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답고 평온한 마을.
그곳엔 누구보다 격렬하게 자신의 존재로 고민하는 고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입 험한 친구 녀석들은 나를 두고 파도 중독자니 세상 즐기는 법을 모르는 가엾은 연습 벌레니 하며 놀리지만, 나는 서핑에 중독된 내 모습에 불만을 품은 적이 없다. 파도를 타는 것은 내게는 한없이 자연스러운 데다가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과 마찬가지로. - page 12
일렁이는 파도의 리듬과 자신의 심장박동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느끼는 '미쓰히데'.
늘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는 그를 보며 친구들은 아무 걱정 없어 보인다고 부러워하지만 사실 미쓰히데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다시금 은근히 화가 난다. 멍청한 놈들.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인간이 어디 있겠냐. - page 32
그런데 아버지는 연명 치료를 거부하며 아들에게 존엄사를 존중해 주기를 바라고, 미쓰히데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죽음 그 자체보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과정에 낙담하게 됩니다.
아니, 나는 어떻게 했을까. 분명 내 손으로 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내가 정말로 그 스위치를 끌 수 있었을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다. 내 손으로 스위치를 끄지 못한 것을 지금은 몹시 후회하고 있지만, 만일 내 손으로 꺼버렸다면 이런 후회는 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때는 또 내 손으로 꺼버린 것을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한 행동이 옳았는지, 자신이 없어진다. - page 401 ~ 402
그리고 공부든 운동이든 모든 면에서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는 '후지사와 에리'.
다들 에리를 천성적으로 '착한 아이'이자 모범생으로 생각하지만...
거울 보기가 싫다.
거울 저편에서 눈에 익숙한,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눈에 익숙해지지 않는 여자가 무례하게 이쪽을 흘끗 마주 본다. 그 여자의 얼굴을 보면 나는 마치 어금니로 은박지를 꽉 깨문 듯한 기분이 든다.
성별이 바뀐 채로 태어나 버렸다......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게 언제쯤부터일까. - page 13 ~ 14
억누를 수 없는 욕구에 남몰래 괴로워하며 또 동성인 단짝 친구 미야코를 사랑한다고 자각한 뒤로는 친구 사이를 망칠까 봐 마음을 숨기고 힘겹게 노력하는 에리.
아무도 진짜 나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제 새삼 내 입으로 모든 것을 고백할 수도 없다. 인간에게는 저마다 기대되는 역할이라는 게 있고, 나는 지금까지 너무도 능숙하게 그 역할을 해내버렸다. 이제 와서 그걸 내던진다면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걸 피하려면 나는 이대로 계속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진짜로 모든 게 지겨워진다. 이따금 내 손으로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을 만큼. - page 22
그러다 결국!
들끓는 욕망을 잠재울 수 없었던 에리는 파격적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성이 적은 집에서 떨어진 도시, 요코하마에서 에리는 일을 감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만 남고 돌아오는 길에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다부진 어깨, 바닷바람에 변색된 머리카락.
직접 말을 나눈 일은 없......지는 않은, 학교 안에서 유명인사인 미쓰히데.
"내가 보다시피 경망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겉보기만큼 입이 가볍지는 않아. 남의 일에 괜히 참견할 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내 말, 믿어도 돼." - page 64
그런 장면을 들켜버린 데다 왜 그런지 이유 없이 동정까지 받고 있다고 느낀 에리는 미쓰히데에게 위험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미쓰히데, 나하고...... 잘래?" - page 104
느닷없는 거래였지만 응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곧 걷잡을 수 없는 관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의외로 있을 수 없는 일이 태연히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인지도 모른다고. - page 100
역시나 있을 수 없는 일이 의외로 태연히 일어나는 게 이 세상인 모양이다. 하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그 말이 증명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 page 103 ~ 104
청춘의 한 시기인 미쓰히데와 에리.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피할 수도 없이 아픈 감정이 몰려올 때, 두 사람은 모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저항하지만 결국 고민이 주는 아픔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자신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 그들.
"우린 둘 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속이지는 않았잖아?" 미쓰히데가 내쉰 숨이 내 이마에 눅눅하게 와 닿았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면서 했어. 그렇지?"
그렇다. 분명 그건 맞는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칭찬받을 만한 짓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양심에 찔리는 짓이었어도 우리는 상대를 좋아한다고 믿어보려는 거짓된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 page 361
"그럼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떨떠름하게 눈을 뜨자 바로 위에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있었다.
"뭔데?"
여전히 코는 꽉 막힌 채였다.
"나한테...... 어때, 괜찮지?"
"뭐가?"
"나한테 허락해 줘도 괜찮지?"
"글쎄 뭘?"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한테 다정하게 구는 거." - page 364
짙푸른 바다.
일렁이는 파도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작아져 간 두 개의 하귤처럼 그렇게 이들도 이내 금빛 점이 되었습니다.
'청춘'이기에 할 수 있었던 것...
그 시기엔 한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
이들의 여름이 부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 반짝임이 그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마주하게 된 이 소설.
모든 청춘들에게 바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