더 크게 울어버리는 걸로 상황을 끝내버렸다. 그리고 일 년 후 그런 식으로 모아둔 비상금을 들고, 나는 도망치듯 집에서 빠져나왔다.(114/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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