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엄한 매질Royal Beating. 플로가 한 장담이었다. 장엄한 매질을 한 번 당하게 될 거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0
‘장엄’이라는 말이 플로의 혀 위를 구르며 요란하게 과장되었다. 로즈는 무엇이든 머리에 그려보고 말이 안 되는 것들은 꼬치꼬치 따져봐야 직성이 풀렸는데, 그런 욕구는 말썽을 피하려는 욕구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그녀는 위협을 마음에 새기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매질이 장엄할 수 있지?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0
그들은 온타리오주 핸래티에 있는 상점 뒤편에서 살았다. 가족은 네 명이었다. 로즈와 아버지, 플로, 로즈의 이복동생 브라이언.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0
로즈의 어머니는 죽고 없었다. 그날 오후, 어머니는 로즈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설명하기 힘든 어떤 느낌이 있어요. 삶은 달걀이 가슴속에 든 것 같아요.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로요." 어머니는 밤이 되기 전에 죽었다. 폐에 생긴 혈전 때문이었다. 당시 로즈는 바구니에 담긴 아기였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0
플로가 로즈의 어머니에 대해 유일하게 해주는 이야기, 어머니가 죽던 날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묘한 거리낌이 느껴졌다. 플로는 죽음의 세부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사람들이 죽을 때 하는 말, 몸부림치거나 침대에서 나오려고 하거나 욕하거나 웃는(정말로 웃는 사람이 있다) 행동 같은 것. 하지만 플로는 로즈의 어머니가 말한 가슴속 삶은 달걀 이야기를 어쩐지 바보 같은 비유처럼 들리게끔 전했다. 마치 정말로 로즈의 어머니가 달걀을 통째로 삼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류인 것처럼.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1
그것이 그의 자랑거리였다. 그토록 저렴한, 심지어 터무니없기까지 한 가격에 그토록 훌륭한 솜씨를 선보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2
만물은 살아 있다. 스피노자.
플로는 스피노자가 브로콜리나 가지처럼 그가 재배하려고 계획한 새로운 채소일 거라고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3
헛간에는 난로가 하나 있었고, 대충 만든 선반 여러 개 위에는 페인트와 바니시, 셸락*과 테레빈유가 든 깡통, 도료용 붓이 담긴 항아리, 그리고 까맣고 끈적끈적한 기침약 병 등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3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나 플로에 대해서나 뭐든 더 아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이에 이르러 있었다. 무엇을 알게 되건 당혹감을 느끼고 진저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3
날씨가 따뜻하면 이웃의 노인들 몇 명이 플로의 가게 바깥에 놓인 벤치에 나와 앉아 뒷소문을 나누거나 졸곤 했는데, 이들 중 몇 명도 항상 기침을 했다. 사실 그들은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죽어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이 특별히 억울해할 것도 없이 ‘주물공장 병’이라고 부르는 것 때문이었다. 평생을 타운에 있는 주물공장에서 일한 그들은 이제 수척해진 누런 얼굴로 가만히 앉아 기침을 하며 킬킬거리다가 지나가는 여자들이나 자전거를 탄 어린 소녀들을 보면서 목적 없는 막연한 음담패설을 주고받았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3
구름 위로 높이 솟은 탑들, 언젠가 그녀는 아버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구름 위로 높이 솟은 탑들, 수려한 궁전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5
그건 욕실 소음과도 같았다. 플로는 돈을 모아 집에 욕실을 들였는데, 욕실 자리로 가능한 공간이 부엌 한쪽 구석밖에 없었다. 문은 잘 맞지 않았고 벽이라고 해봐야 홑겹 널빤지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부엌에서 일하거나 얘기하거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욕실 안에서 화장지를 뜯는 소리, 궁둥이를 들썩이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아랫도리가 내는 목소리에 익숙해졌다. 폭발적인 순간뿐만 아니라 은밀한 한숨이나 으르렁거림이나 애원이나 단순한 진술까지도. 그들은 모두 내숭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혹은 듣고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고, 그에 대해 입에 올리는 사람도 없었다. 욕실 안에서 그런 소음을 내는 사람과 그곳에서 걸어나온 사람은 서로 관련이 없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5
훗날 전설적 빈곤으로 기억될 그 시기에 대해 로즈는 대체로 비루한 것들을 기억했다─위협적인 개미총과 나무 계단들, 그리고 희붐하고 흥미롭고 문제투성이로 보이는 세상.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7
처음에는 플로와 로즈 사이에 긴 휴전이 있었다. 로즈의 성정은 뾰족한 껍질에 싸인 파인애플처럼 자라났으나 그 변화는 느리고 은밀했다. 단단한 자존심과 회의주의가 서로 겹쳐지면서 로즈 자신에게조차 놀라운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7
어떤 사람들은 항상 중앙로에서 어슬렁거리며 여러 상점을 드나들었는데, 마치 스스로를 전시할 의무와 어딜 가나 환영받을 권리를 지닌 양 행동했다. 예를 들면, 베키 타이드처럼.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7
그녀는 머리가 크고 목소리가 요란한 난쟁이였다. 마스코트 같은 무성無性의 걸음걸이로 활보하고 빨간색 벨벳으로 된 탬*을 썼으며 틀어진 목 때문에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항상 위를 향한 시선으로 곁눈질을 해야 했다. 그녀는 광택이 나는 조그만 하이힐, 진짜 숙녀화를 신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8
베키의 아버지는 그녀의 남동생과는 다른 종류의 푸주한이었다고 플로는 말했다. 성미가 고약한 영국인. 입담의 측면에서 보자면 베키와도 달랐다. 그의 입은 열리는 법이 없었다. 구두쇠에다 가정의 폭군이었다. 베키가 소아마비에 걸린 이후로는 딸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19
베키만 보더라도, 속없고 심술궂은 지역의 기인이자 대중의 애완동물 같은 그 여자는 푸주한의 포로, 불구가 된 딸, 말 못하고 매 맞고 애를 밴, 창가를 휙 지나가는 흰 그림자와는 결코 겹쳐지지 않았다. 그녀의 집과 마찬가지로, 그저 형식적인 연상만이 가능할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1
한 편의 소극이지, 플로가 말했다. 일 년 안에 그들은 모두 풀려났고, 모두 사면받았으며,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높으신 분들이 너무 많이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키와 로버트는 정의 실현을 목도할 의지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남겨진 재산은 넉넉했다. 그들은 핸래티에 집을 샀다. 로버트는 푸줏간으로 들어갔고, 긴 은둔을 마친 베키는 사교와 자기 전시의 이력을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3
그때 플로는 분명 삼십대 초반이었다. 젊은 여자. 그런데 차림새는 오십대, 혹은 육십대, 혹은 칠십대 같았다. 무늬가 날염되고 목과 소매와 허리 부분이 헐렁한 실내복 원피스 위에 역시 날염 무늬가 있는 긴 앞치마를 입고 있다가 부엌에서 가게로 나갈 때는 앞치마를 벗었다. 그 시절, 가난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하지는 않은 여자들의 일상적인 옷차림이었다. 이는 또한 어떤 면에서 경멸을 나타내는 의도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4
로즈에게 플로에 대한 가장 이른 기억은 남다른 부드러움과 딱딱함에 관한 것들이었다. 부드러운 머리칼, 길고 부드럽고 창백한 볼, 귀 앞쪽과 입술 위쪽에 보일락 말락 하는 부드러운 솜털. 뾰족한 무릎, 딱딱한 허벅지, 납작한 상체.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4
그보다도 전에, 더 이른 시기에 플로가 살았을 것 같은 삶을 생각했다. 혼잡하고 전설적인 삶, 바버라 앨런과 베키 타이드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온갖 흉포함과 설움이 한데 뒤섞인 삶을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5
플로가 귀담아듣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변호사 데이비스의 부인, 성공회 신부 헨리스미스의 부인, 수의사 매케이의 부인이었다. 플로는 집에 오면 그들의 경박한 목소리를 흉내내곤 했다. 그들이 괴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어리석음, 과시, 자화자찬의 괴물.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6
흡연은 플로가 다른 사람이 했다면 허세라고 비난했을 거면서 자기도 하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6
그녀가 옆으로 다가갔을 때 그가 한 행동은 바로 이런 것, 그러니까 돌아서서 재킷을 열어젖히고 바지 지퍼를 내린 채 제 몸을 보여준 것이다. 추위 속에서 그애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플로는 코트 깃을 세워 목을 단단히 감싸야 했던 날씨에. 그애가 손에 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플로가 말했다, 머리에 떠오른 단 한 가지 생각은, 저 녀석은 지금 볼로냐소시지를 가지고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7
로즈와의 언쟁은 이미 시작되어 영원처럼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어떤 꿈이 뒤로 계속 거슬러올라가 고개를 넘고 문을 지나 다른 꿈들로 이어지는 것처럼, 미치도록 흐릿하고 복작거리고 익숙하고 포착이 힘든 상태.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7
프라이팬 위에서 움찔대는 문어 같은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와해되는 이성. 불꽃처럼 튀는 광기.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29
그들은 실랑이를 계속한다. 계속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서로를 내버려두지 못한다. 포기한 것처럼 보일 때도 사실은 그냥 기다리고 있거나 화를 차곡차곡 쌓고 있을 뿐이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0
플로는 바닥을 기어다니며 솔로 문지르고 걸레로 닦아낸다. 그녀의 다리는 길고 하얗고 근육질이며, 누가 지워지지 않는 연필로 강줄기를 그려넣은 것처럼 사방에 푸른 실핏줄이 비친다. 솔이 리놀륨 바닥을 씹어대는 소리, 걸레가 쓰윽쓰윽 지나가는 소리가 비정상적인 에너지, 맹렬한 혐오를 표현한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0
플로는 보통 때의 멸시어린 냉정을 잃고 역시나 놀랍도록 극적으로 변해, 자신이 로즈를 위해 인생을 바쳤다고 말한다.
-알라딘 eBook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중에서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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