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이름 - 미술사의 구석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여성 예술가들
권근영 지음 / 아트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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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 들여다보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이들의 삶 속에서 그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했던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본다. - 김보라(영화감독)

여전히 까마득한 밤에 가리어진 그녀들.

그럼에도 그녀들의 남긴 예술 작품들은 오롯이 빛을 내었고 우리도 이제서야 그 빛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들의 '이름'을 외쳐보려 합니다.

지워진 이름을 대신해 '먼저 온 미래'라 불리던 여자들,

예술로 스스로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하다

완전한 이름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10년 넘게 미술과 문화에 관한 글을 쓰는 '권근영'씨.

과거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때는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점에 크게 의문을 갖지 않았지만 사회인으로 문화예술계를 취재하고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가 된 후 한쪽으로만 치우친 예술가들의 성별이 차츰 이질적으로 느껴졌고,

#1. '<축제전>여는 규수화가 황주리 씨'

1984년 개인전을 소개한 이 기사 제목에, 당시 스물일곱의 작가 황주리는 속이 상해 잠을 못 이뤘다고 돌아봤다. '규수'라는 예스러운 말을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남의 집 처녀를 정중히 이르는 말' 혹은 '학문과 재주가 뛰어난 여자', 나쁜 뜻 하나 없지만 당사자가 질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야심만만한 신진 예술가를 '누구의 딸'이나 '젊은(어린) 여자'로만 봤기 때문이다.

#2. 대범하고 활달하게 휘두르는 붓질에는 '남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마치 남성 화가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정직성의 기계추상은 짧은 시간 밀도 있게 그려야 하는 아기 엄마의 삶에서 나온 것이라는 반전이 있다. 두 번의 결혼에서 얻은 세 아이를 키우며, 작업에 전념할 수만은 없었던 주부의 삶...... 그런 와중에 붓을 휘둘러 우리 시대의 풍경을 그린 것이 경쾌한 추상화로 이어졌다.

학문으로 접하던 미술세계와는 전혀 달랐던 이들의 이야기.

그래서 저자는 더 여성 예술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 이름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부 「길을 떠나다」 에서는

100년 전 진보적 교육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성별 불문 입학 조건을 내건 바우하우스가 결국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의 그늘 아래 놓이게 한 '흑역사'를 지적하며, 그럼에도 아동미술에 선구적 역할을 한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서양인의 눈으로 바라본 조선 여인의 삶을 기록한 '엘리자베스 키스'

현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 교수이자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그림 철학자 '노은님'

소재와 매체를 확장하며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경쾌하고 세련되게 전하는 '정직성'

2부 「거울 앞에서」 에서는

인상파의 여성 멤버였고, 출산을 했던 한 해를 제외하고 인상파 전시회에 빠짐없이 출품했던 '베르트 모리조'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화가 자신이 되고자 분투한 '파울라 모더존베커'

가족을 추스르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아 예술적 발자취를 남긴 '버네사 벨'

한국의 현대미술가 '천경자', '박영숙'

3부 「되찾은 이름들」 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프란스 할스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유딧 레이스터르'

최초의 추상화가였으나 이름 대신 '먼저 온 미래'라 불린 '힐마 아프 클린트'

조선의 알파걸 '나혜석'

18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화가이자 스승으로서 일찍이 여성 연대를 꿈꿨던 '아델라이드 라비유귀아르'

바로크시대 유럽 무대를 종횡무진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까지 사회적 그늘 혹은 가문의 이름에 가려졌던 여성들이 어떻게 예술로 자신의 이름에 완결성을 부여했는지 그 당찬 행보를 되짚어가고 있었습니다.

저에겐 이 책에 나온 이들 중 위대했던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프리들 디커브란다이스.

격동의 시대였던 그 시기에 프리들은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선전 포토몽타주 제작에 관여한 혐의로 1년 남짓 옥살이를 했고 이후 프라하로 이주, 빈 출신의 전쟁 피난민 아이들을 가르치며 프라하 정신분석학회와 교류하며 아동심리와 미술치료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나치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지만, 남편의 비자가 거절당하자 함께 남아 테레진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이곳에서 프리들은 아이들에게 드로잉을 통해 상상하고 표현하며 그림에 자기만의 느낌을 담도록 독려했습니다.

1944년 9월, 남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자 프리들은 다음 열차로 아우슈비츠행을 자청하고 도착 직후 가스실에서 살해됩니다.

이때 아이들의 그림 4500장을 두 개의 여행가방에 담아 감췄는데 훗날 프리들이 감췄던 여행 가방은 프라하 유대인박물관에 기증되는데...



홀로코스트 시기 최대의 아동 미술 컬렉션이다. 프리들의 수업에서 아이들은 집, 꽃과 나비, 태양을 그리며 희망을 부여잡았다. 마르기트 코레초바의 「나비들」이 그렇다. 마르기트는 이 그림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됐다. 그때 나이가 열한 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거친 수용소 생활에서 그림은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으며 아이들을 치유했다. 살아남은 한 학생은 프리들의 수업에 대해 "모든 사람이 우리를 상자 안으로 밀어넣었지만, 그녀는 우리를 그 상자에서 꺼내주었다"고 돌아봤다. - page 25

그리고 '천경자'.

꽃과 여인으로 남다른 정한을 화폭에 풀어낸 한국 근현대 화단의 여걸 천경자.

의사가 되라는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가 되겠다며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로 진학한 그녀.

화가로 이름을 알린 건 스물일곱 되던 1951년에 그린 초록 뱀, 빨간 뱀, 갈색 뱀 등 서른다섯 마리의 뱀이 스멀스멀 뒤엉켜 있는 묘한 분위기의 그림 「생태」였는데...

어렵던 시절, 돌파구가 된 그림.

"그런 속에서 누이동생이 죽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의학을 공부 못한 까닭으로 오만 가지 저주를 받은 것이고 두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낸 나는 악이 받쳤던가, 꽃향기 찾아 스치는 뱀 두 마리로는 마음이 차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무더기 뱀을 그림으로써 살 용기와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천경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53세에 돌아본 스물두 살 때.

결혼 이듬해였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첫째 딸이 태어나던 해.

비련의 신부, 결핍의 모성, 슬픈 마녀 같은 자화상.

보고 있노라면 넋두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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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름 -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아무튼 시리즈 30
김신회 지음 / 제철소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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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1인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그에 따른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공감도 하게 되고 이렇기에 좋아하는구나! 관심이 없었던 저도 어느새 관심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크기도 작아 부담 없이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읽기 좋은 책.

마냥 가볍지 않아 더 좋은 책.

전부터 이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이제서야 결제와 함께 읽게 되었습니다.

믿고 읽는 '김신회' 작가님.

개인적으로 사계절 중 여름을 좋아하지 않지만 작가님의 '여름'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휴가, 수영, 낮술, 머슬 셔츠, 전 애인...

여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

아무튼, 여름




그녀에게는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여름날의 추억이 있었습니다.

여름옷을 꺼내 입으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는 내 몸에 대해 고민하고,

여름에 만나 사랑한 연인과 이별하면서 그동안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잃어버린 진짜 내 모습과 마주하며,

이 책을 계약한 날 백화점 과일 코너에서 산 샤인 머스캣을 먹으며 나한테 잘해주는 일의 중요함에 대해 생각하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예찬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애호하는 마음'과 그 마음이 가능케 한 작은 변화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 또 그러한 변화조차 기어이 여름의 공으로 돌리고야 마는 그녀의 지극한 '여름 사랑'은 저에게도 울림을 선사하였는데...

그 시절 내가 그리워한 건 여름이 아니라 여름의 나였다. 여름만 되면 스스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나, 왠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는 나, 온갖 고민과 불안 따위는 저 멀리 치워두고 그 계절만큼 반짝이고 생기 넘치는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겨울인 사람은 여름 나라에서도 겨울을 산다. 손 닿는 것 모두 얼음으로 만들어버리는 <겨울왕국>의 엘사처럼, 싸늘한 마음은 뜨거운 계절조차 차갑게 만들어버린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여름을 완성하는 건 계절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그 어디서든 여름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거다. - page 116

그녀의 위트도 엿볼 수 있었던 이야기.

수영을 배우고 싶지만 수영을 못하고, 그러면서도 결코 수영을 배우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

그 이름도 '수수수'.

언젠가 수영할 수 있게끔 서로를 응원하는 모임이 아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영을 배우지 않게끔 서로의 발목을 잡는 모임이라니...

발상의 전환이었습니다.

저도 수영을 하고 싶지만 물이 두려운...

왠지 가입 가능하지 않을까?!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

이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 같다는 허무함이 밀려들 때 그녀는 식물이 눈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말 못 하는 생명이지만 물을 주고, 분갈이하고, 햇빛을 쏘여주면서 적어도 애들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는 그녀.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잎을 향해 가는 발걸음, 이 한 몸 건사하기 힘든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깨달음, 춥고 지루한 어둠 속에서도 따스한 햇살을 기다리는 마음. 그런 것들이 사람을 하루 더 살게 한다는 걸 우리 집 식물들이 내게 가르쳐주고 있다. - page 92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

그 믿음이...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 그게 사람을 살게 하는 것 같아."

그러니 그대도, 아니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니 존재 그 자체가 소중함을 스스로에게 다짐해 봅니다.

저에게 여름은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였는데 이렇게 여름의 순간들을 마주하니 뜨겁기만 했던 햇빛이 반짝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여름을 한 입 베어 물었더니』를 읽으며 여름의 찬란함을 느꼈었는데...

그 느낌이 이제 눈부심으로 저의 여름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여름의 문턱에 마주한 요즘.

덕분에 이번 여름엔 나만의 여름을, 아니 여름의 나를 마주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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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세계 - 우리가 사랑한 영화 속 컬러 팔레트
찰스 브라메스코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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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색에는 의도가 있다!"

이 문구에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영화 속 컬러 팔레트.

그동안은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과 함께 그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작품에는

남다른 '컬러 한 끗'이 있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호텔은 왜 분홍색과 보라색일까?

「박하사탕」의 영호는 왜 회색 양복을 입었을까?

「아멜리에」 주인공의 피부색에 숨겨진 비밀은?

컬러의 세계



본문에 들어가기 앞서 영화 「타이타닉」의 '나무판자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잭이 로즈에게 매달린 채 얼음으로 뒤덮인 대서양에 잠겨 있는 장면.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영하의 기온을 표현하기 위해 남색 필터가 씌워져 있지만,

어떤 결과에서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조각 같은 외모를 살리기 위해 어두운 푸른색의 밝기가 한껏 높여져 있기도 하고,

잭이 입은 셔츠와 로즈가 걸친 구명조끼의 크림색을 강조하며 푸른색 필터를 완전히 걷어낸 이미지,

로즈의 붉은색 머리카락이 높은 채도로 강조되어, 마치 불가능한 로맨스가 가미된 동화 같은 느낌의 이미지

등 색의 재구성에 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달라지면서 상징적인 의미가 부여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영화에서 색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그 과정에서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영화 속에 적용한 개념을 영화 평론가인 찰스 브라메스코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컬러영화의 태동기부터 디지털 아이맥스 영화에 이르기까지, 100년의 영화사를 관통하는 50편의 영화를 엄선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박하사탕」도 함께 실려 있어 한국 역시도 영화 산업에 족적을 남길 만큼의 수준임을 여실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첫 이야기부터 큰 인상을 남겼었습니다.

<흑백영화의 사후 색채화>

흑백영화의 진중한 무게감에 색채를 덧입힌다?

색상의 간섭 자체는 큰 위협이 아닐 수 있지만... 이미지의 진실성은...?!



컬러 영화가 등장하고부터는 선악을 묘사하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스타워즈」에서 평화의 수호자 제다이의 라이트세이버는 파란색이나 녹색(내면이 평온하게 하나 됨을 의미)으로 빛나고, 테러리스트 시스의 것은 빨간색(분노와 충동, 불의 의미)으로 빛나지만

「해리 포터」에서는 소년 마법사 해리의 지팡이가 빨간색(용맹함을 지닌 고결한 귀족 혈통을 암시)을, 어둠의 군주 볼드모트의 지팡이가 녹색(뱀, 화려함, 독성을 암시)을

띠는 것으로

색에 대해 하나로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색의 배치와 보색을 숙지하는 것은 장면의 요소를 구분하는 것부터 관객의 시선을 제어하기까지 영화 촬영의 팔레트를 구성하는 첫 번째 단계라 하였습니다.

책 표지에서도 맞이하였던 「중경삼림」.

이 영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란콰이풍 지역의 산업화된 도시는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하고, 밤거리 포장마차의 희미한 불빛만이 거리를 비추는 듯 하지만 두 인물이 만나면 '햇살' '밝음', '사랑스러움'으로 묘사하는 색채를 발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만남의 밑바닥에 깔린 잔잔한 슬픔을 파랑, 보라, 초록의 색감으로 표현하는데...

거친 듯하면서도 세련된 이 영화.

다시 찾아서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기차의 기적소리를 뚫고 과거로 흘러갔던 이 영화 「박하사탕」.

이 영화는 색채 면에서는 다른 측면만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진 않고, 그저 자연주의적인 표현을 고수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의 색채를 보면

자살로 끝나는 소풍 장면은 낙엽이 무성하고 날씨가 흐린 반면, 회상 장면은 숲속을 물들이는 눈부신 태양 아래서 전개된다. 흐트러진 회색 양복을 입고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영호의 볼품없는 외양은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가치 없게 여기는지 암시한다. 그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때 입는 하늘색 티셔츠는 그의 슬픔이다. 회색 양복 안에 입은 파란색 와이셔츠는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 상처를 단단한 외피 속에 묻어두는 법을 가르쳐주었음을 나타낸다.

...

색이 바랜 금속 물질에 둘러싸여 보내는 시간은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살아 있는 나무의 희귀함을 강조한다. 자살을 결심한 영호는 마지막으로 진짜 자신의 모습을 느꼈던 장소로 돌아가고, 왜 이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 확인한다. 스무 번의 겨울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초록빛 봄, 그 가장자리는 마치 다시 찾아 들어가는 요람의 벽처럼 느껴진다. - page 136

의미를 알고 다시 보니 그의 절규가 더 처절하게 느껴졌습니다.

색을 사용해서 감정을 끌어내고 의미를 전달하였던 영화.

덕분에 영화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색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그 색상이 어떤 의미를 어떻게 나타내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서 저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색은 기쁨이자 에너지요, 삶 그 자체다. 적절한 도구와 화학물질, 그리고 약간의 영감만 있다면 영화는 우리를 어디로든 데려가서 무엇이든 보여줄 수 있다. 마이클 파월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전쟁 판타지 영화 「천국으로 가는 계단」 속 이승과 저승의 안내자는 필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천국에도 테크니컬러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있다." 천국에서조차 영화의 아름다움을 부러워한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테크니컬러가 주는 감동을 다시 한번 전하고자 끊임없이 애를 쓴다. 천국에 있는 사람만이 아니다. 이승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목마르다. 이 책은 잔치의 시작일 뿐이다. - page 15

이제 색들이 그려낸 향연 속으로 들어갈 차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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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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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는' 기쁨을 읽었었는데...

이번엔 '독서'!

책태기에 빠졌던 저에게 이건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이미 이 책은 6년간 독자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김겨울 작가의 첫 번째 책이라 하였습니다.

그땐 왜 몰랐을까...

인연이 아니었나...

책도 다 인연이 닿을 때 읽으며 공감하고 위로를 받는다더니 그 말을 실감하게 되었던 이 책.

'독서'의 기쁨은 무엇일지 저도 한 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책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열렬한 러브레터를 쓰는지 궁금해하는 여러분에게

지금부터 독서가 얼마나 즐겁고 훌륭한 유희 활동인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독서의 기쁨



책을 펼치기 전엔 독서법에 관한 책이지 않을까, 아니면 서평집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자마자 저자는 우리에게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책은 책과 함께 자라온 한 독자가 책에 보내는 러브레터다."

독서가 얼마나 재밌고 기쁜 행위인지 책의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파헤쳐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책과 친구가 되게 하는 '책에 관한 책' 이야기였습니다.

목차를 보면 더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1부는 책의 모습과 물적 속성, 그리고 그 안에 든 정신을 주제로 삼았다. 나는, 으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러하듯, 책의 물성을 사랑한다. 책의 모습과 그 안에 든 정신을 주제로 삼았다.

말 그대로 책의 외양, 내지, 무게, 독서대나 가름끈과 같은 물성과 책 안에 든 깃든 정신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특히나 저도 한때는 책을 많이 읽으면 내 삶이 바뀔 거라 믿고 열심히 읽기만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천 권을 읽으면 정말 삶이 바뀔까. 그럴지도 모른다. 독서에 익숙해지는 데에 있어서 독서량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곧바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되는 것도, 갑자기 훌륭한 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히려 그런 방향과는 멀어질 확률이 높다 책을 많이 읽었을 때 삶이 바뀐다는 것은, 인생에서 지속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사유 능력과 공감 능력을 증대시키고, 질적으로 훌륭한 차원의 쾌감을 주는 취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책을 즐기는 게 최고다. - page 63 ~ 64

꾸준히 즐기면서 하는 독서야말로 진정 나를 '바꿀' 것이라는걸...

저도 직접 체험(?) 하며 깨달았었습니다.

2부는 책을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다. 책을 고르고, 사고, 곁에 두고, 냄새 맡고, 읽는 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여느 장 보다 공감하면서 읽었던 '만남과 동거'.

인터넷 서점에서 굿즈를 받기 위해 5만 원에 맞추어 결제를 한다거나 사고 나서 끌리는 책부터 읽고, 다 읽기 전에 또 다른 책을 사면서 자책하고...

읽은 책보다는 읽겠다 다짐한 책들이 책장을 장식하고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책장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의 관심 분야가 책장에 반영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머릿속이 책장에 꽂힌 책과 점점 닮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책을 소유한다는 것은 언제든 책에 정신을 침범당해도 좋다는 인정이다. 책장을 들여다볼수록, 또 책장의 책을 들여다볼수록, 그 사람의 세계는 가지고 있는 책의 관심사와 비슷해진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책에 대한 소유욕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우아한 소유욕이다.

이 글을 쓰며 책장을 바라본다. 왜인지 책장을 바라볼 때마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한동안 바라보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깨어있느냐는 물음이 죽비처럼 내리친다. 내가 책을 소유함으로써 얻은 것 중 가장 소중한 한 가지만 꼽으라면, 이 물음이다. - page 120 ~ 121

책은 소유할 때만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우아한 소비, 아니 우아한 소유를 해도 된다며 자기 합리화를 해 봅니다.

그리고 저도 책을, 특히 종이책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특유의 책 냄새 때문이었는데 이를 뭐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자 덕분에 좋아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책 냄새를 좋아하는 이유를 유기 화합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책 냄새를 맡았을 때 곧바로 연상되는 분위기, 책의 신비로움, 책만이 가지는 따뜻함이 책 냄새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을. 책 냄새는 단순히 책 한 권의 냄새로 남지 않는다. 책을 꽂은 책장과 그 책장의 주인, 책에 들어간 사람들의 정성과 시간, 이 책을 읽었을 사람들과 읽을 사람들, 지금 책에 코를 박고 있는 것이 허락된 환경 모두가 책 냄새를 책 냄새로 만든다. 우리가 책이라는 존재를 통해 공유하고 있는 세계가 이 냄새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책에 기록된 글자는 모두 다를지라도 우리에게는 약속된 향이 있다. - page 155 ~ 156

맞아!

형언할 수 없었던 그 모든 것을 간직했던 책.

그래서 내가 좋아했던 것이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종이책의 매력이다! 싶었습니다.

3부는 책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책이 어떻게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었는지, 세계는 어떻게 책이 되었는지, 그리고 세계 속에서 책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다루었다.

한 권의 책이 세계가 되었다가 발견되었다가 소실되었다가 파괴되었다가 다시 세계가 된 책들-《바벨의 도서관》, 《하얀 성》, 《장미의 이름》,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은유가 된 독자》-을 소개하고 '책에 관한 책을 읽고 쓴 서평'과 책을 다루는 매체들, 책에 주어지는 상, 책에서 빌려간 이야기들, 그리고 저자의 유튜브 속 책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

사람들이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면 한다. 책이라는 좋은 친구를 다들 곁에 두고 살기를 바란다. 책을 읽음으로써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고, 몰랐던 것을 배우고, 혼자 있는 시간을 풍요롭게 보내길 바란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새로운 관점을 접하는 계기가 더 많아지길 바란다. 읽으면 읽을수록 읽을 책이 까마득히 많아지는 그 역설을 공감하길 바란다.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함을 느껴보길 바란다. 어떤 계기로 읽게 되든, 책은 일단 친해지기만 한다면 평생 배신하지 않는 좋은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 page 241

비록 내가 책태기에 잠시 허덕이고 있었지만 묵묵히 기다려주었던 책.

새삼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 언제나 내 곁을 지켜줄 소중한 나의 친구, 책...

이제야 손이 책장을 향해 뻗기 시작하였습니다.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이런 책들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고 기쁨을 선사했다고, 이런 식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던 이 책.

오히려 '책' 그대로의 모습으로부터 매력에 빠지게 해 주었던 이 책.

덕분에 독서 이전의 책 매력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독서에 빠져들 수밖에 없으며 이 즐거움의 바닷속에 오래도록 빠져들고 싶음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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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탐정단
김재희 지음 / 북오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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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김재희 작가님의 작품을 만나게 되다니!!

그렇지 않아도 유방암 투병 중이셨기에...

최근에 만난 작품들은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셨었는데...

이번엔 시한부 암 환자와 영원불멸한 뱀파이어 사이에 있는 여성 히어로들을 탄생시키고, 멋진 스릴러 한 편을 만들었다고 하니!

여느 작품보다 더 기대가 되었던 이 소설.

장르를 넘나드는 김재희 작가의 판타지적 상상력 속에 빠져들어보겠습니다.

시한부 20대 여성 암 환자들

영원불멸의 뱀파이어 히어로

다시 태어나다!

뱀파이어 탐정단



"도대체 피를 어떻게 빼는 거야?"

21세 말기 간암을 선고받은 소홍연 환자는 암전문병원인 강동구 위치 애덤 암센터에서 항암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공원 은근의 골목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온몸에 피가 없는 상태로 발견된 그녀.

특히나 젊은 암 환자를 보니 지난번 유방 초음파를 했을 때 양성 혹이 나왔던 것이 신경쓰이게 된 강력계 형사 '주다인'.

다음날 비번이라서 쉬던 중 근처 유방외과 병원에 가 검사를 했고 유방암 시한부 말기 판정을 받게 됩니다.

스물여섯인데... 이럴 수 있나......

집으로 돌아와 유방암 시한부 말기 판정 등 여러 단어를 검색하던 다인은 신약 실험을 하는 중이라는 존 듀이 암 케어 병원을 알게 됩니다.

[존 듀이 암 케어 병원 한국 분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말기 암 환자분들 대상으로 신약시험에 참가할 분들을 모집합니다.

20대에 처음으로 암 판정을 받은 환자분에 한하며, 4기 이상의 시한부 판정을 받은 분들을 모집합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최신의 항암 요법과 치료를 행할 예정이고, 신약을 시험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이메일과 전화로 문의주십시오.]

'살아야 한다. 이렇게 형사로서 인생을 펴기 전에 죽을 수 없다.'

그렇게 다인은 신약시험에 참가하게 됩니다.

전문의 과정을 밟기 전 잠시 쉬면서 생활체육 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인플루언서 겸 트레이너로 일하던 '이세경'.

체육과 의학을 겸비한 재활의학과 의사가 되기 위해 고민 중이다가 위암 진단을 받게 됩니다.

완벽한 건강전도사가 되려 했는데...

위암 말기 환자를 치유한 존 듀이 암 케어 병원을 추천받아 세경은 이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학생들을 일사불란하게 다루는 열혈 교사 오주미.

췌장암 선고받고 시한부 1년을 받았습니다.

학교에 휴가를 내고 암 케어 병원으로 향한 주미.

20대 여성인 다인, 세경, 주미는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소원이 같아. 몸속의 암세포를 몰아내고, 완치되어 나가는 것. 여기서는 거기에 집중하자. 다른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보면 더 스트레스 받아. 그건 바로 암세포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잖아. 그러니 우린 희망차고 긍정적으로 치료에 전념하자. 자, 약속~" - page 38

이들은 각자 존 듀이 주니어와 병원 의료진들 진료에 따라서 항암 주사 요법과 각종 기이한 치료를 받게 됩니다.

특히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신종 기계 캔서제로 기계에 들어가 이틀간 수면을 취하는 치료를 받게 된 다인, 세경, 주미.

치료를 받고 나니 엄청난 활력과 자신감이 생겨났고 게다가 초음파로 종양의 크기가 작아졌다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선택해. 다시 예전의 시한부 인생으로 돌아갈 건지, 아니면 영원불멸의 삶을 살든지. 그대들 몸에서 추출한 악성 종양 세포를 다시 주입하면 뱀파이어로서의 유전자는 죽일 수 있어. 하지만 다시 예전의 환자가 되는 거야." - page 80

그들은 암에서 벗어난 대신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말하는 듀이.

뿐만 아니라 뱀파이어와 인간을 모두 몰락시키고 지구를 지배하려는 뱀파이어 하이브리드족으로부터 지구를 지켜야 하는 무거운 책임도 맞게 되는데...

각자의 능력을 합해 뱀파이어 탐정단을 결성한 다인, 세경, 주미.

인간과 뱀파이어, 모두를 위협하는 하이브리드족의 음모를 파헤치는 그녀들의 활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짜릿함보다는 뭉클함이 더했던 이 소설.

시한부, 뱀파이어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을, 영원한 인생과 사라질 것들에 대해 되짚어보게 되었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장식할 죽음.

죽는다는 것...

누구나 겪지만 막상 죽음을 모르고 살아가기에 공포로 다가옴에...

그래서 영원불멸의 삶을 꿈꾸게 되지만 과연 그 삶이라고 나은 것인가...

"후후, 이것만큼 찰나의 아름다움 같은 게 있을까."

"네?"

"인간들이 여기다 자물쇠를 꽁꽁 걸고 이름을 새기고 사랑을 맹세해. 과연 얼마나 결혼하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 인생의 덧없음이여. 그건 살아본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니." - page 189

무료함, 무상함을 억겹으로 느껴야하는 무한한 생.

좋은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유한한 우리의 삶이 더 빛나는 것이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해답을 찾아야 함을 소설을 읽으며 되새겨봅니다.

또다시 감동을 선사해 주셨던 김재희 작가님.

다음번의 초대장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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