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책고집
최준영 지음 / 답(도서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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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최준영이 책에 관해 쓴 글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각도로 책을 읽고, 읽은 후의 생각들을 책의 소개와 함께 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그저 단순한 책소개로 그치거나 저자의 감상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다.

 

최준영이 쓴 글마다 말미에 참고한 작품들이라며 책 목록을 적어놓았는데, 그것을 살펴보면서 내가 읽은 것이 혹시 있는지, 그래서 읽었다면 나는 왜 그것을 똑 같은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들을 건저 올리지 못했는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그 언급된 책을 꺼내들고 해당 페이지를 다시 읽으면서 저자가 건저올린 생각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그런 나의 독서가 부족한 듯하여 저자가 소개해준 책들 중 읽지 못한 것을 새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읽은 책을 다시 읽게 하는 책이며 또한 이 책은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을 읽어보게 만드는 책이다.

 

읽은 책을 다시 읽게 하는 책

 

고통을 통해 성장하라, 맹목적인 긍정은 경계하라.”(91쪽 이하)를 예로 들어보자,.

 

이 부분에 등장하는 책들은 다음과 같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결핍을 즐겨라> 최준영

<맹자> 맹자

<신화의 힘> 조셉 캠벨

<스피노자 - 책 제목 밝히지 않음>

<긍정의 배반> 바버라 에런라이크

 

그리고 그 글이 끝난 다음에 참고한 책, 읽어볼만한 책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소개해 놓았다.

 

<결핍을 즐겨라> 최준영.

<아프니까 청춘이다> 김난도

<신화의 힘> 조셉 캠벨

<철학하라> 황광우

<긍정의 배반> 바버라 에런라이크

 

이중에서 내가 읽었던 책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맹자>, <신화의 힘>, <긍정의 배반>이다.

 

흐르는 물이란 구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그런데 <맹자>, 읽긴 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구절은 처음 보는 듯하다.

 

여기 이런 말이 등장한다.

<“흐르는 물이란 구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황광우의 <철학하라>에서 건진 맹자의 말입니다. 흐르는 물 앞에 구정이가 있으면 물은 일단 구덩이를 채웁니다. 물이 차기 전에는 흐름을 멈출 수밖에 없고, 구덩이를 가득 채운 뒤라야 비로소 흐릅니다. 단순한 자연의 이치에서 맹자는 인간의 덕목을 이끌어 냅니다. 무릇 군자는 학문과 덕행을 차근차근 쌓아가야 합니다. 역경과 시련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기다림과 인내의 의미를 알려주는 말이기도 합니다.>(93)

 

흐르는 물이란 구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맹자가 저런 말을 했던가? 맹자의 어느 부분에 저런 말이 있었나?

맹자를 읽기는 했지만, 어디 모든 구절을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으니, 부득히 다시 맹자를 열어 보았다,

 

그 말은 맹자 진심장구상- 24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가셔서는 노 나라를 작다고 여기셨고, 태산에 올라가셔서는 천하를 작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바다를 보는 사람은 물이야기하기를 어려워하고, 성인의 문에 노는 사람은 말하기를 어려워한다. 물을 관찰하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결을 봐야 한다. 해와 달은 밝은 빛을 지니고 있어 작은 틈바구니에까지도 반드시 다 비친다.

흐르는 물이란 구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가지 않는다. 군자가 도에 뜻을 두었어도 환하게 몸이 드러나지 않으면 도에 나아가지 않는다.>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이 부분을 이기동은 다음과 같이 해설해 놓고 있다.

<물이 구덩이가 있을 때에는 그 구덩이를 다 채우고 난 뒤에 다시 흘러가는 것처럼,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머리로써 이해하며 곧바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몸에서 우러나와 밖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지 아니하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맹자강설, 이기동, 613)

 

이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전에 읽었던 맹자를 다시한번 읽고 새기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 교훈을 여기 이 책에서는 이렇게 변용하여 사용한다.

<생의 시련 혹은 역경이란 흐르는 물이 언젠가는 반드시 만나게 마련인 구덩이에 다름 아니다. 흐르는 물에게 구덩이란 채워야 할 곳이지 흐름을 멈추어야 할 파국의 의미는 아닌 것이다.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93-94)

 

그런 다음에 글은 자연스레 고통의 문제로 넘어간다.

<고통은 피하면 피할수록 더 큰 고통으로 되돌아온다. 차라리 직접 대면하는 것, 그게 바로 고통을 이기는 방법이다. 얼핏 하나마나한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빤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렇기야 하겠는가. 모든 고통을 비판없이 무조건 긍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나친 긍정은 외려 근거없는 낙관주의로 흐를 수 있으니 그 역시 위험하다.>(95)

 

고통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맹목적 긍정을 경계하라

 

그래서 그 다음 등장하는 책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긍정의 배반>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그 책에서 맹목적 긍정을 경계하라고 지적한다.

 

이렇게 이 글에서 저자는 고통을 통해 인간은 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 고통을 마냥 긍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에런라이크의 말을 들어 맹목적인 긍정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여기 이 글에서 맹자의 그 말을 우리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하는가, 맹자의 말이 다만 책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런 고통과의 직면이 다만 우리에게 자기 위안이 아니라, 또한 고통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었다는 식의 긍정도 또한 취할 자세가 아니라는 것, 그러한 것들이 바로 책들에서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책은 살기 위해서”(57) 읽는 것이다.

 

책을 재음미하며 또한 새로운 책 기대하게 되다.

 

그렇게 내가 읽었던 책들이 새롭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다시한번 그 책들을 살펴보게 되는 것에 이 책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저자가 소개해 준 책 중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한 기대를 하게 만드는 것, 역시 이 책에서 맛보는 즐거움이다.

 

읽었던 책에 대하여는 재음미하는 기쁨과, 또 새로 소개된 책을 읽을 기대가 함께 부풀어오르게 만드는 것, 그런 기쁨이 바로 책 읽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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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 베스트셀러를 쓰다 탐 철학 소설 20
염명훈 지음 / 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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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기 위해, 일연 베스트 셀러를 쓰다

 

삼국유사(三國遺事) VS. 삼국사기(三國史記)

 

이 책에 등장하는 베스트셀러인 삼국유사, 먼저 그것부터 짚고 넘어가자.

삼국유사가 유사(遺事)인 줄을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역사책이니까 당연히 유사(遺史)인줄 알았다. 그래서 삼국사기와는 그 성격이 확실하게 차이가 나는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을 확실하게 밝혀놓고 있다.

 

<삼국사기가 왕의 명령에 따라 엄격하고 정확한 틀 안에서 역사책이 가져야 하는 모범에 충실하면서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쓰였다고 한다면, 삼국유사는 일연스님의 자유로운 선택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일연스님이 찾아낸 여러 이야기가 담기면서 우리 민족의 뿌리라고 할 단군부터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있던 사람들까지 주인공으로 등장해 삼국사기 하나로는 알 수 없었던,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구석구석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202)

 

따라서 이 책은 당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역사적 가치가 없는 단순한 이야기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의 생생한 삶이 오히려 더 역사적인 가치가 있기에, 이 책이 역사적 기록이라는 점 또한 소홀히 취급되면 안될 것이다.

 

이런 자료 하나 덧붙인다, 삼국유사에 관한 개괄적 서술, 인터넷에서 찾은 내용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도 아니며, 불교사 전반을 포괄하지도 못하였고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역사 . 지리 . 문학 . 종교 . 언어 . 민속 . 사상 . 미술 . 고고학 등 총체적인 민족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될 만큼 다른 전적에서 볼 수 없는 다양하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의 주인공, 일연스님

 

그런데 이 책은 특이하다. 제목이 <일연 베스트셀러를 쓰다>이다. 그런만큼 당연히 이 책의 주인공은 일연스님일터. 그래서 일연이 베스트셀러인 삼국유사를 쓰게 된 배경, 그 과정들이 나타나야 마땅한 일이다. 또한 저자는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책은 일연스님의 삶을 밝히려 노력한 책입니다, <삼국유사>에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가보다 그 책을 쓰신 일연스님이 어떤 삶을 사셨나에 주목하고 싶어서 쓴 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용의 전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들을 따라가고 있습니다.>(8)

 

그래서 일연스님을 중심으로 든금, 생동, 가초, 무극(無極) 등이 등장하여 일연스님이 베스트셀러인 삼국유사를 쓰는 사건을 이야기 식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중 무극은 실제인물이다.

 

무극과 관련하여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는데, 무극은 삼국유사 책의 간행하는데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에 관한 사서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저자의 관심을 끈 자료들을 선택적으로 수집, 분류한 자유로운 형식의 역사서이다. 저자에 의한 초간본의 간행 여부는 분명하지 않으며, 1310년대에 제자 무극(無極)이 간행하였으나, 무극의 간행이 초간인지 중간인지는 알 수 없다.>

 

일연은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했을까?

 

고구려, 신라, 백제라 하면 이젠 아주 먼 옛이야기들인데 어찌 그것에 그렇게 힘을 기울이십니까?‘라고 든금이 묻는다.

그런 질문에 일연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지나간 시간이란 것이 말이다. 어떻게든 잊어야 할 것도 있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것도 있는 법이란다. 지나간 일을 잊어도 될 때가 있고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할 때도 있다. 지금이 바로 우리 고려가 지난 삼국의 일을, 아니 더 멀리 올라가 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의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 된 일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나라에 비참하게 짓밟히고 있어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는 힘이 잇다는 걸, 그 힘이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에게 있었단 증거를 위해서라도 꼭 우리의 이야기들은 필요한 것이지. 그게 내가 몸담았던 이 나라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내 아버지 같은 분들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느냐?>((184-185)

 

고려 시대, 폭력적인 무인 정권의 통치아래, 그리고 몽고의 침략으로 고통받던 민초들에게 희망을 주고, 긍지를 갖도록 그 이야기들을 써낸 일연의 안타까운 가슴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 하다.

 

일연, 희망을 쓰고 가다

 

이 책은 그렇게 일연의 이야기를 전기체로 서술해나가면서, 일연이 얼마만큼 백성들을 생각했는가, 고통에 빠진 백성들을 위정자들을 생각하지 않는데, 일생을 다하여 사랑했던 일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그런 일연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후세 사람들은 말하길, 일연스님은 우리의 조상이 하늘에까지 이어졌음을 알려 당시 몽골의 침략과 지배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용기를 부어넣었다, 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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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두 번 숨다 탐 철학 소설 19
황희숙 지음 / 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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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서 비트겐슈타인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정보 정도로만 요약해 본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철학의 조류에서 영미 경험론을 계승하고 있는 분석철학의 대표자이다.

분석철학은 초기 논리경험주의와 후기 일상언어학파로 나눌 수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이 두가지 철학의 시조에 해당한다.

 

그의 저서로는 전기를 대표하는 저서 <논리 - 철학 논고>, 후기를 대표하는 저서 <철학적 탐구>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당대에는 가장 이해받지 못한 수수께끼의 철학자, 자금은 가장 영향력있는 현대 철학자, 그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그의 고뇌어린 철학(), 그의 기이한 스타일, 풍부한 의미를 가지면서도 놀라우리만큼 새로운 표현들은 전문 철학의 영역을 떠나 일반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이상 178)

 

그런데 다음과 같은 언급은 그래서 우리가 그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으니, 다른 설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의 경구 같고 신비한 표현들은 멋대로 토막 난채 인용되고 크게 오해되는 일이 빈번하다.>(10)

<비트겐슈타인의 말과 글은 아무 체계도 없어 보여서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했다>(104)

 

이 책의 목적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으므로, 그것을 돕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것이 또한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가상의 인물인 지효와 상우를 설정하여 비트겐슈타인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의 사상을 소화해가며, 자신의 불안정한 삶에 연결해가는 것....>(7)

 

지효는 상우의 외할머니로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비트겐슈타인과 동시대 인물로 설정되었으며, 비트겐슈타인과 직접 대면하며 그의 삶과 사상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상우는 그런 외할머니의 궤적을, 우연히 보게 된 외할머니의 노트를 통해서 알게 되고, 그것을 자기 현재의 삶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고, 그의 사상을 소화

   

1. 말놀이

 

<‘말놀이는 언어의 문제를 언어 사용집단의 삶의 양식(forms of life)'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104)

 

이 말을 설명하고 있는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비트겐슈타인은 요즘 들어 자주 집을 짓고 있는 인부와 그의 조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예로 들었다.인부가 벽돌이라고 말하면 그의 조수는 그 말한 것을 가져온다. 그들은 여기에서 원초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말놀이를 하는 셈인데, ‘벽돌이라는 말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를 지닌다. ‘벽돌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 말이 가리키는 대상 즉 단단한 벽돌이 아니다.

 

지효는 이 예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태권도 사범이 격파시범을 보여주는 훈련생에게 벽돌이라고 말할 때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이 때 벽돌이란 말에는 벽돌을 깨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다른 종류의 말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지효는 한 언어적 표현의 의미가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사용이론(use theory of meaning)'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104-105)

 

나 또한 지효의 태권도 사범의 벽돌 격파를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을 듣고는 곧 이해가 되었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여기 이 책에서 모두다 알아야겠다는 마음은 애초부터 없었으나, 이런 설명을 듣고, 그의 철학을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2. 유머

 

비트겐슈타인은 유머는 기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 말한다.(147, 156)

 

이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의미일까?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효는 곰곰이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사물을 바라보는 것에 관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럼,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나치 독일에서 유머가 사라졌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 나치가 삶의 양식을, 세상을 바라보는 양식을, 또 그것과 연관된 모든 반응, 관습을 파괴하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라고.”>(156)

 

(철학을) 자신의 불안정한 삶에 연결해가는 것....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바 이 책을 저술하는 목적 중, 이 부분이 가장 기대가 되었다, 그토록 난해하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중학생 상우가 생활 속에서 어떻게 적용해 나갈지?  

 

언어가 휴가를 간 날

 

상우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외할머니가 언어가 휴가를 간 날에 대해 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108)

 

그럼 외할머니인 지효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가 휴가를 간 날에 대해 뭐라 생각했는가 살펴보자.

 

<지효는 언어가 휴가 갔을 때라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언어가 휴가를 가버린다면? 지효는 미국 유학 초기에 영어 문제로 겪은 난처한 경험을 떠올렸다.....휴가는 집이나 자기마을을 떠나는 것을 말하는데, 언어가 휴가를 갔다는 말은 어떤 언어적 표현들이 본래의 고향인 말놀이를 벗어났다는 의미일까?....지효는 수수께끼를 푸는 사람처럼 끝없이 묻고 대답해 본다.>(106-107)

 

그렇게 난해했던 그 개념, ‘언어가 휴가를 간 날을 상우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상우는 클래식 기타를 배우고 있다. 그런 상우는 선생님이 말한 바, ‘음악은 손가락이 아니라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라는 말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타를 배운지 4년째가 되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생겼으니, 상우가 말하는 것을 엄마 아빠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 할 수 없으면 침묵하라,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명제를 통해 소통을 명확히 하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 주장했다. 더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해서 말하기를 포기한다면 파리통에 갇힌 파리에게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 주는 철학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책 소개 글에서 발췌)

 

결국 철학은 우리 삶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그래서 상우는 그 말 - 언어가 휴가를 간 날 - 을 이렇게 적용한다.

<가끔 우리 집에서 언어는 휴가를 간다. 언어가 빈둥대며 일손을 놓고, 내 말이 헛도는 것을 느끼면 나는 얼른 말문을 닫고 내 방으로 도망친다.>(111)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학설이 아니라 활동이 되는 것(83), 맞다. 심지어 어린 상우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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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고수의 생각법 - 생각은 반드시 답을 찾는다 인플루엔셜 대가의 지혜 시리즈
조훈현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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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의 생각에 대한 생각

 

바둑을 둘 줄 안다. 그래서 예전에 바둑에 관련된 책 - 예컨대 <바둑의 정석> , 그런 책들- 도 조금 본 적이 있고 바둑 기사(碁師)들에 대해 조금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 나에게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

 

우리 바둑의 이야기들 우선 재미있다.

 

지금 와서 알게 되는 우리 바둑의 이야기들 우선 재미있다.

조훈현, 일본에서 9년간 바둑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그가 한국 바둑계와 일본 바둑계를 바라보는 시선, 우선 흥미로웠다.

 

<일본 기원에서는 또래 기사들과 어울리면서 연구하고 검토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여기서는 뮤조건 실전이었다. 기원에 나가면 누구든지 눈이 마주치는 기사와 다짜고짜 앉아서 짜장면 내기 바둑을 벌여야 했다. 일본에서는 기사들끼리 내기 바둑을 잘 두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었다.>(114)

 

그렇게 이질감을 느끼던 한국바둑계에 대한 생각이 그를 정신적으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질감을 잘 극복하게 되는 과정이 비단 바둑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인들 적용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그의 책은 그런 면에서 바둑판을 빌려 말하는 이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서봉수와의 인연도 재미있다.

서봉수와의 바둑 시합 후에는 복기를 하지 않게 된 사연(88), 서봉수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지금도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죽어도 지기 싫다”(91)고 고백하는 그 심정이 전해져 오는 글, 읽으면서 마음이 훈훈해 지는 것은 어쩐 일인지?

 

그의 제자, 이창호의 모습도 재미있다. 돌부처란 별명을 듣는 이창호와의 인연.

()제자로 기르면서 숙식을 같이 하는 사이인데, 어느새 그 제자가 성장하여 자기를 이기게 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는 글둘이 담담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런 내용도 있다.

1990년 제 29기 최고위전, 이창호와 조훈현은 결승전 대국에서 맞붙었다. 전체 대국은 다섯 번인데, 4 국까지 22로 무승부. 결국 승패는 마지막 대국인 5국에서 결판이 나게 되어있는데, 여기에서 조훈현은 패배한다.

 

그런데 그 당시 이창호는 조훈현의 집에서 숙식하고 있는 내제자였다. 그러니 돌아오는 길도 같이 할 수밖에.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날 밤 우리는 같은 차를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한 사람은 이기고 한 사람은 지고 돌아왔으니 가족들은 축하도 못하고 위로도 못하고 난감했을 것이다.>(68)

원래 말이 없다는 이창호, 돌부처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와 같은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조훈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왔을까?

 

그러한 생각들은?

 

여기 이 책이 바로 그러한 조훈현의 생각들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먼저 왜 생각이란 것이 필요한가? 또한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바둑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 ....... 그러니 세상사를 바둑판이라고 생각한다면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문제는 반드시 해결된다. 해결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근성만 있으면 된다. 그 근성이란 바로 생각이다.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성. 반드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 그리고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핑요한 모든 지식과 상식, 체계적인 사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을 나는 생각이라고 부르고 싶다.>(23-24)

 

저자는 그렇게 생각의 중요성, ‘생각이 가져다주는 힘에 대하여 강조한 다음, 최종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바둑이 내게 가르쳐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집중하여 생각하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 (26)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그런데 그가 보기에 요즘 사람들은 생각이 부족하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인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면, 참 잘 두긴 한다. 그런데 꼭 어디서 본 것 같은 바둑이다. 누군가의 기보, 누군가가 창안한 정석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이쯤해서 창의적인 수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아무리 기다려도 뻔한 수만 나온다.>(33)

 

저자는 그렇게 신인들이 생각없이 누군가 이미 해 놓은 생각- 정석 등-을 따라만 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래서 틀에 박힌 교육은 틀에 박힌 사고, 그리고 틀에 박힌 자아를 만들어낸다. 생각이 한정된다면 자아도 한정될 수밖에 없다”(34)는 것이다.

 

조훈현의 생각에 대한 생각

 

그렇게 조훈현의 생각에 대한 생각은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특히나 요즈음 생각 자체를 꺼려하는 세태에 이 책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생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신기하기조차 할 것이다. 더하여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책에서 무엇이 생각을 방해하는가’(257쪽 이하)를 읽어보면 생각이 조금이라도 바뀔까?

 

밑줄 긋고 싶은 말

 

<최근 몇 년 사이에 고민을 상담해주는 인생 멘토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고 있는 이유는 뭘까. 그만큼 혼자 힘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까.>(37)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 우리는 그럴수록 진지하고 신중한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은 조금만 더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들이다.>(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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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 마운틴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가슴이 뻥 뚫린 사내를 곁에 두고 건져올린 생각들.

 

 

우리는 태어났다, 이 세상에. 무언가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

 

소설 속의 주인공인 가 사슴을 잡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가운데 나온 말이다.

이 말 가운데 가족의 법칙이라는 말은 그 주인공 나와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로 이루어진 가족을 말하는데, 그 가족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진리는 가족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 진리는 이 세상에서도 똑 같이 통용되는 진리다.

 

그 진리는 우리가 입 밖에 내지 않고 살아가지만, 모두 다 공감하는 진리다. 우리는 이 땅에 누군가를, 아니 무엇인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그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애써 무시하지만, 하루라도 그런 진리를 역행하고 살 수는 없다,

 

이 책은 어찌보면, 그 진리에 대한 웅변이고, 그 진리에 대한 변증과 반증을 엮어가는 소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시작은 11살짜리 소년인 주인공 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은유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가슴이 뻥 뚫린 사내.> (43)

 

그렇게 가슴을 뻥 뚫리게 한 주체가 바로 이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다음,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이 계곡 얘기가 아니라 네가 저지른 짓 말이다. 피할 길이 없어.>

(118)

 

그런 세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

<내가 서 있는 이 땅은 저 산을 따라 어딘가로 미끄러져 무저갱(無底坑)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무너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우리 네 사람, 그리고 매달린 시체. 나머지는 모두 배경에 불과했다.>(57)

 

살인, 아니 삶에 대한 성찰

 

는 그(밀렵꾼)를 죽인 다음부터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생각이 이 소설의 대부분을 이룬다. 따라서 이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나, 그 생각의 깊이와 넓이는 깊고 넓다.

 

그런데 이 소설의 문장이 지나가는 속도를 보자.

현란하다. 마치 가 트럭 짐칸에 타고 가면서 바라보는 숲속의 경치처럼 휙휙 지나간다.

저자는 그런 속도로 의 생각들을 헤집어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그러니 잠깐만 그 흐름을 놓치면 - 트럭 짐칸에서 바라보는 경치처럼 - 벌써 다음 계곡을 지나 산에 이르니, 조심 조심해야 한다.

 

저자는 그런 흐름을 속도감 있게 전달해주고 있는데, 하나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트럭이 달려가는 것을 살펴보자. 지금 는 트럭의 짐칸에 타고 있다.

 

<정찰병인 나는 트럭에서 망을 보았다. 바람에 건조해져 잔뜩 찡그린 눈에 들어오는 생명체라곤, 몇 킬로미터를 오는 동안 새 몇 마리뿐이었다. 새들은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흰 줄무늬 날개를 활짝 펼치며 무리를 지어 활강하는 새들, 청어치, 덤불어치 소리가 엔진소리, 타이어 소리보다 훨씬 더 컸다. 이름 모를 작은 갈색 새들도 계속해서 길을 따라왔다. 이따금 맹금류도 한 마리씩 나타났는데.....>(13)

 

다음은 생각의 흐름들이다.

 

<나는 심장을 놓고 옆으로 물러나 한참을 씹은 다음에야 삼켰다. 드디어 내 인생이 시작하는 기분이다. 열한 살.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해가 지면서 그림자도 짙어졌다. 밤은 큰 품으로 세상의 피조물을 모두 하나로 이어주었다.> (192 )

 

어른이 되는 순간을 내면에서 느끼는 장면인데, 그 순간 동시에 현실에서의 시간도 어느덧 밤이 된다. 밤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바로 세상의 피조물을 (어둠 속에서) 모두 하나로 이어주는, 각성의 시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다음은 생각이 튀는 것을 살펴보자. ‘에게 한가지 사물, 사건을 그냥 그 자체로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튄다. 한 가지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튀어간다.

여기에서는 죽은 남자를 끌고 온 것에 대한 생각이 어디로 튀는지 살펴보자.

 

<(죽은 남자)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시작했다. 바위 위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살아 있었다. 아버지가 언덕을 질질 끌고 내려온 다음엔 할아버지가 캠프 근처의 풀밭으로 끌고 다녔고, 다시 아버지가 끌고 나와 두 번째로 그를 매달았다. 우리의 삶은 반복한다. 우리뿐 아니라 그전의 누구라도. 예수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끌었다. 십자가는 고통의 양식, 인간 삶의 형식이다. 그 어떤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간다. 이른바 '예수의 수난'. 예수는 우리 스스로를 동정하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243)

 

시체를 끌고간 그 행위가 예수가 십자가를 끌고간 행위로 튀어간다. 그러니 이 책 읽으면서 그 가닥을 잠깐이라도 놓친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모르게 된다. 소설 속에서 방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

 

그러한 생각의 흐름을 면밀하게 관찰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그래서 끝을 향하여 가는 동안 한시도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긴장과 서스펜스? 물론 이런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진행을 그대로 사람들의 인생, 삶에 대입해 본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한편의 인생 기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죽이기 위해 이 세상에 나왔다.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 바로 가족의 법칙이자 세상의 법칙이다.> (184)

 

 

 

누구를 죽이느냐?

<이번에는 꼭 죽여라. 조준경으로 녀석을 확인하고 가늠자를 가슴에 맞춘 다음 방아쇠를 당기는 거야. 반드시 해야 한다. 아니면 네가 죽어.>(286)

 

그렇게 할아버지는 말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 ‘가 겨눈 대상은? 방아쇠를 당긴 대상은?

, 여기에서는 말하지 말자.

다만, 이 말은 기록하기로 하자. 책을 덮은 다음에도 여운을 남기는 말이니까...

,

<내 눈은 훈련받은 대로 배경을 지우고, 세상을 지우고 오로지 타깃만을 남겨둔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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