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집은 1996년에 지은 단독주택이다. 집이 오래 되니 수리할 데가 많아졌는데 대문 잠금장치의 경우는 아예 새로 갈아야 했다. 20년 넘게 눈비를 맞은 탓에 고장 났기 때문이다.
기술자가 그 잠금장치를 떼어내고 새것으로 바꿔 달면서 새 열쇠도 내게 건넸다. 하긴, 잠금장치와 열쇠는 공동운명체였다. 잠금장치를 바꾸면 열쇠도 바뀌어야 했다. 대문의 이전 열쇠가 아무 짝에도 쓸 모 없는 폐품으로 전락한 순간이다.
가장으로서 내가 서두를 일이 생겼다. 우선 철물점에 가 새 열쇠의 복사물을 몇 개 더 만들었다. 그런 뒤 내가 하나 갖고 남은 식구 셋한테 하나씩 건네며 말했다.
“이전 열쇠는 내게 주고 이제부터는 이 새 열쇠로 대문을 열어야 해.”
남은 식구 셋에는 지난봄에 장가가면서 분가한 아들애도 포함돼 있다. 아들애는 옆 동네 아파트에 살면서 한 달에 두어 번 우리 집에 들른다. 그렇게 해서 내 손 안에 이전 대문 열쇠 네 개가 모였다. 이것들을 방치했다가는 실수로 멀쩡한 잠금장치나 망가뜨릴지 모른다. 철저히 폐기해 버리는 일에 나서야 하는데 왠지 망설여졌다. 미련일까? 결국 책상 위에 놓고 기념사진부터 찍었다.
사진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아들애가 단짝 친구와 군대를 같이 갔다 온 일이 떠올랐다. 둘이 한 날 한 시에 해경에 자원입대했는데 훈련을 받은 뒤 각기 다른 부대로 배치돼 2년 가까운 복무를 하고는 제대하는 날 다시 해경본부에서 만나 함께 전역신고를 한 것이다. 이전 대문 열쇠들이 20여 년 전 같은 날 우리 가족들에게 나눠진 뒤 20년이 지난 오늘 다시 이 자리에 그대로 모인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지 않나?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우리 아들애와 친구는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데 2년이, 이전 대문 열쇠들은 20여년이 걸렸다는 시간 차일 것 같았다. 맙소사, 고작 2년에 불과한 인간사에 비해 그 열 배 넘는 20여년이라는 이전 대문 열쇠들의 기나긴 인연!
새삼 놀라운 것은,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하는 세월에도 우리 네 가족 중 한 사람도 이 열쇠들을 잃지 않고 잘 간직해 왔다는 사실이다. 조금씩 성격이 다른 가족들이지만 대문 열쇠를 소중히 여기는 일 같은,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보수적인 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공통됐다는 게 아닌가.
‘그럼 이 열쇠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저런 상념 끝에 폐품으로 버려야 할 것들에 자신이 없어졌다.
20여 년 소지(所持) 기념으로 안방 장롱 서랍에 보관할까? 아니다. 그러다보면 집안이 폐품더미처럼 될 듯싶다. 현재도 별로 쓰일 일도 없이 자리차지나 하는 집 안의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서가에 남은, 우리 애들이 중고등학교 시절에 보던 참고서나 만화책들이 그렇다. 층계 밑 작은 창고 안은 또 어떤가? 눈 내린 날 차바퀴에 걸겠다며 사다 놓은 체인이 20년 넘게 녹슨 채로 있다. 차의 흠집을 해결한다며 사다 놓은 작은 페인트 용기도 여럿이다. 이런 물건들도 정리 못했는데, 이전 열쇠를 보관한다고?
하물며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에 용도 잃은 물건을 보관한다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다. 멀리 내다 버려야 한다.
기념 촬영까지 마친 이전 열쇠 네 개를 애써 외면하고는 TV를 켰다. 국정농단의 최순실이 25년 형을 구형받고는 ‘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는 뉴스 뒷얘기가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