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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탐일기 - 디킨스의 만찬에서 하루키의 맥주까지, 26명의 명사들이 사랑한 음식 이야기
정세진 지음 / 파피에(딱정벌레) / 2017년 2월
평점 :
'음식'에 관련되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결혼을 하고난 뒤였습니다.
그 전까지만해도 '요리'에 '요'도 관심이 없었고 엄마가 차려주신 밥상에는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요리를 해야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의 막막함.
요리가 아닌 조리를 하였지만 '손'으로 요리를 한 것인지 '발'로 요리를 한 것인지, 과연 먹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에 놓였을 때 여자로써의 수치심.
더구나 아기가 태어나고 점점 자라면서 엄마의 정성어린 음식으로 자라날텐데 그에 적합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의 좌절감.
그래서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불어 '음식'에 대해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탐일기』
단순히 '식탐'에 대해 주인공의 일기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디킨스의 만찬에서
하루키의 맥주까지.
26명의 명사들이 사랑한
음식 이야기
제 추측과도 달라서 조금 놀라웠지만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것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 '하루키'의 이야기도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가끔 '술'과 관련되어서, '음악'에 관련되어서 이야기가 진행되곤 하였기에 그와 관련된 책들이 시중에 있긴 하지만 아직은 접해보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명사들의 음식 이야기가 궁금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는 조선의 선비 '송강 정철'부터 제인 오스틴, 고흐, 디킨스, 프리다 칼로, 헤밍웨이, 피카소, 왕비 '카트린 드 메디치'까지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이들이 나오기도 하였고 잘 알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위치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이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요즘 관심이 갔던 <고통을 이겨낸 예술가의 레시피 - 프리다 칼로와 그녀가 만든 음식들>이 인상깊었습니다.
사실 '프리다 칼로'에 대해 알게 된 건 최근이었습니다.
『화가의 통찰법』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서 그녀의 일생을 담은 책을 구입해서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이야기는 쉽사리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는 그림과 함께 요리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힘겨운 삶을 버텨냈다고 하였습니다.
리베라가 프리다의 작품을 보고 한 이야기.
"예기치않은 표현의 에너지와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진정한 엄정함을 보았다.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졌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였다." - page 126
하지만 그녀의 작품만큼의 명성을 결혼에선 받을 수 없었습니다.
몇 번의 배신감과 고독감을 선사한 남편, 디에고.
또한 그녀의 삶에 고통을 안겨준 것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불임이 되어버린 몸.
몸과 마음의 고통을 동시에 겪으면서도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평생소원은 단 3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 page 128
평생을 디에고에 대한 애증 속에 살던 프리다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디에고의 전처인 과달루페로부터 전수받은 레시피를 요리함으로써 고독과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만든 음식들은 호두 소스와 칠리, 호박 소스를 곁들인 닭고기와 옥수수 반죽을 쪄낸 빵의 일종인 타말레스.
그밖에도 살사 베르데에 찍어 먹는 나초와 호박꽃 수프, 노팔스 선인장을 곁들인 돼지고기 요리 등.
정열적인 여인 프리다 칼로는 캔버스와 주방을 오가며 마음속의 불꽃을 예술작품으로, 요리로 승화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가 <젓가락에 콕 찍은 새까만 게장의 추억 - 박완서의 작품에 녹아 있는 개성 음식>이 인상깊었습니다.
우리의 문학에 한 획을 장식한 그녀, 박완서.
그녀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늦은 40상에 문단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작품들은 날카로운 풍자와 함께 소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곤 합니다.
그녀의 수필집을 보면 서울에서 맛본 개성 음식보다는 고향 개성의 소박한 음식들을 꼽았다고 합니다.
메밀칼싹두기와 수수팥떡, 강된장과 참게장 등.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맛본 참게장에 대해 "맛의 오지"이며 "궁극의 비경:이었다고 극찬을 하였다고 합니다.
가을철 벼가 누렇게 익을 무렵 잡은 참게는 볶거나 구워서 먹었다는데 노란 알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고. 그러나 참게로 만든 진짜 별미는 "고약처럼 새까맣고 끈끈한 암게의 장"이었다. 그 새까만 게장을 할아버지는 젓가락으로 콕 찍어 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고, 어린 손녀에게 게장의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 page 229
그녀의 이야기처럼 '고약처럼 까만'장의 정체는 잘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 음식에 담긴 추억은 왠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책은 명사들이 사랑했던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에 읽으면서 그들 역시도 평범한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음식이 소중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추억이 있기에 그렇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아닌 제 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 음식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평범하거나 소박하였습니다.
하지만 음식에 추억을 덧붙이고 의미를 주고나니 비로소 그들만의 '음식'이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읽고나서 저 역시도 제가 사랑하는 음식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가 떠올린 음식도 그리 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엄마의 정성이 들어있기에, 엄마의 손길이 있어야 가능한 음식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머리말>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명사들이 사랑했던 음식이다. '녹색의 요정'으로 불리던 마성의 술 압생트나 아랍에서 전래돼 기독교로 '개종'한 커피, 옛 우리 조상들의 고픈 배를 채우고 망국의 한조차 잊게 한 메밀 등은 사람과 함께하면서 때로는 한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앞으로도 음식은 보다 다채로운 인류의 역사를 써 나가는데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page 7
나에게 소중한 음식도 작게는 소소한 행복에서 크게는 나의 역사 속, 우리의 역사 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왠지모르게 책을 읽고난 뒤 엄마의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반찬들이 그리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