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다 -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공감 능력을 회복한 아이들
브루스 D. 페리, 마이아 샬라비츠 지음, 황정하 옮김 / 민음인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불행한 사람조차,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행복한 사람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사람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불행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렇게 된 사유가 얼마나 다양한지?

그러나 그렇게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할지라도 그들의 삶, 역시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해주는 책이 있다. 바로 브루스 페리와 마이아 샬라비츠 공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다>이다.

 

이 책에는 그것을 증명해주는 다양한 사례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등장인물들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에서 말해주는 그 불행의 나름의 모습들로, 얼마나 가슴아픈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저자들은 그 불행한 인생들을 이 땅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게 이끌어주는 실제 사례들을 글로 우리 독자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런만큼, 저자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추스르며 읽었다. 한 건 한건 케이스가 펼쳐질 때마다, 그래도 그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었다.

 

사랑받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의 제목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다>이다. 그렇다면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태어나다라는 말은 이해하기 쉬운 말이나,‘사랑받기 위해는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

사랑받는다는 말 자체가 구체적이지 않기에 그렇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받는다는 말인가?

 

저자는 그 말을 어떤 의미로 썼을까?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의 원제는 <Born for love: why empathy is essential and endangered>이다.

거기에 바로 힌트가 있었다. 바로 공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받는다는 그 것에 공감을 적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랑받는다는 말은 공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받기 위해서는 공감이 바로 관건이 된다는 말이겠다. 그런 나의 추론은 바로 <작가의 말>에서 증명된다.

 

<우리는 이 책을 위해 방대한 작업을 했다. 교육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 중 핵심내용만을 뽑아 설명하고자 했다. 공감은 매우 광범위한 주제기에 관련내용을 취사선택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지나치게 단순화 된 사례도 있다.>(11)

 

또한 <프롤로그>에서는 바로 이점을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다.

 

<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에게 관심을 보일까? 우리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태어났을까? 이런 질문들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인 공감이다. 공감은 사회적 관계를 맺게 하고, 서로를 치유하거나 상처 입히는 인간관계의 원동력이다.>(12)

 

결국,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받는다는 것은 공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프롤로그의 제목인 <우리는 과연 사랑을 충분히 주고 있을까>라는 말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하고 있는가?’라고 바꿔도 좋을 것이다. 또는 공감을 주고 있는가로 대치해도 좋을 것이다.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럼 공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저자는 공감에 대해 여러 가지로 분석을 해 놓고 있다. 공감이란 무엇이며 공감에 대한 현대의 상황은 어떤 정도인가, 까지.

 

몇 가지만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아동기에 공감 능력이 제대로 발달하려면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특정한 경험 및 ,행동이 필요하다.(15)

 

마이아는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공감에 대해 오랫동안 의문을 품어오다 어린 시절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으로 괴로운 시절을 보냈던 그녀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강렬한 욕망은 물론 그것이 불가능한 때 자신 안으로 침잠하게 만드는 극도의 고통에 시달려 왔다.

 

이 책은 사회 전체에 공감의 물결이 확산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공감은 사실상 신뢰, 이타심, 협동, 사랑, 관용과 같은 모든 사회적 가치의 근원이다. (16)

 

그러한 공감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살아가도록 우리는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공감능력의 부재로 인하여 현대 사회는 위기에 처했고, 결국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오늘날 미국 사회의 공감능력은 위기에 처했다. (14)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사례들

 

그 공감의 문제를 풀기 위하여 저자들은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그 어느 것이든 좋으니 차분하게 읽어볼 것을 권한다. 그 사례들을 몇가지 소개하고 싶은데, 저자가 소제목에 압축하여 표현한 타이틀이 그 내용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눈맞춤으로 시작되는 인간관계

나에게만 사랑을 주세요

개별적인 돌봄의 부재

공감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맥락

반복적인 애착 박탈이 가져온 잔인성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공감하는 존재로

공감 능력을 마비시키는 또래 집단의 압력

불평등한 사회에서 약자가 받는 스트레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

공감 결핍의 시대를 건너는 방법

 

이런 사례들을 통하여 저자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공감능력을 회복한 많은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하여 태어났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몇가지 빠트리지 말고 읽어 볼 부분들

 

공감능력에 영향을 주는 인생주기

 

에필로그에서 440-441 쪽에 나오는 공감능력에 영향을 주는 인생주기에 관련된 글. 꼭 읽어볼 일이다.

 

이렇다.

<사회의 공감능력 발달에 영향을 주는 인생주기에는 영아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우리는 많이 접해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과는 제대로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 ...(중략).... 마찬가지 이유로 우리는 연장자와도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연령별 분리는 사람들의 관계 형성 기회를 제한한다.....(하략) >(440-441)

 

부록, 꼭 읽어라

 

이 책의 부록에 나오는 것들, 정말 요긴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뿍 담겨있다. 그러니 저자의 감사의 말까지 읽고 다 읽었다고 책을 덮지 말고, 꼭 부록에 나오는 글을 모두 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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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성들
서영 지음 / 책벗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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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새롭다, 특이하다, 놀랍다.

 

이 책은 특이하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중국 역사를 다루지만 그 중국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접해 오지 못했던 인물들을 다룬다. 물론 그 중에는 우리가 많이 접해 본 인물도 있다. 서시, 왕소군, 측천무후. 그러나 그 이름을 들었다고 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중국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그저 말타고 스쳐 지나가듯이 보고 알 뿐이다. 그러니 그런 인물을 포함하여 다른 인물-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들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일단 이 책은 특이하다. 이런 이름 들어본 적이 있는지? 이청조, 황도파, 진양옥?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럼 중국 최초로 황후란 타이틀을 얻은 인물은? 그리고 중국 정사에 기록된 단독으로 기록된 여장군은? 그리고 이런 것도 있다. 중국 글자인 한자(漢字), 그 중에서 한자를 새로 만들어내어 자신의 이름으로 정한 여인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아시는지?

 

이렇듯, 이 책은 우리 독자들이 지금껏 모르고 있던 인물들, 모르고 있던 사실들이 담뿍 들어있는 책이다. 그만큼 특이하다. 다른 중국역사를 다룬 책, 또는 중국 인물들을 다룬 책들과는 차별성이 있다. 그러나 더 가치가 있는 것은 그런 인물들을 발굴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저자의 기억을 되살리는 자세가 특이하다.

 

기억과 기록

 

왜 저자는 책의 제목을 <중국역사가 기억하는 비범한 여성들>이라고 했을까? ‘기록이 아니라, ‘기억’. 뭔가 뜻이 있으리라!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기록이라는 말 대신에 기억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애썼다.

 

기억기록의 차이가 무엇일까?

대개의 경우 기록에 의지하여 기억을 되살리는 것이니. 기억은 큰 개념(합집합)이요 기록은 작은 개념(부분집합)이다. 따라서 기억은 총체이고, 기록은 그중의 일부분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먼저 기록을 충실하게 따져봄으로서 기억을 되살리고, 그 다음에 기록에 없는 부분을 저자는 저자의 방식대로 어떤 기준에 의거하여 복원하지 않았을까?

그런 나의 추론은 저자의 글 <글을 마치면서>에 의해 증명되었다.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무미건조한 서술식을 피해 이야기를 엮는 것이 이해와 재미를 돕는데 효과적이라 생각되었다. 그런 이유로 책의 내용에 필자의 주관적인 부분이 들어간 것은 부인할 수 없다.>(274)

 

또한 저자는 덧붙인다.

<같은 여자로서 그녀들의 입장이 되었을 때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과 고민도 해 보았다.>(274)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상상을 충분하게 읽을 수 있었고, 또한 거기에 스며있는 고민의 흔적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저자가 역사적 고증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먼저 기록 - 역사적 고증-에 충실한 다음에 기억을 복원하기 위한 작업을 충실하게 했다는 것을 글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가 인용한 저작물들

 

저자는 이 책에 수록된 인물들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많은 자료들을 섭렵하고 있다.

저자가 섭렵한 자료에는 비단 사료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고전의 저작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저자가 우리에게 전거로 들고 있는 자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기. 국어, 좌전, 제자, 묵자, 장자, 맹자, 한비자, 한서, 자치통감,

심지어 고려 시대에 편찬된 명심보감에서도 반소를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91)

 

기록의 한계 또는 해석의 한계

 

그렇게 인물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가운데, 저자는 기록이란 것의 한계를 뚜렷하게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하여 회복하여야 할 기억이 기록에만 의존할 때에 얼마나 미흡하게 되는지를 사례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데, 예를 들어보자면, ‘진시황 배후의 여상인인 과부 청이다.

 

저자는 <사기, 화식열전>에 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고 먼저 소개하고 있다.

<진시황은 청을 정부(貞婦)로 인정해 정중하게 대했으며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를 지었다.>(39)

 

<위의 기록에서 정부의 뜻을 일반적으로 지조가 굳센 여인이라고 해석한다.>(39)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한 다른 해석도 소개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청이 무녀(巫女)라는 설이 있다. 사기에 기록된 진시황은 청을 정부(貞婦)로 인정해라는 대목에서 절개를 지킨 여인의 뜻도 있지만 점치는 여인의 의미도 있다.>(41)

 

그러니 기록에 의지해 한 인물을 기억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기록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하며, 부족하기 마련인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렇게 기록을 살려내, 한 인물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려고 애쓴 저자의 수고가 고맙다.

 

그래서 이 책, 믿을만하다.

 

저자가 말한 바와 같이 <남성 위인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고 희미한 기록들이지만 그녀들의 일대기는 ..>(5)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사료의 부족함을 어떻게 보충하고 채워나갔나 하는 데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차지한 역사의 공간은 극히 제한적이라 자연 사료가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데, 그 부족함을 저자는 어떻게 채워나갔을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기억을 되살리는데 과거의 사료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일단 많은 사료들을 인용해 그 인물들을 그려낸다. 그 다음에 사료뿐만 아니라, 각종 저술에서 언급된 인물들의 면면도 살펴보면서, 사료에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해 나간다.

 

게다가 그들을 과거에만 묶어두지 않는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이나 유물의 사진을 함께 실어 그들이 현재 어떻게 평가받고 있는지도 아울러 언급하고 있으니, 그 기억, 참으로 생생하기까지 하다. 해서 이 책은 실로 새롭다, 특이하고 내용은 놀랍기까지 하다.

 

 

 

이러한 저자의 노력을 살펴본 결과, 우리에게 생소한 중국의 인물들, 그것도 여성들을 우리에게 소개하는데 있어, 저자가 얼마나 열과 성을 가지고 접근했나를 알 수 있다는 데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고, 그래서 이 책은 믿고 읽을만하다.

 

 

 

또한 저자는 친절하기까지 하다

 

저자는 혹시 중국 역사에 문외한들이 이 책을 잡으면서 어려운 용어나 배경이 되는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이야기에 흥미를 잃어버릴까봐, 그들을 위한 여러 장치를 해 놓았다.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그런 독자들을 위한 해설을 삽입하여 놓은 것이 그 첫째이고, 풍부한 사진 자료들을 삽입하여 시각적으로도 이해하기 쉽게 한 것이 둘째이다.

 

참고로

 

이 서평을 쓰면서 서론에 몇가지 언급한 것이 있다.

우리 독자들이 흔히 들어보지 못한 인물을 예시하느라, 중국 최초로 황후란 타이틀을 얻은 인물은? 그리고 중국 정사에 기록된 단독으로 기록된 여장군은 누구인지 물었다. 그리고 중국 글자인 한자(漢字), 그 중에서 한자를 새로 만들어내어 자신의 이름으로 정한 여인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물었는데,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게 됐겠지만, 그 답은 이렇다.

 

중국 최초로 황후란 타이틀을 얻은 인물은? 유방의 부인 여치(52)

중국 정사에 기록된 단독으로 기록된 여장군은? 진양옥( 263쪽 이하)

 

중국 글자인 한자(漢字), 그 중에서 한자를 새로 만들어내어 자신의 이름으로 정한 여인이 있는데, 그게 누구인지? 바로 측천무후이다. (144)

 

 

 

<일부 사람들은 무조(武 )를 (측천무후의) 본명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그녀가 황제가 될 무렵 조()라는 한자를 새로 만들어내어 자신의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이 신생 한자에는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천하를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몇가지 더!

 

중국에서는 명절인 설이 되면 집집마다 복(福) 자가 적힌 네모난 종이를 붙이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 희한하게도 복 자를 거꾸로 하여 붙인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그 유래에 대하여는 이 책의 257쪽을 살펴볼 일이다.

 

주원장이 싫어하는 글자가 있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과연 그 것이 사실일까?

주원장은 황제가 되기 이전에 한 때 승려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황제가 된 후에 광(), (禿), () 자를 싫어하여 그 글자들을 쓰지 못하게 했다는데, 그게 사실일까?

이 책에서는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는 독자는 이 책의 256쪽을 살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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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친구들 1
줄리언 반스 지음, 한유주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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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줄리언 반스는 똑똑하다.

 

이 소설에서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그 이름은 아서와 조지. 서양사람들이니 이름이 길다. 정확한 이름을 적어보자면, 아서는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 조지는 '조지 어니스트 톰슨 에들지' (George Ernest Thompson Edalji)(286)이다. 둘 다 실존인물이다. 그러니 작가 줄리언 반스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실제 사건을 소설화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 호흡이 길다. 그래서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야 한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읽었다. 하나하나 작가의 숨소리까지 경청하면서 차분하게 읽었다. 그렇게 해야 읽는 맛이 나는 소설이다. 이 책의 내용은 실제 사건인만큼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으니, 이제 작가가 어떤 식으로 그것을 형상화 할 것인지, 그게 바로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되겠다.

 

그가 구사하는 소설 기법들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설의 줄거리는 생략한다.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아직 그들은 친구가 아니다. 만나지도 않았다

 

소설의 주인공인 두 사람 - 언제 친구가 될지 모르나, 아직까지는 서로 모르니 친구가 아니다 - 이 등장하는데, 각각 따로 등장한다. ‘따로라는 말에 걸맞게 작가는 그 상황을 각각의 처소에서 따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예컨대 '아서'라는 타이틀로 구분하여 아서의 이야기를 진행하고, 또 '조지'라는 타이틀 아래 조지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식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진행되는 각자의 이야기를 얼른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서술하다 보니, 독자들은 이런 조바심을 간직한 채 책을 읽게 된다.

<언제 '아서 &조지'라는 타이틀이 등장하지? 그래야 이 친구들이 만날 수 잇을 것 아닌가?>

 

그런데 여간해서 그 고대하는 타이틀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게 바로 독자들을 감질나게 하는 방법이 아닌가? 두 친구가 조우하기를 학수고대하며 독자들은 기대하고 있는데, 그 날이 오기를, 아서와 조지가 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등장하기를 염원하게 만드는 그 기법이 바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기법인가 보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우선 1권을 읽었다.

 

그러면 두 친구는 언제 조우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스포일러가 될 듯하니 그냥 넘어가련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서또는 조지로만 등장하던 내용에 드디어 변화가 보인다 

바로 147쪽이다. 거기 타이틀이 아서& 조지로 되어 있다. 드디어 아서와 조지가 만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잠깐만! 아직 둘 사이에 만나야 할 어떤 계기가 없었다. 둘은 각자의 처소에서 그저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이니, 아직 둘은 만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 만난다면? 스토리에 커다란 균열이 생길 뿐이다. 그렇다. 그런 나의 생각이 맞았다. ‘아서& 조지라는 타이틀 아래 진행된 이야기에 둘의 만남은 없다.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이 타이틀 하에 진행된 이야기를 통하여 둘은 만난다는 것이리라.

그게 무얼까?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거기에 일단, 표를 해주고 읽어가자. 포스트잇을 붙여 놓아도 좋을 듯하다. 거기 무언가 힌트가 있다!

 

사건이 벌어진다?, 아니 이것은 사건이 아닌가보다.

 

이 소설에서 드디어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게 아서와 조지를 넘나들면서 각자 인물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부모님은 평안하신지, 마치 안부를 묻고 다니던 이야기꾼처럼 행세하던 줄리언 반스, 자세를 고쳐 잡고 꺼낸 이야기가 바로 조지와 그의 가족들이 괴롭힘을 당하는 사건이다. 영문도 모른 채 그와 그의 가족이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괴롭힘의 주체를 알 수 없다. 조지나 그 가족들에게도, 독자에게도 어떠한 힌트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괴롭히던 그 사건이 일부의 마지막에서 갑자기 사라진다. 이렇게!

<하루가 지난다. 일주일이 지난다. 한 달이 지난다. 두 달이 지난다. 괴롭힘이 멈춘다. 괴롭힘이 중지되었다.> (98)

 

그러나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괴롭힘의 시작이다. 작가는 독자들을 그렇게, 그런 식으로 괴롭힌다.

아니, 이렇게 사건이 마무리 되는거야? 그냥 흐지부지 되는 거라면 굳이 왜 그런 사건을 발생시키고, 진행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뚝, 하고 끝을 내는거야. 이게 뭐야?’하는 의아함이 머리에 메아리치기 시작하니, 어찌 괴롭지 않을까?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는 제 2장으로 넘어간다. 2장의 타이틀은 <결말을 동반한 시작>이다.

그렇게 독자들을 한껏 기대에 부풀게 한 다음에 슬그머니 한 사건을 언급한다. 바로 인근 마을의 가축들이 공격을 받아 죽어가는 사건.

 

누구는 태평연월을 구가하고 누구는 고생한다. 친구 맞아?

 

이어지는 제 2장에서 작가는 여간해서 그 이빨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조지도 아서도 태평연월을 읊는다. 나름대로 고생은 하지만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된다. 아서는 작가로 의사로서 명성을 쌓게 되고, 조지도 사무변호사로 안착을 한다. ‘이제 그들이 제자리를 잡았으니 그 이야기는 그 정도로 족하다. ‘이제 제발 사건을 들려다오라고 독자들이 아우성 칠 때가 되었음을 아는 줄리언 반스, 드디어 이빨을 드러낸다.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아까 포스트잇을 붙여놓기를 권한 그 장면 기억하는지?

그 장면이 공연히 있었던 게 아니다. 드디어 시련이 시작된다, 조지에게!

 

어떤 사건인가? 공식적으로는 이렇다. 사건의 결말까지 포함하여 말하자면, “징역 7년 언도. 웨얼리의 가축 살해사건. 범인은 동요하지 않았다.”(293)는 것이다. 조지 어니스트 톰슨 에들지가 그 사건의 피고가 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조지에게 세월은 인고의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제목인 <용감한 친구들> 중 한 명인 아서는 그저 꿈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부인이 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그야말로 태평연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조지와 만나 용감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나? 한 쪽 친구는 감옥에 갇혀 고생을 하고 있는데, 다른 한 쪽 친구는 그렇게 태평으로 지내고 있으니, '이거 친구 맞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러나? 아직 작가인 줄리언 반스는 독자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둘을 만나게 해서 친구로 지내게 할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이 궁금한 분들에게 이 소설 제 2권이 마련되어 있다!

 

아 참, 깜박할 뻔했다.

1권 마지막에 줄리언 반스, 한마디 잊지 않고 무언가 말했다. 409쪽이다. 그나마 말해주니, 무척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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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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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봐야 할 생각들, 그리고 지녀야 할 무기들

 

무엇을, 어떻게 생각할까?

 

누군가는 말한다. 결코 모난 돌이 되지 말라고, 그저 둥글둥글하게 살라고. 그러니 제발 아무 생각없이 남이 생각하는 대로, 남이 행동하는 대로 그 뒤만 따라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누군가는 말한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생각없는 백성은 죽은 것이다. 그러니 제발 생각좀 하고 살아라...

 

그래서 혹자는 생각해 보려고 할 것이다. 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가 맨 먼저 앞에 놓인 걸림돌이다. 대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그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그 것에 대한 속 시원한 안내서가 바로 이 책, <생각해봤어?>이다.

물론 이 제목이 형태는 과거형이다. 과거에 그런 생각을 해 봤냐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제목을 대하면 주눅이 들지도 모른다. , 한번도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과거에 설령 한 번도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할지라도, 걱정- 이것도 생각인가? - 하지 말지니, 이 책을 읽으면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그 무엇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선명하게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기에그런 염려는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정도면 이 책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짐작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이렇게 세 분이 처음으로 같이 쓴 책이라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다음 몇가지 나를 생각하게 만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더듬어 볼 기회가 되었다. 이 책은 나에게 다음의 네 가지 방향에서 '그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었다,.아마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된다.

 

첫째, 우물안 개구리 격으로 전혀 그런데까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있다.

 

둘째, 뭘 알아야 생각하고 말고가 있지, 대체 뭐 자세한 내막을 알아야 생각을 하고말고가 있지?

 

정보 접근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나에게는 귀한 정보들이 들어있다.

 

셋째, 내 앞에 코가 석자인데, 사회 돌아가는 형편에 생각이 미치나요?

그런 나에게, 그런 독자들에게 누군가 생각거리를 짚어주니, 얼마나 좋은가?

 

그마저도 아니라면 이런 카타르시스라도!

거기에서 나오는 촌철살인 멘트 하나.

 

: '' 누리당, 정말 세요

: 달도 차면 기울고 열흘 붉은 꽃은 없는 겁니다.

: 그런데 이 꽃은 365일 붉어요.

: 조화라 그래요...... (345) 이런 촌철살인을 어디 가서 들어볼 수 있을까?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생각이란 무기하나씩

 

그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에 수록된 내용들이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만 하는 주제들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데, 적어도 이정도만은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전후사정을 꿰뚫고 있어야만, 야바위꾼들이 설쳐대는 이 사대에 허튼 소리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저자들이 말한 바 삶에 필요한 무기라고 하는 것이 백번 맞다. 그런 야바위꾼들이 설쳐대는 이 사대에 우리들이 휘둘리지 않고 확실하게 주관을 잡고 살아가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고, 또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방향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이런 말도 한다.

답이 분명한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바라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앞서 가는 사람들도 새롭게 바라봐야만 하는 문제가 있는데, 보통사람인 독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이 책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좋아질 것이라는 저자들의 주장, 거기에 동의한다.

 

특히 소통과 공감이 이 나라에 살아나기를

 

여기 가슴에 특히 와 닿은 말은 의외로 서문격인 <책을 펴내며>에 들어있다.

 

<이 책의 내용이 다소 정밀하지 않을 수 있고, 읽은 이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소통과 공감은 머리가 똑 같아지는게 아니라, 함께 즐거워하는 마음 혹은 아파하는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5)

 

그런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 비단 이 책의 편집자만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리더의 자리에서 한자리 하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런 생각 뼈저리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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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영, 삶을 풍요롭게 가꿔라 - 임어당이 극찬한 역대 최고의 잠언집
장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윽한 꿈속을 잠시 거닐었네

 

<유몽영(幽夢影)>이란?

 

이 책은 청나라의 장조가 지은 잠언 성격의 글이다. 먼저 책의 제목인 유몽영의 뜻을 살펴보자. 책의 제목의 뜻을 알고 읽는다면 그 글의 의미가 더욱더 새롭게 다가올 것이니 말이다.

 

그윽한 꿈의 그림자라는 의미이다.(20)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이 책의 209칙을 읽어보자.

 

能閒世人之所忙者, 方能忙世人之所閒 (능한세인지소망자, 방능망세인지소한)

 

능히 세상 사람이 바삐 여기는 것을 등한히 하는 자만이 바야흐로 세상 사람이 등한히 여기는 것을 바삐 할 수 있다.

 

장조는 209칙에서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사는 비결을 언급하고 있다. 세인과 반대로 한()과 망()을 즐기라고 주문한 게 그 것이다. (259)

 

이렇게 세상 사람들과는 반대로 바쁨과 한가로움을 즐기라고 하는 것이 이 책의 지은이인 장조의 가르침이고, 권면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에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면서 하나라도 빠지지 않게 속속들이 일어야지 하는 노심초사 같은 것, 하지 않는 것도 관건이다. 그저 하나 하나 읽어가면서 글을 즐기고, 글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의미를 음미하며 가는 것이다.

 

역자의 공로

 

이 책은 잠언 성격의 글이다. 해서 짤막 짤막한 글 여러편 으로 이루어 졌는데, 우리가 접하고 있는 책은 역자인 신동준의 번역과 해설이 덧붙여져 나온 책이다. 그런데 역자는 원래의 책에 두 가지를 덧붙였다.

 

그 하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유몽영과 유몽속영을 모두 합친 305칙에 대해 각 칙 마다 4자성어로 된 제목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은 제목만 봐도 해당구절의 내용을 곧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30)

 

요즘 시대의 독자들은 한문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 제목을 붙인 것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지 모르나, 역자가 그 내용을 요약하여 4자로 요약한 것은 보통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그 문장 전체를 읽지 않더라도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다는 점이 그 첫 번째 장점이며, 두 번 째로는 그 문장을 읽고 나중에 기억할 때에 아주 요긴하다는 것이다. 말은 길면 길수록 기억하기 어려워지는 법, 그러니 요약한 4자가 기억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할 것이다.

 

이 책은 역자의 수고로 다시 태어났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역자의 수고를 거쳐 이 책은 새로운 책으로 태어났다는 점이다.

이 책 자체는 매우 간단한 글로 이루어졌다. 간단하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설명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짧은 글 속에 들어있는 내용을 독자 - 중국 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 들로서는 그 심오한 뜻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것들에 대한 보충 설명이 필요한데, 역사가 바로 그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역자가 그저 단순하게 그 글에 등장하는 단어라든가, 배경만 설명하는데서 그쳤다면 이 책, 그렇게 울림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역자는 사계의 권위자이고, 중국의 역사와 문화, 문학에 대해 이미 정평이 나있는 분이 아닌가? 해서 그의 설명은 오히려 원래의 글보다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역자가 그런 설명을 하기 위하여 거론한 사례, 사건 그리고 글들의 제목과 저자들을 나열해보자.

논어, 노자의 도덕경, 장자, 묵자, 관자, 이탁오, 서경, 사마천의 사기, 윤휴, 송시열 등등 헤아릴 수 없다. 서양의 경우는 어떤가? 군주론이 등장하며 질 들뢰즈 또한 등장한다.

 

그러니 그런 식견(?)을 가지고 들여다 보는 글이 어디 우리가 이해하는 것하고 같을 수 있으리요? 해서 우리는 역자의 안내를 따라 이 책을 더욱 깊고 넓게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경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도 훨씬 넓어진다. 예를 들어보자

논어의 태백 22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논어 해석을 접했다.

<우임금에 대해서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음식은 보잘 것 없이 하면서도 귀신에게는 효를 다했고,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도 예복에는 아름다움을 다했고, 궁실은 낮게 지으면서도 논도랑을 정비하는 데에는 온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흠잡을데가 없다.>

 

이런 논어의 태백중 한 구절이 나오게 된 것은 유몽영 135, 오무간연(吾無間然)을 설명하는 가운데 간연(間然)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이다,.

 

간연(間然)은 본문에서 이렇게 등장한다.

吾無間然矣’, 한글로는 오무간연의라고 읽는다.

여기서 저자는 <‘간연은 흠잡는 것을 말한다. 논어 태백에 나온다. 해당구절이다. 우임금에 대해서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음식은 보잘 것 없이 하면서도 귀신에게는 효를 다했고, 의복은 검소하게 입으면서도 예복에는 아름다움을 다했고, 궁실은 낮게 지으면서도 논도랑을 정비하는 데에는 온힘을 다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더 이상 흠잡을데가 없다.>

 

그렇게 역자는 논어의 태백에서 해당구절을 인용 해석해 놓는다.

거기에서 간연(間然)흠잡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럼 논어의 해당구절에 대한 다른 견해는 어떨까?

논어의 해당구절에 대해 상세한 해설을 해 놓은 책은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리라. 그래도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수태는 그의 책 <새번역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間然(간연) : 이 표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으나 어떤 사람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덤이 있을 때 그로 인하여 생기는 거리감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정약용도 간()으로 보고 있다. 공자는 우에 대해서는 그러한 점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수태, 새번역 논어, 226)

그래서 이수태는 우임금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거리감이 없다고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거리감흠잡을 데는 의미가 다르지 않은가? 해서 다른 해석들을 찾아보았다.

주희는 이것을 우임금에 대해서는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라고 해석했다.(<주희가 집주한 논어>, 정후수 역, 218)

 

김학주는 우는 나로서는 비난할 데가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다.(<논어>, 김학주 역주, 137)

 

그렇게 많은 경우 흠잡을 데가 없다, 즉 비난할 데가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 책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바 간연의 의미는 정확하다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내가 다른 <논어>를 읽을 때에는 관심두지 않았던 것을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니, 그런 점에서도 이 책의 가치는 있다 할 것이다.

 

위에 언급한 많은 책들 - 동서양의 고전들-을 역자는 이미 충분히 섭렵하고 이해했으리라. 그러기에 거기에 기반한 지식으로 이 책 <유몽영>에 등장하는 글들에 응용하는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독자들은 동양 고전들을 그저 하나의 구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다른 글 속에서 응용 - 또는 적용- 되어 나타나는가를 볼 수 있으니, 이 책 한권이면 다른 책 몇 권의 공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이 책은

 

그렇게 다른 경전이 여기 이 책에 녹아 들어있는 것을 살피면서 읽는 것도 이 책의 의미있는 독서법이겠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기쁨은 <유몽영>이란 제목의 뜻을 살펴보면서 말한 바와 같다. 세상을 유유자적하게 사는 비결이 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유유자적하며 이 책을 읽어가는 것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이 책중의 글 하나를 더 소개하련다.

 

<조용히 앉아 생각하는 정좌(靜坐)를 하지 않으면 바쁜 행보가 얼마나 빨리 정신을 소진시키는지 알 길이 없고,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범응(泛應)을 당하지 않으면 한가한 행보가 얼마나 참되게 마음을 길러주는지 알 길이 없다. >( 406, 유몽속영 24)

 

여기에서 범응(泛應)이란 말은 여러 방면으로 응수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분주한 꼴을 당하지 않으면 한가한 행보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따라서 한가한 행보,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러한 경지를 깨닫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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