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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낼 수 없는 대화 - 오늘에 건네는 예술의 말들
장동훈 지음 / 파람북 / 2021년 12월
평점 :
끝낼 수 없는 대화
그림을 다시 보게 해준, <이카루스의 추락>
그림을 생각하며 다시 보게 된 계기가 있다.
그리스 신화를 공부하면서 본 한 폭의 그림이다.
피테르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이란 그림이다.
보통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하여 그린 그림은 척 보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그 대상이 그리스 신화의 스토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은 달랐다.
분명 제목을 보면 이카루스가 하늘을 날다가 추락한 이야기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카루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브뤼헐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이런 말을 한다.
내게 브뤼헐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 첫 작품은 <이카루스의 추락>이었다. 동틀 무렵인지, 한낮을 지난 오후인지 해가 수평선 저쪽에 있다. 농부는 밭을 갈고, 목동은 양을 치고, 낚시꾼은 고기를 낚고, 한껏 바람을 머금은 범선이 바다로 나가는, 유럽 여느 해안가 마을 어디서나 있을법한 풍경이다. 거기서 화면 오른쪽 구석 고꾸라진 발만 보이는 이카루스를 찾기란 쉽지 않다. (........) (100쪽)
그렇게 해서 찾아낸 브뤼헐의 천재성을 이렇게 말한다.
브뤼헐의 천재성은 아마도 이 두 개의 전혀 다른 농도의 시간을 한 화면 위에 잡아두고 있는 점일 것이다. 새가 낮게 날며 바라보는 듯한 시점은 저 아래 제아무리 어떤 끔찍한 변고가 있더라도 화면을 풍경화처럼 고요하게 지켜낸다. 어쩌면 브뤼헐은 이 ‘위’의 시선과 저 ‘아래’ 벌어지는 사건 사이의 공간을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이 공간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고, 그 크기만큼 인간이 얼마나 참혹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폭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02쪽)

그림을 보면서 이 글을 읽어보면, 그 그림이 다시 보일 것이다.
그의 그림의 특징, 하나 더.
브뤼헐 작품의 특징이라면 그 어떤 주제라도 조망하는 듯한 풍경화의 시점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97쪽)
신부인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그런 글과 그림이 가득한 이 책의 저자는 현직 사제, 즉 신부다.
신부인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그가 세상에 건네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 직전에 당시 교황 바오로 6세가 교서를 발표했는데, 그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교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해줄 말이 있고 건네야 할 메시지가 있으며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습니다.” (9, 190,208 쪽)
저자는 교황의 교서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대화를 해야 한다는 그 선언, 그림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그림과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찾아내 보여준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읽고 곧이어 과르디니의 『근대의 종말』을 찾아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다. 인간 상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성찰이다.
태초의 인간은 자연을 포함한 외부 세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다.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구를 고안해냈지만, 그가 부리는 힘은 어디까지나 도끼나 곡괭이처럼 신체 일부와 결속될 때만 발휘되는 것으로 여전히 ‘인간적’이었다. 아직은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파악하고 체험하는 범위안의 힘이라 자연의 형태나 본질을 전면적으로 바꾸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신을 자연에 ‘맞추어 들어가면서’ 자연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계 문명의 출현과 함께 비약적으로 강해진 힘은 감각기관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 더는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일종의 ‘낯선’ 힘이 되었다. 한계와 통제를 벗어난 이 힘은 인간이 외부 세계와 맺던 관계를 왜곡했고 마침내 인간 자신의 상실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33쪽)
주세페 펠리차 다볼페도의 그림에서
신화와 성서에서, 이전의 세상에서 분명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이 비로소 역사의 무대에 올라선 것이다.(65쪽)
‘존재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이들이 어떻게 무대에 올라섰는가는 다볼페드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굶주림의 대사들>, <범람>, <제4계급>
<제4계급>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시대가 주는 축복이다.
화가의 시선에 시선을 보낸다.
오노레 도미에 :
그의 그림이 뿜어내는 알 수 없는 온기와 위로는 단순히 이런 표현 기법의 차이 때문이 아닌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선’ 에 있다. (137쪽)
한스 홀바인이 그린 에라스뮈스의 초상 :
그의 초상 모두가 섬세한 손 묘사와 더불어 대개 초상화에서 인물의 정치적이고 지적인 개성을 강조하고자 사용하던 측면 초상으로 그려진 것은 홀바인이 그를 단순히 작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170쪽)
오윤의 현실주의 :
그의 현실주의는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현실 고발이 아니라 어쩌면 현실의 조금 앞쪽, 잃어버렸지만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던 것들과 그래서 되찾아와야 할 것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189쪽)
또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변화’다. 시대의 변화.
그 예로, 2019년 12월 23일 프란체스코 교황이 한 성탄 인사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읽어낸다.
핵심은 오늘날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변화의 시대’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 차원의 세기적 전환, 곧 ‘시대의 변화’임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194쪽)
그래서 저자는 그 변화의 하나로, 코로나 19로 인한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다.
이런 글을 추려내어 들려준다.
전염병 이후 도래할 세상을 두려운 마음으로 전망하는 경제학자 홍기빈은 예측이 안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미래를 대하는 방식은 ‘결단’이라고 말한다. (86쪽)
( 『코로나 사피엔스』, 홍기빈 외, 116쪽)
세상도 교회도 또 한번 ‘거대한 전환’ 앞에 서있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혼미한 내일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 팬데믹 선언 직후 곳곳에서 피어나던 인문학적 성찰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전염병의 ‘종식’과 ‘박멸’만이 모든 담론을 집어삼킨 듯 하다. (279쪽)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기록들
그런 변화 중의 하나로, 저자는 르네상스 시대의 ‘변화’에 대하여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여기저기 르네상스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 중 몇 개 적어둔다.
마사초를 말할 때면 어김없이 언급되는,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원근법을 처음 그림에 들여왔다거나... (13쪽)
흔히 르네상스의 의미를 ‘인간의 재발견’이라고 정의하지만, 그래서 왠지 고상하고 관념적으로 들리지만, 예술가들에겐 매우 현실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108쪽)
투시 원근법, 단축법, 비례법 등 르네상스 미술이 축조한 용어들은 그러니까 단순히 조형기법의 변화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 시대가 맞이한 인식론적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47쪽)
고대나 중세 미술이 평면적인 까닭은 표현력의 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관심사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249쪽)
‘자연의 모방’으로 시작된 서구회화는 르네상스를 거치며 원근법과 소실점 등 대상을 좀 더 실제처럼 보이기 위한 기술들을 고안해냈다. (268쪽)
중세를 거치면서 르네상스 시대가 어떻게 시대의 변화를 이루어냈는지, 지금 이 시점에서 살펴봐야 할 대목이기도 해서, 옮겨 보았다.
다시, 이 책은?
이 책은 단지 그림을 감상하거나 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저자는 신부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어떤 식으로 전해져야 하는지에 대해 민감하다.
해서 그 말씀이 평범한 말이 아니라, 현실에 내려앉는 말이 되기를 바란다. 현실에 맥을 못추는 말이 아니라, 현실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키는 말을 원하는 것이다.
그는 교황의 말을 구체적인 예로 든다.
저 멀리 있는 늙은 교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여기 있다. 교황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다시 끄집어낸 말들과 그 방식 때문이다. ‘설교대’의 말들이라도 그의 입을 거치고 나면 항상 단단한 몸통을 얻기 때문이다. 손을 뻗으면 금방 만져질 것처럼 말이다. (209쪽)
난, 저자의 말이 공감은 되지만, 교황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 아쉽다.
대신 저자가 교황의 뜻을 받들어, 그림을 통해 그림 속에서 읽어낸 것들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살펴보고, 그런 아픔과 연대하려는 그 마음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본격적으로 그가 세상에 건네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있다. 해서 그림이 이렇게도 말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책의 제목이 왜 『끝낼 수 없는 대화』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