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생명의 지문 - 생명, 존재의 시원, 그리고 역사에 감춰진 피 이야기
라인하르트 프리들.셜리 미하엘라 소일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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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축구 경기 전반전이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심장외과 의사 프리들은 전화를 받는다. 칼이 아직 가슴에 꽂혀 있는 부상자가 병원으로 오고 있다는 전화였다.

20대 중반의 남자 하미트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고, 몸은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 추위에 온몸을 떨었고 (...) 피는 산소를 운반할 뿐 아니라, 생명의 온기를 배달한다. 생명의 온기가 피와 함께 몸에서 빠져나갔고, 그것은 죽음을 향한... (p. 18)'


<피, 생명의 지문>은 인류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피의 서사시라고 할만한 책이다. 저자 라인하르트 프리들 박사는 수천 개의 심장을 다룬 심장외과 분야의 선구자로 심장에 칼이 깊숙이 꽂힌 채 응급실에 실려 온 하미트의 수술과 회복 과정, 그리고 그가 칼에 찔린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피에 얽힌 모든 것들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1부 '피'에서는 하미트처럼 외상을 당했을 때 피가 반응하는 응고, 면역, 치유 과정 등 의학 정보뿐 아니라 과학, 경제, 문화과 관련된 피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피는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관통하여 흐르며 연결해 준다. 10만 킬로미터나 되는 동맥, 정맥, 모세혈관을 흐른다. 피는 뼈에서 비롯되고 피가 없으면 뼈가 마르는 순환하는 인과관계다. 피를 대가로 치러지는 전쟁에서 피가 권력과 잔혹함, 탐욕으로 거래되는 블러드코인으로 변질되는 것을 본다. 아무 근거도 없이 피가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피부와 상처가 아물었더라도 영혼의 상처로 남은 고통은 여전할 수 있다. 뇌나 심장이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관여하는 호르몬 옥시토신이 고통을 줄여준다. 트라우마는 피에 지문을 남긴다.

'폭력의 트라우마는 세대를 거쳐 계속 대물림된다.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의 자녀들은 종종 신체적, 정서적 폭력 속에 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것을 자녀와 손자들에게 물려준다. 이것을 대물림된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p. 178, 179)'
명상, 신앙, 사랑, 희망이란 묘약으로 조각난 영혼이 온전해질 수 있다.

2부 '생명'에서는 피의 기능과 함께 스트레스, 공감과 같은 인간의 감정이 피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태초에 흐름이 있었다! (p. 245)'
피는 심장의 펌프질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동한다. 피의 본질은 움직임이고 그 흐름으로 순환이 시작된다. 피의 흐름이 없다면 사랑도 없다. 피는 입술을 붉게 물들여 매력을 발산하며 파트너를 유혹한다.

우리 몸은 탄소, 수소, 산소, 칼슘 등 약국에서도 구할 수 있는 화학재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원자들이 상호 연결될 때, 죽은 물질에 불과한 것들이 스스로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고 유전자를 가진 기적과 같은 생명이 탄생한다. 호흡이 몸과 마음을 연결한다. 들숨은 영감을 불어넣어 준다. 숨결은 피를 타고 계속 전달된다. 호흡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세포에 활력을 준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는 일 호흡, 첫 숨을 쉬웠던 순간과 마지막 숨을 쉬게 될 날과 시간, 그 사이가 우리의 삶이다.

'피는 생명이고, 죽음이고, 흐름이다. (p. 336)'


의료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인 민영화 움직임이 눈에 띈다. 건보 재정이 마르면 민간 보험으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이동하고, 병실 예약 특혜와 같은 차별화된 서비스가 더해지면 더더욱 민간 보험에 의존하게 될 것이며 의료 차별은 더욱 빠르게 가속화될 것이다.

'현대사회는 의료와 치유라는 공공복지를 환자의 질병에서 이익을 얻는 거대 기업에 넘겼다. 권력, 돈, 소유, 피에 대한 탐욕으로 찢긴 마음의 구멍을 물질적 재화, 풍요, 데이터가 메워 주리라 희망하는 사회다. (p. 262)'

피의 지문으로 우리 몸의 정보가 새겨진다는 글을 읽고 걱정이 앞섰다. 우리 피, 생명의 지문이 기업의 손아귀에 쥐어질 때, 우리 생명이 그들의 탐욕으로 이용될까 하는 걱정이다. 자본이 욕심을 채우는데 내 소중한 생명이 수단으로 쓰이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죽음 또한 그들의 영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한다.

그래서 그 어떤 욕심으로도 오염되지 않고, 영혼의 상처마저 치유된 내 몸의 원소들이 내 생명이 다하는 날, 내 몸을 떠나 우주를 떠돌다가 다른 생명의 피의 흐름으로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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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신저, 파리
패신저 편집팀 지음, 박재연 옮김 / Pensel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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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만 명이 사는 도시 파리, 프랑스에서 가장 큰 도시치곤 적은 인구다. 하지만 이곳 파리가 프랑스 전체에서 차지하는 힘은 가장 큰 도시답다. 파리는 프랑스 전체 GDP의 3분의 1을 담당할 뿐 아니라 유럽에서 GPD가 가장 높은 도시다. 일자리도 4분의 1이 파리에 집중돼있다.

또한 파리는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 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센 강을 따라 콩코르드 광장에서 에투알 개선문에 이르는 샹젤리제 거리, 연 관람객 890만 명으로 세계 미술관 가운데 제일 많은 사람이 찾는 루브르, 퐁피두 센터 등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곳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여행책자에서 소개하는 뻔한 곳을 찾아가 사진에 남기며 여행한다면 그 도시의 진짜 여행은 불가능하다. 새로운 개념의 '북커진(북+매거진)' <패신저>는 진짜 여행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화 여행서'이다.

'장문의 에세이, 탐사 보도문, 프로프타주 문학, 시각적 서사 등 다양할 글을 통해 여러분은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문화와 정체성, 공적 담론, 국민 정서, 핫이슈, 다채로운 기쁨과 아픔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뒷날개)'

<패신저>의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파리다.

우리가 예술적 관점에 바라보는 파리의 랜드마크 대부분은 정치권력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결과물이다. 지금은 민간 재단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지만 보부르 효과일 뿐, 이들 건축물들은 관광객들의 사진 촬영을 기대하는 상품에 불과하다. 사회적 박탈감에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시위대는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곳으로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거리 샹젤리제를 택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도시 파리에도 편견과 폭력은 있었다. 중국계 프랑스인들을 비롯한 아시아 커뮤니티가 그 대상이다. 이들 모두 프랑스인이지만 지금도 다양한 방법으로 프랑스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미식의 도시 파리에서 미슐랭을 받기 위한 도전이 아닌 계절을 대표하는 음식재료로 고급 요리를 선보이며 파리 사회의 미식 문화를 바꾸는 이들이 있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성상 '파리지엔', 이젠 파리에서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파리지엔의 신화가 없다면 파리는 어떻게 될까? 이 밖에도 파리에서 아프리카를 보여주는 콩고공화국에서 시작된 사페의 미학, 뜻밖에 불친절함을 겪고 얻는 파리 신드롬, 반인종주의와 반파시즘의 철학을 간직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팀 레드 스타 FC 등 파리가 품은 진짜 이야기가 <패신저, 파리>에 담겨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 중이어서인지 열세 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주목한 꼭지는 '두 건의 유대인 노파 살해 사건이 프랑스를 뒤흔든 방법'이었다.

'루시 아탈 Lucie Attal과 미레유 놀 Mireille Knall의 연이은 죽음과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논란은 종교에 대한 논쟁의 불씨를 지폈다. 이 사건은 반유대주의에 의한 살인일까, 아니면 우파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이슬람 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악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이슬람 반유대주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일까? (p. 121)

두 살인 사건은 발생한 지 한참 지났지만 두 죽음을 여전히 정확히 규정하지 않아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1978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정치적 목적으로 인종 또는 종교에 대한 인구 조사 수집이 불법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인종차별이나 인종주의적 폭력이 여전한듯하다.

인종혐오를 반유대주의로 세탁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이슬람인을 살인자로 의심하는 여지를 두고 이슬람이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른 인종혐오도 마찬가지다.

'벤진은 이러한 비극의 또 다른 요인은 이른바 '공감대 형성'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누가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일례로, 국가가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 전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반면, 노예 제도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는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p. 130)'


북커진 <패신저, 파리>가 파리의 뒷골목을 가이드 해주는듯했다. 파리라는 도시의 환상과 고정관념도 깨주었다. 파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파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패신저>가 가이드 해줄 다음 도시가 궁금하다. 어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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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지 (20주년 기념판 양장본)
헬렌 한프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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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링크로스 84번가>는 영국의 헌책방 거리로 알려진 채링크로스가 84번지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뉴욕에 사는 희귀 고서적에 취미가 있는 가난한 작가가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놓은 책이다. 편지로 책을 주문하고 청구서를 주고받으면서 서점 주인 프랭크 도엘과 작가 헬렌 한프는 조금씩 자신을 내보여준다.

'가엾은 프랭크, 제가 그분을 너무 못살게 굴죠. 늘 뭔가 트집을 잡아 가지고 호통을 쳐대니 말이에요. 그저 재미로 조금 놀리는 것뿐이에요. 그분이 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분이라는 것은 알지만요. 저는 저 점잖은 영국인의 자제심에 구멍을 내보려고 애쓰는 중이랍니다. 그분한테 궤양이 생긴다면 아마 그건 제가 한 것이겠죠. (p. 28)'

배급제로 식료품 구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런던의 사정을 알게 된 헬렌은 식료품을 선물로 서점에 보낸다. 식료품을 나눠가지면서 서점 직원들 그리고 프랭크의 아내, 이웃집에 사는 볼턴 부인까지 헬렌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따뜻한 선물까지 주고받으며 가까워진 서점 직원들과 프랭크의 가족들은 헬렌이 런던 마크스 서점을 방문하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

'서점 사람들이 나한테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보냈는지 아니? 아일랜드풍 리넨 식탁보야. 진한 상앗빛에 고풍스러운 나뭇잎과 꽃무늬를 손으로 수놓은 건데, 꽃은 송이마다 다른 빛깔로 아주 연한 색에서 아주 깊은 색까지 명암이 표현돼 있고. 이런 건 너도 본 적이 없을 거야. 물론 내가 고물상에서 산 접이식 탁자는 여지없이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언제라도 물결치는 빅토리아풍 소매를 살짝 걷어올리고 우아한 팔놀림으로 상상 속의 그레고리풍 찻주전자로 차를 따르고픈 충동이 들 정도야. (p. 70)'


영화 <84번가의 연인>을 이 책보다 먼저 봤다. 1987년에 개봉한 영화로 헬렌 한프 역에 앤 밴크로포드, 앤서니 홉킨스가 프랭크 도엘 역을 007 시리즈의 M역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주디 덴치가 노라 도엘 역으로 등장했다. 책을 매개로 한 영화여서인지 뭔가 고급스러운 감동을 느꼈다. 특히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이 책에서는 헬렌이 프랭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마크스 서점에 끝내 가지 못하지만) 헬렌이 마침내 런던을 찾아가 문을 닫은 마크스 서점을 쓸쓸히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그 여운이 오래갔다.

헬렌 한프는 희곡 작가로 닥치는 대로 글을 썼지만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한 실패한 작가였다고 한다. 옮긴이에 따르면, 헬렌은 채링크로스가 84번지로부터 마지막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그러고는 바로 그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챙겨 출판사로 갔다. 이를 계기로 헬렌은 유명 작가가 된다.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책이 마크스 서점의 가족들과 헬렌 한프에게 특별한 만남을 만들어주었듯이 내게도 책이 뜻밖에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었다. 글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보여주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절대로 내 인생에 등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헬렌이 프랭크와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듯 나는 SNS로 그렇게 한다. 아픔을 같이하고 기쁨을 나눠 받기도 한다.

이들과의 책 인연이 헬렌처럼 유명 작가로 만들어주진 않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즐거운 삶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직장 생활하며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위로를 그들로부터 받았다. 살아가는 데 힘도 얻고 있다. 퇴직 후의 인생을 그들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헬렌이 마스크 서점의 가족을 생각했듯이 책으로 맺어진 책 친구들을 떠올렸다. 큰 신세를 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모든 책을 내게 팔았던 그 축복받은 사람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서점 주인 마크스 씨도요. 하지만 마크스 서점은 아직 거기 있답니다. 혹 채링크로스 가 84번지를 지나가게 되거든, 내 대신 입맞춤을 보내주겠어요? 제가 정말 큰 신세를 졌답니다.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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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막걸리에 사이다 살짝
장경자 지음 / 책마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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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십이월 아버님이 소천하신지 1년 만에 두 누님과 고향을 찾았다. 밥을 먹으며 나이 든 누님들 모습을 보며 얼떨결에 제안했다. 세 사람 생일날 모이자고. 생일 축하금을 보내면 생일인 사람이 만날 곳을 정해 밥을 사고 커피도 사고 수다 떨기로.

며칠 전 작은 누님의 생일이었다. 그때 수다 떤 이야기들을 <인생은 막걸리에 사이다 살짝>에서 다시 만났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누나도?'
'그래 맞아 (이심전심? 동상이몽!)
'부모들 마음은 다 똑같네~'
'그거 오지랖이야~'


'투박한 내 글이_ 마음을 쓰다듬는 반푼어치의_ 위로라도 되기를... (프롤로그)'

깔깔대며 웃다가 눈물을 글썽이고... 서로의 마음을 쓰다듬어주고 위로하고... 큰 누님 생일, 내 생일에 만나 나눴던 이야기는 엊그제도 이어졌다.


'사춘기를 겪어본 부모는_ 자식의 질풍노도가 이해되지만_ 갱년기를 겪어보지 못한 자식에겐_ 이해하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_ 조증과 울증을 넘나들며 (p. 32, 33, 어찌 알겠누...)'

아내가 요즘 요양원에 계신 장모님 때문에 갱년기를 더 심하게 겪고 있다는 내 말을 시작으로 두 누님의 갱년기 극복 배틀이 펼쳐진다.
"아내만 그런 줄 알았는데 누나들도 갱년기를 심하게 겪었구나? 난 아내의 갱년기에 겨를이 없어 내 갱년기는 꺼내 보지도 못했거든~"
"ㅎㅎ 너도 갱년기가 있니? 남자도 있는 줄은 몰랐다~ 얘~"


'그동안 살아온 삶을 부정한_ 피검사의 살벌한 결과에 형은_ (...) 한 달 동안의 금주와 아침, 저녁 스쿼드 100개를 선언했다. (p. 83, 빨간불이 떴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했다는 말과 함께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는지 물었다.
"여든다섯?"
"언니 그건 너무 이르지"
"근데 그 사람은 왜 곡기를 끊었대?"
"이렇게 사는 건 삶이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일 거야.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히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건강하지 않다면, 그래서 자식들에게 누를 끼칠 정도라면 그때는 죽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우리 셋의 이심전심이었다.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살려고 매일 아침, 스트레칭에 홈트를 1시간 30분 동안 한지 몇 년 됐어"
"그래 그래야지. 너 대단하다~ 야~"


'엄마!!!!_ 냄비를 맨손으로 집어 식탁에 올리는 나에게_ 딸이 눈을 하얗게 흘긴다_ (...) 내가 그렇게 이해 못 했던 친정엄마의 모습을_ 닮아간다_ 이젠 목소리도 행동도 닮아있다_ .......내 딸이 걱정이네_ 참나 (p. 184, 185, 그렇게 닮아 간다)'

"시집간 딸이 나은 손녀를 처음 안아본 친정아버지가 딸아이가 다시 얘기가 돼서 온 것 같다고 말했데."
"아버지들은 그렇게 느끼는가 보네?"
손주 볼 기회를 포기하더라고 나는 딸아이가 시집가서 고생할 걸 생각하면 차라리 결혼 안 했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근데 왜 아들은 결혼했으면 하지?) 딸만 둘인 두 누님의 생각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둘씩 있는 딸들에게로 옮겨갔다.
"그래~ 결혼해서 고생하는 모습 보면 안쓰럽긴 해."
결혼한 딸아이 걱정이 여전한 누님들이다. 장경자 작가처럼 그 딸아이들이 자기를 닮는 건 아닌지... 그런 같은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앞모습이 화려해 눈이 부셔도_ 누구에게나 그림자는 있다_ 누구에게나 고단한 흉터가 있기 마련이다_ 그게 인생이니까 (p. 218, 거기서 거기)'

어느덧 우리 세 남매는 각자의 삶이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던 서로의 인생을 들여다 본다. 이제서야 참견하는 오지랖을 떤다. '그런 거 부러워할 거 없어', '그게 왜 니 잘못이니?', '이제부터라도 이왕이면 맛있는 거 먹어', '너 언제 그렇게 머리카락이 빠졌어? 서리태가 좋다는데'...


'고단한 삶에 별사탕 같은 당신의 순간들을_ 응원합니다. (...)
은근 기분 좋은 날들이 있기를_ 응원합니다. (...)
지금의 선택 또한 장하다고 말해주는 누군가 당신 옆에 있기를_ 응원합니다. (...)
당신의 마음이 누룩 같은 시간들로 잘 발효되기를_ 응원합니다. (에필로그)

이렇게 우리는 일 년에 세 번이라도 만나 서로 응원해 주기로 마음먹은 걸 잘한 일이라고 자화자찬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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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 - 박화성과 박서련의 소설, 잇다 6
박화성.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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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함께 읽는 '소설, 잇다' 시리즈 여섯 번째는 60년 동안 활동한 2세대 작가 박화성과 역사, 판타지, SF, 청소년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박서련 작가를 잇는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다. 박화성의 소설 세 편과 박서련의 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려있다.

박화성은 사회적, 역사적 약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높였으며 박력 있고 의기가 넘치는 글을 쓰며 자신을 여성작가로 분류하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박서련 역시 소수자와 약자, 역사나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의 목소리에 항상 주목하며 글을 쓰는 작가다.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에서 서동권은 하수도공사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책임자를 상대로 석 달이나 밀린 임금을 받아내려고 투쟁한다. 또한 동권은 부하린의 유물사관 책을 읽으며 동료들에게 계급적 초등 지식을 넣어 주려고 노력한다. 한편 동권은 이복 여동생의 친구인 용희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동권 자신처럼 가난한 노동자가 부잣집 딸인 용희를 사랑하는 것과 사회주의자의 길로 나서는 자신의 동지로서 용희는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그러나 용희는 어쩐지 누가 아오?" (p. 54)'

(중략)

박서련의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는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다시 쓴 작품이다. 독서 동아리 회장 진은 총여학생회를 재건하기 위해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다. 림은 진과 비밀스러운 동성애 관계로 그의 선거를 적극 돕는다. 독서토론 책으로 박화성의 <하수도 공사>를 정하면서 림은 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용희! 나는 용희를 정말로 사랑하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억제하는 때가 많소.
우리의 사랑이 현재 우리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 우리의 사랑은 정세에 합당하지 못하다.
정세에 합당한 연애란 무엇일까?
이러한 주제에 골몰하는 이상은 소모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p. 192)'

둘의 관계를 독서모임에 알리자는 림의 말에 진은 '여자 총학생회장을 본 적 없는 학교가 레즈비언 총학생회장은 괜찮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어. (p. 195)'라고 말한다.

박서련은 <하수도 공사>에서 계급과 이데올로기가 달라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동권과 용희의 관계를 <정세에 합당한 우리 연애>에서 총여학생회의 재건을 꿈꾸는 진과 레즈비언 관계인 림으로 바꿔 놓았다. 림은 진에게서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연애'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동권을 본다.

'그런 걸까? 언니는 동권이고 나는 용희인 걸까?
그러니까 언니는 나를 애인보다도 한 동지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동권이 정말로 용희를 동지라고 여겼다면, 동등한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라고 느꼈다면 어째서 용희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을까? (p. 201)'

100년 전 여성의 온전한 삶을 가로막는 '정세에 합당하지 않은' 상황은 그 조건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여전하다.

'가부장적 위계 구조와 사회주의자로서의 분투가 긴밀히 공모하는 가운데 (p. 233, 해설)' 박화성은 남편 옥바라지를 하며 여성 가장으로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글을 썼다.

박서련은 박화성과 다른 여성작가의 삶을 살고 있을까?
'학력에 대해 말할 때는 '나왔다'라는 말의 모호함을 즐겨 악용한다. 나왔다고 말하면 졸업을 한 건지 자퇴를 한 건지 헷갈리니까.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자퇴 사실을 숨기지는 않는다. 누가 묻기 전까지는 말하지 않을 뿐이다. (p. 206, 박서련 에세이 <총화>)'

여성 작가 박서련 역시 누구의 애인, 누구의 아내, 학내 중앙 자치기구 단체장의 여자 친구, 노조 상근자의 아내로 살았다. 소설을 쓰는 것보다 소설이 기반한 사실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박서련은 고백한다.

여성 또는 여성 작가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사회를 향해, 박서련처럼 대학교 자퇴 사실, 이혼한 남편 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어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는 건 아닐까? 편견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다. 누가? 가부장 제도가. 여성과 이데올로기를 논하는 것을 한가하다 여기며 자신은 뭔가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남자로 규정하는 자들이.

박화성과 박서련, 그리고 역사와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온 여성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정세에 합당한 연애를 하고 있어요.
정세에 합하지 않는 연애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p. 202)'

그리고 비겁하게 '정세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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