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캘리그라퍼 강상규님한테서 ‘춘심산촌’ 붓글씨를 받는 순간 무심은 그 멋짐에 반했다. 그 까닭을 이제 분석해봤다.
첫째, 네 글자의 전체모임이 황금비율을 생각나게 할 만큼 편안한 구도였다. 우리는 가로로 놓인 두 눈으로 사물을 보며 그렇기에 가로 방향으로 놓인 직사각형, 정확히는 세로 길이와 가로 길이가 1:1.618 비율로 된 황금비율 형태를 아주 편안하게 여긴다. 참고로 명함, 신용카드, TV 화면 등이 이 황금비율을 따랐다.
둘째, ‘춘심산촌’의 낱글자들 모두 울림소리 받침을 갖고 있었다. ‘춘’의 ㄴ, ‘심’의 ㅁ, ‘산’의 ㄴ, ‘촌’의 ㄴ이 모두 울림소리라 입으로 발음할 때 저절로 리드미컬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춘심산촌’에 쓰인 붓글씨들의 ‘살아 있음’이다. 네 글자 중 세 글자나 받침이 ㄴ이되 그 중 하나도 같은 모양의 ㄴ은 없었다. 첫 글자 ‘춘’의 ㄴ이 별나게 크게 쓰여서 전체의 균형을 깨뜨려버릴 것 같았지만 웬걸, 셋째 글자 ‘산’과 넷째 글자 ‘촌’에서 비록 작지만 잇달아 쓴 ‘ㄴ’들의 중첩으로 무게 균형을 이루었다. 변화를 주되 균형을 잃지 않은 기막힌 배치다. 하긴 ‘ㅊ’도 두 번 쓰였지만 모양이 전혀 닮지 않았는데‘ㅅ’ 또한 마찬가지다. 사물의‘살아있음’은 변화로 나타난다.
네 글자에 불과한 ‘춘심산촌’이지만 캘리그라피로 쓰인 순간 변화가 주(主)가 되어 봄기운이 만연한 산촌의 정겨움이 구현됐다.
우리 한글은 ‘소리글자’다. 낱글자로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산’이라 썼을 때 무슨 뜻의 ‘산’인지 알 수 없다. ‘물건을 산’인지, ‘나이가 90이 되도록 산’인지, ‘동네에 있는 산’인지 알 수 없는데 만일 한자로‘山’이라 적는다면 그 뜻의 모호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캘리그라피를 ‘소리글자들이 뜻글자들의 고유영역을 넘보는 작업’이라 정의하고 싶다. 캘리그라피 ‘춘심산촌’을 보라. 어울리지 않게 크게 쓴 ‘춘’은 마치 봄날의 부푼 마음 같지 않은가. 그 다음의‘심’을 보자. 앞 글자의 반밖에 안 되게 작게 썼는데 그만큼 소박한 마음처럼 보인다. 첫 글자 ‘춘’에서 마냥 부푼 마음을 두 번째 글자‘심’에서 살그머니 붙잡아 준 게 아닐까.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방종은 금물’이라는 경구를 연상케 한다.
특히‘심’의 받침‘ㅁ’의 아래 획이 삐친 모양은 보는 무심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ㄴ’받침들 속에서 유일한‘ㅁ’이지만 그래도 ‘ㄴ’의 형태를 흉내 내며 전체 조화에 일조하겠다는 마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영어 알파벳으로도 캘리그라피가 이뤄질 게다. 하지만 ‘초중성’을 갖춘 우리 한글에 비해 그 기술이 1/3에 머물지 않을까 싶다. 그러잖아도 한글이 디지털시대를 만나 날개를 얻은 듯 승승장구하는데 이제는 캘리그라피까지 만나면서 날개 하나를 더 달았다는 무심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