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토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저택 안, 하녀 글로리아는 손님들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며 계단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 page 9
북부 지역의 물이 범람한다는 기사가 실린 신문.
2개월간 내린 비로 침수 피해와 수재민이 계속 늘어나고 강의 수위는 도시를 덮칠 듯 높아지는 상황 속...
"비상사태를 선언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총리님?"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겠어요, 코베트 의원님. 도시에 불안을 조장하시게요? 걱정할 것 전혀 없어요. 기상학자들이 곧 우리를 안심시켜줄 겁니다. 이 음산한 비는 곧 그치고 태양이 떠오를 거예요."
총리는 비꼬듯 말했다.
"하지만 총리님! 오늘 신물을 아직 보지 못하신 건가요? 북부 지역에서 오는 전보는 받아 보셨나요? 강이 범람 직전이란 소식은요? 가옥들이 물에 잠겼다는 얘기는요? 비가 이토록 많이 내리니 강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어요! 신문에 이미 실린 사실입니다.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성문은 모두 닫아야 합니다. 북부 도시들이 어떤 지경인지 듣기는 하신 겁니까, 총리님?" - page 14 ~ 15
기상학자들이 건넨 봉투를 열어 보고서를 읽어본 총리.
불편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리곤 슬며시 입을 벌려 말하기를
"좋은 소식입니다, 여러분! 일기예보에 따르면 곧 비가 그치고 덥고 건조한 날이 이어질 거라는군요. 강 상류는 벌써 해가 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들 기상학협회는 신뢰하시겠지요. 성문을 닫는다? 하! 기차역을 봉쇄한다? 과잉 대응입니다." - page 19
사실 총리는 거짓 발표를 한 것이었고 시찰을 핑계로 도망가게 됩니다.
총리의 부재에 대해 남편 티모르는 하녀 글로리아에게 제안 아닌 제안을 합니다.
"저는 하녀예요! 할 일이 많다고요! 침대 정리! 청소! 주방 일도 봐야 하고... 그건 그렇다 쳐도 누가 저를 총리님으로 믿겠어요."
"총리가 자기 일을 끝까지 해내도록 도와야 해! 그래야 하지 않겠니? 총리가 돌아올 때까지만이야. 알겠지?" - page 53
아팔리아 총리인 척을 하라니.
어처구니없는 상황-계속 내린 비로 불어난 강, 계속 발생하는 침수 피해와 이재민, 대책을 바라는 이들의 압박에 더 내리는 비에 화산활동으로 빙하마저 녹을 이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총리 대역이 되어버린 글로리아.
어쨌든 결국 그렇게 한다 한들 아무도 속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어?!
하지만 어쩐 일인지 누구도 총리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고, 오히려 시민들의 일상을 세심하게 살피는 '글로리아의 언행'에 찬사를 보내는데...
"... 안도감. 사람들은 안도감을 느끼고 싶어 하지요. 이름들이 있으면 좋겠군요. 명단 말입니다."
그늘진 곳 어딘가에 있던 티모르가 거들어주었다.
"명단?"
"명단이요. 누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요."
...
"남문을 닫을 때 총리님께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셨는지 감히 말씀드려도 될지요? 총리님이 계시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사기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경첩 속 피스톤의 기름을 살피라고 제안해주신 덕분에, 음, 우리가 모두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씀 외에는 달리 표현할 것이 없습니다. 경이로우십니다." - page 104
지금껏 중요하거나 특별한 취급받은 적 없었던 글로리아는 점차 자신감을 얻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신뢰하는 사이가 된 티모르의 도움을 받으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한편, 넘쳐난 강물로 마을이 잠기고, 결국 지붕으로 대피한 클렘과 그 부모 그리고 잡종견 '하인즈'.
한참 뒤 구조팀이 배를 타고 이들을 구하러 오지만 배에 오를 수 있는 건 오로지 사람뿐이었습니다.
결국 홀로 남겨진 하인즈는 자신이 클렘을 찾아가기로 마음먹고, '내차야 씨'라는 묘한 개가 탄 자동차에 올라 하류로 떠내려가게 됩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 속-동료를 얻고 잃으며 클렘이라 착각하고 다가간 인간에게 상처를 입지만 다른 인간으로부터 치료와 위로를 받기도 하는 등-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코를 믿으며 멈추지 않고 걸었더니 간신히 클렘과 재회를 하게 되고
개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사이, 클렘이 흘리는 짭조름한 행복의 눈물이 엉겨 붙은 털 위로 떨어졌다. 말도 입으로 하인즈를 툭툭 치고 있었는데,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됐어, 친구. 이제 됐어.' - page 313
다시 글로리아로 돌아오면 도시의 주요 수입원인 '공장'의 침수를 막으려고 그녀가 한 적도 없는 발언을 인용하거나 광견병에 걸린 개들이 돌아다닌다는 거짓 정보로 시민들을 동조시키고 정작 시민들에게 강요했던 자들은 자신만의 탈출 방법을 논의하며 호화로운 만찬을 즐기는데...
점점 프래스토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가 쌓여가는 와중에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글로리아는 어떤 선택을 할지...
"나는 총리가 아니다! 난 하녀다."
그녀의 대담하고 짠하며 감동적인 휴먼 블랙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공익을 위해 사용해야 할 예산이나 재산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하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작성된 기사와 조작된 정보를 발송하는 언론.
그리고 정치인과 신문의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시민들의 태도.
누구를 비난할 수 있을까...
다 똑같은 인간인 것을...
나조차도 반성하게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를 보면서 같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실제 1928년 미국에서 일어난 홍수(원문은 1928년으로 되어 있지만 정황상 1927년 미시시피 대홍수로 추정됨-옮긴이)를 모티프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저자는 무려 약 100년 전의 사건을 가져온 것일까?
이에 대해 책의 마지막에서 답해주었습니다.
이 책은 질문을 던집니다. 같은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책은 또한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인터넷, 신문, 광고 같은 것을 통해 믿고 있는 것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신문기자들과 정치인들은 일반적으로 거짓말쟁이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믿는 것을 말하고, 여러분도 그걸 믿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 page 541
지금까지 실수하고 틀리고 놓쳤던 일이라도 우리가 바꿀 수 있음에 희망을, 무엇보다 우리는 지성과 안목을 길러야 함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던 거짓말.
가볍지만 묵직한 한 방이 있었던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