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남’이란 서로 모습을 보이면서 이뤄지는 게 아닌가. 혹 전화 통화나 이메일로 첫 인사를 건네면서‘만남이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제대로 된 만남은 못된다. ‘만남이 시작됐다’는 표현 자체에서 알 수 있듯 ‘만남’의 완성을 위한 출발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만남의 시작은 어느 시점에 서로 모습을 보이면서 소멸될 게다.
우리 내외와 ‘그분’과의 만남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처음에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로써 선보였다. 2012년 여름 어느 날, 우리 내외가 땀 흘려 농사짓는 고구마 밭을 ‘일시에 폭탄 맞은 듯 쑥밭으로 만들어버린 흔적’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 짓인지 몰라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한테 그 요절난 고구마 밭을 보였더니 이렇게 말씀했다.
“멧돼지 짓이네. 그러잖아도 이 지역은 산골짜기라 산짐승들이 자주 내려온다고 알려드리려 했는데…. 우리처럼 상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고구마 농사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산짐승들도 사람들이 고구마를 맛있어 하면 똑같이 맛있어 하니까 말입니다. 수박 참외 같은 농사를 이 동네에서 엄두내지 못하는 게 그 때문이죠.” “그럼 여기는 뭘 농사지어야 합니까?”
“옥수수 농사가 무난하죠. 그놈들이 옥수수를 따다 쪄 먹을 것도 아니니 밭의 옥수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내외는 이듬해 봄, 밭에다 옥수수 모종을 사다 심었다. 고추도 겸해서 심었다. 그랬더니 밭에 별일 없이 그 해가 갔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가을 어느 날 우리 밭 바로 아래 집에 들러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멧돼지다!”
얘기 나누다 말고 뛰쳐나와 그 쪽을 봤더니 우리 밭 가까운 산 쪽으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그분' 이 보였다. 50미터가 넘는 거리에, 엉덩이만 보이는지라 그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못됐다. 하지만 멧돼지인 것은 분명했다. 흑갈색 털빛이며 돼지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이며. 그분은 우리 밭에 먹을 작물이 없나 해서 옥수수 밭에 접근했다가 동네 사람이 소리치자 기겁해 달아난 것이다.
가슴이 벌벌 떨린다는 아내 옆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산으로 달아나다니,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도덕적 관념이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덕적 관념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사람)과 맞닥뜨렸다는 두려움에 달아난 거겠지.’
여하튼 결론은 그렇게 내렸지만 그분의 뒤뚱거리며 산속으로 피하는 모습 자체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뒤 달아나는 행동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냥 사람도 아니다. 엉덩이가 무거워 바삐 움직일 때마다 뒤뚱거리는 중년 느낌의 사람이다.
그 후 몇 년 간 그분이 우리 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고라니는 간간이 옥수수 밭에 숨어 있다가 달아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고라니는 옥수수를 먹으러 숨어든다기보다 산에서 지내다가 답답해서 옥수수 밭으로 바람 쐬러 나오는 느낌이었다. 옥수수도 별로 훼손되지 않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지난 주‘그분’이 느닷없이 옥수수 밭을 휘젓고 간 것이다.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밭을 폭격 맞은 듯 마구 휘젓고 특히 여물지도 못한 옥수수들까지 씹었다 만 꼴로 방치하고 한 행태로 봐 분명히 그분이었다. 옥수수는 그분이 잘 건드리지 않는다더니 어쩐 일일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리 내외는 하는 수 없이 울타리 망을 농협에서 사다가 옥수수 밭에 쳐야 했다. 나름대로 공을 들여 종일 망을 쳤는데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비닐 울타리 망으로 감당할 수 있을까? 저돌적으로 울타리에 달려든다면 금세 찢어지거나 무너질 텐데.’
그건 그렇고 한 번도 제대로 서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우리 내외와 그분. 이런 경우는 수많은‘만남’중 어떤 만남에 속할까?
그리고 참, 이번의 그분이 몇 년 전의 그분과 같은 존재일까 다른 존재일까? 밭의 피해는 피해이고 이제는 의문까지 더해지는 신비스런 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