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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평점 :
여권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도 소개한) 2004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인 이란 사람 메르한 카라미 나세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나세리는 난민 서류를 분실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번 터미널에서 18년을 지냈다.
영화 <터미널>에서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국적이다. 그저 멋진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뉴욕으로 향한다.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크로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보스키의 비자가 취소된다. 이때부터 미국에 입국할 수도 조국으로 귀국할 수도 없어 JFK 공항에 머무르는 악몽이 시작된다.
여권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 놓기도 한다.
<여행 면허>는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가능하게끔 만들기 위해 이들이 의존한 서류에 관한 내용이다. (P. 26)'
기원전에도 여권은 있었다. 여권은 우리 인류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또 여권은 어떻게 여행 꼭 필요한 것이 됐을까? 여권은 예술과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 정체성, 국가 권력, 국제적 불평등 문제까지 모두 여권에 반영돼있다. 이러한 여권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여행자는 반드시 여권이 진본임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서류와 자신이 일치함까지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p. 41)'
1976년 초가을 프랑스 영토에 도착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최근 발급된 이집트 여권을 소지했다. 오래전 사망해 미라가 됐는데 왜 여권이 필요했을까. 신원이 확인돼야 유해 이송이 가능하다는 국제법, 생사와 관계없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프랑스 법률, 사망자조차 출국하려면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집트 법률 등 그 이유가 다양하다.
츠바이크는 회고록에서 여권의 발달이 가져온 상실감을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행처럼 번져 각국 정부는 외지인을 점점 더 수상하게 여길 때였다. 정면과 좌우 옆얼굴 사진, 열 손가락 지문, 각종 증명서 등 범죄자를 떠올릴 정도의 굴욕이 여행자에게 부과된다고 츠바이크는 증언했다.
헤밍웨이는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급하고 엉성하게 휘갈겨 쓴 탓에 유명한 'writer 작가'가 아니라 'waiter 웨이터'로 오인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중에 여권 발급처 앞으로 정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세계 난민 실상을 알리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에서 아이웨이웨이는 수용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리아인 마흐무드와 여권을 바꾼다.
'이 교환은 여권 통제 의례를 신랄하게 패러디한 장면으로, 여권 소지자가 체류할 국민국가에 위협이 되는지 판정하기 위해 서류를 검사하고 소지자를 심문하는 대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여권, 자신의 신원, 자신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로 급진적인 환대를 표현한다. (pp. 266, 267)'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스마트 패스 서비스가 지난해 7월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했다. 간소화와 편리함을 앞세워 여권은 점점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 뻔하다. 디지털화는 신원 확인이나 국경 출입 과정 등에서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밀한 내 정보의 저장 및 공유를 더 많이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화된 개인 정보를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하는 움직임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NSK 국가의 여권, 국경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세계업무기구의 세계 여권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반反여권' 움직임은 더 이상 여권에 '좋은'이나 '나쁜'이란 딱지가 붙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신체는 지나가게 하는 반면 다른 신체는 붙들리는 일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서류로서 말이다. (p. 368)'
어쩌면 보완과 효율성을 핑계로 진행되는 여권의 디지털화는 제2의, 제3의 나보스키를 만들어 공항에 가둬두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반反여권' 움직임이 있어 다행스럽다. 여권 디지털화에 제동을 걸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도 전에 개인 정보를 토대로 누구는 환영하고 누구는 거르는, 그런 통제에 여권이 사용된다면 더 이상 이동성을 보장하는 여권으로서 기능은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어느 누가 뉴욕 JFK 공항의 나보스키가 되기를 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