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 전장의 눈물, 운명의 날 역사 딥 다이브 1
김휘찬 지음 / 한언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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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은 전쟁을 시작하고, 부자는 무기를 대고, 가난한 사람은 자녀를 제공한다.
전쟁이 끝나면
정치인들은 미소를 지으면 악수를 하고, 부자들은 생필품의 가격을 올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자녀의 무덤을 찾아간다.'
- 세르비아 속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또 전쟁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이 전쟁의 참혹함은 인류가 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은 살아있나...' 그리고 인간이란 부조리하고 허무한 존재라는 결론에도 이르게 됐다.


유튜브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전쟁사를 전해주는 김휘찬의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 : 전장의 눈물, 운명의 날>은 제2차 세계대전을 낳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로 확산 전개되는 과정을 각국의 승패와 운명을 갈라놓은 전장의 하이라이트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작전에는 결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타협과 갈등은 물론, 독선, 오해에서 비롯된 판단 오류 등 다양한 뒷이야기가 숨어있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그 전날 독일 친위대 소속 특수부대가 폴란드 군복을 입고 위장해 가짜 선전포고문을 낭독한 일이 빌미가 됐다.

사막의 여우 롬멜은 계속되는 무의미한 희생을 막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은 무시하고 후퇴 결정을 했다.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결행했던 공격 역시 리비아를 지키라는 정식 임무를 어긴 롬멜의 독단이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일방적 파기하고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 작전인 소련 침공, 바르바로사 전쟁을 시작했다. 4년간 벌어질 이 전쟁을 절멸 전쟁이라는 일컫는 이유는 게르만 민족의 새로운 생활권과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곳에 사는 열등한 슬라브 민족을 절멸한다는 프로파간다 때문이다.

'<전쟁론>의 저자이자 군사학자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Carl von Clausewitz 가 말한 것처럼, 전쟁은 결국 정치의 연속이자 상대 방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무력 행위입니다. 따라서 '의지의 강요', 그것이 곧 전쟁의 목표가 되겠죠. (p. 110)'

사상 최대의 전차전 쿠르스크 전투에서 민슈타인은 예비로 남겨둔 제2친위기갑군단을 투입해 소련군을 돌파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기갑군단은 히틀러에게 이탈리아 방위 업무를 부여받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만슈타인은 조금만 더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건의했으나 히틀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히틀러의 생일 바로 다음 날인 1945년 4월 20일 소련군 포병부대는 베를린 시내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위중한데도 편집증적이고 신경질적인 히틀러는 여전히 혼자 망상에 사로잡혀있었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들을 지도 위에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자신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계속해서 전쟁을 지휘하던 그가, 처음으로 패배를 인정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냈습니다. "우린 전쟁에서 진 거야!" (p. 252)'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옥처럼 아름답게 깨져 흩어진다'는 뜻으로, 최후의 한 명까지 후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싸운다는 의미의 '옥쇄'명령을 민간인에게도 강요했다. 이런 격렬한 저항은 미군에게 '작은 섬에서도 이 모양인데, 본토에 상륙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을 만들어주었다. 그런 생각은 '승리가 확실한 가운데 병사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있을까'라는 논리로 이어졌다. 격렬한 저항이 없었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 보이'와 '팻맨'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전쟁에 관심이 없을지 몰라도, 전쟁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 (p. 279)'

지금도 전쟁의 한가운데 놓여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 국가의 사람들 그리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그런 처지에 있다.

정권 연장을 위해 정치인은 전쟁을 불사한다. 거대 방산업체는 있는 힘껏 전쟁을 부추긴다. 힘없는 국민들의 아이들은 전쟁에 동원돼 죽어나간다.

제2차 세계대전처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언젠간 끝날 것이다. 정치인들이 만나 악수하며 협정을 맺을 것이다. 전쟁 복구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될 것이고, 자식, 친구, 이웃을 잃은 전쟁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은 상처가 너무 쓰라린 나머지 신을 원망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서로 불신하게 될 것이다.

전쟁으로부터 무언가 배웠어야 함에도 인간은 그러기보다 또 전쟁을 시작하고 무기를 대고 자녀를 제공한다. 악수하고 물가는 올라가고 자녀의 무덤을 찾아 슬퍼할 것이고... 신에게 화풀이하고 세상이 부조리하다 원망하는 짓을 반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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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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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살이 돼서야 처음으로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관람했다. 내 속에서 탄성이 터졌다. 아름다웠다. 환상 그 자체였다.

그때 내 옆에 앉은 발레를 전공하는 연인으로부터 백조 오데트와 흑조 오딜은 프리마 발레리나 1인이 2역을 하며 푸에테 32회전을 아름답게 소화해 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사귀는 여자와 발레 이야기를 하려면 쓰이는 용어와 웬만한 작품의 스토리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공부했다.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p. 26)'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무용수 가운데 가장 희귀한 점프 능력을 타고난 점퍼였다. 예술가는 만들어진다. 그런 면에서 나타샤는 예술가가 아니었다.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는 만들어지지 않고 태어난다.

나타샤는 전 세계 모든 발레학교 중 가장 섬세하고 우아하기로 정평이 난 상트페테스부르크 바가노바에 니나 베레지아와 합격한다. 그곳에서 소피아와 페료자를 만나 우정을 쌓으며 이들 넷에게는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모스크바 국제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로 선정된 나타샤는 볼쇼이 극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 사샤, 볼쇼이 발레단의 남자 수석 무용수 드미트리를 만난다. 그리고 마침내 나타샤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당수스 에투알, 최상위 수석 무용수 제안을 받고 사샤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파리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나타샤는 <지젤> 공연을 앞두고 추락한다. 지젤이 젊은 귀족 알베르의 비밀을 알고 충격에 빠졌듯이 나타샤는 사샤와 드미트리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알고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전거를 타고 개선문 로터리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미끄러지는 무언가에 나타샤는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두 개의 헤드라이트가 하나의 둥근 빛으로 합쳐지면서 도시 전체를 지우고 나를 집어삼키는 순간이다. 그렇게 나는 날개를 얻은 이카루스처럼 환히 웃으며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p. 464)'

사고로 은퇴한 지 2년 지나 나타샤는 다시 샹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정상에 있던 나타샤에게 상처를 줘 바닥으로 떨어뜨린 드미트리와 사샤가 있었다. 드미트리는 나타샤에게 지젤 역을 부탁하며 사샤와 함께, 사고로 못다 한 <지젤> 공연 마무리를 제안한다.

'"음. 첫째, 너를 보고 있으면 꼭 날 보는 것 같아. 두 번째 이유, 유감스럽게도 네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발레리나라서. 정당한 평판이지." 몸을 일으킨 그가 요새에 솟은 두 개의 탑처럼 길고 튼튼한 다리로 우뚝 선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아무에게도 절대 얘기하지 마. 나한테도 하지 말라고. 내일 런스루 리허설에서 보자." 이 말과 함께 드미트리는 홱 뒤돌아서 자리를 뜬다. (p. 490)'


한 인터뷰에서 김주혜 작가는 <밤새들의 도시>를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신은 나탈리아 레오노바에게 천재적인 점프 능력을 주었다. 그리고 대가를 요구했다. 버티다가 결국 신에게 사랑을 내주고 <지젤> 앞에서 추락했다.

나타샤에게 아직 신이 준 점프라는 날개가 꺾이지 않고 남아있었다. 날갯짓에 안간힘을 써 새들처럼 그의 집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글쎄, 아마 저기가 집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세료자가 창문을 당겨서 닫으며 말했다.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건 아주 강렬한 본능이지. 죽음의 두려움보다도 더 강렬한." (p. 515)'

<지젤>에 향한 사랑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마지막 힘을 <지젤>과 함께 날아오르는 날갯짓에 쏟아부었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알리스 볼라트 프로프리스 Alis volat propriis (p. 518)' 자신의 날개로 날아올랐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그녀는 주어진 삶에 그녀의 '세계'를 창조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세계를...


그동안 낯설었던 발레 작품과 발레 용어를 읽다 보니 이십 대 막바지에 만났던 그녀가 떠올랐다. 희미했던 그녀가 다시 뚜렷해졌다. 그쪽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주말마다 마산에서 서울로 레슨을 받으러 올라왔었다. 마침내 발레로 유명한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녀의 석사논문은 '발목 부상에 관한...' 것으로 기억한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그녀는 '예술과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반대로 사랑도 포기했는데, 무슨 까닭인지 예술과의 사랑도 그만두었다는 소식이 슬펐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했을 텐테. 높이 날아올랐으면 좋았을 텐데. 신의 그녀에게 점프 능력을 주지 않아서일까? 그래서 예술가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힘겨웠을까?

'예술가와 예술 간의 사랑', 어쩌면 천재에게만 주어진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깐 천재가 아닌 우리는 예술 간의 사랑이 아닌 그냥 사랑만 했어야 했다. <밤새들의 도시>,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발레 용어들이 날 다시 아릿하게 했다. 발레만큼이나 아름다웠던 시절, 발레만큼이나 환상적이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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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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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노선을 따라가는 버스에 앉아 생각한다. 이 버스가 바닷가로, 숲속으로, 고즈넉한 들판으로 날 데려다주기를. 하지만 내가 그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 한, 내가 생각한 그곳, 그곳에 절대 갈 수 없다.


<너무 늦은 시간>
공무원 카헐은 약혼자 사빈이 왜 자신과 파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약혼반지를 찾는 기뻐해야 하는 날이긴 하지만, 추가 비용이 있다는 말에 주인이 호구로 여기는 것 같아 화를 냈고, 사빈이 구사하는 영어가 이상할 때 지적하곤 했다. 사빈이 짐을 들일 때도 사빈의 물건이 많아 당황스럽다고 했다.

아이랜드 남자들이 여자를 "씹년"이라고 부르는 걸 이상하게 여겨 그냥 아일랜드 관습이라고 설명했다. 사빈이 식재료를 사와 음식을 만들어줄 때도 그러려니 가만히 있었다.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캐보면." 카헐이 말했다.
"뭐?"
"파보면'이 아니라 '캐보면'이라고." 그가 말했다.
"봤지?"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결국 똑같잖아? 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요만큼도 봐주질 못하는 거야." ( p. 39)'

카헐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빈을 생각하며 말한다. "씹년."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하인리히 뵐은 죽으면서 자신의 집을 작가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남겼다. 뵐 하우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주인공은 음식을 먹고 글을 쓰려고 하는 데, 독문학 교수라는 남자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뵐 하우스를 둘러보고 싶다는 그는 여주인공이 대접한 케이크도 먹고 대화를 나눈 다음 나가다가 한 마디 한다.

'우리는 글을 쓸 수가 없어서 그러는 건데, 그런데 당신은 작가라면서 하인리히 뵐의 집에서 케이크나 만들고 있군요."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뭐라고요?"
"하인리히 뵐의 집에 와서 케이크나 만들고 옷도 안 입고 수영이나 한다고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매년 찾아오는데, 항상 똑같아요. 대낮에 잠옷이나 입고 돌아다니고, 자전거 타고 술집이나 가고!" (p. 76)'


<남극>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다. 며칠 동안 가족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떠난 여자는 감옥을 개조한 술집에서 한 남자를 만나 이끌리어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당신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남자가 말했다. "보살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 " (p. 92)'

여자는 남자의 집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운 남극을 경험한다. 침대에 묶인 채 어릴 때 생각했던 지옥, 반쯤 얼어있지만 절대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못 느끼는 지옥을, 그곳에서 영원을 생각한다.


관계가 빠개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리 친밀한 약혼녀일지라도 "씹년"이라며 여자를 혐오하거나 심지어 그녀에게 주는 건 뭐든지 아깝다고 생각하면 그 친하고 가까운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낯선 사람일지라도 관계는 엉망이 될 수 있다. 내가 가지지 못할 걸 상대방이 갖고 있다는 질투에 눈이 멀어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낯선 관계는 시작하지도 못한 채 깨져버린다.

아이들과 남편 뒤치다꺼리만 하는 부인이라면 어떤 한 남자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꿈을 꿀 수 있다.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런 남자와 관계를 맺었다. 꿈이 영원한 지옥이 되어 관계가 산산조각 나기도 한다.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p. 7)'

옮긴이 허진은 10년씩의 차이를 두고 발표한 세 단편을 다양한 남녀 관계를 보여준 작품으로 묶는다. 남녀 관계뿐 아니라 모든 관계는 한쪽 시각에서 보면 터무니없다. 내가 볼 때 혐오인데 다른 쪽은 그냥 관습일 뿐이다. 오만무례한 행동이 분명한데 한쪽에선 여성작가가 하도 한심해서 하는 충고다. 지금 현실이 행복하지만 또 다른 현실을 엿보려는 객기를 부려본 것뿐인데 그쪽에서는 자신이 꿈꾸던 현실로 끌어다가 묶어 놓는다.

한 쪽이 사라지거나 아님 내가 마음을 고쳐먹어야 관계가 지속된다. 버스에서 내리면 버스는 정해진 노선을 따라갈 것이고 나는 다른 버스를 기다리던지 걸어가면 된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냥 버스에 앉아 있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가 평소에 알던 곳이지만 그 목적지로 가면 된다. 한 발은 버스에 걸치고 한 발은 버스 밖으로 내미는 건?... 그건 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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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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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눈을 쉬게 하려고 신문을 내려놓았고 생각에 잠겨서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p. 119)'

스티븐슨 가족은 구월이 되면 시뷰라고 불리는 곳의 허깃 부부에게 객실을 빌려 보름 동안 휴가를 보낸다. 20년째다. 스티븐슨 씨는 그곳으로 가는 열차 안 맞은편 의자에 앉아 졸고 아내를 쳐다본다. 파란 서지 코트와 치마를 입고 있는데 벌써 이 년 전에 산 옷이라 어깨 부분이 바랜다. 아내의 흰 머리카락도 보인다.

스티븐슨 씨가 아내를 만난 건 회사 동료 톰의 여동생이 출연하는 뮤지컬에서였다. 우유 짜는 여자들 사이에서 아내는 황홀한 작은 미의 화신이었다. 신혼여행 때 세인트 매슈스 로드에 있는 허깃 부부 객실을 빌린 인연이 20년간 계속된 것이다. 아이들은 커서 메리는 곧 스무 살이 되고 딕은 열일곱 살, 막내 어니는 열 살이다.

아이들이 성장한 만큼 허깃 부부의 객실도 변했다. 검게 변한 가스등 받침대, 닳고 닳은 서랍장, 무너질 것 같은 세면대, 해진 커튼의 가장자리 등등. 스티븐슨 부부가 자는 침대도 가운데가 꺼져 언제 베개 받침을 놓아야 했다. 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은 객실이 우중충하고 끔찍할 정도 형편없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은 스티븐슨 가족이 영국에서 가장 햇볕이 좋다는 보그너 레지스로 휴가를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것부터 휴가 마지막 날까지 하루하루를 다룬 소설이다. 극적인 반전이나 계획에 흐트러짐 없이 휴가를 보낸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가족은 각자의 방법으로 소소한 행복을 찾아 휴가를 즐긴다.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는 가족의 유대를 유지하면서.

스티븐슨은 저녁을 먹은 다음 파이프 담배를 채우고 자신만의 조용한 길을 따라 걷는다. 스티븐슨 부인은 설거짓거리도 없고, 차려야 할 아침 식탁도, 닦아야 할 신발도,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한 시간을 앉아 그저 게으르게 보낸다. 메리는 남자 친구를 만나는 모험을 즐기고, 딕은 혼자 해변을 따라 나가 바다를 보면서 자신의 지난 일 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들에게는 객차 안에서 떨어져 앉았다가 함께 모여 앉는 것마저도 행복하다.


작가 세리프는 보그너 레지스에서 사람들을 지나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 가족 하나를 무작위로 선택해 그들이 바닷가에서 연례 휴가를 보내는 이야기가 쓰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 한다. 평범한 가족의 보름간 여름휴가 이야기,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여서 이 소설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p. 341, 342)'

확실한 윤곽이나 반전이 없어 지난 일이 희미하지만 스티븐슨 가족의 여름휴가 이야기처럼 나의 언젠가 보름을 떼어 놓으면 <구월의 보름>이 되는 것이다. 행복하다 여기고 감사하게 되는 그런 보름 동안 나날 말이다.

정리를 다루는 유튜브를 아내가 본 모양이다. 앨범을 정리해놓지 않고 죽으면 아이들에게 짐이 된다고 소리를 들었는지 지난 일주일 동안 앨범을 꺼내 놓은 사진을 떼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하면 계속 불러댄다.
"자기야 이 사진 좀 봐. 이때 기억나?"
"우리 애들이 이렇게 귀여웠어~"

세월이 그때 그 일의 예리한 윤곽을 무디게 해놓아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날 하루가 몽땅 생각나기 시작했다. 사진을 보며 그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행복해 저절로 웃음 짓게 만든다. 그래서 앨범 하나 정리하는 데 하세월일 수밖에 없다.

'천천히 잡지가 그녀 무릎 위로 떨어졌고 그녀는 남편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 104)'

마주 앉아 본 적이 있었나? 마주 앉기는 했지만 각자 할 일을 했다. 밥을 먹거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자세히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사진 가지고 수다 떨다가 앨범 정리하는 아내를 쳐다봤다. 나이보다 젊다는 소릴 많이 듣던 아내다. 게다가 늦게 결혼해 아이를 낳다 보니 또래 아이들의 부모 나이 취급을 받았다.

목에 주름을 발견했다. 흰 머리카락도 눈에 띈다. 나만 나이들은 줄 알았더니 조용히 나이 먹는 사람이 곁에 있었다. 큰 병을 앓거나 사고가 없어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내의 모습,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아 아내가 한 말, 아내의 몸짓이 남아있지 않지만... 내 삶에 동반자로 살아줘서 내가 허물어지지 않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지난날들도 스티븐슨 가족의 '구월의 보름' 같은 날들이었다.

'휴가지 해변에서 주워 모은 색색깔의 투명한 유리알들을 유리병에 고이 담아 코르크 마개로 봉해 놓은 다음,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발하는 따스한 빛에 용기와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그런... (pp. 454,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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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면허 - 이동하는 인류의 자유와 통제의 역사
패트릭 빅스비 지음, 박중서 옮김 / 작가정신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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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을 생각하면 (이 책에서도 소개한) 2004년 개봉한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 떠오른다. 실존 인물인 이란 사람 메르한 카라미 나세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나세리는 난민 서류를 분실해 파리 샤를 드골 공항 1번 터미널에서 18년을 지냈다.

영화 <터미널>에서 나보스키(톰 행크스)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국적이다. 그저 멋진 도시를 구경하고 싶어 뉴욕으로 향한다. JFK 공항에 도착했을 때 크로코지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나보스키의 비자가 취소된다. 이때부터 미국에 입국할 수도 조국으로 귀국할 수도 없어 JFK 공항에 머무르는 악몽이 시작된다.

여권에는 기묘한 힘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는 안전한 통행을 약속하지만 오도 가도 못하게 가둬 놓기도 한다.


<여행 면허>는 '국경을 통과하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 여행하는 사람들, 경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횡단이 가능하게끔 만들기 위해 이들이 의존한 서류에 관한 내용이다. (P. 26)'

기원전에도 여권은 있었다. 여권은 우리 인류와 함께 어떻게 진화했을까? 또 여권은 어떻게 여행 꼭 필요한 것이 됐을까? 여권은 예술과 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 정체성, 국가 권력, 국제적 불평등 문제까지 모두 여권에 반영돼있다. 이러한 여권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있다.

'국경을 넘어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서 여행자는 반드시 여권이 진본임을 입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서류와 자신이 일치함까지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p. 41)'

1976년 초가을 프랑스 영토에 도착한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최근 발급된 이집트 여권을 소지했다. 오래전 사망해 미라가 됐는데 왜 여권이 필요했을까. 신원이 확인돼야 유해 이송이 가능하다는 국제법, 생사와 관계없이 여권을 소지해야 한다는 프랑스 법률, 사망자조차 출국하려면 서류가 필요하다는 이집트 법률 등 그 이유가 다양하다.

츠바이크는 회고록에서 여권의 발달이 가져온 상실감을 서술하기도 했다. 당시 전쟁이 끝나고 외국인 혐오증이 유행처럼 번져 각국 정부는 외지인을 점점 더 수상하게 여길 때였다. 정면과 좌우 옆얼굴 사진, 열 손가락 지문, 각종 증명서 등 범죄자를 떠올릴 정도의 굴욕이 여행자에게 부과된다고 츠바이크는 증언했다.

헤밍웨이는 여권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급하고 엉성하게 휘갈겨 쓴 탓에 유명한 'writer 작가'가 아니라 'waiter 웨이터'로 오인받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나중에 여권 발급처 앞으로 정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야만 했다.

세계 난민 실상을 알리는 중국의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의 다큐멘터리 <유랑하는 사람들>에서 아이웨이웨이는 수용소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시리아인 마흐무드와 여권을 바꾼다.

'이 교환은 여권 통제 의례를 신랄하게 패러디한 장면으로, 여권 소지자가 체류할 국민국가에 위협이 되는지 판정하기 위해 서류를 검사하고 소지자를 심문하는 대신, 아이웨이웨이는 자신의 여권, 자신의 신원, 자신의 시민권이라는 형태로 급진적인 환대를 표현한다. (pp. 266, 267)'


출국 절차를 간소화하는 스마트 패스 서비스가 지난해 7월부터 인천국제공항에서 시작했다. 간소화와 편리함을 앞세워 여권은 점점 디지털로 변환될 것이 뻔하다. 디지털화는 신원 확인이나 국경 출입 과정 등에서 우리에게 멋진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세밀한 내 정보의 저장 및 공유를 더 많이 허용해야 한다.

디지털화된 개인 정보를 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하는 움직임도 있다. 영토 국가의 개념을 거부하는 NSK 국가의 여권, 국경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세계업무기구의 세계 여권이 그 사례다. 이와 같은 '반反여권' 움직임은 더 이상 여권에 '좋은'이나 '나쁜'이란 딱지가 붙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떤 신체는 지나가게 하는 반면 다른 신체는 붙들리는 일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서류로서 말이다. (p. 368)'

어쩌면 보완과 효율성을 핑계로 진행되는 여권의 디지털화는 제2의, 제3의 나보스키를 만들어 공항에 가둬두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반反여권' 움직임이 있어 다행스럽다. 여권 디지털화에 제동을 걸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공항에서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환대를 받기도 전에 개인 정보를 토대로 누구는 환영하고 누구는 거르는, 그런 통제에 여권이 사용된다면 더 이상 이동성을 보장하는 여권으로서 기능은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어느 누가 뉴욕 JFK 공항의 나보스키가 되기를 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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