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필두로 7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다시 대학에 입학한 인물이 충만한 기쁨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그린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 page 44
교지 편집부 활동에서 조금씩 자신만의 글을 써나가면서 여성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그 시대의 상황으로부터 인물들 간 틈이 그려진 「몫」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희영은 열어놓은 창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 page 79 ~ 80
동갑내기 인턴과 함께 카풀을 하면서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대화를 통해 생긴 균열이 결국 시간이 흐른 뒤 서로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짚게 된 「일 년」
그녀가 퇴원하기 전날에도 다희는 그녀를 찾아와 곁에 머무르다 갔지만, 다희도 그녀도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다희의 삶에서 비켜나 있었고, 다희 또한 그녀에게 그랬다. 퇴원하던 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안방 창가에 서서 내리는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에 달라붙은 눈은 금세 작은 물방울이 되었지만 바닥까지 내려간 눈은 지상의 사물들을 흰빛으로 덮었다. 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 채로 살아 있었다. - page 123 ~ 124
그 무엇보다 강렬했던 「답신」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 언니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엄마가 집을 나간 후 아빠의 방치 속 책임감이 강한 3살 터울의 언니에게 많이 의지를 하며 살아갔었는데...
어느 날 집 앞에 검은색 세단에서 언니가 내리게 됩니다.
당황스러워하며 우연히 만난 학교 선생이 태워다 줬다고는 했지만 거짓말임을 눈치챈 나.
그리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자신보다 열다섯 살 많은 그 선생과 결혼할 거라는 언니의 모습에, 상견례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언니를 무시하는 그 남자를 통해 나는 어떻게든 언니를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무력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결국 어떤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고 결국...
내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고 말하면 너는 왜냐고 물어. 그럼 나는 내가 너희 아빠에게 심한 폭력을 저질러서 너희 아빠에게 심한 폭력을 저질러서 너희 가족에게 절연당했다고 답하지. 왜? 다시 묻는 너에게 나는 답해. 너희 아빠가 내 언니를 괴롭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그에게 경고하고도 싶었다고. 너는 내게 다시 왜냐고 물어. 나는 답하지. 사랑하는 언니를 보호하고 싶어서, 언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너는 왜냐고 물어. 나는 대답해.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니까. 왜? 너는 말간 얼굴로 내게 다시 묻지. 그럼 나는 답해.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이모는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만날 수 없게 된 거네. 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지. 그래, 맞아. 네 말이 맞아. 어느덧 나와 너는 얼굴을 마주보고서 웃고 있어. - page 177 ~ 178
왠지 모를 웃음 뒤의 눈물이 그려지는 건...
후반의 세 편의 소설은 흔히 '가족'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른,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살펴준 오빠의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동생의 이야기인 「파종」
하지만 모두 다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었다.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라도 그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단순한 진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이제 세상에 없으며, 그가 자신에게 준 마음을 갚을 방법 같은 건 없다는 진실이었다.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고,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은 지울 수 없는 후회와 미안함으로 남으리라는 진실이었다.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 page 199
어린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낸 이모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새겨진 흔적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하는 모습이 그려진 「이모에게」
"희진이."
이모가 작게 내 이름을 불렀다.
"우리, 희진이."
이모는 그렇게 말하고 눈을 비볐다.
"추워."
"춥다고?"
"너가, 추워."
"하나도 안 추워."
그러자 이모는 천천히 내 곁으로 와서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세상에 단 한 명,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이모였으니까. 그건 내 자존심이자 이모에 대한 예의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는 고르게 숨을 내쉬면서 잠이 들었다. - page 260 ~ 261
육십대 '기남'이 홍콩에 살고 있는 작은딸 '우경'을 만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나지만 자신과 우경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고 자신의 실수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뜻밖의 위안이 된 손자 '마이클'의 인상적인 한 마디
"할머니."
기남의 품에서 나온 마이클이 기남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 page 318 ~ 319
가 그려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까지
각 소설마다 짧지 않은,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호흡으로 내쉬고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먹먹해짐에 참 많이도 방황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우리 모습과도 같았기에, 그렇게 살아가기에, 또다시 나아가고 있었음에 뭐라 형언해야 할지...
희미한 빛이 잔상으로 아련히 남았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후기에 남긴 이 말이 참 와닿았습니다.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고 나는 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풀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 page 348
이제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찬찬히 음미하며 만나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