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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시 이야기 ㅣ 펭귄클래식 135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은 시민사회를 싹트게 했다. <두 도시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런 프랑스 혁명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낭만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
영국의 왕좌에는 턱이 큰 왕과 못생긴 왕비가 앉아 있었고, 프랑스의 왕좌에는 턱이 큰 왕과 아름다운 왕비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빵과 생선을 쟁여 놓고 사는 두 나라 모두의 귀족들은 당시의 전반적 상황이 영원하리라 확신했다. ( p. 13, 첫 문장)'
런던 텔슨 은행 직원 자비스 로리는 파리로 가는 중이다. 에브레몽드 가문에 의해 억울하게 18년 동안 옥살이했던 프랑스 의사 마네뜨 박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네뜨 박사의 외동딸 루시와 함께 했는데, 로리는 마네뜨가 감옥에 있는 동안 루시를 갓난아기일 때부터 돌봤다.
이들은 파리에서 석방된 마네뜨 박사를 돌보고 있던 드파르주 부부를 찾아간다. 런던으로 돌아온 마네뜨 박사는 딸과 행복하게 지내던 중 스파이 혐의로 재판 중인 찰스 다네이의 증인으로 나선다. 다네이는 무혐의 풀려나고 서로 호감을 가지고 있던 루시와 결혼한다.
파리에서는 대혁명이 시작된다. 드파르주 부부는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마네뜨 박사가 갇혀있던 방에서 드파르두 부인 가족이 에브레몽드 가문에 의해 얼마나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는지를 기록한 쪽지를 발견한다.
에브레몽드 가문의 다네이는 귀족에 부역했다는 죄로 위험에 빠진 가문의 집사 가벨을 구하기 위해 성난 파도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고 죽이는 광기로 가득 찬 파리로 다시 돌아온다. 루시와 마네뜨 박사도 다네이를 구하러 파리로 쫓아오고, 루시를 사랑하는 변호사 시드니 카턴도 이들을 구하려고 파리로 온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낭만적 생각을 내려놓게 된 이유는 비판적 시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권력을 쥔 민중은 단순히 귀족이거나 귀족의 일을 봐줬다는 사실만으로 이들 모두를 사형에 처한다.
'매일 자갈 깔린 거리로 사형수를 태운 호송 마차가 힘겹게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아름다운 소녀, 갈색 머리, 검은 머리, 잿빛 머리의 매력적인 부인, 젊은이, 정정한 노인, 귀족 출신, 농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기요틴에게 붉은 포도주를 부어주었다. 역겨운 감옥의 어두침침한 감방에서 햇빛 비치는 곳으로 나와 거리를 지나 기요틴의 끝없는 갈증을 채워주었다. (p. 395)'
다네이는 가문의 악행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귀족 신분을 버렸다. 드파르주 부인은 그것과 상관없이 가족의 원수인 에브레몽드 가문의 다네이는 물론 그의 가족을 몰살하려고 끝까지 쫓아가 복수를 시도하지만 그녀의 과거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는다. 권력이 귀족에서 민중으로 옮겨가는 식의 시스템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가 변할까. 그런 의구심이 혁명에 대한 나의 낭만을 지워버렸다.
그렇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무엇일까. 찰스 디킨스는 사랑을 말하는듯싶다. 사랑에는 선택이 따른다. 사랑이 공허한 이유는 선택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한 가장 숭고한 선택은 희생이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해 십자가를 선택하는 희생으로 인류를 구했듯이 말이다.
로마시대 유대인들은 혁명가 예수를 기다렸다. 로마를 끝장내고 핍박받던 유대인에게 자유를 가져다줄 왕인 줄 알았는데, 예수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전파하며 사회를 변화시킬 힘으로 혁명이 아닌 사랑을 선택했다. 유대인들은 실망했고 급기야 예수를 버렸다.
다네이는 가문의 집사 가벨을 구하려고 사랑하는 가족을 등지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지옥 같은 파리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시드니 카턴 역시 사랑하는 루시와 그의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선택을 했다.
역사의 흐름에 개인을 개입시키면 역사는 훨씬 복잡해진다. 억압자와 피억압자로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억압자 속의 어떤 개인, 피억압자 속에 어떤 개인은 억압자 또는 피억압자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의 사정을 어쩔 수 없이 생략하고 순식간에 일괄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는 혁명으로 사회를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답답하더라고 유대인처럼 실망하면 안 된다. 한사람 한 사람 변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 개인의 변화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찰스 디킨스의 또 다른 작품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사람들을 멀리하던 그토록 완고한 스크루지 영감의 마음도 변했는데?
어떤 선택이든 희생이 뒤따르는 사랑이 있다면 사람의 마음도 변하고 사회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런던과 파리, 두 도시의 왕좌에 앉아있던 턱이 큰 왕과 못생긴 왕비, 턱이 큰 왕과 아름다운 왕비는 자신들이 영원할 줄 알고 민중을 사랑한다고 말만 할 뿐, 선택을 뒷받침하는 어떤 희생도 하지 않았다. 그러한 공허한 사랑은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사랑은 사회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루시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시드니 카턴의 고백처럼 사랑은 숭고하고 영원하기까지 하다.
'"...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품에 안긴 내 이름을 딴 사내아이가 한때 나의 길이기도 했던 인생길을 훌륭히 걸어가리라는 것을. (...) 리고 들린다,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가.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곳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 (p. 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