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말했다.
“당신 입가에 고춧가루가 묻어 있어.”
사실 그런 일이 있다면 굳이 말로 할 게 아니라 여자가 슬그머니 자기 손수건으로 K의 입가를 닦아주면 되지 않나? 둘이 나란히 창가 의자에 앉아 있으니 말이다. K도 어지간한 사내다. 미소 띠며 그 고춧가루를 닦아 달라는 뜻으로 얼굴을 여자한테 더 가까이 하면 될 텐데 그러지 않고 손등으로 입가를 쓱 한 번 문질러버리곤 그만이다. 여자가 이번에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고춧가루가 그대로 남아있어.”
마침내 K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춧가루 묻은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야? 정 보기 싫으면 당신이 직접 닦아주면 안 되냐고?”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하면서 여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칠칠치 못하긴!’이란 뒷말을 우물거리는 듯싶다. K는 더 이상 여자 옆에 있고 싶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보하듯 말했다.
“더 앉아있을 거야? 나는 갈 거야. 창가라 추워서 더 앉아 있기도 힘들어.”
여자는 창밖 풍경을 보며 말이 없다. K는 여자가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알았기에, 적지 않게 실망했다. 코트 주머니 속의 자동차 키를 꺼내 들고는 카페의 계산대로 가는 K. 먼저 나가더라도 둘이 마신 찻값은 치러야 예의다.
‘호수 카페’는 넓은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바지에 있어서 데이트 족들의 명소다. 문제는, 영하의 날씨가 보름 넘게 이어지며 호수 물빛이 검푸르다 못해 음산한 납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자가 느닷없이 K한테 ‘입가에 고춧가루’따위의 기분 나쁜 말을 툭 뱉은 것은 이런 음울한 풍경 탓이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카페에 다른 때보다 손님들도 몇 없었다.
‘젠장, 애당초 이런 추운 호숫가 카페를 찾아온 게 잘못이지.’
K는 카페 옆 공터에 주차돼 있는 차 문을 열었다. 시동을 걸어 호숫가를 떠났다. 보름 전 내린 눈이 빙판이 돼 차를 아주 천천히 몰아야 한다. 여자하고의 일로 기분이 상해 호숫가를 훌쩍 떠나고 싶은 K의 심정을 전혀 몰라주는 빙판 길. 이래저래 기분 되게 나쁜 오후다.
한 시간 후.
K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뉴스를 보다가 인터폰 소리를 들었다. 수화기를 들자 대문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K는 얼른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대문이 열리게 했다.
호숫가에서부터 걸어왔는지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언 모습으로 현관에 들어섰다. K는 여자의 가죽코트를 받아들며 여자보다 먼저 서둘러 말했다.
“전화하지 그랬어? 그랬더라면 차를 몰고 태우러 갔을 텐데. …… 아까 미안했어.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더라고.”
“고혈압 환자를 남편으로 둔 내 팔자지.”
자식들이 모두 출가한 탓에 텅 빈 느낌의 단독주택. 모처럼, 오랜만에 젊었을 적 데이트 하던 기분을 내려했던 부부는 다시 적적한 현실로 돌아왔다. 적막한 분위기를 깨듯 여자가 말했다.
“당신 배고프지 않나?”
“응 배고파.”
“조금 기다려.”
여자는 주방에 들어가 라면 두 개를 끓일 채비에 들어갔다. K는 소파에 앉아 다시 TV 뉴스 보기에 집중했는데 여전히 고춧가루 한 점이 입가에 남아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