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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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두막하면 떠오르는 것은 목가적인 풍경과 푸근하고 인심 좋은 하얀 수염난 아저씨가 우리를 맞아주고 세상 모든 근심을 잊고 그곳에서 한가하게 머무는 이미지가 떠 오른다. 이 책의 제목이나 책 표지에 있는 그림을 보더라도 그런 이미지가 책을 읽으면서 내 뇌리에 각인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과거의 즐거운 경험을 반추하거나 부담없이 읽을 생각으로 집어 들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한 가족이 여행을 떠나고 더 없이 행복한 가족의 단란한 시간을 묘사하고 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작은 사고가 생기고 그 사고가 금새 해결되면서 책에서 잠시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생각되었으나 그 후에 생각지도 못한 연쇄살인범에 의한 딸 아이의 사망이라는 사건이 생긴다. 역설적인 제목이고 추리 소설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마음을 먹고 책을 본격적으로 읽으려 하는 순간 책은 다시 이 모든 사건이 끝이 나고 만다. 추리 소설도 아닌 것이다. 책을 읽은 페이지는 겨우 5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이 소설은 하려고 하는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을 때 뜻하지 않은 전개가 시작되면서 책의 서두에서 읽은 문구가 문듯 떠 오른다. 이 책에는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그 말을 읽을 때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드디어 그 의미가 다가온다.





그저 편안한 소설이라 여겼던 책은 어느덧 종교서적으로 탈바꿈한다. 정확하게는 크리스챤을 위한 동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단순하게 특정 종교인을 위한 책이라거나 특정 종교를 알리기 위한 책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서구로부터 건너와 앞선 문물로 여겨졌던 크리스챤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그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들어 주고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





책에는 깊은 울림이 있다. 억지로 짜내거나 머리로 만들어 낸 우화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영으로 본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솔직히 읽으면서 중간에 이 책이 진정으로 보통 크리스챤들이 읽는 책이 아니라 어딘지 사이비종교 집단에서 전교목적으로 써 져 있는 책이 아닌가 하는 약간의 우려를 가지면서 읽었지만 책 말미에 추천하는 사람의 명단에 우리가 존경하거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의 명단을 보고 안심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얼마나 우스운 행동인지 모른다.





내가 느낀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누군가 권위있는 사람 - 그가 비록 영적으로 의심할 필요없어도 분명히 사람이다 - 에게 의지하여 누가 보지도 않는데 인정을 받으려는 모습이 우습지만 그것이 인간인지라 부끄러워도 받아들였는데 그런 이유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가 기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평소에 어렴풋이 느끼게 있던 것과 많이 흡사해서 좀 더 놀라고 이것이 맞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인간이 만든 제도와 체제와 정치와 경제등에 의해 잘못 왜곡되고 오역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 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판단이 들었다.





인간은 자유 의지라는 것을 갖고 있고 그 자유 의지에 의해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른 선택을 내린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판단을 신의 뜻이라 여기며 신이라는 이름으로 악행을 저지른다. 물론, 그 순간에는 그 모습이 악행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는데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런 질물은 하는데 책에 나오는 예수님은 '예수님이라면'이라고 하는 질문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인종이든 어떤 종교를 갖고 있든 상관없이 그 존재만으로 다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글을 읽는 순간 '맞다'라는 망치가 내 머리를 쳤다. 분명히 내 이웃을 사랑하는데 있어 조건이나 성별이나 종교를 따지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랑하는 것에도 우리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 사랑을 하려고 한다. 결단코 가려서 사랑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가려서 사랑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지만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인간이 만든 눈가리개에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엄한 것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이야기할 때는 예수님을 찾는다고 말한다. 이것도 내가 그 종교에서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에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성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배우게 되는데 이 개념이 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데 이 책을 읽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되고 저절로 체득하게 된다. 어떨 때는 하나님, 어떨 때는 예수님, 어떨 때는 성령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 같은 모습이다.





이것도 우리 인간이 편의적으로 구분하기 편하게 만든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진정으로 내가 믿는 종교에서 말하는 것의 근본을 제대로 쫓지 못한 것이 아닐까하는 깊은 울림을 갖게 만들었다. 원래 선데이 크리스챤이라고 스스로를 우스개소리로 이야기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날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다만, 책임과 책무를 맡게 되면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는데 그것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이 책에서도 사람들이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보고 있다는 말을 한다.





워낙 거대한 존재라 누구는 90도 각도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누구는 정면에서 바라 본 모습을 이야기하면서 자기가 맞다고 한다. 하지만, 다들 근본에 대한 것을 잊은체 인간이 어느새 만들어 버린 이미지로써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로써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여러 점에서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책 서두에 나온 연쇄 살인마에 의해 죽음을 당한 딸 아이로 인해 모든 것을 거부하는 아버지가 다시 환상을 - 그 부분이 안 믿는 사람에게는 환상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지만 - 통해 자신을 다시 찾게 되고 진정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그려지고 있다. 물론, 당연히 연쇄살인마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연쇄살인마에 대한 용서를 스스로 하게 된다.





실제로 용서는 남과 나와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문제다. 예전에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본 다큐에서도 우리나라에서 연쇄살인범에 의해 살해 당한 어느 딸의 부모가 그 연쇄살인범을 용서하고 다른 피해자들에게도 용서하자고 설득하면서 다른 피해자 가족들이 당신이나 용서하라며 면박을 주고 그 아버지가 외국에서도 그런 살인범을 용서한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 연쇄살인범을 만나려 했으나 그 살인범이 자신은 죄인이라며 만나주지 않는 것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으며 나도 저럴 수 있을까라는 물음과 나도 저런 용서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그 기억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살아났다.





이 책은 진정으로 환상으로 가득찬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찼다고 할 것이다. 또 누군가에게는 깊은 울림을 가득하게 선사할 것이다. 나에게는 환상을 통해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다. 굳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 책을 통해 우리 인류에 대한 깊은 사고를 만들어 준다고 본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어떠한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들의 많은 리뷰가 있다는 것만을 파악한 후에 읽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많은 것을 선사했다. 오히려 알았으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몰랐기 때문에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읽게되어 좋았다.




최근에 사람들을 만날 때 빈 손으로 가기 뭐할 때 그래도 내가 책을 읽는다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음료수 같은 것을 갖고 가는 것보다는 책을 선물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책을 앞으로 선물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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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슬럼버 - 영화 <골든슬럼버> 원작 소설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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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추리소설의 묘미는 무엇보다 읽는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전개되면서 끝까지 다음 상황이 어떻게 진행이 될지 모르는데 있다고 본다. 그게 아니라면 미리부터 결과를 알려주고 그에 다다르는 방법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묘사하여서 이렇게 연결이 된다는 감탄을 하며 읽게 만드는데 있다.





골든 슬럼버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치밀하게 사건을 묘사하는데 그 방법이 특이하다. 현재에서 출발하여 미래로 갔다가 다시 현재로 왔다가 사건이 벌어진 몇 개월 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건 자체도 총리가 테러로 살인이 된다느 충격적인 소재이지만 총리의 살인은 그저 하나의 메타포에 지나지 않는다.





사건이 일어날 때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읽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히 전혀 연결되지 않지만 추리소설에서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이야기들이 나중에는 거미줄처럼 다 연결되어 촘촘히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골든 슬럼버도 초반에 묘사되는 많은 상황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내가 우둔해서 그런지 한 200페이지가 될 때까지 전혀 연결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읽으면서 적응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책의 내용이 왔다 갔다 하면서 현재에 갔다가 인물의 과거로 다시 돌아갔다가 하니 가뜩이나 인물에 대해서 구분도 확실히 안되는데 더 혼동되어 힘들었다.





주인공은 너무 평범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택배기사라는 점은 평범한 직업인이지만 그가 가진 가장 장점은 바로 그가 다니는 지역은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으로 인해 도움을 받기도 하고 말이다.





다만, 책의 중반부에 나와 주인공을 돕는 인물중에는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드는 인물도 있는데 그 인물로 인해 극의 사실성이 좀 떨어진다. 너무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등장하여 도움을 주고 퇴장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더 극에 몰입되고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환타지를 꿈꾸기도 하지만 사실이라는 점을 부각해주며 물러난다.





책에는 이제는 도움 흔해진 CCTV를 기반으로 한 정보 통제에 대해 나온다. 우리는 이제 숨으려 해도 숨을 수 없는 환경에 살고 있다. 우리가 다니는 길에 전부 우리를 보고 있는 카메라가 있는 것도 모잘라 자동차의 블랙박스라는 것이 사소한 곳까지 촬영을 하고 있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





사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잡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현실에도 잡지 못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음모를 키우게 된다. 어느 인물이 한 번 포착되면 그가 어디로 가는지는 무조건 발견되다. 도망 갈래야 갈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다.





책에는 이런 상황의 초기현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어느덧 이런 상황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조지 오웰의 1984는 이제 누구도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의 뇌리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보가 외곡될 수 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나 이미지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 현 시대에 미스매디어가 만드는 이미지이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보고 싶은 것만 발췌해서 볼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다.





추리소설이지만 단순하게 볼 것이라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에게 보여지고 내 뜻과는 다른 의미로 전달 될 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조금은 철학적인 추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인 골든 슬럼버는 비틀즈의 노래이다. 도대체, 비틀즈의 영원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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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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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에게는 생소한 책이지만 이 책의 작가인 에밀 아자르이자 로맹 가리는 프랑스에서 무척 유명한 작가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지도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가로 보인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책을 냈고 로맹 가리라는 본인 이름으로도 책을 펴 낸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인데 필명으로 낸 작품이 더 높은 인정을 받고 작품성을 받은 것에 대해 본인 스스로는 굳이 밝히지 않고 사후인지 사망직전이지 밝힌듯 하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장르가 아예 따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장기 소설은 무척이나 많이 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유명한 작가일수록 자전적 성장 소설이 꽤 많은데 그건 아마도 본인 스스로 과거에 대한 것을 털어버려야만 작가로서 갖고 있는 껍질을 깨고 새롭게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큼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 자신의 과거를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부담감도 분명히 있으리라 보인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니 자전적 소설인 경우가 많았는데 불행히도 지금까지 읽은 소설중에 이 소설 정말로 좋았다고 느낀 소설은 없었다. 그저, 그 사람의 과거를 알게 되었고 그런 이야기를 간직 하고 있구나정도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문학적 소양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 작품성에 대한 것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마찬가지로 나에게는 기존에 읽었던 자전적 소설과는 큰 차별성이나 대단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아랍인 고아를 키우고 있는 유대인 노인의 이야기 정도가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다. 이 것도 어디까지나 유럽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조합이 특수하면서 특이하다고 여기는 것이지 사람과 사람이 사는 관계에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싶다. 더구나, 어린 아이를 키우며 돈을 벌고 있는데 그 아이의 출신성분은 아무 이유가 없다.





책의 주인공은 모하메드라 불리는 모모인데 실제로 책에서 더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로라 아줌마라고 불리우는 노인이 아닐까 싶다. 철저하게 모모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것을 책을 통해 표현되고 있지만 도저히 이제 겨우 14살 - 10살로 알고 있다가 나이가 잘못되었다고 알게 된다 - 아이의 시선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철학과 시선을 보여준다.





읽다보면 아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철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나보다 더 뛰어나고 현명해서 - 비록, 이 친구가 살아온 지난 세월(??)을 볼 때 충분히 이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길러준 부모와 태어나게 해 준 부모중에 난 경험하지 못해서 정확하지 않겠지만 길러준 정이 더 크다고 본다. 까 놓고 어릴 때 부터 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모른다면 이미 내 의식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 부모라고 믿으며 살아 갈 것이라 보고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어떻게 되었든 간에 계속 봐야지만 서로 무엇인가 생긴다고 본다.





책에서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모모와 로라 아줌마는 서로가 상대방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친부가 나타나도 그들은 그 존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상대방을 진정한 부모자식으로 여긴다. 아마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한결같이 제대로 된 인물은 없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정이 많고 - 프랑스인들이라 정과는 다른 개념이겠지만 - 세상에 대해 제대로 된 시선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외관상으로 볼 때 선입견으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인물들이지만 말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되고 이렇게 글을 쓰지만 내 자신도 현실세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외관으로 쉽게 판단하는 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여기서 모모가 갖게 되는 모든 지혜와 시선은 그가 만나는 어른들을 통해서이다. 그가 만나는 인물들이 겉 모습이 별로 일지라도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고,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하면서 지금까지 이 세계를 몸으로 느끼고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그들과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허심탄회(??)하게 만나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었다.





책의 말미에 로라아줌마를 떠나며 책은 끝맺게 되지만 최근 말로 모모 2.0이 시작되는 환경이 된다. 주변 사람들이 로라아줌마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사회통념으로 모모와 떨어지게 하려 하지만 모모와 로라아줌마는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끈으로 - 실제로 서로 제 정신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그러 많지 않다 - 자신들의 손으로 결말을 한다.




역시, 자전적 소설은 무엇인가 남들과는 다른 경험을 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내 과거를 돌아봐서 어릴 적 경험으로 책을 쓸 만큼의 이야기는 없다. 누구에게나 다 자기만의 이야기는 갖고 있겠지만 들을만큼 풍부한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은 축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어린 시절에 대해 절대로 후회하지는 않으니 남들과 같은 아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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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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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자신의 생명이 예정되어 있는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이다. 불사의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치의 병에 걸려 자신의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인간이다.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정도 알려져있어 대략적인 유추가 가능하지만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수용소와 같은 특수한 환경에 처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하지도 않고 유추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나치 시대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용되어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때나 가능한 내면의 심리상태를 가질 수 있는 것이지 이와 같이 특수하게 언제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상황에 놓여 있을 때 갖게 되는 인간의 심리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여기서 내일이라는 것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성공지상적인 당위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을 열심히 산다고 내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게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일 죽으나 오늘 죽으나 똑같다는 심정으로 내 목숨을 함부로 할 수도 없는 것이 당장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육체에 가해지는 고통이 내 의지와 심적인 혼란과는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오기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인간은 우습게도 이런 극한 상황에서는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그 어느 것도 없다. 단 한가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없다. 잠을 자고 싶어도 무얼 먹고 싶어도 떠들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한가지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각자 내면에 갖고 있는 선택의 자유마저 꺾지는 못한다.





죽음의 수용소은 실제로 정신과 의사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이야기를 책으로 펴 낸 실화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적인 특수성은 실제로 이 곳에서 아무런 빛도 장점도 되지 못한다. 수용소에서 자유를 획득한 후에 그때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며 책을 쓸 때의 상황과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한 심리상태에 놓여있을 때 남들과 똑같은 조건에서는 아무런 차별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정신과 의사이자 종교인으로써 수용소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생존을 터득했다. 그것은 바로 외부 환경과는 상관없이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유일한 의지이다. 그 의지는 그 누구도 간섭하거나 변경할 수 없다. 단, 영향을 줄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은 환경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는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은 없다. 오로지 유일하게 있다면 번호로 명명되는 호칭만 있을 뿐이다. 한결같이 부족한 잠과 부족한 식량으로 언제 질병으로 쓰러질지 모르는 환경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겨우 바람만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옷을 걸치고 있어도 그 추위에 감기에 걸리지 않고 동상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특별히 선택받은 누군가만 우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다 적응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말고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인간 행동에 대한 비밀 아닌 비밀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똑같은 조건과 환경에 처해 있어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인간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유라는 것이다. 불행히도 당시에는 그 선택에 대한 판가름이 나지 않지만 결국에 올바른 판단은 당장 편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은 힘들어도 보이지 않는 미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수용소에서 살고 있지 않지만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도 지금 우리가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이 점에는 수용소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 남았고 누군가는 생을 마감했다. 단지 운만으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내 자신이 선택을 한 결과로 나온 종말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내 자유의지이다. 우리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눈 앞에 보이는 찰나의 쾌락을 추구할 수 밖에 없지만 - 그것이 죽음이라는 선택이라도 -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 문구중에 '그렇게 힘든데 왜 자살을 하지 않으시나요?'라고 물어보면 한결같이 그 질문에 자살할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자살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역설적인 질문이 오히려 그 사람의 강박관념을 풀어 버린다고 한다. 무엇인가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 감추려 하지 말고 차라리 그것을 더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해결 가능한 일이 많다는 것이다.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구 구성비율로는 많지 않지만 동물과 비교하면 자살을 선택하는 인간이 많다. 그들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다. 불치의 병을 갖게 된 사람들중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건 너무 역설적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은 생존을 선택하고 생존할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은 사람들은 - 비록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우리의 인생이지만 - 죽음을 선택하는 이 아이러니는 현대사회의 모순일 수 있다.





수용소에서 탈출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하지 않은 것이 기사회생인 경우도 있다. 탈출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지만 실행을 하려 할 때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하다보니 수용소가 미군에 점령되어 전화위복이 되거나 행정착오로 다른 수용소로 가지 못하는 - 현재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환경의 수용소 - 일이 벌어 졌을 때 담당자들도 미안해하고 본인도 깊은 실망에 빠져 있었지만 그 수용소는 오히려 화재로 인해 전원이 살아남지 못한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를 보면 인간은 현재의 결과가 향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경험후에 책의 저자인 빅터 플랭크는 로고테라피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이론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실제로 적용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프로이드와는 달리 편안하게 누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환자들이 큰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는 이론이지만 결국 인간은 극한의 한계까지 가면 다 똑같다는 사실에 근거한 이론으로 보인다.



책의 마지막 단락은 비극속에서 낙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한다. 아무리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일이 없는 상황에서도 포기를 선택하는 대신 알 수 없는 내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살아 남았다.





특별히 우월한 사람이 존재할 수 없고 동일한 조건으로 똑같은 음식에 노동에 잠을 잤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동일하지만 각자 그 내부에 있는 선택에 따라 산자와 죽은 자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산 자의 논리로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눈에 보이는 어떠한 선택도 없고 할 수도 없는 환경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선택이 바로 진정한 우리의 힘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와 같은 환경에 처해 있을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분명히 내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지만 내 자유의지가 내가 처한 환경과 압박을 극복할 수 있는 선택이 될 것인지에 대해 솔직히 의문이 들지만 그렇다고 굴복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인간이 평소에 생각을 한대로 살지도 못하고 아무리 미리 예상을 한다고 해도 현실 앞에서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속성이지만 미리 미리 조금이라도 각오를 하고 있다면 그나마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A를 택하든, B를 택하든지 아니면 갑을 선택하든지 을을 선택하든지 그에 대한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의 결과의 몫은 어디까지나 온전한 내 몫이다. 최소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선택이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내 스스로 부끄러운 선택이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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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지음, 이기섭 엮음 / 아름다운사람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하건대 내가 믿고 있는 종교를 남들에게 굳이 전파하려 할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믿는 종교를 나로 인하여 욕을 먹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남들이 묻지 않는데 굳이 먼저 이야기를 하지도 않지만 내가 믿는 종교를 베드로처럼 부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 물음이 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일 최선은 나로 인하여 욕을 먹는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사람들이 나를 본 후에 '저 사람이 믿는 종교를 나도 믿어봐야 겠다'정도이지만 밝히지 않는다면 분명히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 해도 이 책을 읽으면 그저 부끄러워지고 한없이 작아짐을 느낀다.





종교의 지도자나 나서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영적인 존재만이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더 깊은 공감과 유대감을 형성하여 많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깝게 다가 설 수 없는 분들이 하는 이야기의 이론적인 설교나 접근하기 힘든 그 분들의 알 수 없는 행동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면서 내 행동을 돌아보게 만들어 준다.





'낮은 곳에서 임하소서'라는 말이 있다. 말이 쉽지 이 말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너무 힘든 욕망이다. 나서려 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기 원하고 떠 받쳐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존재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되고 충분히 사람들에게 그런 칭찬과 존경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고 한결같이 낮은 곳에 임한다는 것은 보통 어련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남들이 세운 원칙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망과도 같은 일이다. 스스로 세운 원칙을 지키기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차라리 그 원칙을 안 지키는 것만 못하다. 책의 주인공인 안수현씨는 자신의 원칙으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줄까봐 자신이 편안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것을 포기하며 실천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의사들에게 갖는 이미지는 돈 많이 버는 직업, 개인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존재자로서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받는 사람이면서 환자로써 의사들을 만날 때 충분하게 눈을 맞쳐주며 이야기해 주지 않는 위에 군림한 사람이나 알 수 없는 용어를 자연스럽게 써 가며 우리에게 위압감을 주는 존재로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 선언을 통해 직업인으로써 갖는 이미지보다는 인간의 생명을 위하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나고 느끼는 많은 의사들이 그렇다.





분명히 그렇지 않은 의사들이 더 많을 것이고 그들이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처리해야 하는 일의 속성상 그럴 수 있지만 일반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환자의 눈높이에서 환자를 돌보는 의사들의 이야기가 회자되는 것은 그만큼 드물기 때문으로 보인다.





안수현이라는 의사는 그런 부분에서 진정으로 낮은 곳에서 환자의 눈 높이 정도가 아니라 환자가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점을 미리 먼저 긁어 줄 정도의 의사라는 점에서 뛰어난 의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의료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확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놀란 점은 단순히 환자를 돌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환자의 집까지 방문하고 환자들의 대소사까지 챙겨줬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의사라도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못했을 듯 하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 정도까지는 직업적인 사명감이나 소명감을 갖고 했겠지만 그 이상으로 환자들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의사들 입장에서도 호불호가 있었겠지만 진정으로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행동이라 생각한다.





책은 의사 안수현이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벌어진 여러가지 상황과 내면을 일기 형식으로 인터넷에 올린 글들과 안수현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사람들의 추모형식의 글로 엮여져 있다. 의사로써 분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길잡이 역할도 했고, 한 교회의 성경모임 리더자로서 겪은 리더로써의 어려움과 사명감에 대해서도 언듯 언급되면서 이 시대의 리대가 진정으로 가야 할 길에 대해서까지 제시하고 있다.





시대가 가면 갈수록 각 개인들의 자존심과 자아는 강해지고 내가 남들보다 뛰어나고 남들로부터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자의식은 강해지고 있다. 최소한 속으로 어떤 새각을 갖고 있던지 간에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에서는 남들을 존중하고 무릎을 꿇을 정도의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이제 구성원 다수는 결코 리더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안수현이라는 사람은 단순히 의사로써 자신의 의술을 펼친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 다른 인간을 동등하고 대하고 진심으로 - 측은지심이 아니라 - 한 인격체로 마음을 교환하고 자신에게 주워진 것들을 불만 불평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 실천했다. 책을 통해 의사로써의 기술이 뛰어난지는 전혀 알 방법이 없지만 그가 훌륭한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책의 거의 말미가 되도록 안수현이라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나오고 있지 않아 궁금했다. 암같은 불치의 병에 걸려 돌아가신 것으로 오독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신의 일기가 나오리라고 생각했으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부분에서는 진정으로 인간은 신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 성공(????)여부는 그의 사후에 알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겨우 33살에 불과한 안수현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장례식장에 몇 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왔다는 것은 그가 전파한 것들이 헛되지 않고 그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나와 동년배로 보인 한 사람과 비교하여 지금 당장 내가 사망한다면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이 몇 천명은 커녕 몇 십명밖에 되지 않을까 한다.





예수님이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다면 지금과 같은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수현이라는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의술과 인술을 펼치며 옆의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동거동락하며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안수현이 보여준 사랑에 감화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후에 커밍아웃을 하며 안수현씨와 같은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책의 이야기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죽음으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면 혹시 그에 대한 결례가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 생존하지 않다는 점에서 -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 곳곳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수현씨가 지키려 했던 가치관과 삶의 자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현재에도 아직 그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고 보인다.





책을 읽으며 몹시도 부끄럽고 몹시도 창피하고 몹시도 부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도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부러웠지만 그 이외에 그가 했던 그 모든 것에 대해 지금의 내 자신이 하는 행동과 생각에 부끄럽고 창피하면서 무엇인가 울컥하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어떤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움직일 지는 아직 모르겠다. 오랫동안 여러 생각을 하고 있고 해야지라며 미루고 있던 것들이 바로 지금이라는 속삭임을 해 주고 있는 듯 하기도 하다. 분명히 책을 읽은 지금과는 달리 오래되지 않아 잊고 살 수 있지만 결코 잊지 않고 구체화되지 않은 이 울컥을 실천할 것이라고 이렇게 글로써 남기며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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