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그는 개그맨이다.
서울에서 방영되는 TV에는 안 나오지만 우리 지방의 TV 프로그램에서는 낯을 보인다. ‘웃찾사’ 같은 코미디 프로그램이 없는 지방 TV이라 그가 하는 일은 취재 프로그램에서의 리포터 역할 정도이다. 사실, 그가 다른 일반 리포터와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변이 없을 것 같다. 요즈음 리포터들 중에는 개그맨 못지 않게 재미나게 진행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개그맨이라 인식하는 것은, 방송국 측의 특별한 대우에 근거한다. 그가 등장할 때마다 ‘개그맨 ○○○’라고 작은 글자를 화면 아래에 병기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대우가 없다면 아무도 그를 개그맨이라 고 봐 줄 이유가 없을 듯싶다.
‘개그맨으로 출세하고 싶은 사람’이 여의치 않아서 지방 TV 방송국에 속해서라도 노력하며 지내는 게 아닐까?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그는 딱한 개그맨이다. 인터뷰 취재를 재미나게 진행하려 애쓰지만 억지웃음에 가까워, 딱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많으니 말이다. 나도 모르게 이런 푸념까지 했다.
“저 사람, 라면 값이나 벌까?”
사실 시청자 혼자만의 독백이라 해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지방 TV에서라도 자기 입지를 마련하려 항상 애쓰는 개그맨에게 마음의 격려는 못해 줄망정 모욕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었다. 나는 즉시 반성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나를 감격시켰다.
그와 함께 취재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던 여(女) 아나운서가 개인 사정으로 방송계를 떠난다는 날이다. 그녀의 마지막 등장 화면(생방송이다.)에서, 그가 석별의 마음을 꽃다발에 담아 전하다가 그만 엉엉 우는 게 아닌가. 마치 철부지 아이처럼 말이다. 재미난 덕담으로 이별을 장식하려다가, 섭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며 울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여 아나운서.
개그맨으로서의 본분을 잊고 울고 있는 그를 달래려고 애쓰는 중에 프로그램이 끝났다.
나는 감격했다. 글쎄, 개그맨이라는 사내가 포복절도하게 웃겨서 감격한 게 아니라 애들처럼 우는 모습에 감격했다니 말도 안 되지만, 여하튼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감격했다.
서울에서 방영되는 TV들마다, 억지웃음을 유발시키려고 개그맨들이 여간 고생하는 게 아니다. 이상한 복장에다가 이상한 분장, 이상한 억양 등, 그래서 나는 그런 프로그램들을 잘 보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지방의 TV에 소속되어 ‘개그맨’으로 활동하는 그를 업신여겼을 게다. 그러나 그가 여 아나운서와 이별할 때 철부지 아이처럼 엉엉 우는 장면을 지켜본 뒤로는 그가 좋아졌다. 얼마나 신선한 울음인가. 각본을 벗어난 울음이 내게 전해주던 그 진한 감동.
여전히 지방 "개그맨"인 그는 아직도 시청자들을 웃기는 데에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나는 정겨운 눈길로 그를 지켜보며 웃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