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순으로 교사 발령을 낸 걸까?

내가 발령받은 곳은 고향 춘천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삼척군 관내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삼척군 관내에서 삼척읍내의 삼척중학교로 2차 발령을 받은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춘천에서 외수 형과 숱한 밤을 소주 마시며 보낸 내가― 알콜중독자처럼 살던 내가 이제는 의젓한 중학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1974년 그즈음에는 주소지가 바뀌면 반드시 새 주소지의 이장님을 찾아뵙고 ‘어느 집으로 전입했다’는 확인 도장부터 받아야 했다.

내 하숙집은 삼척읍 당저리에 있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물어물어 찾아간 당저리 이장님은 머리가 허연 노인이었다. 아까시나무가 많이 들어선 주변 풍경을 보며 나는 이장님께 나를 소개했다.

“박학문 씨 댁에 하숙을 든 이병욱이라 합니다.”

그러자 이장님은 내 직업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긴 박학문 씨 댁은 주로 학교 선생들을 하숙 치는 집이었다.

“그럼, 선생질 하슈?”

하필 선생질이라니. 그냥 선생이라 해도 좋을 텐데.

나는 잠시 얼떨떨했지만 이내 이장님의 질문을 수긍했다.

내가 고향 춘천에서 천 리나 떨어진 삼척까지 짐 꾸려 온 건, 오직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으로는 길바닥에 나앉을 판인 가족들(어머니와 동생들)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고개 수그리며 응답했다,

“네, 맞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오전의 일이다.
어두운 서재를 밝게 하려고 유리창의 브라인드를 올렸다가 소스라쳤다. 유리창 바깥쪽으로 잠자리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잠자리가 유리창에 매달려 있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내가 소스라친 건 까닭이 있다. 나는 현재 30층 되는 아파트의 20층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잠자리라니.
창밖에는 차가운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자리의 처지가 이해가 됐다. 차가운 가을비를 피해 천신만고 끝에 찾은 정처(定處)가 내 서재 유리창 바깥임을.
불현듯 그 광경을 시로 표현하고 싶어졌다. 책상의 컴퓨터를 켜고 시상을 가다듬었다. 한참 만에 시가 나왔다.
‘잠자리 한 마리가
차가운 가을비를 피해
20층 높이
아파트 유리창 밖에
매달려 있었다’
그 이상 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냥 비도 아니고 차가운 가을비를 피해 20층 높이 유리창에 매달린 존재의 처절함이, 시 한 편으로는 절대 부족한 걸까?
명색이 작가라고, 작품집을 세 권이나 낸 내가 어휘 부족에 다다른 걸까?
밤이 되었다.
잠자리는 내 서재 유리창 바깥에 매달린 채로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이다. 그 잠자리가 안 보였다. 내 서재 유리창에서 어딘가로 떠난 것이다. 아니면, 부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잠자리는 미완의 시 한 편
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나도 이 아파트에서 다음 달에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간다. 잠시 이 아파트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잠자리와 나는 진화(進化)의 가지 끝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리곤 헤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잠자리 한 마리가

차가운 가을비를 피해

20층 높이

아파트 유리창 밖에

매달려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과연 세 남자 중 한 사람이 누구냐?

 

실화 장편소설 세 남자의 겨울에서 세 남자란 나와 나의 아버지그리고 이외수를 말한다그런데 독자에 따라서는 나의 아버지 대신 박장호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만하다. ‘의 후배 박장호가 나의 아버지보다 더 많이 소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장호는 사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이외수에게 마침 겨울방학이라 비어 있는 자기네 하숙집 뒷방을 내준 고마운 후배로서 충분하다이 말은 소설 속의 세 남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의 아버지가 ’ 및 이외수와 함께 세 남자 중 한 남자라는 사실은 이 소설의 영광 연탄직매소 사무실에서 벌어진 부자간 대화의 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다른 사람도 아닌 이외수가 대화 중재자로 나섬으로써 비현실이 특징인 나아버지이외수 만남이라는 포복절도할 장면이 탄생하는 것이다소설에서 이 장면은 이렇게 표현된다.

돌이켜보면, 1974년 1월 중순 어느 날 영광 연탄직매소 사무실에서 외수 형의 중재로 부자간 대면이 이뤄진 일은사건이었다비록 부자간 대화는 무산됐지만 그 중재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형이기 때문이다부자는 물론이고 형까지 얼마나 현실부적응이 심한 사람들이던가.

우선 형의 경우다. 2년제 교대를 10년 가까이 다니다가 그만둔 것도 그렇지만산골짜기 분교의 소사로 있다가 그만두고는 이 추운 겨울에 얇은 나일론 잠바 차림으로 춘천에 올라와 초라한 연탄직매소 사무실 신세를 지고 있으니… 같은 교대 동기들이 일선 초등학교에서 신참교사로서 한창 활약하고 있을 텐데 그런 처지라니 얼마나 현실부적응이 심한가.

우리 아버지도 만만치 않았다요즈음으로 치자면 수십 억대의 제지공장을 부도낸 것을 시작해서예총 일을 하면서 김유정 문인비 건립 자금을 대느라 물려받은 산 하나를 헐값에 팔아버리고도 대우받지 못한 채 현재는 초라한 연탄직매소의 사장을 하는 신세연탄직매소 운영마저 뜻대로 되지 않아 그 먼 태백산맥의 상동까지 오가며 새 사업을 벌이려는 모습이지만 문제는어머니를 포함해서 식구 중 누구 하나 그 새 사업이 잘 될 거라 믿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지천명 나이에 다다른 아버지의 현실 부적응이라니!

나는 또 어떤가대 작가가 될 꿈에 부풀어 다니는 대학을 업신여기며 학점 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두 과목이나 해결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고도과연 졸업사정회를 통과했을까?’하는 불안이 수시로 엄습하는 처지뒤늦게 자신의 현실 적응 능력에 자신감을 완전히 잃은 모습이다.

이런 세 사람이 한겨울에 자리를 함께했다는 건사건이 아닐까.

 

 

결정적인 사실은 이 소설의 결말에서다.

와 나의 아버지’ 그리고 이외수에 대한 언급만으로 결말을 맺는 것이다.

 

한편임해중 기자(네이버 채널 뉴스1)가 쓴신간 세 남자의 겨울 출시라는 짧은 소개 글의 한 줄이 세 남자가 누군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설에선 문학을 사랑했던 세 남자가 등장한다꿈과 현실 사이에 방황하다 떠난 남자꿈을 이룬 남자현실과 타협했지만 꿈을 버리진 않았던 남자 얘기를 시간대를 자연스럽게 넘나들며 서술한다. 여기서

꿈과 현실 사이에 방황하다 떠난 남자는 나의 아버지며,

꿈을 이룬 남자는 이외수이며

현실과 타협했지만 꿈을 버리진 않았던 남자는 를 말한다.

 

이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세 남자 중 한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어떤 독자가 나는 박장호라고 생각합니다.’하며 주장을 물리지 않는다면 작가로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작품이 일단 작가의 품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외수 형이 교대를 자퇴한 때가 1972년 8월 말이다. 자퇴하고서 인제로 내려가 취직한 직장이 객골 분교. 가는 찻길도 없어 개울을 따라 20 리 이상 걸어가야 나타나는 조그만 분교인데 그 분교의 소사 겸 임시교사가 형의 직책이었다.

한창 젊은 27살 나이에 하늘마저 좁은 분교에 틀어박혀 지내자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갑갑하다 못해 절망감에 한이 다 맺혔을 듯싶다.


그러던 어느 날 엽서를 구해 한 면을 볼펜 글씨로 빼곡하게 채운 뒤 춘천의 내게 보냈다. 1972년 9월 16일이란 날짜를 밝힌 엽서의 처음은 이렇다.


’추석은 이곳 운동회요.

승탁 군과 같이 면회 좀 해 주기 비오.

동인지 건도 의논 겸.‘


형이 굳이 ’방문‘이란 말 대신 ’면회‘란 말을 사용한 게 이해가 된다. 형에게 그 좁고 갑갑한 객골 분교는 감옥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승탁 군‘은 춘고 다닐 때부터의 내 친구 ’박승탁‘을 가리킨다. 형이 나와 친해지면서 자연스레 승탁이하고도 친해진 것.

그 ’박승탁‘이가 세상을 뜬 때가 그로부터 20여 년 지난 1995년 경이다. 확실히 적지 못하고 ’-경‘이라 한 건 까닭이 있다. 승탁이가 나를 의도적으로 멀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장례도 알 수 없었다.

기가 막힌 우정의 끝 장면이다. 40대 중반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뜬 박승탁 얘기만으로도 나는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다.


외수 형은 자신과 나, 승탁이 해서 셋이 함께 동인지를 내자는 의견을 이 엽서에서 밝힌다. 승탁이도 소설을 썼기 때문이다.

“강원대 행정과를 다니던 승탁이가 소설을 썼다고?”

하며 놀랄 동기들이 적지 않을 게다. 하지만 사실이다. 춘고 동기이면서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승탁이와 내가 1972년 그 해 여름에 급격히 친해진 건 같은 소설을 쓴다는 공감에서였다.


외수 형은 이 엽서를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춘천에서 유일하게 나와 언어가 통했던 당신과 승탁 군. 아, 말도 못하게 보고싶소. 빌어먹을, 이제 나는 산에 갇히고… 아무 말도 못하오.


나는 이 엽서를 받고, 그냥 내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말았다. 날마다 학교(강대)에 가서 강의를 받아야 하는 학생 신분에 어딜 간단 말인가?

정작 강의실에 앉으면 강의가 따분해서 졸거나 몽상하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으면서.


춘천에서 자신을 면회하러 올 친구들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형이 결국 한 달여 뒤인 10월 21일, 나를 보러 춘천에 왔다. 그런 형을 따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선다.

그 길로 근화동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 인제 가는 버스를 탄다. 우리 집 식구 누구도 그런 나의 잠적(?)을 몰랐다. 사실상 집안 형편이 파산지경에 다다라서 한창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가정환경에 문제가 있었던 형과 나. 우리는 친형제처럼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