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무라야마 유카 지음, 양윤옥 옮김 / 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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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 미야베 미유키와 함께 일본의 3대 여성 작가로 손꼽히며 나오키상, 주오고론문예상, 시바다렌자부로상 등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한 '무라야마 유카'.

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를.

그리고 이 소설이 1999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뒤 약 2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 전국 도서관에서 특정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져 뜯겨 나간 채 발견된 소설로 입소문이 나며 마침내 현지에서 재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이제서야 만나다니...

아니, 이제라도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인간 실격』을 떠올리게 하는

아릿한 후유증을 남기는 책" _ 독자평

과연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지 기대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원하지만 사랑은 아닌 이 관계가

어째서 우리는 이토록 간절한 걸까?"

서정과 파격을 오가는 이야기, 불온하고 매혹적인 문장

위태롭고 불안해서 더 아름다웠던 청춘의 비망록

파도가 닿았던 모든 순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답고 평온한 마을.

그곳엔 누구보다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로 고민하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입 험한 친구 녀석들은 나를 두고 파도 중독자니 세상 즐기는 법을 모르는 가엾은 연습 벌레니 하며 놀리지만, 나는 서핑에 중독된 내 모습에 불만을 품은 적이 없다. 파도를 타는 것은 내게는 한없이 자연스러운 데다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 page 12

일렁이는 파도의 리듬과 자신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느끼는 '미쓰히데'.

늘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는 그를 보며 친구들은 아무 걱정 없어 보인다고 부러워하지만 사실 미쓰히데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다시금 은근히 화가 난다. 멍청한 놈들.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 - page 32

그런데 아버지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며 아들에게 존엄사를 존중해 주기를 바라고, 미쓰히데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과정에 낙담하게 됩니다.

아니, 나는 어떻게 했을까. 분명 내 손으로 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내가 정말로 그 스위치를 끌 수 있었을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 손으로 스위치를 끄지 못한 것을 지금은 몹시 후회하고 있지만, 만일 내 손으로 꺼버렸다면 이런 후회는 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또 내 손으로 꺼버린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한 행동이 옳았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 page 401 ~ 402

그리고 공부든 운동이든 모든 면에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는 '후지사와 에리'.

다들 에리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이자 모범생으로 생각하지만...

거울 보기가 싫다.

거울 저편에서 눈에 익숙한,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눈에 익숙해지지 않는 여자가 무례하게 이쪽을 흘끗 마주 본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면 나는 마치 어금니로 은박지를 꽉 깨문 듯한 기분이 든다.

성별이 바뀐 채로 태어나 버렸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게 언제쯤부터일까. - page 13 ~ 14

억누를 수 없는 욕구에 남몰래 괴로워하며 또 동성인 단짝 친구 미야코를 사랑한다고 자각한 뒤로는 친구 사이를 망칠까 봐 마음을 숨기고 힘겹게 노력하는 에리.

아무도 진짜 나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제 새삼 내 입으로 모든 것을 고백할 수도 없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기대되는 역할이라는 게 있고, 나는 지금까지 너무도 능숙하게 그 역할을 해내버렸다. 이제 와서 그걸 내던진다면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걸 피하려면 나는 이대로 계속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로 모든 게 지겨워진다. 이따금 내 손으로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을 만큼. - page 22

그러다 결국!

들끓는 욕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에리는 파격적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성이 적은 집에서 떨어진 도시, 요코하마에서 에리는 일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만 남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다부진 어깨, 바닷바람에 변색된 머리카락.

직접 말을 나눈 일은 없......지는 않은, 학교 안에서 유명인사인 미쓰히데.

"내가 보다시피 경망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겉보기만큼 입이 가볍지는 않아. 남의 일에 괜히 참견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내 말, 믿어도 돼." - page 64

그런 장면을 들켜버린 데다 왜 그런지 이유 없이 동정까지 받고 있다고 느낀 에리는 미쓰히데에게 위험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미쓰히데, 나하고...... 잘래?" - page 104

느닷없는 거래였지만 응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곧 걷잡을 수 없는 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의외로 있을 수 없는 일이 태연히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인지도 모른다고. - page 100

역시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의외로 태연히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인 모양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그 말이 증명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 page 103 ~ 104

청춘의 한 시기인 미쓰히데와 에리.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피할 수도 없이 아픈 감정이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저항하지만 결국 고민이 주는 아픔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 그들.

"우린 둘 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속이지는 않았잖아?" 미쓰히데가 내쉰 숨이 내 이마에 눅눅하게 와 닿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 했어. 그렇지?"

그렇다. 분명 그건 맞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칭찬받을 만한 짓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양심에 찔리는 짓이었어도 우리는 상대를 좋아한다고 믿어보려는 거짓된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 page 361

"그럼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떨떠름하게 눈을 뜨자 바로 위에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뭔데?"

여전히 코는 꽉 막힌 채였다.

"나한테...... 어때, 괜찮지?"

"뭐가?"

"나한테 허락해 줘도 괜찮지?"

"글쎄 뭘?"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한테 다정하게 구는 거." - page 364

짙푸른 바다.

일렁이는 파도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작아져 간 두 개의 하귤처럼 그렇게 이들도 이내 금빛 점이 되었습니다.

'청춘'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

그 시기엔 한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이들의 여름이 부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반짝임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마주하게 된 이 소설.

모든 청춘들에게 바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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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헌책 - 책에 남은 흔적들의 우주 아무튼 시리즈 65
오경철 지음 / 제철소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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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아무튼 시리즈>에서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찾아 읽곤 합니다.

이번 역시도 제 눈길을 사로잡은 '헌책'이란 주제, 더 정확히 이 책에 대한 소개글에선

"아무개가 소유했으나 짐작하기 어려운 온갖 사연을 안고 세상에 흘러든" 헌책을 모으는 일

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겐 한낱 물건으로만 여겨질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이보다 더 값진 보물일 수밖에 없는 '헌책'.

그 매력 속에 저도 한번 빠져보겠습니다.

어떤 헌책이든 그저 헌책일 뿐이라서

나는 그것을 사랑해마지않는다

아무튼, 헌책



오랫동안 종이책을 만들어온 그 '오경철'.

그의 첫 책 『편집 후기』는 생업의 결과물로서(편집자로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채 책과 출판계를 바라보았다면,

이번 두 번째 책 『아무튼, 헌책』에서는 순수한 취미로서(독자로서) '건조한 일상에 잔잔하나 활력을 불어넣는 책 수집'의 즐거움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태준, 정지용, 박태준 등 전근대의 진귀한 고서들에 관한 비화부터 김현과 오규원, 김종삼과 최승자, 김화영과 장정일 같은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숨은 이야기까지.

헌책과 헌책방에서 발굴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가득하였습니다.

물건과 그 역사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얽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많은 감정과 희망을 보존하며, 미혹마저도 기꺼이 보존하려 든다. 책의 힘은 아주 강력하고도 미묘하다. 책은 그냥 물건이 아니다. 수많은 인생, 수많은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목소리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물건 그 자체로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지만, 내용으로 더욱 강력하게 표출되는 목소리 말이다. 책은 다른 시대의 유물인 동시에 전성기의 매력을 영원히 유지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물건으로서 책으로서, 자기가 태어난 시대에도, 새로 만나는 독자의 시대에도, 변함없이, 끊임없이.

* 필리프 블롬, 앞의 책, 241쪽

요즘은 헌책방은 많이 사라지고 대형서점에서 관리하는 '중고서점'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중고서점이 익숙한지라 오랜 책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종이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내가 찾으려는 책은 언제든 검색해서 구할 수 있는데...

그에 비해 헌책방의 매력은 내가 원하는 책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책의 존재를 발견하고 도움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책을 잔뜩 사게 되는 마력을 지닌 곳.

그뿐이랴.

오랜 책들에서 뭉근히 피어오르는 종이 냄새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사람은 있을지언정 한 번만 가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낭만이 있는 헌책방...

그리고 그 속에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를 밝히는 헌책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직도 안 가본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나는 가끔 헌책방이야말로 책의 우주 같다고 생각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곳은 책에 남은 흔적들의 우주이기도 하다고. - page 198

무엇보다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책은 금세 잊힌다. 오래된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책조차 잠시 기억해둘 틈도 주지 않은 채 금세 잊히고 만다. 그리고 잊힌 책들은 흩어진다. 우리가 잘 알거나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들로. 어딘가에 정착한 책들은 곧 수면에 빠진다. 그것은 죽음과 비슷한 잠이다.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데 때로는 안타깝게도 아예 깨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

많은 책들이 그 내재적 가치를 잃고 그저 재생을 위한 종이 뭉치로 전락하여 고유의 형태를 잃어버릴 때까지 이러한 숙명을 감내한다. - page 163 ~ 164

책의 운명...

냉정하게 말하자면-'솔직하게 말하자면'의 이란성 쌍둥이-헌책방이나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책들은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책들이 타고나는 우울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어쩌면 그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므로 그곳에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 page 171

책에 지금보다 더 많이 애정을 가져야겠습니다.

날이 좀 선선해지면 저도 헌책방에 가 보아야겠습니다.

매번 다짐만하고 못 가보았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

이곳에 아이들과 함께 거닐며 역사와 추억을 만들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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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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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하루키의 에세이!

이미 세번째 무라카미 라디오를 만나고 이번에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를 만나게 된 이 순간.

이번 책에선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을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기대하며 읽어보았습니다.

사사하고 소소한 일상을 특별함으로 채우는 하루키만의 에스프리!

영원한 청년작가, 하루키가 전하는 '지금/여기/우리'를 위한 52편의 에세이

'세계가 열광하는 작가'의 감성과 '취향이 좋은 남자'의 감각으로 재단한

인생을 한 뼘 더 즐겁게 사는 법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이번 제목 역시도 작가 특유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2009년 작가가 오랜 휴식을 끝내고 10년 만에 연재를 재개하면서 더불어 추진된 '무라카미 라디오 단행본 프로젝트' 두 번째.

역시나 52컷의 동판화와 함께 다양한 에피소드가 그려져 있었고 솔직 담백한 '인간 하루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이라는 영화에서 노인으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

솔직히 이 말을 보자마자 채소가 시시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닌가! 라 생각되었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하였습니다.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나 다름없다"라고 누군가 단호히 말하면 무심결에 "그런가?" 하게 될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채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채소마다 마음이 있고 사정이 있다. 하나하나의 채소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인간으로서의 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하고 무심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그럴 때도 있다). 뭔가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우집는 건 좋지 않군요. - page 15

그렇게 '채소의 기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소설가여서 소설 쓰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해 에세이라는 것은 본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스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이 지나친 겸손은...)

그래서 '무라카미 스타일로 에세이 쓰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

(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

(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긴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

(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그리하여 '쓸데없는 이야기'를 쓴다지만...

옛날 미국 서부의 술집은 대부분 전속 피아노 연주자를 두어 밝고 티없이 맑은 춤곡을 연주하게 했다. 그 피아노에는 '피아니스트를 쏘지 말아주세요. 그도 열심히 연주하고 있습니다' 하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간ㄷ나. 술에 취한 카우보이가 "저렇게 시원찮아빠진 피아노 연주자가 있다니, 이런 빌어먹을!" 하고 피스톨을 빵 쏘아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하면 연주자도 곤란할 것이다.

피스톨, 갖고 있지 않으시죠. - page 35

어쩌죠...

저는 요즘 작가님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은데요... 하하핫;;;

올림픽과 관련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 올림픽 시즌이고 TV에서 중계를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는 경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에, '메달을 따는가, 따지 않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저자의 말에 새삼 우리의 자세를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현지에서 나는 일본 선수나 일본팀이 나오는 시합도 물론 보았지만, 그보다는 일본과 관계없는 경기를 계획 없이 볼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독일과 파키스탄의 하키 시합이라든가. 그런 건 그냥 그 자리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었다. 이해가 얽히지 않은 만큼 순수하게 즐기고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강하든 약하든 누구나 열심히 땀을 흘리며 애쓰는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된다. 메달의 수는 국가나 국민의 수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실제 올림픽에는 진짜 피가 흐르는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 신기한 '현장의 힘' 같은.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으로는 그게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어딘가로 느닷없이 증발해버린다. 일장기가 올라간다, 올라가지 않는다, 만으로 얘기가 진행되고, 아나운서가 소리를 지르며 여론으로까지 강하게 몰아간다. 이것은 선수들에게도 우리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까? - page 58 ~ 59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어쨌든 내게는 '딱 좋다'가 인생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잘 생기지도 않고 다리도 길지 않고, 음치에 천재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괜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그냥 딱 좋지 않은가'하고 생각한다. - page 114

'이쯤이 딱 좋네'하고 여유롭게 생각하기.

앞으로 나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에도 시기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던 이번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다시 그의 책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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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축일 캐드펠 수사 시리즈 4
엘리스 피터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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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드펠 수사 시리즈'의 4번째.

이번 작품은 복잡한 정세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사건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세련되면서도 담백하게 풀어냈0다고 하였습니다.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유감없이 드러난 역사추리소설.

또다시 책을 펼쳐듭니다.

슈루즈베리 최고 축제 성 베드로 축일장에 벌어진

수상쩍인 살인사건과 절도사건의 뜻밖의 배후와 진상

성 베드로 축일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슈루즈베리.

슈루즈베리 최고 축제 중 하나인 '성 베드로 축일'을 앞두고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수도원은 새로 부임한 라둘푸스 수도원장과 함께 축일장 준비에 분주합니다.

그런데 시장은 수도원장에게

"슈루즈베리시의 상인 길드원들과 시민을 대표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기가 불황일 때는 우리도 요구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수료를 올려주시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좋은 방안으로, 수레나 짐마차나 배들이 장터로 들이는 물건에 대한 세금의 일부를 시에 떼어주어 성벽 복구비로 쓰게 해주십시오. 도시가 수도원을 보호해주는 덕에 수도원도 이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수익금의 1할을 떼어줬으면 합니다. 그 정도면 우린 진심으로 감사할 겁니다. 이건 요구가 아니라 정중한 호소입니다. 1할의 몫이 정의에 합당한 조처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 page 19 ~ 20

라며 전쟁 복구에 수도원이 일조해야 한다고 축일장 수익의 재배분을 요구하며 수도원과 시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적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치열한 전쟁터에서 보낸 캐드펠 수사가 대꾸했다. "평화가 좋을 거라고 누가 그러오? 내가 아직 수도원장의 의중을 꿰뚫을 만큼 그 속을 아는 건 아니오. 그분의 약한 면도 본 적이 없지.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소명과 이 수도원에 대해 서약을 했소. 그러니 시간을 좀 드립시다. 당신 경우를 생각해보시오. 내가 당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을 때도 시간이 해결해주었지." - page 37

잉글랜드 전역에서 상인과 구경꾼들이 몰려와 오랜만에 왁자지껄한 축제의 흥분에 휩싸인 슈루즈베리.

젊은이들과 상인들 간에 난장판이 벌어지고...

다음날 아침, 도기 장수가 강둑 밑에서 뭔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날 밤 브리스틀의 토머스가 단검에 찔려 죽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고 누군가 익사한 것처럼 강에 빠뜨린 것이었습니다.

"어제저녁 선창에서 벌어졌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물건을 하역하고 장터에 가판대를 설치하던 다른 상인도 여럿 피해를 입었거든요. 마을 사람들과 손님으로 이곳에 들른 상인들 사이에 악감정이 흐르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얘기죠. 외숙께서는 꽤 영향력 있는 상인이고, 그런 양반이 난동을 주도한 젊은이와 심하게 부딪쳤습니다. 그 청년이 밤을 틈타, 아마도 술에 취해 복수를 감행하려다가 고의로든 사고로든 그분에게 치명상을 입힌 건지도 모르죠." - page 93

시 측은 난장판을 벌인 젊은이들의 우두머리 필립 코비저를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했지만 또 다른 절도 사건과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필립은 혐의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피해자의 아름다운 조카딸 에마 버놀드와 캐드펠 수사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영리한 게임을 시작하게 되는데...

젊은 영주 이보 코르비에르가 사건의 주변을 맴돌면서 에마에게 접근하고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면서 사건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에마가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에마는 정체 모를 살인범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기 일보 직전, 이보는 에마의 보호를 명목으로 에마를 데리고 자신의 영지로 떠나고...

도대체 진범은 누구란 말인가...?!

이번 소설에서는 서로 속고 속이는 심리전과 정보전, 숨 막히는 추격전에 더하여 사랑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드라마틱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온갖 종류의 욕망에 찌든 인간 군상의 모순을 보여준 이 소설.

모드 황후와 스티븐 왕 간의 치열한 전쟁 와중에 서로에 대한 정보를 은밀하게 캐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축제를 즐기는 척하는 사람들.

음모의 한복판에서 추악한 야욕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등.

에마가 아니라면, 결국 그가 원하는 건 한 가지밖에 없었다. 지금껏 누군가 극단적인 사건을 벌이면서까지 줄곧 손에 넣으려 애써왔던 것, 지금 그녀가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 말이다. 그것이 지나가는 곳마다 죽음이 뒤따랐다. - page 322

또다시 인간의 추악한 욕망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보기 싫다...)

간만에 추리/미스터리 시리즈를 만났습니다.

읽는 재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캐드펠 수사 시리즈'.

이젠 한 권 한 권 독파하는 재미까지 느껴보도록 하겠습니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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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지문은 DNA를 말하지 않는다 - 유전자에는 없는 세포의 비밀
알폰소 마르티네스 아리아스 지음, 윤서연 옮김 / 드루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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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도 그랬습니다.

'생명과학'이라고 하면 '유전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아무래도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있었고, 다윈이 있을 수도, 어디에서도 흔하게 접할 수 있었던 유전자.

그러니까 유전자는 우리와 아주 밀접한 곳에서 우리 생명을 이루고 유지하는 장치로 인식되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스페인의 생명과학자 '알폰소 마르티네스 아리아스'는 우리 생명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전자 중심의 생명관을 뒤집을 이야기.

벌써부터 설렜습니다.

우리는 정말 유전자의 산물인가?

'이기적 유전자'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세포의 과학

당신의 지문은 DNA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유전자가 무엇이며 어떻게 관찰 가능한 특성으로 변환하는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DNA가 풀려서 부분별로 RNA로 전사된 다음, 세포 내에서 효소로 변환되어 명령을 수행하게 됩니다.

RNA 안으로의 DNA 변환이 시작되고 끝나는 염색체 지점들도 A, G, C, T의 특정 배열로 표시됩니다.

이 구간이 바로 '유전자'입니다.

판독가, 메신저, 변환자가 수행한 변환 및 복제본에서 생겨난 단백질과 RNA로 유전자가 '의미'를 얻게 되지만 여전히 의문인 건...

DNA 내 이런 메시지들이 어떻게 생명체의 복잡한 조직과 장기로 전환되는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심장이 왼쪽에 자리 잡게 된 이유를,

손가락의 개수를,

세포의 번식과 같은 부분들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아니며, 유전자는 그저 생명의 청사진일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세포는 그러한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며 유전자가 만든 설계를 실행하는 건축가라는 것을.

책은 '세포'에 대해 3부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1부에서는 유전자의 정체와 유전자가 운명의 예언자로 받아들여지게 된 과정, 세포로 넘어가서 세포와 유전자의 관계를 탐구하였습니다.

특히나 '이기적 유전자'라는 관점으로 많이 알려진 생물학적 논지에 반박하며 세포의 관점을 제시하였습니다.

세포의 눈으로 생명체를 보면 다세포 유기체 내에서 벌어지는 줄다리기를 볼 수 있다. 진핵세포는 다른 세포와 결합하고 협력하여 장기와 조직을 만들고, 이를 통해 유기체를 구성한다. 유전자의 관심사는 자신을 무한히 복제하는 것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다양성, 특히 동물계의 다양성은 세포와 유전자가 서로 다른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합의를 형성했음을 시사한다. - page 152

유전자는 자연선택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유전자만으로는 지느러미가 지느러미발, 손, 발, 날개로 진화한 과정을 설명할 수 없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도구 목록에 변화가 생겨 새로운 창조적 가능성이 열리지만, 어떤 새로운 도구를 보관하고 사용할지, 어떤 도구를 버릴지를 결정하는 것은 세포다. 자연선택이 일어나기 전에 세포는 자체를 위한 선택을 한다. - page 154 ~ 155

배아는 세포의 장신 정신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배아는 부피, 형태, 기능, 시간이 결합하여 유기체라는 작품을 만드는 연속된 창발의 결과물이다. 이 과정은 유전자와 세포가 맺은 합의의 결과이며, 유기체의 발달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감탄을 자아내는 다양한 형태와 기능의 근원이기도 하다. - pageg 155

2부에서는 세포와 유전자 간의 관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세포가 배아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 기법을 알아보았습니다.

배아 생성 과정에서 세포가 하는 역할과 더불어 최근에 우리의 유전체가 하나가 아닌 다수로서 세포의 수보다 많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인간 한 명에게는 유전체 한 가지라는 개념을 타파하였습니다.

세포는 미리 정해진 암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배아 발생 과정에서 세포 집단 내 자체 위치를 해석하여 특정 조직이나 장기 내에서 고유릐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만든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모든 세포가 각기 고유하며, 이런 고유성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특징을 형성한다. - page 284

3부에서는 세포의 관점에서 우리가 매년 다른 존재가 된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저자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성 방식과 정체성에 관한 관점은 유전자가 생물학의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포의 활동에 통합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앞으로 생물학적 체계에 관한 세포 기반의 이해가 질병을 해결하고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어 현재 유전자에 대한 것보다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리라고 본다. 이런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 면역세포가 종양을 찾아 파괴하도록 훈련하는 면역 치료의 성공, 세포의 노화 방식과 노화를 되돌릴 방법을 알아내고 있는 연구를 들 수 있다. 세포의 비밀이 풀리고 그 구조와 기능이 나란히 발전하는 방식이 밝혀진다면 재생 의학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세포가 유전체를 사용하기 위해 결합하는 방식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이로운 배아 유사 구조와 장기 유사체 세포의 놀라운 작용에서 그 해답이 드러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세포의 세기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다. - page 412

지속적으로 밝혀질 세포에 대해 잔뜩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으로 돌아가...

당신의 지문은 DNA를 말하지 않음을.

세포의 작품임을.

생명 현상의 키 '세포'에 대한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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