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왜 ‘오랜’이란 수식이 필요한지 이유부터 밝힌다.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만난 때는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다. ‘쯤’이란 표현을 하는 것은 그 시기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4학년 초일 수도 있고 2학년 말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친구나 나나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울 때 만났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만났다기보다는 아버지들끼리 만나는데 우리가 곁에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싶다.
그 때 우리 아버지는 운영하던 제지공장이 망한 뒤 사실상 실직자가 된 처지였다. 당시 흔치 않았던 기와집을 나와 변두리 동네에서 셋방을 사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여름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공지천으로 간 것이다.
공지천 제방에도 '하꼬방'들이 여럿 있었다. 훗날 깨달았는데, 그 때만 해도 6‧25동란이 끝난 지 채 10년이 안 되었으므로 시내는 하꼬방 천지였다.
아버지가 한 하꼬방 앞에 다다라, “자네 있나?”하고 불렀던 듯싶다.
그러자 하꼬방 밖으로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어른 한 분이 나와 두 분은 악수를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길에 서서 나누었다. 하꼬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좁은 데다가, 더운 날씨였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나는 좁은 하꼬방 안에 있는, 내 또래 아이를 보았다. 여위었으나 두 눈이 둥근 얼굴이었다. 어른들이야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 아이와 나는 처음 보는 사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말을 건넸더라면 금세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나나 그 아이나 말이 없는 성격들이라 서로 소 닭 보듯 한 것이다.
어제 내가 그 장면을 얘기하자, 친구 역시 그 소 닭 보듯 했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날 우리 아버지가 친구 아버지를 찾아간 이유도 (정말, 거의 60년 만에 밝혀졌다) 알게 되었다. 두 분은 지방 신문사를 설립하는 문제로 그 날 만났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처럼 친구 아버지도 그즈음 창간호에 실을 원고를 모으고 그랬었는데, 친구와 나의 짐작이지만,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무산되고 만 거다. 6‧25동란이라는 참화의 여파가 여전한 그 즈음 두 분은 비록 작은 도시이지만 언론사를 하나 만들려고 했었다. 당시 두 분의 나이 30대. 포부는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자금이 안 돼 마음고생이 심했을 두 분 어른.
가슴 아프다.
그러다가 2,3년 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국어 산수에다가, 턱걸이 같은 간단한 종목을 시험 본 뒤 춘천중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요즈음 나라를 뒤흔든 청와대의 모 여자와 우리는 같은 학번이다. 참, 묘하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반이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는 특수반이었다. 학교에서 입학 성적순으로 50명을 선정하여 특수반을 만든 것이다. ‘특수반’이라니, 사실 요즈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비교육적인 일이 아닐까?
이 글은 굳이 장르로 말한다면 경수필에 속한다. 심각하지 않게, 편하게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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