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춘심산촌의 밭농사는‘봄에 밭 갈고 씨 뿌리면서’시작되는 게 아니다. 봄에, 지난겨울 면사무소에서 신청했던 퇴비부터 공급받은 뒤에야 시작된다. 퇴비포대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 밭 어귀에 나타나는 3월 중순 어느 날이 그 해 밭농사의 시작 날이다.
여기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밭 가장자리의 관정도 개통시켜야 한다. 관정이란‘지하수를 이용하려고 만든, 둘레가 대롱모양으로 된 우물’이다. 밭농사를 지으려면‘물’이 필수적이다. 밭 가까이 하천이 흐른다면 ‘물’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천생 관정 하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평시에 관정은 지름 1‧5m쯤 되는 둥근 철판 덮개로 덮여 있다. 값비싼 모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무심은, 관정 모터야말로 춘심산촌 밭의 심장이라 여긴다. 지하 깊숙이 있는 물을 지상의 밭으로 뽑아 올려 작물들이 잘 자라게 하는 동력원(動力源)이기 때문이다. 무심이 그 모터와‘지하에서 올라온 관(管)’을 서로 이은 뒤 모터에 전기를 넣으면‘위이잉!’하는 모터 가동소리와 함께 지하수가 지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지하수는 겨우내 지하 깊이 고여 있던 물이라 쉬 나오지 않는다. 그런 때를 대비해 한 주전자 물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모터를 작동시킴과 동시에 그 물을 부어서, 지하수가 지상으로 잘 나오도록 돕는 것이다. 설명하자니 길었는데 짧게 말하자면 ‘마중물을 붓는 일’이다.
‘마중물’
얼마나 정겨운 우리말인가! 지상의 물이 땅속 지하수한테 ‘어서 밖으로 나오도록 마중 간다’는 뜻이니, 전직이 국어교사였던 무심은 이른 봄 관정 물 개통 작업 때마다‘마중물’ 어휘의 맛에 잠시 시름을 잊는다.
아직도 땅속에서 졸고 있는 지하수한테 지상의 물이 손수 내려가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나오셔야죠.’마중나간 모습. 생명체가 아닌 ‘물’들끼리 오가는 정겨운 상봉 장면이러니.
무심네 관정은 그 깊이가 60m다. 대개의 관정들이 20∼30m 정도 깊이이므로 무심네 관정은 별나게 깊은 편이다. 공사할 때 땅 밑으로 박은 관(管)이 최소한 암반층 하나는 뚫고 내려갔다. 그래서일 것이다, 그 물이 아주 차갑고 맑다. 밭의 작물들에 뿌려주는 게 원래 목적이지만 무심이 목마를 때는 마시기도 하고, 온몸이 땀에 젖어 씻을 때에도 사용한다. 그럴 때 시원함이란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무심네 관정은 8년 전 무심 내외가 농사를 시작하기 한 달 전, 지하수 개발업자한테 맡겨 공사했다. 공사비가‘관정 깊이를 20∼30m 정도’로 한 것보다 두 배나 들었다. 무심이 거금 지출을 무릅쓰고 관정을 그리 깊이 판 것은 농사일을 잘 아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기 때문이다. 친구가 지하수 개발업자를 무심한테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관정을 깊이 파라고. 그래야 가뭄이 와도 물 걱정 없을 뿐만 아니라‘지하수 물맛이 좋은 집’으로 소문도 나지. 마치 약수 나오는 명소처럼 되는 거지.”
친구 말대로 이듬해 여름 몹시 가물어서 다른 집 관정들은 물이 잘 안 나온다고 걱정들 많았지만 무심네 관정은 그렇지 않았다. 다소 양이 줄어들긴 했지만 큰 걱정 없이 물이 잘 나왔다. 하지만‘지하수 물맛이 좋은 집’으로 소문난 것 같지는 않다. 외진 골짜기 춘심산촌이니 그럴 만하고, 솔직히, 그런 소문이 나서 낯선 사람들 발길이 잦아지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저 무심 내외가 조용히 농사지으며 세상 살아가는 시름을 조금이라도 덜면 그만이다.
요즈음 들어 햇살이 화창해졌다. 겨울이 끝나가는 것이다.
한 열흘 후 봄 햇살이 온 산하에 넘쳐나는 날 춘심산촌에 갈 것이다. 십자드라이브와 몽키렌치를 찾아 들고서 관정에 다가가, 철판 덮개를 연 뒤 모터와 관을 다시 잇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럴 때 아내는 주전자 물을 준비해야 한다. 마중물이다.
아직도 땅속에서 졸고 있는 지하수한테 그 마중물이 내려가 말붙일 것이다.
“뭐하시는 겁니까? 어서 지상으로 나오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