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20만 부 에디션, 양장)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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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 패트릭 브링리의 결혼식이 있어야 했던 날, 형이 세상을 떠났다. 브링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었다. 그래서 그 찾은 곳은 그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곳, 가장 단순한 일을 할 수 있는 곳, 매트로폴리탄 미술관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10년을 지냈다.

메트Met에서 브링리는 두려움 없는 예술가들의 위대한 걸작품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조용한 시간 내내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작품이 무엇을 드러내는지 이해하려고 할 때 작품이 진지하게 말을 걸어왔다. 형을 잃어 비탄에 빠졌을 때 생긴 삶의 커다란 구멍을 이곳에서 하나하나 메꿔나갔다.

'만약 무언가가 웃기는지 알고 싶다면 그것이 우리를 웃게 만드는지 확인하면 된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지 알고 싶다면 그림을 바라볼 때 우리 안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확인하면 된다. 웃음만큼 확실하지만 대부분은 좀 더 조용하고 주춤거리며 나오는 반응일 것이다. (p. 122)'

메트의 고요한 공간에서 '아무 할 일도 없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해야 하는 일 (p. 319)', 경비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은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시간과 차원이 달랐다. 그 시간은 소비하고 낭비하고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었다. 마치 여름날 포치에 앉아 바람이 부는 걸 바라보는듯한 시간이었다.

이 같은 메트에서 브링리의 삶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보이는 20층, 잡지사 뉴요커 사무실에서 펼쳐질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다. 형의 죽음으로 인해 브링리가 선택한 두 번째 인생이었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은 자신의 상황에 갇힌 사람들이 아름답고, 유용하고, 진실한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조각조각 노력을 이어 붙여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교훈까지 말이다. (p. 308)'

이 책에는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있다. 브링리는 다양한 배경과 이력을 가진 그리고 꿈도 제각각인 그래서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메트를 택한 600여 명 동료 경비원들의 삶과 대화했다. 예술품을 바라보며 낯설고 먼 곳은 물론 과거를 다녀온 여행자가 되기도 했다. 메트를 방문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분수대 앞에서 한 어머니가 아이에게 동전 두 닢을 건네며 말한다.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 이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는 듣자마자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 똑같이 말해주리라 결심한다. (p. 149)'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브링리를 삶은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장 아름답고 단순한 일을 할 수 있는 곳을 떠날 때가 됐다. 형의 죽음으로 도망쳤던 그곳으로 다시 가서 '군말 없이 살아가면서 고군분투하고, 성장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p. 331)' 삶을 살아야 했다.

'세상이 이토록 형형색색으로 화려하고 충만하며, 그런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며,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들을 정성을 다해 만들려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예술은 평범한 것과 신비로움 양쪽 모두에 관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뻔한 것들, 간과하고 지나간 것들을 돌아보도록 일깨워 준다. 예술이 있는 곳에서 보낼 수 있었던 모든 시간에 고마운 마음이다. 나는 다시 이곳에 돌아올 것이다. (p. 330)'


내게도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형님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인 40대 중반에 형수와 어린 조카 둘을 남겨놓고 세상을 등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는 오열했다. 큰 딸을 잃어 참척의 고통을 겪은 어머니는 큰 아들이 죽기 전에 돌아가셔서 두 번째 참척의 고통은 피했다.

형님의 아이들에게 내가 어떤 책임을 다해야 하는지, 있을 곳이 없어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방을 하나 더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급했다. 이사를 했고 서둘러서 방 한 칸 더 있는 집을 구하려다 빚을 지고 말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때 서두를 것이 아니라 브링리처럼 아픔을 보듬을 장소와 시간을 가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후회된다. 그랬으면 살아오면서 의미 없이 지나쳤던 것들에게서 새로운 깨우침을 얻어, 브링리가 메트에서 이탈리아 수사 안젤리토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인생 그림을 찾았듯이 내 인생에서도 걸작품을 하나 얻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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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주인공들 - 이것은 불멸의 이야기
오자은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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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모는 증조부의 폭언을 듣고 "한 번 더 그런 말 했다가는 당신 내 손에 죽습니다"라고 처음으로 맞대응을 한다. 아마 딸에 관한 일이 아이였으면 평소처럼 끝까지 참았을 터였다. (p. 305)'

딸아이가 커가면서 여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 앞에 펼쳐질 여자로서의 삶, 아니 여성으로서 삶에도 걱정이 앞섰다. 과거에 살았던 여자의 삶을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다. 여자의 삶이 어땠길래? 여자가 아니거나 딸을 둔 부모가 아니라면 이런 질문할 자격이 없다.


오자은의 문학 비평집 <여자 주인공들>은 한국 현대 소설이 지난 50년 동안 어떻게 여성을 상상해왔는지에 관한 책이다. 이미 낡아버린 질문이라고 전제하면서 '소설은 왜 읽는가'라는 물음으로 오자은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과 인식을 반영한다는 데에 그 본질적인 의미가 있다는 대답을 하고 싶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설은 현실에 대한 새로운 믿음과 인식을 개척하여 현실을 변화시키고 형성해가기도 한다. (p. 7, 책머리에)'

소설이든 현실이든 여자는 오랜 시간 약자 또는 결핍을 운명으로 지내왔다.

<나목>의 이경처럼 K-장녀의 삶은 오빠만 자식으로 마음에 품고 사는 엄마를 견디고 버텨내며 단박에 어른이 되는 삶이었다. <도시의 흉년>에서는 남자아이를 살리기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여자아이의 삶, 그리고 남성의 씨를 받아 남자아이를 생산해 대를 잇기 위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여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겨울여자>의 이화는 당시 남성만 독점하고 있던 이성 편력을 거치면서 세상의 이데올로기, 사회 관습과 규범을 뛰어넘어보지만 이마저 남성의 판타지로 완결돼버리는 한계에 부딪힌다. 남성 중심의 사회, 1970년 대 소설 속 여자의 삶이다.

이문열은 <레테의 연가>에서 작가 욕망을 가진 젊은 여성을 등장시켜 성장을 그려내지만 그 성장을 견인하는 위치에 남성을 배치한다. 1980년 대 (남성 입장에서) 위협으로 다가오는 여성의 성장마저 길들이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김향숙이 그린 1980년 대 또 다른 여성의 모습은 '언캐니'한 딸 들이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린다면 우리는 이를 '언캐니 Das Unheimliche'한 상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로 옮겨보자면 '두려운 낯섦' 정도가 될 것이고, 언캐니한 감정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친숙한 것이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질 때의 그 불안과 공포이다. (p. 170)'

험난한 입시전쟁을 뚫어낸 자랑스러운 딸이 운동권 대학생이 되는 순간, 여자인 엄마는 딸이 패자가 될 거라는 두려움과 함께 어렵게 이룬 중산층의 삶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예감한다.

1990년 대,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문학 여공'을 등장시켜 소설로서 여공 희재를 어떻게 구해낼지를 갈등하는 문학 여공의 삶을 그려낸다. 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세 여성이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커리어를 쌓는 이혼한 여성이자 독신 여성, 이념을 포기하지 못한 채 운동권 언저리에 있다 생계형 워킹맘이 된 여성, 경제력 있는 남성과 결혼하고 전업주부를 선택해 유복한 생활을 하지만 답답한 생활에 염증을 느껴 불륜으로 활력을 찾는 여성. (p. 236)'
1990년 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여성에게 선택할 수 있는 삶이 생겼다.

2000년 대, 서영은의 <그녀의 여자>에서 전통적으로 예술가의 자리에 있던 남성을 끌어내리고 여성으로 대체한다. 그뿐만 아니라 중년 여성의 사랑을 그것도 나이 어린 여자와 동성애를 그린다. 그럼으로써 아직도 어른거리는 가부장 지배의 그림자를 걷어내려 한다. <밝은 밤>에서 최은영이 보여주는 키워드는 '무해함'이다. 남성은 여성을 책임진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당연시하며 행사했고 여성은 자신을 책임지는 남성의 폭력을 용인했다.

''무해함'은 영어로 harmless. 말 그대로 '해로움이 없음'이다. 그런데 애초의 용례를 살펴보면 단순히 해가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 득도 실도 없어서 사소하며 별 의미 없는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p. 316)'

약한 자들, 여자들은 책임진다는 말은 못 할지라도 멀리서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볼 수는 있다. 깊이 관여하여 명령하고 요구하는 대신에 작고 사소한 방식으로 상대방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그 마음을 알아주는 '무해함'의 관계는 맺을 수 있다.


지난 21일 주말에 경찰 차벽에 막혀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진이 남태령에서 멈췄다. 남태령 고개로 모여달라는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응원봉을 들고 또 모여들었다. 대부분 '2030여성'들이었다. 그들의 밤샘 투쟁으로 차벽은 열렸고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는 한남동 관저까지 행진을 이어갈 수 있었다.

여의도에서도, 광화문에서도 2030여성들이 있었다. 부조리에 맞서는 정도가 아니라 앞장서서 싸우는 2030여성들의 모습에서 과거 여자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딸아이 앞에 펼쳐질 여자의 삶을 걱정하는 부모들,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나름 2020년 대 여성은 자신이 살아갈 여성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딸아이 미래에 대해 내가 가진 불안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번 내란을 겪으면서 시대에 따라 진보하는 여성의 삶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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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세계 -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곤충들의 비밀스러운 삶
조지 맥개빈 지음, 이한음 옮김 / 알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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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지기 시작하는 초여름이면 한강을 끼고 있는 우리 동네는 팅커벨(팅커벨과 생김새가 비슷한 동양하루살이를 우리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별칭)로 가득해진다. 환하게 불 켜진 쇼윈도에 잔뜩 붙어있을 뿐만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 앞 유리 날아와 부딪치기 일쑤다. 벌레를 보는 것만으로 비명 지르며 소스라치는 딸아이는 아파트 현관문에 팅커벨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들어온다. 딸아이에게 팅커벨은 없어져야 할 존재다.

동양하루살이가 떼를 지어 나타나는 건 한강 수질이 개선됐다는 증거다. 생애 대부분을 물속에서 유충으로 지내다가 성충으로 사는 1~2일을 큰 무리를 지어 혼인 비행하는 데 쓰고는 생을 마감한다. 동양하루살이에게는 번식을 위한 신성한 짝짓기 비행일 텐데... 입이 없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징그럽다는 이유로 우리는 싫어한다.


몇몇 곤충에 자신의 이름이 붙었을 정도로 곤충을 사랑하는 조지 맥개빈의 <숨겨진 세계>는 지구 생명체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많은 곤충의 미스터리를 밝히고 곤충이 처한 위험을 살펴보는 곤충에 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이다.

곤충은 육지에 나타난 최초의 동물이며 하늘을 난 최초의 동물이기도 하다. 곤충은 여섯 가지 초능력을 지닌 덕분에 지구를 점령했다.

'절지동물이므로 몸은 보호하는 겉뼈대로 덮여 있고, 대개 몸집이 작아서 큰 종들보다 더 잘 살아남는다. 건조한 육지에 올라올 때 적합했던 효율적인 신경계와 환경을 감지하는 탁월한 능력도 지닌다. 이윽고 비행 능력까지 갖춤으로써 궁극적인 이주 개척자이자 탈출 묘기 전문가가 된다. 마지막으로 유달리 빠른 속도로 번식하고 불어난다. (p. 65)'

곤충은 지구가 제 기능을 하는 데 꼭 필요한 경이로운 존재다. 지구의 생태계를 곤충이 지탱한다. 곤충 가운데 한 종인 벌이 멸종하면 육상 생물종의 4분의 1이 생존 위협을 받을 정도다.

곤충을 얕보고 무시하는 것도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다. 죽은 조직과 잔해를 분해해 지구에 사체가 쌓이지 않도록 하는 험한 일을 곤충이 담당한다. 지금도 일부 곤충을 먹긴 하지만 우리 식탁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곤충이 육류를 대체해 우리 식탁을 독차지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꿀이라는 벌의 토사물을 먹는다. 연지벌레로부터 색소를 얻기도 한다. 우리 피부를 감싸는 가장 사치스러운 실크도 누에의 침샘에서 나오는 물질이다. 이렇듯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곤충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한강을 걷다 보면 곳곳에 설치해놓은 끈끈이에 동양하루살이들이 붙어있고, 포충등에 타다닥 타죽는 소리가 들린다. 곤충들을 모조리 잡아 없애는 게 맞나. 농경이 시작되면서 숲을 경작지로 만들었고 작물이 자라는데 방해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곤충을 죽여왔다. 환경 위기를 잘 버티는 곤충임에도 살충제를 마구 뿌려대는 인간의 공격에 속수무책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곤충의 종을 잃게 될까.

우리가 이 땅을 정복하며 이룬 성공은 자연 세계의 엄청난 희생의 대가인 셈이다. 결과야 어찌 되든지 말든지 자연을 희생물로 삼아 언제까지 인류가 버틸 수 있을까.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행성을 구해 거기서 살면 될까? 자신의 배설물조차 처리할 수 없는 인간이 과연 그곳에선 살 수 있을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지구를 구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지 않을까?

'물고기처럼 생긴 우리의 원시 조상이 얕은 물에서 지느러미처럼 생긴 다리로 일어서서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고 마른 땅을 바라보기 훨씬 이전부터 곤충은 이 지구에 살고 있었음을 잊지 말자. 그리고 곤충과 그 친척들은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살아가리라는 것도. (p. 328)'


예쁜 딸~ 팅커벨이 아무리 징그럽더라도 참아야 해. 팅커벨이 있어야 지구의 생태계가 무너지지 않아. 그래야 우리가 자연과 함께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거고. 팅커벨이 진짜 팅커벨인 거지.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곤충들의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를 위해 곤충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 알아야만 해. 그리고 그 작은 것들의 안부를 물어야 해. 지구, 이곳에서 계속 숨 쉬며 살기를 원한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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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와 무민의 첫 겨울 무민 골짜기 이야기 시리즈
이유진 옮김, 토베 얀손 원작 / 어린이작가정신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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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골짜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무민 가족은 겨울이 되면 11월부터 4월까지 긴 겨울잠을 잔다. 한줄기 달빛이 무민의 얼굴을 비추자 무민은 그만 겨울잠에서 깨버렸다. 무민은 무민마마를 귀를 잡아당겨봤지만 겨울잠에 빠진 무민 마마는 일어나지 않았다.

'해 뜰 녘에 무민은 집 밖을 나가 주위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어요. (...)
문은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가, 지붕 출입문을 냅다 열고 기어 나갔어요.
차가운 공기가 무민을 덮쳤어요. 무민은 숨을 헐떡이며 지붕 가장자리를 굴러 넘어가 하얗고 차가운 눈 속으로 뚝 떨어졌어요.
무민 골짜기는 이제 푸르지 않았어요. 살아 있는 소리도 모두 사라졌어요. (p. 8)'

무민은 하얀 눈으로 뒤덮인 무민 골짜기를 처음 봤다. 무민이 맞는 첫겨울, 마음씨 착한 무민은 낯선 환경에서 겨울잠을 자지 않는 처음 보는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게 될까...


"무민이 왜 좋아?" 그 어느 캐릭터보다 무민을 좋아하는 그래서 인형을 비롯해 무민 아이템을 여럿 갖고 있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대답은 '귀여워서'였다. 무민을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흰색 한 가지 색깔에 선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모습에 셀 수 없이 많은 귀여운 표정이 숨어있다.

무민의 귀여운 모습과 달리, 무민의 탄생은 토베 얀손의 어린 시절 외삼촌이 들려준 무시무시한 이야기 속 괴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부엌 난로 밑에 사는 무민트롤이 갑자기 튀어나와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다고 겁을 주었다. 트롤은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무서운 괴물이다.

하지만 토베는 무서운 무민이 아닌 귀여운 무민을 생각해냈다. '크고 둥글고 하얀 코처럼 눈으로 뒤덮여 늘어진' 나무 그루터기를 보고 무민의 둥근 주둥이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가 만들어낸 캐릭터의 영감을 자연에서 얻은 셈이다.

2025년이면 무민이 모습을 드러낸 지 80년이 된다. 1945년 <작은 무민 가족과 홍수>로 무민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 참~ 토베 얀손이 동성애자인 소수자의 삶을 살았다는 걸 아는지... 토베는 1971년 핀란드에서 동성애가 합법화될 때까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유령 쪽'이라는 은어로 표현했다고 한다.


지쳤지만 아내는 마지막 힘을 내 연년생 어린아이 둘을 양옆에 끼고 누워 동화책을 읽어주며 잠재우곤 했다 (그 덕분에 아내는 웬만한 동화의 줄거리를 다 꿰고 있다). 두 아이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는가 하면 경쟁이라도 하듯 궁금하다 싶은 걸 엄마에게 물었다.

무민이 첫겨울을 지내면서 전혀 몰랐던 세상이 있다는 걸 깨달았듯이 두 아이도 동화책 한 권 한 권에서 펼쳐지는 낯선 세상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때 상상했던 세상의 자투리가 조각조각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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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디즈니 로얄 클래식
릴리 머레이 지음, 한소영 옮김 / 반출판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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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딸아이 애착 인형은 트위티(Tweety)였다. 귀엽지만 심술궂은 표정도 매력인 트위티는 노란색 털을 가진 카나리아다. 오염에 취약한 노란색, 손 때가 잔뜩 묻고 세 가닥뿐인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인형을 딸아이는 항상 꼭 껴안고 다녔다.


렛잇꼬~ 열풍을 가져온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개봉된 2013년, 그 즈음에 서너 살 이상 된 아이들 대부분이 애착 인형이라도 되는듯 엘사 인형을 들고 다녔다.

'2008년부터는 <겨울왕국> 제작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감독 크리스 벅과 미술감독 마이클 지아이모는 1950년대에 출간된 고전적인 리틀 골든 북스와 스칸디나비아 느낌의 핸드 드로잉 느낌을 살린 작품을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어요. (p. 64)' 그렇게 엘사가 탄생했다.

연보라색 양장 커버의 디즈니 로얄 클래식 <겨울왕국 Frozen>을 본 순간, 이미 다 커버렸지만 여전히 디즈니 캐릭터 덕후인 딸아이에게 줄 선물로 제격이란 생각에 서평단 욕심을 부렸다. 실물은 받아든 딸아이는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섬세한 은박 음각(사진으로 보여줄 수 없어 안타깝다)과 패브릭 양장 제본의 책은 소장하기에 딱이었다.


'<겨울왕국>은 작업에 참여한 애니메이터만 70명 이상이고, 모두 합하면 대략 600~650명이 함께 만든 작품이에요. (p. 68)'

책 속에는 원작 그림, 스토리 스케치와 콘셉트 아트 그리고 애니메이션 장면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있다. 이젠 애니메이션 제작에 우리나라 작가들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캐릭터 디자이너 김시윤, 작가 겸 애니메이터 이민규, 콘셉트 디자이너 김진, 애니메이터 이현민이 <겨울왕국> 제작에 참여한 주인공들이다.


딸아이 손에 넘어간 이책을 딸아이는 언제까지 소장할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 <겨울왕국>의 엘사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 아이는 엘사를 좋아할까? 어쩌면 그 아이의 애착 인형이 엘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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